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1월 9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완전히 탈환 하였습니다.
하지만 평양성 시가지는 격전으로 인해 거의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다만 일본군이 축조한 토굴은 시가지에 비해 상태가 좋았지만
명군이 평양성을 함락한 직후에 일본군 진영과 시가지를 약탈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 되었습니다.
이때 전세정이 지휘하는 명군만 약탈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세정이 군사들을 단속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양성 탈환 이후 명군은 평양성 시가지에 거주 하였고
원래 시가지에 살던 백성들은 쫓겨나 외각에 거주하였습니다.
1월 11일, 이여송은 평양성 전투에서 타던 말이 철환에 맞은 이유로
조선 신하들로 하여금 준마 한 필을 구하도록 하여 타고서 한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널리 군중에 찾아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여송이 말하기를
‘국왕에게 이문(문서를 보냄)하여 한 필을 빌려가지고 싶다.’
고 하였습니다.
아침식사 이후 이여송이 제물을 갖추도록 하고 전투에서 죽은 장사들을
보통문 밖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는데 소리내어 통곡하며 슬픔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니
제장 이하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여송이 기자묘를 참배하려고 재물을 준비하려 하니,
평양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조선 백성들이 6~7섬의 쌀로 떡을 만들어
명군을 대접하며 위로하였습니다.
이때 이여송이 부로들을 불러들여 눈물을 머금고 위로하며 사례하기를
‘우리 군사가 그대들을 구원하여 살리려다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3천여 명이나 되는데
성을 공격할 때에 그들은 보았는가?’
하니,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두손 모아서 빌었습니다.
이여송이 이어 말하기를
``우리가 분명히 곧장 경성으로 향하여 왜노들을 모두 죽일 것이니
그대들은 안심하고 정착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이여송이 도순찰사 이원익, 공조 판서 한응인, 한성부 판윤 이덕형을 불러 말하기를
``왜노가 가까운 길을 따라 도망하였는데,황해도의 장병관은 어찌하여
군기를 어기고 그르쳤는가?
군대는 신속함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나는 급히 경성으로 향하려고 한다.
앞으로 쓸 식량과 말먹이는 얼마나 준비하였는가?
그리고 우리 군사 중에 죽거나 다친 자가 모두 3천여 명이나 되니
빨리 그대 나라의 날랜 군사 3천 명을 뽑아내어
우리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게 해서
따로 한 부대를 만들도록 하라.’
라고 하고,
이원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가서 단속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또 백패를 내어 거느린 군사 15만 명을 전진시킬 뜻을
일로와 경성의 여러 곳에 전달하여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빈을 순변사로 삼고 군사 3천명을 주어
이여송과 함께 싸우게 하였습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구로다 나가마사 군이 있는 배천까지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도 명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니시 군은 계속 남쪽으로 후퇴 하였으며
구로다 군도 이 철수에 합류하니
용천의 구로다 나가마사의 가신 오가와 덴우에몬과
백천의 구로다 나가마사와
강음의 구로다 나가마사의 가신 구리야마 사부로우에몬의 군대도 패주에 합류 하였습니다.
그리고 1월 16일, 고니시군은 한양에 도착하였습니다.
1593년 1월 9일, 이여백의 명군은 고니시군을 추격하기 위해 황주로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추격을 염두해 두었는지
황주로 가는 길목에 장애물이 많았습니다.
명군이 길을 정비하고 많은 군사들의 이동으로 인해 빨리 추격하지 못하니
도체찰사 유성룡이 샛길을 통해 명군보다 먼저 황주에 도착 했습니다.
이때가 밤 삼경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은 떠난 뒤였고
황주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명군은 1월 10일 이른 아침에 봉산에 도착했으나
이미 일본군은 남쪽으로 도주한 뒤였습니다.
유격 이타가 가정(집안 노비-사병) 100여명을 데리고 검수까지 추격하였지만
역시 일본군은 달아나고 없어서 결국 봉산으로 되돌아 가야 했습니다.
