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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삼국시대 남아있는 성씨(姓氏)에 대한 조사(펌)

작성자콘스탄티누스 콤네수스|작성시간08.09.10|조회수994 목록 댓글 3

디시인사이드의 고려후님이 쓴 글입니다 저도 성씨를 크게 믿지는 않지만 그냥 읽어 볼만 하다고 해서 퍼왔습니다

 

 

삼국시대 남아있는 성씨(姓氏)에 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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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가 인터넷과 여러 자료를 조사해서 쓴글이므로 신뢰도는 장담못합니다. 그 냥 이런 가문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좋겠습니다. 족보라 신뢰도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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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단군의 후손인 부루만 확인됩니다. 현재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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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晋州蘇氏)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 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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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청주한씨(淸州韓氏)

청주한씨의 시조는 한란이지만 청주한씨의 족보인 한씨세보에 의하면 한란은 기자의 후손이며 기자의 31세손 준왕이며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후 금마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습니다.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마한이 망하자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다고합니다.(마한계보 원왕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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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의 계보

태조 문성왕 기자(太祖文聖王箕子)가 40년

장혜황 송(莊惠王松)이 25년

경효왕 순(敬孝王詢)이 27년

공정왕 백(恭貞王伯)이 30년

문무왕 춘(文武王椿)이 28년

태원왕 찰(太原王札)이 44년

경창왕 장(景昌王莊)이 11년

흥평왕 착(興平王捉)이 14년

철위왕 조(哲威王調)가 18년

선혜왕 색(宣惠王索)이 59년

의양왕 사(誼襄王師)가 53년

문혜왕 염(文惠王炎)이 50년

성덕왕 월(盛德王越)이 15년

도회왕 직(悼懷王職)이 25년

문열왕 우(文烈王優)가 15년

창국왕 목(昌國王睦)이 13년

무성왕 평(武成王平)이 26년

정경왕……(이름이 지워졌습니다.)……(貞敬王)이 19년

낙성왕 회(樂成王懷)가 28년

효종왕 존(孝宗王存)이 17년

천로왕 효(天老王孝)가 24년

수도왕 양(修道王襄)이 19년

휘양왕 이(徽襄王邇)가 21년

봉일왕 삼(奉日王參)이 16년

덕창왕 근(德昌王僅)이 18년

수성왕 상(壽聖王翔)이 42년

영걸왕 여(英傑王藜)가 16년

일민왕 강(逸泯王崗)이 17년

제세왕 혼(濟世王混)이 22년

청국왕 벽(淸國王璧)이 35년

도국왕 징(導國王澄)이 19년

혁성왕 즐(赫聖王騭)이 28년

화라왕 습(和羅王謵)이 16년

열문왕 하(說文王賀)가 8년

경순왕 췌(慶順王萃)가 19년

가덕왕 후(佳德王詡)가 27년

삼로왕(三老王)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25년

현문왕 석(顯文王釋)이 39년

장평왕 윤(章平王潤)이 28년

종통왕 휼(宗統王恤)이 12년

애왕 준(哀王準)이 28년

출저 - 청장관전서 제55권 앙엽기 2(盎葉記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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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계보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四十一世則馬韓王位八世.

*1세 무강왕(혹은 애왕이다.) 휘는 준 도읍을 금마로 옮긴후 승하, 태조 문성대왕이 평양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후 41세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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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2세 강왕 이름은 “탁”이며 중국 혜황제2년무신에즉위,4년간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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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3세 안왕 이름은 “감” 혜황제 6년 임자년에 즉위 재위 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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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4세 혜왕 이름은 “식” 문제 후원 7년 갑신년에 즉위 재위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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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5세 명왕 이름은 “무” 경제13년 정유년에 즉위 재위 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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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6세 효왕 이름은 “형” 무제28년 무진년에 즉위 재위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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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7세 양왕 이름은 “섭” 선제 본시 1년 무신년에 즉위 재위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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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世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甲子(B.C 57年)新羅王朴赫居世立國慶州遂界辰韓二十二年 甲申(B.C 37年)高句麗東明王高朱蒙立國成川並二府 元稽之末有後孫三人一曰乎稱鮮于氏入黃龍國一曰諒稱韓氏一曰乎稱奇氏

