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이옥순 저, 푸른 역사)' 에서 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

마라타 왕국의 시조 시바지 본슬레(1627 ~ 80)
나폴레옹처럼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을 입증한 150센티미터의 단신 시바지는 무슬림 통치에 대한 증오를 키우면서 이방인의 종교로부터 독립을 꿈꾼 야심 많은 젊은이였다. 20세에 큰 뜻을 품고 집을 나온 시바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홍길동처럼 데칸 지방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무슬림의 요새를 하나씩 공략했다. 그 때문에 '데칸의 산쥐'라고 불린 시바지는, 전설에 따르면 거대한 도마뱀의 도움을 받아서 산쥐처럼 가볍게 가파른 산악과 요새를 넘나들었고 승리를 자기편으로 이끌었다.
그는 10만 대군을 이끈 무슬림 술탄국 비자푸르의 장군 아프잘 칸을 살해하고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1674년 1만 1천명의 브라만들이 장엄하게 베다를 암송하는 가운데 왕위에 오른 힌두 지배자였다. 시바지의 전과는 전설이 되었고, 데칸의 집집마다 골짜기마다 그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전세가 불리하자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와 강화조약을 맺으러 아그라에 간 시바지는 배짱 두둑한 발언으로 감옥에 갇혔지만 빨래 바구니에 숨고 하인으로 변장하여 탈주를 감행함으로써 또 다른 신화를 만들었다. 그가 죽은 후 시바지의 후손들은 마라타를 무굴 제국의 괄목할 상대와 영국의 간담을 서늘하게하는 위협자로 키웠다.


마라타 왕국이 무슬림 술탄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외친 구호는 "젖소와 농촌을 지킨다."였다. 젖소는 무슬림 술탄국과 대비되는 마라타인의 종교인 힌두교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바지를 홀로 키운 시바지 어머니의 믿음이었다. 또한 농촌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한 의식이자 사랑, 즉 내셔널리즘이었다. 시바지와 마라타가 무슬림과 그 종교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며 사용한 자치라는 뜻의 '스와라지(Swaraj)'는 "스와라지는 내 천부인권이다. 이제부터 나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 라고 선언한 이후 '스와데시'구호와 함께 훗날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슬로건이 되었다.
"기마병(마라타족)들이 내려와서 평원의 사람들을 둘러쌌다. 그들은 금과 은을 약탈했고 사람들의 손과 코, 귀를 잘랐으며 때로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다. 어여쁜 여자들은 끌고 갔다."
"그들은 연신 '돈을 내놔, 돈을 내놔, 돈을 내놔!'라고 소리쳤다. 돈을 뺏지 못하면 사람들의 콧구멍에 물을 붓거나 저수지에 던져버렸다. 어떤 이들은 목이 졸려서 죽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돈을 주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목숨을 주었다....."
한 벵골 시인의 글은 1740년대 벵골 지방을 점령한 마라타 군대의 잔학성과 약탈의 습관을 잘 보여준다. 마라타 군대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약탈의 오명이 있었다. 마라타가 무굴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데에는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한 이 나쁜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마라타 부족은 이러한 부정적인 기록과 기억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인도인, 무슬림과 대적한 용감한 힌두의 대명사가 되었고 영웅으로 널리 숭배되었다.
마라타인들은 말을 타고 험준한 산악 지방을 누비고 다니는 식의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명성을 드높였다. 군대와 화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시바지의 군대가 오랫동안 무슬림 술탄국, 특히 강대한 무굴 제국을 괴롭힐 수 있었던 이유는, 벌떼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릴라 전법 덕분이었다. 또 무굴의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사로잡혀 고문을 당하고 결국 살해된 마라타 왕국의 지배자 샴바지가 보여준 생애 마지막 며칠의 영웅적인 행적도 마라타인의 용기를 더욱 부각시켰다.
1760년경의 마라타 왕국

마라타는 부와 힘을 겸비한 무굴 제국 쇠퇴의 일등 공신이었다. 독실한 무슬림인 아우랑제브 황제는 무려 26년간이나 마라타를 정벌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데칸 지방의 산채를 두고 계속된 마라타와 무굴의 뺏고 뺏기는 장군멍군식의 전쟁은, 무굴의 풍성한 재정을 갉아먹고 수많은 생명을 데려가면서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50만 대군과 5만 마리의 낙타, 3만 마리의 코끼리 부대 등 '움직이는 도시'를 이끌고 친정을 계속한 나이든 황제는 마침내 마라타 정복을 포기하고 수도 델리로 귀환하는 길에 사망했다. 마라타를 상대로 보낸 30년의 허망한 세월을 탄식하듯 그는 쓸쓸한 유언을 남겼다.
""나는 혼자 왔다가 이방인이 되어 혼자 떠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라니 락시미 바이
일찍이 1664년 수라트 지방을 공격하여 간신히 마련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무역 사무소를 약탈한 이래 영국과 무굴 제국의 후계자 자리까지 노리면서 19세기 초반까지 중부 지방에 큰 세력을 떨쳤던 마라타인의 용맹성은 1857년 대반란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열심히 싸웠고 가장 끝까지 버티며 영국의 자존심에 비수를 꽂은 반란군은 양자라는 이유로 영국에 의해 왕위에서 퇴출된 마라타 왕국이 마지막 지배자 바지 라오 2세의 후계자인 나나 사히브와 마라타 계열의 작은 왕국 잔시의 왕비 락시미 바이였다.
락시미 바이는 자신의 양자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고 강제로 왕국을 병합해버린 영국을 상대로 놀라운 용기와 지휘력을 발휘해 인도 역사상 최고의 히로인이 되었다. 약관 20세의 몸으로 반란군을 이끈 락시미 바이는 가장 훌륭한 반군 지도자이자 전쟁터에서 전사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특히 남자처럼 전투복을 입고 말 위에 올라 기병을 진두 지휘하여, 영국이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부른 장대한 괄리오르 성을 빼앗은 락시미 바이는, 인도인의 용기와 '남자다운'투쟁 정신을 과시하여 적군인 헨리 로스 경까지도 "반란군 중에서 최고의 남자"였다고 칭송해 마지않은 진정한 1857년의 영웅이었다.
"영국인이 내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라!" 왕비는 최후의 순간에도 진정한 '남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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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전상용 작성시간 06.06.24 왕마귀님 혹시 아프간 군이 영국군을 몰아낸 자료도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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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yhn217 작성시간 06.06.24 마라타의 힘이 강해지자 무굴제국은 페르시아의 마지막 정복자 나디르 샤에게 SOS를 타전하죠. 1761년에 마라타인들은 장기로 삼던 게릴라를 버리고 파니파트에서 나디르 샤와 맞섭니다만 패배. 무굴시대에는 이 파니파트에서 전투가 세번이나 벌어집니다. 뭐하는 동네인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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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교 작성시간 06.06.25 아아~~ 정말 잘 보옵니다~~ 왕마귀님께 언제나 감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