평양성 함락 이후 이여송은 평양에 머물면서
좌협대장 장세작과 선봉장의 총병 사대수 등에게 명령하여 남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또 유성룡과 접반사 이덕형으로 급히 앞으로 나가서
마초와 양곡을 마련하도록 독려하게 하고
부교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또 호조 판서 이성중을 전임으로 하여 좌랑 김계현과 이자해를 거느리고
군중 일행을 따르며 군량과 마초를 주관하게 하고,
또 박충간을 독촉하여 수송 관계를 주관하여 보살피게 하고,
또 분호조판서 권징을 보내 종사 황치경과 권협ㆍ중추부 경력 신암을 데리고
강화 교동으로 들어가서 공사간의 저장 물자를 다 징발하여 군량을 보태고
이어 충청ㆍ전라도의 해상 수송을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또 사간원 정언 극중을 보내어 작업을 감찰하게 하고,
의정부 우의정 유홍으로 여러 가지 사무를 총독하게 하되
모두 주야로 독촉하여 시각을 지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성룡이 1월 9일에 먼저 황주에 입성한 이후
급히 글을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 보내어 수운을 독촉하게 하고,
또 글을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보내어 김응서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
싸움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뽑아서 평양으로부터 지고 이고
뒤를 따라 황주까지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또 평안도 세 현의 곡식을 배로 실어 운반하되
청룡포에서 황해도로 운송하게 하였는데,
이 일이 미리 준비가 있은 것이 아니라 임시로 갑작스럽게 이루어 진 것 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명나라 대군이 뒤를 따라왔지만 다행히 군량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무렵 포천에 주둔한 일본군이 금화·철원의 적과 서로 연락하며 사방으로 나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습니다.
또한 개성의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임진강 하류인 덕진단 근처에
목책을 설치하고 참호를 팠으며
강백과 근교(개성 근교)에 모여 진을 쳤으니
이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군이 개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상대하겠다는 의도 였습니다.
이때 조명 연합군의 선봉군은 중협대장 이여백의 군대로서
1월 20일에 고책·양심 두 유격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정탐하여 일본군이 개성의 동쪽 들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여송은 야불수(명군 연락 장교)에게 명령하여
급히 두 장수를 조발(지원)하여 돕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명군의 기병부대가 개성 청석골에 이르니
그곳의 지형은 험하고 좁으며 좌우에 절벽이 하늘에 닿게 높이 서고
가운데로 외길이 통했습니다.
그런 곳에 일본군 수백 명이 모여 있다가 명 나라 군사들은 바라보고 달아나 숨으며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니 명군이 추격하여 30여 급을 베었습니다.
마침내 명군이 개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개성의 일본군은 개성 백성들을 죽이고 집을 불사르고
모두 도망하여 버린 뒤였습니다.
이여백은 즉시 임진강을 향하여 진격하면서
임진강 나루터 가를 바라보니 그쪽에 약 3∼4천 명의 왜적이 모여 주둔하고 있으므로
조명연합군이 갑자기 진격할 수 없어 역시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다 군영을 주둔시켰습니다.
이때 조선의 부인 두 사람과 어린아이 한 명이 왜적의 군영에서 나와
통사(통역관)와 더불어 말하기를
`왜적이 장차 물러나려고 하는데 명나라 군사가 그 뒤를 밟으므로
어쩔 수 없이 여기에다 군영을 주둔시켰다.
만약 명나라 군사가 조금 늦추어 준다면 저들은 응당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고 하였는데,
이것은 일본군이 일부러 시켜서 와서 떠들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이여백이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우리들로 하여금 왜적을 모두 죽이고
한 사람도 빠져 도망하는 자가 없도록 한 연후에 국왕을 도성에 편안히 모시고
10년 동안 여기에 머물면서 보호하고 방어하게 하셨으니 내가 조금도 늦출 리가 없다.
너는 용서하여 죽이지 않도록 명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여자와 아이가 떠난 뒤에 또 일본군 20여 명이 나와서 바라보므로
명군이 맞아 12급을 베고 1명을 사로잡고 인해서 추격하여 나아가니
강가의 일본군이 모두 흩어져 강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명군은 그곳의 얼음이 얇은 것과 또 적의 계책을 측량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강가에 주둔하면서 제독을 기다리고,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하였더니,
일본군 약 1만 4∼5천 명이 강에서 20리쯤 되는 산언덕 위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군은 이여송 제독이 도착한 이후에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여송 제독이 당도하기 전에 일본군은 서울 방면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고바야카와 다카가게를 설득하여 서울로 후퇴하게 하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일본군 수만명이 임진강을 건너 한양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이에 명 나라 군사가 동파탄을 경유하여 얕은 곳을 걸어서 건너 추적 습격하여
명군은 일본군 1백 65명을 베었습니다.