*8세 원왕 이름은 “훈” 선제 신작 4년 계해년에 즉위 재위 26년

갑자년 신라왕 박혁거세가 경주에서 나라를 세움 진한 22년

갑신년 고구려 동명왕 고주몽이 나라를 세웠다. 후손중 3형제가 있었으니 첫째는 황룡국에 들어가 선우씨가 되었고 둘째는 한씨 셋째는 기씨가 되었다.

註))三年 春三月 黃龍見於嶺

-삼국사기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嶺)에 나타났다.

*여기서 기훈의 아들 우경이 황룡국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동명왕 3년 황룡이 골령에서 나타났다를 학자들이 황룡국이 골령에 세워졌다라고 해석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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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己丑(B.C 32年)立 鴻嘉四年甲辰(B.C 17年)爲百濟溫祚所奪在位十六年人只保圓山錦峴城 新莽己巳(A.D 9年)以二城降于百濟馬韓不祀 自康王戊申至稽王己巳爲二百二年

*9세 계왕 이름은 “정” 성제 원년 기축에 즉위 홍가4년 갑진년

백제 온조가 나라를 침략해 점령하였다. 계왕 재위 16년때 일이었다.다만 금현성을 지킬뿐이었다. ??? 9년 항복했다.백제가 마한을 불사름

강왕부터 계왕까지 202년의 다스림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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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

선우씨는 청주한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입니다. 원왕의 삼형제중 선우량이 용강 오석사에 황룡국을 세웠습니다. 선우량의 10세손 선우병때에 고구려에게 멸망당하고 서민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고려 문종때 중서주서를 지낸 선우정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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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씨(信川康氏)

시조 강후(康候)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의 둘째 아들로서 기원전 198년에 평양에 들어와 왕실을 교화한 공으로 기자(고조선시대 기자조선의 시조)로부터 강씨 성을 받았다. 고려 명종때 80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이 신천에 살다가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 신성은 신천의 옛 이름)에 봉해지고 후손이 본관을 신천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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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경씨(泰仁景氏)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같이 왔다는 경여송(景汝松)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그를 원조(遠祖)로 하고있다.

고려에 이르러 후손인 경차(景磋)가 조정에 공을 세워 태산군에 봉해졌으므로 경차(景磋)를 시조로 하고 역시 그 후계를 알 수 없어 후손 경상조(景祥祖), 경상록(景祥祿) 형제가 본관을 태인경씨와 해주경씨로 나누어서 대를 이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태인으로 일원화하여 태인파, 해주파로 일컫고 있다.

토산궁씨(兎山弓氏)

시조 궁흠(弓欽)은 중국 태원 사람으로서 은나라 말에 기자가 우리나라에 올때 태사로 수행해와서 도의교육에 힘써 토산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후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후손인 궁계신(弓繼信)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토산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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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금씨(奉化琴氏)

시조 금용식(琴容式)은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사(太師)를 지냈다. 그러나 금응으로부터 금용식까지의 세계를 고증할 수 없고, 또 금용식으로부터 6세 내지 8세의 세계가 실전되어 금의(琴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졌고 관직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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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기씨(幸州奇氏)

시조 기우성(奇友誠)은 기자의 49세손으로 백제 온조왕때 시중으로 입사했다 한다.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애왕(41대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금마(현재의 익산)군에 마한을 세웠으며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으며 기우성의 후손들이 본관을 행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대의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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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씨(開城王氏)

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지금의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이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후 수극의 57세손 왕염의 13세손 왕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왕몽은 신라 건국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왕몽이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수도하면서 전, 신, 차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고 차무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한다. 차무일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 왕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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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채씨(光州蔡氏)

시조 채순희(蔡順禧)는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일부에 알려지기로는 그의 선조는 중국 고신(高辛)씨의 아들 계(契)의 후손으로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그밖의 사항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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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평해구씨(平海丘氏)

