남대문시장의 오후

작성자신재옥|작성시간26.06.10|조회수121 목록 댓글 0

회현역에서 나오니 뱃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배꼽시계만큼 정확한 것도 없으니 그리니치 천문대 시계 못지않다. 명동으로 갈까 망설이며 걷는데 우연히 옛날통닭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이미 두어 걸음 앞서가고 있었지만 얼른 불러 세웠다.
"여보, 우리 통닭 먹을까? 옛날통닭 한번 먹어보고 싶다 했잖아."
아내의 표정이 싫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자그마했지만 손님은 제법 있었다. 길가 통닭집 메뉴판은 대개 노란색인데, 아마도 노릇하게 튀겨진 통닭 껍질 색을 닮아서일 것이다. 유명 브랜드 치킨은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옛날식 통닭은 가성비가 좋다.
옆자리에는 팔십대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통닭 한 마리를 앞에 두고 드시고 계셨다. 물을 찾으니 종업원은 "셀프입니다"라는 말만 툭 던지고 지나갔다. 정수기가 할머니 바로 뒤에 있는 것을 보니 미처 못 보신 모양이었다. 다소 건조한 식당 분위기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오랜만에 즐기는 치맥의 기분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물을 뜨러 간 아내는 우리 것과 함께 할머니께도 물 한 잔을 건넸다. 할머니는 고맙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잠시 후 우리 자리에도 통닭 두 마리가 놓였고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요즘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치맥의 유혹만큼은 쉽사리 뿌리칠 수 없다.
맥주를 한 모금 넘기고 통닭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시장기도 있었고 오랜만의 치맥이라 더욱 맛있었다. 점심 한 끼로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젠슨황이 들렀던 성수동 치킨집 못지않은 맛과 멋을 즐겼던 시간이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남대문시장으로 들어섰다. 언제 와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입안에 남은 느끼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달랬다.
상가 건물 앞 작은 공터는 할머니들의 쉼터였다. 나도 한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비둘기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혹시나 과자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눈치였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가방에서 빵을 꺼내 던져주자 비둘기들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사람과 비둘기가 한 공간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풍경이었다.
비둘기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먹이를 주지 말라고 하지만, 인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한쪽 발가락이 몇 개 없는 비둘기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절룩거리며 먹이를 쫓아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저 녀석이 치열한 먹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냉혹한 생존 경쟁은 비둘기 사회에도 예외가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한동안 비둘기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돌아온 아내는 모자가게로, 액세서리 가게로 순례하듯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남대문시장은 역시 남대문시장다웠다. 물건도 넉넉하고 사람도 넉넉했다.

한참 돌아다녀 힘이 들었는지 이마에 땀이 홍건 하고 앉고 싶은 차에 아내가 팥빙수를 먹자고 슬쩍 말을 꺼냈다.
단골 카페가 있다고 앞장서기에 뒤따라갔다. 꽤 높은 건물 3층에 카페가 있다. 이 시간에 꽤 넓은 카페는 이미 손님들이 다 점령하고 있다.
그래도 창가 구석이 눈에 띄어 얼른 자리를 잡은 후 팥빙수를 시켰다. 모처럼 달달함으로 감싼  차가운 빙수로 더위는 단숨에 가시고 혀까지 호강했다.

통닭집에서 만난 할머니, 공터에서 비둘기에게 빵을 나누어 주던 할머니, 복작이는 사람들까지. 거기에 팥빙수의 달달함이 더해져 시장 곳곳은 아직 사람 냄새와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남대문시장은 늘 정겹고,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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