이때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도 와서 협공하여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한성부 판윤 이덕형이 치계하니
“신이 1월 21일에 개성부에 들어가서 살펴보니 목청전은 이미 철거되었으며,
교목은 모두 베어져 통곡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해는 거의 모두 타버렸으며 여염의 집도 남아 있는 것이 18∼19채였습니다.
신이 부교를 빨리 만들도록 독촉하느라고 땅거미가 질 때에 달려서 동파에 도착하니,
적이 파주의 이천원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의 파발아가 또 10여 급을 베자,
적이 모두 그들의 소굴을 태워버리고 경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이령·장응층 등이 날랜 기병 6000~7000을 거느리고 얕은 여울을 경유하여 건너가서
파주에다 진을 치고 장차 경성을 공격하려 하고 있으며
제독은 부교가 다 만들어지기를 기다려 즉시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몰아 전진하려 합니다.
헤아려보니 경성의 적이 대부분 강을 건너 내려가면서 값을 많이 주고 말을 사며
사로잡은 여인들을 놓아주어 되돌아가게 한다고 합니다.
전라 감사와 경기 감사에게 복명을 설치하여 차단하고 살륙하는 것과
한강의 부교 재료를 미리 준비하여 기다리도록 하는 일은 여러 차례 통문하였고,
식량은 지금 강화에서 배로 운반한 쌀로 겨우 지공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무렵 명군이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보급로가 길어져
군량,군수물자의 보급과 명군 부상병 처우의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평양성에서 부상을 입은 명군은 길가에서 이송되어가다가 굶주려 죽기 일쑤 였고
명군의 군량 보급 상황은 항상 조선 조정과 명군 수뇌부를 긴장시킬 정도로 위태로웠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여송도 불만을 품어 1월 13일에 조선조정에 패를 보내어 알리기를
``삼가 황명을 받들어 조선이이 왜적에게 함락당하여
군신이 파천하고 인민이 피난하는 것을 염려해서
특별히 대장에게 명하여 각진의 관병을 거느리고
멀리 바다와 산을 넘어 위태로움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12월 25일 강을 건넌 이후로 조선국의 수신(으뜸 가는 신하)인
유성룡과 윤두수 등은 등을 자세히 살펴보니
와신상담하여 왜적을 섬멸해 수치로 씻을 생각은 않고
사가에서 편히 지내며 마음대로 술을 마시고 스스로 즐긴다.
이것은 명나라 조정을 업신 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국왕을 속이는 것이니
심히 패란(정도를 거스르고 어지러움)하고
명교(마땅히 지켜야 할 바)를 모멸(업신여기며 얕잡아 봄)함이 심하다.
그리고 관병은 들에 주둔하여 한데서 잠을 자며 신명(목숨)을 버려
평양을 탈환할 수 있었으니,
그대들은 나라가 없는 데서 나라를 가졌으며 집안이 없는 데서 집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죄구(죄)와 과실로써 책망한다면 식량이 떨어지고 말먹이가 없는데도
앉아서 관망만 하며 군기(군 기강)를 소홀히 하여 그르쳤으니
황제에게 알린 뒤 군사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돌아가 그대들이 망하도록 내버려 두어
나라 있는 자가 다시 나라를 잃게 하고
집안을 가진 자가 집없는 슬픔을 당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본부(명나라 조정)는 충성과 정절을 타고나서 성심으로 군주를 위하기에
조그만 잘못을 개의치 않고 조정 기강의 대체(기본)를 견지하여 군사들을 평양에 주둔시켜
백성들을 편안하게 위무하고 계책을 짜내며 시기를 따라 진격하고 기미를 헤아려 승리하여
그대들의 가국(집안과 국가)을 안정시켜 일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된 뒤에
곧바로 칙지(황제의 명령)를 받아 복명(명령 보고)하려 한다.
그러니 조선국의 대소 신료들은 수신에게 전달하여 알려서
빨리 본부에 나와 진격하여 섬멸하는 기의(알맞은 시기)에 명을 따르고
식량과 말먹이를 헤아려서 처리하도록 하라.
만약 다시 태만하게 하면 탄핵하여 정법을 행하고 무거운 쪽으로 징계를 보일 것이며
결단코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무렵엔 명군의 위세 부리는 정도가 심해져서
호부 주사 애자신은 군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는다고 하여 2월 1일에
관량관 지중추부사 김응남, 호조참판 민여경, 의주 목사 황진에게 곤장을 쳤습니다.