시조 구대림(丘大林)은 원래 당나라 사람으로 663년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 하다가 평해(울진) 월송정(越松亭) 근처에 도착해 살았으며, 구대림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고구려때 벼슬이 좌복야상서에 이르렀다. 그후의 내력은 알 수 없다가 고려 공민왕때 민부전서를 지낸 구선혁(丘宣赫)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평해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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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晋州姜氏)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것을 논의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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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형씨(晋州邢氏)

시조 형옹(邢顒)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17년에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한 8학사 중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나라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삼중대광을 지냈으며 남양의 관적을 하사 받았다. 그후 그의 16세손 형공미(邢公美)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내고, 1280년(충렬왕 6년) 도원수가 되어 일본 일기도에서 왜군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 졌으므로, 후손들은 그의 할아버지 형방(邢昉)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진주(반성)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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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南陽洪氏)

시조 홍천하는 고구려 27대 왕인 영유왕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과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27대왕인 선덕여왕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세워 당성(남양)백에 봉해졌고 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고있다.

그리고 고려 개국공신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을 중시조로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유(儒)이었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가 '은(殷)나라 부열(傅說 : 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며 이름을 은열로 하사 했다고 한다.

회인 홍씨도 후에 합본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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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옥씨(宜寧玉氏)

시조 옥진서(玉眞瑞)는 고구려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파견된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 국학의 교수가 되어 의춘(의령)군에 봉해지고 의령에 살면서 우리나라 옥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이 없어 고려 때 창정을 지낸 옥은종을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의령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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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온씨(鳳城溫氏)

본관(本貫)은 서원(西原)·온양(溫陽)·전주(全州)·이성(伊城)·나주(羅州)·평호(平皐)·금구(金溝)·거야(巨野)·경주(慶州)·진주(晋州) 등 11본(本)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동일혈족(同一血族)이므로 봉성(鳳城)으로 단일화(單一化)하고 있다. 봉성 온씨(鳳城溫氏)는 멀리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고구려(高句麗) 때 평강공주(平岡公主)와 혼인하여 평원왕(平原王)의 부마(駙馬)가 된 온달(溫達)로부터 온씨의 혈통(血統)이 시작되어, 신라 진덕왕(眞德王) 때 온군해(溫君解), 고려충목왕(忠穆王)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지낸 온

수(溫 粹)로 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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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이씨(益山李氏)

시조 이문진(李文眞)은 고구려 영양왕 때 대학박사(大學博士), 문부전서(文部典書), 오경박사(五經博士)로 공신후가 되고 백제의 공주와 결혼하여 백제로부터 익주(益州. 익산의 옛 이름)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그후 후손에 대한 기록을 밝힐 수 없어 후손인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위(太尉)를 지낸 이의(李誼)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익산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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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大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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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이씨 족보에 있는 문진사적

始祖大學五經博士公 諱文眞事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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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平原王十九年丁酉六月丁丑日乙巳時生容貌龍鍾可笑一日一老人來見曰貴公子早貴之狀因忽不見七歲能通詩書?陽王元年庚戌文科公年十四身長九尺餘其勢望天封侍郞功臣侯冬十月如官文部典書大學五經博士國人曰李文眞乙支文德兩人守國堯之日月舜之乾坤年十五娶于百濟公主年六十八入唐天子聞高名問答詩書天才天神詩中文章東國孔子封太子師兼吏部尙書數年後歸國(出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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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王十一年庚申大學博士李文眞編纂國初以來史記名曰留記記事百卷新集五卷及天文地理算曆法遁甲等諸書成篇出國史(文化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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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義慈王自大梁州勝戰後驕敖日甚一日會?臣議曰朕治國數年國勢大振將率大軍廣闢土地先攻新羅卿等何如佐平成忠奏曰今新羅以金春秋爲相金庾信爲將國雖小未可輕伐也王大怒成忠默然良久又奏曰此結高句麗靺鞨南和日本攻伐新羅可也王曰誰可使之成忠曰高句麗臣李文眞天丁辯士兼有方術王大喜郞具禮幣定三國使說列國王雄論過於儀秦列國王許之王以公爲謀士以文德爲將攻拔新羅北境三十二城唐項城羅唐交通之路先絶此處以塞請兵之計王封公爲文神侯封文德爲弘文侯其後公和親三國(出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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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진의 출생년도도 그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문과가 나오는거 보면 후대에 만들어진걸로 판단된다. 여기서 특기 사항은 백제공주와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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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염씨(坡住廉氏)

