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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월 3일 쌍령전투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시간05.08.27| 조회수2557| 댓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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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朴下史湯 작성시간05.08.27 기병은 적은 수만 있어도 엄청나게 많은 수로 보입니다. 기병을 상대해 오지 않았다면 그런 착시로 인한 위압감도 장난이 아니겠죠.
  • 작성자 강태공 작성시간05.08.27 흠...그렇군....근데 조선군 진짜 허접하긴...허접하다....그냥 죽창으로 맞서 싸워도 3백은 그냥이길터인데
  • 답댓글 작성자 Temuchin 작성시간05.08.28 조선군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용인에서와 같이* 저 전투 당시에 지휘관의 통제력과 병사 개개인의 개별행동이 부른 참패죠. 또한 청나라 기병 *팔기군*은 8개의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죽창으로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_-
  • 작성자 저스티니안™ 작성시간05.08.27 바랑기안 60명이 농민반란군 3000여명 찍어죽이는거랑 비슷하지않을까요...-_-;;ㅈㅅ
  • 작성자 creios 작성시간05.08.27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쌍령 전투는 근접전을 담당할 병과가 없이, 원거리 투사무기만으로 구성된 군대가 실전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 전투였죠. 그리고 강태공님이 "조선군이 각자 총 한방씩만 쏴도 적어도 전멸은 할텐데" 라고 하셨는데, 당시의 조총은 사정거리도 짧고 명중율도 매우 낮았습니다.
  • 작성자 creios 작성시간05.08.27 즉, 총을 쏴도 적에게 명중하는 건 적었습니다. 10발을 쏜다고 해도 1~2발 맞는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4만의 총병이 총을 쏜다고 해도 사정거리 밖에 있는 적에게 명중하는 총알은 매우 적었다는게 현실이었습니다.
  • 작성자 다크킬러 작성시간05.08.28 절대 약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무립니다. 아시겠지만 저당시 군포 및 그밖의 수많은 폐단으로. 군역제는 이미 갈때까지 간상황이었고 국내상황도 임란의 피해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해 피폐한 상태였는데다가 군기도 문제였습니다.
  • 작성자 다크킬러 작성시간05.08.28 그리고 근본적으로 조선군 시스템상 조총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 및 전술이 없었지요.
  • 작성자 朴下史湯 작성시간05.08.29 팔기군은 여덟 깃발, 즉 여덟개 부대로 나뉘어 있어서 팔기병이지 무기 여덟개를 써서가 아닙니다. 기병창, 도리깨, 투창, 장검, 활, 단검, 화승총, 마상총을 썼을까요? (단검 여덟개라도 운반이 장난이 아니겠군요.
  • 작성자 Temuchin 작성시간05.08.30 무기 여덟개를 써서 그랬다는 잘몼됀 저오를 입수해서 그랬습니다-_-; 정정합니다;;
  • 작성자 현수 작성시간05.09.02 조총부대로 새 잡을라고 모았나..ㅡㅡ;
  • 작성자 말이웃음 작성시간05.12.31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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