도사 장삼외는 종군한 자신의 아들의 군공을 위해
윤근수에게 일본군 수급 3개를 요청하니
윤근수가 선조임금에게 알렸고
선조 임금은 장삼외에게 수급 3개를 지급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이여송이 여러 장수를 불러 경계하기를
``조선이 적에게 피폐당하였으니 그대들은 술과 밥을 요구하며 폐단을 일으키지 말라.
조선은 예의의 나라이며 명나라를 공경히 섬겨 백성들이 도시락과 음료수를 가지고서
천자의 군사를 환영하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기이한 계교를 내어 왜적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모여서 살도록 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그대들이 간혹 남의 부인을 범하는데도 조선의 통사(통역관)가 우리 법이 엄격함을 알고
또 명나라 조정의 장관을 위하여 감히 나를 대하여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대들은 그것을 경계하라.
그런 사실이 없다면 더욱 힘을 쓰고 그런 사실이 있다면 고치도록 하라.
나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하고
조승훈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즉시 술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고을의 수령에게 매질을 하였으니,
명나라 조정의 장관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라 하였고,
또 갈봉하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앞서 의주에 있을 적에
날마다 술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았는데 이것이 어찌 장관의 도리이겠는가.
이후로는 이와 같이 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조승훈과 갈봉하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갔습니다.
1월 16일, 선조 임금은 의주 사람들 중 군공에 빠진 사람을 조사하게 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공을 세운 사람 모두를 조사하라고 명했습니다.
1월 17일,선조 임금이 궐문에 나아가 대소의 부로를 모으고 전교를 반포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도승지 유근과 우부승지 심희수에게 고신과 면역첩·면천첩을 나누어 주도록 하니,
부로들이 소리내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임금이 또 도승지 유근으로 하여금 주민들에게 알리기를,
|
“만일 공로가 있는데도 은전을 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뒤따라 시행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1월 18일,조선 조정은 의주를 출발하였습니다.
출발하기에 이르러 선조 임금이 용만관에 거둥하여
궐패를 설치하고 다섯 번 절을 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상이 장차 여에 오르려 하면서 또 도사 장삼외의 수하 임세록과 중국 사람으로
좌우에 늘어선 자들에게 사례하고 여에 올라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의주의 백성들이 길을 가득히 메워 호곡하면서
다만 목사 황진과 판관 권탁을 20년간 유임시키어 본주를 소복시켜 주기를 원하니,
선조 임금은 여를 멈추고 위로하며 타일렀습니다.
이 날 행렬은 양책관에 머물렀습니다.
1월 19일,행렬은 양책을 출발하여 저녁에 임반에 머물렀습니다.
이날 왕세자가 영변을 출발하여 박천에 유숙하였다.
1월 20일, 행렬이 임반을 출발하여 운흥관에 머물렀으며
저녁에 정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날 왕세자가 영변에서 먼저 정주에 도착하여 행렬를 영접하며 안부를 여쭈었습니다.
정주에서 양사가 정주 백성들이 정주 군수가 명군 대접을 소홀히 했다는
탄원을 했다고하여 정주군수를 탄핵하니
선조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명하여
정주군수가 곤장 맞게 하였습니다.
이때 승병장 서산대사가 용사 1백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와서 대가를 맞이하니
이여송이 문첩을 보내어 칭찬하고 권장하였는데
그 중에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치는데 충성이 태양을 꿰니
흠앙하는 마음 금할 수 없다.’
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주었습니다. 공리를 도모하는 뜻이 없었고 無意圖功利 專心學道禪 今聞王事急 摠攝下山巓 이무렵 요동에 있던 경략 송응창이 평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서 지휘사 황응양을 보내어
면사첩(죽이지 않는다는 증명서)을 가지고 가서
서울 안의 일본군에게 붙었던 백성들을 불러내려 하는데,
안주에 이르러 왕을 뵙고 국왕의 교서를 청구하였습니다.
임금이 잠시 장막 뒤로 들어가서
이호민을 불러 교서를 작성하려고 하니
이호민이 구상할 겨를이 없이 즉시 초안을 작성하여 바쳤고
황응양이 이를 가지고 떠나갔습니다. |
1593년 1월 21일, 평안도의 고니시 잔군과 황해도의 구로다 군,
강원도의 모리 요시나리 군, 개성의 고바야카와 군이 한양에 집결 하니
이는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의 제 2번대를 제외한
한양 이북의 모든 일본군이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각군 지휘관들이 모여서 전략을 의논하니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한양에서 철수하는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우리 일본군은 지난 1년 동안 조선의 7할을 장악하였소!
