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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1592년 7월 8일(웅치 전투)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6.07.31|조회수1,625 목록 댓글 10


 

1592년 7월,한반도의 일본육군은 거침 없었습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번대는 평양을 장악하고 의주를 노리고 있었으며,

 

가토 기요마사의 제2번대는 함경도로 진격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본군은 한반도 곳곳에 전개되어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8도에서 가장 인구와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는

 

일본군으로부터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그런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1592년 5월 중순부터

 

제 6번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군대를 동원 하였습니다.

 


당시 경상도의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군대가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4갈래 였는데,

 

 

 

산청-함양을 거쳐 지리산을 우회한 다음, 

 

팔랑치와 여원치를 통과하여 소백산을 넘고 남원을 통해 전주,광주,나주로 진공하는 것과,

 

 

산청-거창-안의-육십령을 거쳐 소백산을 넘고 장수,계안을 통과하여 진안을 거쳐

 

웅치를 통과하여 노령산맥을 넘고 전주로 진공하는 것과,

 

 

추풍령을 통해 소백산맥을 넘고 충청도 영동으로 진입하여 무주-장수-진안을 거쳐

 

전주로 진공하는 것과,

 

 

추풍령을 통해 소백산맥을 넘고 충청도 영동으로 진입하여 무주-금산-진산을 거쳐

 

이치를 통과하고 노령산맥을 넘어 전주로 진공하는 것 이었습니다.

 

 

1592년 5월 24일,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부장이자 승장인 안고쿠지 에케에이에게

 

2천의 병력을 주어 남강 하류의 정암진을 넘어

 

의령을 거쳐 산청-함양 길을 통해 전라도를 진공하고자 하였습니다.

 

 

안고쿠지 에케에이는 스스로를 [전라감사]라 칭하고

 

전라도 각 고을 수령들에게 감사 행차를 영접하라는 통고문을 보낸 다음,

 

전라도로 출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고쿠지 에케에이의 군대는 전라도 진공의 출발지인 정암진에서

 

조선의 의병장 곽재우의 매복공격을 받아 많은 병력을 잃고 패퇴함으로서

 

산청-함양 길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592년 6월엔 합천에서 김면의 의병이 거병하여

 

거창 우척현에 주둔하고 진을 설치하여 강력하게 방비하니,

 

산청-거창을 통해 전라도로 진공하는 길도 막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추풍령을 통해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진공하는 길을 선택하였고

 

1592년 6월 23일, 금산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번대를 반으로 나누어

 

고바야카와의 본대는 진산을 거쳐,이치를 통해 북쪽에서 전주로 진공하고,

 

안고쿠지의 별군은 용담-진안을 거쳐 웅치를 통해 전주로 진공하여

 

본대와 별군이 함께 전주성을 협공하는 전략을 수립하였습니다.

 

 

한편 1592년 6월 6일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참패한 전라감사 이광은

 

전주에 돌아와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가

 

고바야카와의 전라도 진공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광은 조방장 이유의를 팔량치에,

 

이계정을 육십령에 배치 하여

 

일본군의 진공을 막게 하였는데

 

일본군이 무주에 입성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팔량치와 육십령에 배치된 조선군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용인 전투에서 5만의 조선 근왕군이 1600명의 일본군에게 패퇴한지 불과 1달전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팔량치와 육십령의 조선군은 저절로 흩어져 버리고 이유의와 이계정은 전주로 도망쳤습니다.

 

 

덕분에 일본군은 팔량치와 육십령을 통과 하여

 

고바야카와의 본대가 진산을 통해 이치에 이르렀고,

 

안고쿠지의 별군은 진안을 지나 웅치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병과 관군이 전주성에 속속 모여듬으로서

 

조선군은 전라도로 진공하려는 일본군에 대항할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주성에 집결한 조선군은

 

 

광주 목사 권율의 군대 1500여명

 

화순 동북 현감 황진,편장 위대기,공시억의 군대

 

해남 군수 변응정,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의 군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1592년 7월초에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요충지인

 

웅치와 이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웅치에 배치된 조선군은 3개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제 1선은 전주 의병장 황박의 의병 200여명이 배치 되었고

 

 

제 2선은 나주 판관 이복남의 군대가 배치 되었고,

 

 

제 3선은 김제 군수 정담과 그의 휘하 장수 박정영의 군사 300여명과

 

박석의 군사 100여명이 배치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해남 군수 변응정,진안 선비 김수,김정 형제,사천 김씨 일가가 웅치에 배치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의 수는 1000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기와 의욕은 용인 전투의 조선 근왕병들과는 달랐습니다.

 

웅치의 조선군은 목책과 장애물을 설치하고 길목 좌우에 매복한 상태에서 일본군을 기다렸습니다.

 

 
1592년 7월 7일, 웅치에 도착한 안고쿠지의 일본군 7000명은
 
웅치를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공격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1선에 배치된 황박의 의병들이 제 2선의 이복남의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 하였습니다.
 
그러나 격퇴당한 일본군은 다시 공격을 준비 하였습니다.
 


 

1592년 7월 8일 새벽,

 

안고쿠지 에케에이의 일본군 7000명은 웅치를 다시 공격 하였습니다.