후당으로 귀화한 성씨로 신라에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조여적의 청학집에는 염씨가 대방국(고구려)에서 나왔다고 기록하였고 조여적은 청학상인(靑鶴上人)이란 사람이

녹두처사가 쓴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고 하는 얘기를

적은 것이라 한다. 대방국은 황해도일부와 경기도 서북부 장단(長湍) 풍덕(豊德) 지역에 위치하였고, 고구려에 멸망하면서 유민들은 신라 등으로 투항한 것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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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고씨

자칭 고구려후손 근데 족보를 보면 제주고씨에서 갈라져나왔다는걸 알수있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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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고씨 (遼陽高氏)

중국에 살고있으며 장수왕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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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실씨(大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에 비류부장(沸流部長) 추발소(鄒勃素)에게 성(姓) 대실씨(大室氏)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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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松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비(瑠璃王妃)는 다물후(多勿侯) 송 양(松讓)의 딸이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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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씨(克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朱蒙)이 마의 재사(麻衣再思)에게 성(姓) 극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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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실씨(仲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납의 무골(衲衣武骨)에게 성 중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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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씨(少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조의 묵거(藻衣黙居)에게 성(姓) 소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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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씨(絡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대신무왕(大神武王) 5년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항복하자 봉하여 왕(王)을 삼아 연부(椽部)에 두고, 그의 등에 낙(絡)자가 있으므로 성을 낙씨(絡氏)라 내려주었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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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씨(禮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시조(始祖)가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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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돈씨(木川頓氏) , 을지씨(乙支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때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있었다." 하였다.

돈씨가보(頓氏家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조의 명성(名姓)인 을씨(乙氏)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때부터 을지씨(乙支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亂)에 의병장(義兵將)으로 서경(西京)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이 돈산백(頓山伯)에 봉해지고 돈뫼(頓山)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서 누대를 세거(世居)해 오면서 성(姓)을 돈씨(頓氏)로 개성하였다 고 하며, 임진왜란 때의 조방장(助防將)인 돈정신(頓貞臣)은 을지수(乙支遂)의 17대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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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禾氏)와 치씨(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瑠璃王)에 두 여희(女姬)가 있었는데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였다." 하였다.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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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씨(北氏)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북(北)은 고려(高麗)의 성(姓)이다." 하였고, 《정자통(正字通)》에 또한 인용되었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萬姓統譜。北高麗姓也。正字通。亦引之。○中國人。以高勾麗。爲高麗。

-확인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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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씨(似先氏)

만성통보에 "사선씨는 본래 고려의 유종(遺種)인데 당(唐) 나라 무덕(武德) 중엽에 사선 영문(似先英問)으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삼았다." 하였다.

萬姓統譜。似先氏。本高麗遺種。唐武德中。似先英問。爲右驍衛大將軍。

-확인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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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일본 고구려계성씨(신찬성씨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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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朝臣(こまのあそみ)。

高句麗王、好台(こうたい)の七世孫、延典王(えんてんわ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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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原連(とよはらのむらじ)。

高麗国の人、上部王虫麻呂(しょうほうわうのむしまろ)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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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当連(ふたぎのむらじ)。

高麗国の人、前部能婁(ぜんほうのうる)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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御笠連(みかさのむらじ)。

高麗国の人、従五位下高庄子(かうしやうし)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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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水連(いづみのむらじ)。

高麗国の人、後部能鼓兄(こうほうのうこけい)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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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城連(にひきのむらじ)。