그런데 지금와서 아군이 이렇게 힘없이 물러선다면 적은 우리를 비웃을 것이오.
또한 우리가 물러서면 적은 더욱더 용기를 얻어 앞과 뒤에서 칠 것이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소!''
라고 하며 역공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다른 일본군 부대는 한양안에 입성하였지만
고바야카와 부대는 한양 외각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명연합군을 서울 근교에서 요격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일본군 사령관들은 조명연합군에게 역공을 감행하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이무렵 조선군 경기 방어사 고언백, 부총병 사대수 임진강을 건너
한양을 정찰하고 있었습니다.
1월 25일에 이여송이 개성에 입성하였고
그 날 조명 연합군 지휘관들은 전략을 의논하였습니다.
명군 유격장 전세정과 명군 장수들은 속전속결을 주장하였고
도체찰사 유성룡과 조선군 장수들은 신중론을 주장하였는데
결론은 속전속결로 끝났습니다.
1593년 1월 24일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패한 분풀이와
한양 안에서 조선인들이 조명 연합군과의 내응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여
종루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한양 백성 수만명을 늘어 앉힌 다음,
긴 칼을 빼어들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차례로 베어나갔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모두 목을 늘여 칼을 받을 뿐
감히 도망하여 목숨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함께 앉은 사람에게 말하길
``아무래도 죽을 것인데 도망해 달아나면
살아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하니
곁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말리며 말하기를
``오활한(어리석은) 생각 하지마라. 반드시 큰일 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일어나 달아나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마치 즐거운 곳에 가는 것 처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날 일본군은 여염집과 관공서들을 거의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1593년 1월 27일, 일본군 정찰대가 일본군 사령부에 조명연합군의 출현을 보고 하였고
일본군은 조명연합군과 맞서 싸우러 출동하였습니다.
이때 일본군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선봉대: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제 6번대
다치바나 무네토라 제 1대 3000명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제 2대 8000명
고바야카와 히데케아네 제 3대 5000명
키카와 히로이에 제 4대 4000명
선봉대 총 20000명
본진: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일본군 총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제 3번대 제 5대 5000명
이시다 미쓰나리 제 6대 5000명
가토 미츠야스 제 7대 3000명
우키다 히데이에 제 8대 8000명
본진 총 21000명
조명연합군을 요격할 일본군은 총 41000명 이었습니다.
1593년 1월 25일, 명군 부총병 사대수는 조선군 장수 고언백과 함께
명군 기병 수백기를 인솔하여 선봉대로서 파주 인근의 벽제관 방면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때 조명 연합군 선봉대는 미륵원(혹은 여석령)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조우 하였습니다.
사대수의 선봉대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군 130여명을 참살하였습니다.
나머지 일본군은 도주하였고
사대수는 전령을 급히 보내어 전과를 이여송에게 알리게 하였습니다.
사대수의 전령이 파주에 주둔한 이여송에게 보고하니 이여송이 휘하 가정 수십명을 데리고
쏜살같이 출격하였고 곧 휘하의 대장들도 각각 가정 수십명씩을 데리고 출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뒤를 조선에 출정한 명군 중 가장 효용한 북방 기병 3000여명이 따라 갔습니다.
이여송이 급히 달리다가 헤음령에서 낙마하여 얼굴을 다치기도 했지만
부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본군이 있을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무렵 경기 순찰사 권징이 치계 하였습니다.
“제독의 대군이 이달 23일에 개성부에 도착하였고
파주에 주둔해 있던 적은 이달 23일 경성을 향하여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화·금성의 적은 17일부터 이틀간 잇따라 올라와 동대문 밖에 진을 치고
여인 15명을 사로잡아 갔다가 모두 포천현 앞길에다 버렸습니다.
성에 있는 적들도 나와서 동대문 밖과 남대문 밖의 사한리와 한강등처에다 진을 쳤고,
사대문밖에는 녹각을 많이 설치하고 경성의 젊은 사람들은 머리를 깎게 하고
노인들은 모두 죽였으며 짐바리를 잇따라 한강 건너편으로 내보낸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