 

 

웅치의 조선군은 일본군이 활의 유효사정거리에 진입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일본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진입하면 일제히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습니다.

 


 

조선군의 일제사격에 일본군의 피해가 속출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쏟아지는 화살과 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 거꾸러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끝없이 몰려왔고

 

끈질기게 공격했으며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안고쿠지는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고

 

부대를 번갈아가며 투입시키고 빼내는

 

 제파식 전술을 수립하여

 

웅치의 조선군을 무너뜨리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나누어진 부대를 2집단으로 나누어

 

창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집단은 전방에 두어

 

조선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게 하였고

 

 

활과 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집단은 후위에 두어

 

지원사격을 통해 전방의 일본군을 돕고

 

위협사격을 통해 조선군을 괴롭혔습니다.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에 조선군 방어선 제 1선이 무너지고

 

황박의 의병들은 제 2 방어선으로 물러나서

 

제 2 방어선을 방어하던 이복남의 조선군과 합류하여 방어를 보강하였습니다.

 

곧 일본군이 제 2 방어선에 몰려와서 맹렬하게 공격하였고

 

.제 3선에 있던 정담이 제 2방어선으로 내려와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정담이 쏜 화살이 백마를 타고 선두에서 일본군을 지휘하던 일본 장수를 거꾸러뜨리고

 

제 2선의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일본군과 싸웠으나

 

일본군의 끈질기고 맹렬한 공격에 제 2 방어선도 위태로워져 갔습니다.

 

그러자 정담의 부장이 정담에게 후퇴를 건의 했으나

 

정담은 [적을 하나라도 죽이고 죽을 지언정,한 보도 물러 설 수 없다.]라고 말하며 거절하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조선군의 제 2 방어선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제 2 방어선의 조선군과 의병들은 제 3 방어선으로 물러나서

 

웅치 정상의 제 3 방어선에 배치된 정담의 조선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저항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제 3선의 조선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루종일 공격 하였으나

 

제 3선의 조선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견뎌내었습니다.

 

 

7월 8일의 해가 기울무렵, 일본군은 공격을 멈추고 물러가기 시작 했습니다.

 


 

그 때 웅치의 조선군은 하루종일 일본군과 싸우느라

 

화살을 모두 쏴버린 상태 였습니다.

 

 

그래서 조선군 병사들이 화살을 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니

 

일본군이 조선군 병사들이 외치는 말을 듣고

 

조선군을 유심히 보니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진 것이 확실한 듯 하여,

 

조선군을 총공격 하였습니다.

 

 

화살과 돌을 완전히 소모한 조선군은 일본군과 백병전을 전개 하였고

 

조선군은 수가 많고 검술에 능한 일본군에게 밀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승리가 확실해져 가는 순간에서도

 

조선군은 끝까지 싸웠습니다.

 

 

조선군과 일본군이 뒤섞여 백병전이 전개되는 웅치 정상의 전장에서

 

김제 군수 정담, 종사관 이봉, 비장  강운과 박형길은 일본군과 맞서싸우다

 

스러져 죽어갔습니다.

 


 

 해남군수 변응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웅치의 전장을 빠져나갔고

 

나주 판관 이복남이 조선군과 의병들을 수습하여 퇴각 하였습니다.

 

 

결국 웅치의 조선군 방어진은 무너졌습니다.

 

이제 일본군은 전주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일본군의 피해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웅치를 가득 메운 것은 화살과 돌에 맞아죽은 일본군의 시체더미 였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부상당하거나 하루종일 싸워서 완전히 지친 상태 였습니다.
 
 
그래서 안고쿠지는 이치를 공격한 고바야카와 군대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웅치에서 군대를 추스리는 한편,
 
전주로 300여명의 선발대를 보내어 전주를 탐색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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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리틀솔져 | 작성시간 06.08.01 양진영의 전술이 대단하군요. 부대를 교대로 효율적으로 운영한 일본군도 뛰어났고(일단 민족감정 이런건 약간 접어두고.....) 조선군의 유기적인 계단식 방어체계도 상당히 훌륭했읍니다. 저 개인적으로 승패를 떠나서 명승부전이었다고 평가 하고 싶군요.
  • 작성자전상용 | 작성시간 06.08.01 생각해보니 이치 전투의 경우 같은 계단식 방어체계지만 1차 저지선이었나?2차저지선 이었나?한쪽이 무너지려 하니가 예비대를 투입해서 밀어버리고 그 사이에 다시 막았다고 들었는데 맞으려나??
  •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8.01 한교:안고쿠지 에케에이는 안국사라고 불리며 임진왜란 초기 곽재우에게 크게 혼난 인물 입니다. 이분은 전라감사가 되리라고 포부를 밝히고 전라도 진공에 투입되었는데 출발지에서 곽재우의 의병을 만나 크게 패했죠.(이부분을 웃기게 표현하려고 하다가 그냥 건조하게 표기하기로 했습니다.)그때 곽재우가 조선 태조의 어화(신발)을 되찾았었죠. 전상용:조만간 이치 전투를 등록할 예정입니다.
  • 작성자angelmai | 작성시간 06.08.01 그림도 죽이네요 ㅎㅎ
  • 작성자RougeEtNoir | 작성시간 06.08.02 와아 명장님이다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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