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 넘어 애련리까지

작성자신재옥|작성시간26.06.23|조회수78 목록 댓글 2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고려대 명예 교수인 오탁번 교수가 설립한 원서문학관을 찾았다.어제 영월 청령포를 찾고 바로 제천으로 넘어와 숙소를 잡았다.

나는 여행갈 때 언제부턴가 그 지역 문학관을 찾게 되었다. 오탁번 시인은 자신의 모교인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 분교에 문학관을 설립했다. 원서遠西는 제천에서 먼 서쪽이란 뜻으로 그의 고향인 백운을 일컫는다.
아이들이 없어 점차 시간 속에 사라져 가는 폐교를 가꾸고 다듬어 시인들 창작의 산실로 꾸며 놓았다고 한다.
박달재를 옆에 끼고 꼬불꼬불 돌고 돌아 찾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오지탐험하러 가는 길 같았다.
양쪽 창을 여니 깊은 산속에서 응축된 태고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머리가 맑아져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모르게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옆에서 아내가 따라 부른다.
울고 넘는 박달재 1948년 박재홍이 부른 노래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진 노래가 사오십 대 나이가 되어서 한창 불렀으니 불후의 명곡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이 웬만치 든 사람은 이 노래 한자락을 불러봤을 것이다.

이 노래는 비 오는 날 박달재에서 이별한 뒤 홀로 남은 사람이 가슴이 터지도록 울면서 소리치는 내용이라 한다. 2절 마지막 부분의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라는 노랫말 중에 "금봉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박달재에 남겨진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던 남편과 이별하던 여인들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원서문학관을 찾으러 가는 길은 박달재터널을 지나 갔는데, 돌아올 때 보니 터널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박달재를 넘어가는 도로가 보인다.

흥얼거리며 가다보니 안내판이 없어 마침 길가에서 주민을 만나 물었다. 바로 코앞이라고 한다.
아늑한 동네 길가에 자리잡은 문학관은 울타리로 막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철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당연히 입장할 줄 알고 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오탁번 시인이 3년전 타계한 건 알고 있었지만, 운영상 어려움이 있어 문을 닫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할 수없이 울타리를 한바퀴 돌며 아쉬움을 달래봤다. 정문 틈으로 사진으로 옮기는 것으로 만족했다.
문학관 앞에는 수령이 350년인 느티나무가 있는데, 거목이 마치 문학관을 지켜주는 수호신 처럼 느껴진다.
헛발질에 허탈했지만, 근처에 영화 '박하사탕' 촬영지가 있다는 사실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노거수를 끼고 골목길을 따라 내리막 길이다. 2,3분이나 되었을까 약간 녹슨 철길이 보이고 기념비가 남아있다. 철길을 아랫쪽에서 올려다보니 영화의 한장면 같다. 처음엔 폐철교인줄 알았다.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주연으로 이창동 강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박하사탕의 현장에서 마침 화물열차가 덜그덕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묘한 감정의 이입은 어쩔 수 없었다.
백운의 깊은 숲속엔 원서문학관과 영화 박하사탕의 신비와 비밀을 품고 있다.
문학적 가치가 높은 원서문학관이 다시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며 백운면 애련리에서 추억거리를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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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후회 없는 삶 | 작성시간 26.06.23 저 어려서 국민학교 다니던 곳이 전북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였는데, 제천에도 백운면이 있었네요. 문학청년의 풍모 멋지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재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3 문학청년이라 칭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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