高麗国の人、高福裕(かうふくゆ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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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ユカ連(をゆかのむらじ)。

高麗国の人、高道士(かうだうし)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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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史(かうのふひと)。

高麗国元羅郡の杵王(しよわう)の九世孫、延ダ王(えんだわ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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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置造(へきのみやつこ)。

高麗国の人、伊利須意弥(いりすおみ)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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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当造(ふたぎのみやつこ)。

高麗国の人、前部志発(ぜんほうしはつ)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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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内民首(かふちのみたみのおびと)。

高麗国の人、安劉王(あんりうわ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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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部薬使主(こうほうのくすしのおみ)。

高麗国の人、大兄憶徳(だいくゐやうおくとく)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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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わう)。

高麗国の人、従五位下王仲文(わうちゆうぶん)[法名は東楼]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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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かう)。

高麗国の人、高助斤(かうじよきん)の後な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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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かう)。

高麗国の人、従五位下高金蔵(かうきんざう)[法名は信成]の後な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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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여서씨(扶餘徐氏)

부여(扶餘)는 충청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소부리(일명 사비)인데 경덕왕때 부여현으로 개칭, 1914년 부여군이 되었다. 부여서씨(扶餘徐氏)는 백제 의자왕의 셋째아들 태자 융(隆)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조선씨족통보]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서수손(徐秀孫)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부여융(扶餘隆)으로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의 태자이며, 원래 백제왕의 성씨인 부여(扶餘)씨였으나,

[부여서씨세보]에 의하면 660년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게 계백의 황산벌혈전을 마지막으로 패하고, 의자왕은 태자 등 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 무장 소정방에게 압송되어 그곳에서 죽으니, 당제(唐帝)는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의 품계를 내리고 의자왕의 아들 융(隆)에게는 당고종(唐高宗)이 서씨(徐氏)의 성을 하사하고 능진도총에 임명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여서씨의 문호가 열리게 되었으나 그 후대는 실전되어 알 수 없으며. 고려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진 그의 후손 존(存)이 중시조, 또는 1세조로 받들어지며, 그리고 수손(秀孫)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후손들이 원래 성씨인 부여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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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군 가야곡면 육곡리 덕은골에서 전해지는 부여서씨에 관한 전설이다.

백제말기에 의자왕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었다. 드디어 나당 연합군은 백제에 쳐들어 오기 시작했다. 계백장군은 이제 백제의 운명도 끝이라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최후의 결전이 눈앞에 닥쳐 있다는 것을 알고 진영을 나와 처자식을 죽이고 황산벌에서 최후의 격전에 임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한 고을을 맡아 지키던 한 서씨 집안이 있었다. 이미 나라의 국운은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백제가 패망한 후 살아갈 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곳 덕은 고을에 와서 보니 사람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가족들에게 백제가 멸망하면 덕은고을에 가서 자리잡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 후 백제의 계백장군은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5만 군대와 싸워 처음에는 승기하였지만 결국 신라군에게 패하여 계백장군도 장렬하게 전사하게되자 백제는 비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이리하여 부여 서씨들은 백제가 망하자, 여기에 은거하여 살게 되어 지금까지 이곳에 서씨들이 많이 살게 된 동기라 한다.

-「놀뫼의 전설」, 논산문화원, 1988. 8. 20 「놀뫼의 전설」, 논산문화원, 1988.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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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단씨(江陵段氏)

시조 단간목(段干木)은 모양부(牟梁部, 지금의 경주)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분이다. 단간목(段干木)의 아들 단홍인(段弘仁)이 고려 충숙왕 때 무과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는 기록뿐, 3세와 4세는 알려진 바 없고 5세 단유인(段由仁)이 조선 성종 때 맹산현감(孟山縣監)을 지냄으로써 그를 중조로 삼았다고 한다.

