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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1592년 7월 8일(이치 전투)

작성자제국의명장|작성시간06.08.06|조회수1,879 목록 댓글 15

 

1592년 6월 23일, 충청도 금산을 점령한 일본 제 6번대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군대는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진공하고자 하였습니다.

 

 

고바야카와의 휘하 승병장 안고쿠지 에케에이(안국사 주지)가

 

 별대 7000여명을 이끌고 용담-진안을 거쳐 웅치로 진격하였고

 

 

코바야카와 다카가게 자신은 금산성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본대를 동원하여 진안을 통해 이치로 진출 하였습니다.

 

 

1592년 7월 7일,고바야카와의 본대는 금산을 출발하여 진산에 이르렀고

 

안고쿠지의 별군은 용담-진안을 지나 웅치에 도착 하였습니다.


 

한편 전주에 집결한 전라도 조선군은 웅치와 이치에 방어진을 설치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웅치에는 김제군수 정담과 전라 의병장 황박,나주판관 이복남,해남현감 변응정 등이 지휘하는

 

수백명의 조선군과 의병들이

 

7월 7일부터 안고쿠지 에케에이의 일본군 7000명과 싸우기 시작했고

 

 

남원을 방어하고 있던 광주목사 권율과 화순 동북현감 황진의 조선군은

 

전주에 입성한 이후,웅치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싸우려고 하다가

 

고바야카와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치로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치로 이동하여 목책와 장애물을 설치하고 방어진을 형성 하였습니다.


 

1592년 7월 8일 해가 떠올라 아침이 시작되려는 무렵에,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일본군이
 
이치의 조선군 방어진을 공격하기 시작 했습니다.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그의 군대를 2개조로 나누고

 
조선군의 목책을 교대식으로 공격케하여 파괴하고자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설치한 장애물들을 통과하고 조선군의 목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조선군은 장애물 지대를 통과한 일본군에게 화포를 발사 하였습니다.

 
일본군으로서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포격이었으나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돌격하였습니다.


 

조선군의 포격을 돌파한 일본군은 

 
조선군이 일제히 발사하는 화살과 돌의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화살과 돌을 뚫고 조선군 방어진으로 올라온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조선군이 휘두르는 창검 이었습니다.


 

장애물 지대에서 이치의 조선군 방어진 목책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주검이 깔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후방에서 아시가루(총포수)들이 쏘아대는 조총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계속 공격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공격이 맹렬하고 처절하게 이어지는 만큼,
 
저항하는 조선군의 방어도 필사적 이었습니다.
 
 
권율은 방어진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였고
 
비겁하게 전투를 하지 않고 숨어 있는 병사를 발견하면
 
몰래 그 병사의 군모에 칼로 표시해둔 다음,
 
일본군의 공격이 잠시 수그러들 무렵에 붙잡아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권율의 독전과 조선군의 용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의 방어는 조금씩 느슨해져갔고
 
 
권율은 화순 동복현감 황진과 편장 공시억,위대기에게 병력을 주어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케 하였습니다.


 

측면에서 조선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크게 당황 하였고,

 
일본군의 공격은 크게 위축 되었습니다.
 
 
측면에서 공격해오는 조선군 중에서 화순 동북현감 황진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황진은 1583년 여진족이 일으킨 니탕개의 난에서 보인 무용을 이치에서도 발휘 하였습니다.
 
그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구입한 일본도 2자루로 가로막는 일본군을 베어버렸고
 
멀리서 몰려드는 일본군에겐 강궁으로 사살하였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황진을 포위하여 그를 참살하려고 했으나
 
그가 발휘하는 쌍검무의 솜씨가 신기에 가까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시가루(총포병)들은 황진을 향해 조준및 집중사격을 퍼부었고
 
황진은 이마에 총탄을 맞았습니다.


 

황진이 총에 맞자 위축되어 있던 일본군의 기세가 크게 살아나 맹렬하게 공격하여

 
조선군 방어진 목책의 일부를 파괴하고 조선군진으로 진입하니
 
황진의 부상을 봐서 사기가 떨어져있던 조선군은 크게 당황하여
 
방어진이 무너질 듯 하였습니다.
 
 
권율은 일단 부상당한 황진을 구출하는 한편,
 
일본군의 기세에 놀라 달아나려던 병사를 붙잡아 참살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격려하고 자신이 직접 몰려오는 일본군에게 달려들어
 
적병을 베어버림으로서 병사들을 안정시켰습니다


 

권율은 대기시켜둔 예비병력을 방어진에 투입시켜

 
진입한 일본군을 역공격하여 군진 밖으로 밀어내니
 
일본군은 크게 위축되어 점점 기세와 공격의 강도가 약해져갔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에 이르렀으나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은 이치의 조선군 방어진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오후4시경,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는 이치의 조선군 공격을 중단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치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 했습니다.
 
 
그것은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 7000여명이
 
연산에서 출발하여 진안을 통해 금산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1592년 7월 8일,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본대는

 
이치의 조선군 방어진을 뚫지 못하고
 
퇴각 하였습니다.
 
 
퇴각하는 고바야카와의 군대 뒤에는
 
장애물 지대에서 조선군 방어진에 이르기까기 일본군의 시체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이치 전투는 조선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대규모 정면충돌을 전개하여 승리를 쟁취한
 
첫번째 전투 였습니다.




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군대는 그날 밤 급히 금산으로 회군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 6번대의 전라도 진공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웅치를 점령한 안고쿠지 에케에이의 별군은 전주를 공격할 수 있었고
 
또다른 제 6번대의 별동부대가 전라도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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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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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明智光秀 | 작성시간 06.08.08 에케에이는 누구고 에케이케는 누구? 승병장이라든가 아시가루=총포병 등의 개념 오류도 있긴한데... 황진이 일본군에게 쌍검을 들고 돌진하다가 전사했다는 일본측 기록은 정확히 무엇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8.10 오타 수정 하였습니다. 아시가루는 농민 출신의 각종 병장기를 다루는 일반병으로 알고 있습니디만,여기서는 그냥 총포병으로 표기 했습니다.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다면 수정하겠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일본측 기록은 여러가지 인데,기록한 사람마다 서로의 전공을 자랑하는 투로 제작한 고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듭니다.구로다의 기록에 의하면 [성문이 열릴 때 쌍검을 든 조선 장수가 성문에서 일본군을 향해 뛰쳐나오다가 집중 사격을 받고 죽었다.]되어 있습니다.
  • 작성자RougeEtNoir | 작성시간 06.08.09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 작성자윤대협 | 작성시간 06.08.10 항상 재밌게 읽는 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 작성자明智光秀 | 작성시간 06.08.10 친절하신 답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몰라서 묻는게 아닐진데... 재밌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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