백제(百濟)시대로 올라가면 15대 무녕왕(武寧王) 때 단양재(段楊再)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일본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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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단씨(延安段氏)

시조 단유인(段由仁)은 조선시대에 현감을 지냈다. 윗대는 고사(古史)에 나타나는 백제 때 유학자 단양이(段楊爾, 오경박사)가 있을 뿐 그외에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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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도씨(星州都氏)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政丞) 도미(都彌)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도미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도미는 본래 백제 사람인데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정결하기로 소문났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미의 두 눈을 도려낸 다음 배를 태워 멀리 추방해 버렸다. 그후 도미는 고구려 땅에 가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다가 그를 쫓아온 아내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고려 창업에 공훈을 세웠던 도진(都陳)이 정승(政丞)의 벼슬에 올라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성주에 살아오면서 후손들이 성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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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마씨, 장흥마씨(木川馬氏) , (長興馬氏)

백제 건국의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보(左輔)의 벼슬을 역임한 마려(馬黎)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문헌이 전하지 않아 윗대의 계보를 고증할 수 없으므로 마육침(馬陸沈)을 1세조로 하고 있다. 마육침은 서기 660년(백제 의자 왕 20, 신라 무열왕 7)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신라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자 군사를 일으켜 옛 목지국(目支國)의 성거산(聖居山, 충남 직산)을 근거지로 백제 부흥전(復興戰)을 도모했던 장군이다.

그후 고려 문종 때의 마점중(馬占中, 마육침의 10세손)의 맏 아들 마현(馬鉉)이 목천마씨로 둘째 마혁인(馬爀仁) 장흥마씨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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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마씨 세덕비명(長興馬氏 世德碑銘)을 보면

시조는 은양성인(殷陽城人) 마완(馬浣)이며 아들 장(莊)이 고조선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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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상씨(木川尙氏)

시조 상국진(尙國珍)은 원래 백제의 유민으로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자 백제의 재건을 위해 목천 상왕산(확성산) 아래에 숨어지내며 여러차례에 걸쳐 항쟁을 하자 화가난 태조 왕건이 동물성씨인 상(象)을 주었다. 그후 그의 아들 득유가 1059년(문종14년) 최충이 설치한 시빙제의 학사가 되자 원래의 성인 상(尙)을 회복했다. 후손들이 시조의 근거지인 목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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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이씨(潭陽李氏)

시조 이덕명(李德明)의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백제 때 신평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 신평이씨)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고증할 수 없다.

시조 이덕명은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인종 때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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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전씨(天安全氏) , 정선전씨(旌善全氏)

시조 전섭은 백제 개국공신이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烏干), 을음(乙音)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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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조씨(稷山趙氏)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에 의하면 시조 조성(趙成)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11대 황제때 주몽(朱蒙)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百濟)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遷都)하여 마한(馬韓)을 멸망시킨 후 백제창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훈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白)에 이봉(移封)되었다고 하며, 그의 아들 조준연(趙俊連)과 손자 조입충(趙立沖)이 함께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을 역임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시조의 손자 조입충(趙立沖)으로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계보가 전해지지 않아 후손들은 고려 말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합문지후사(閤門祗侯使)에 올랐던 조원우(趙元祐)와 병부 낭중(兵部郞中) 조원경(趙元慶),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조복원(趙復元), 태자 첨사(太子詹事) 조영원(趙永元),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한 조응원(趙應元) 등 다섯 계통으로 갈라져서 각각 중시조로 받들고 대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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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백씨(水原白氏)

시조 백우경(白宇經 - 시호는 문경)은 중국 소주 사람으로 황제 헌원의 16세손인 을병의 후손이다.

그는 780년(신라 선덕왕1년) 우리나라에 와서 계림의 자옥산 아래에 정착하여 살면서 신라때에 좌복사공대사도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경명왕(신라 54대)때에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을 중시조로 하며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수원백씨중 일부사람들은 자신들이 백제 백씨의 후손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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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沙氏)

사오(沙烏), 사약사(沙若思), 사법명(沙法名)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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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씨(解氏)

해충(解忠), 해수(解須), 해루(解婁), 해수(解須)

-현재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 흔적을 찾을수 있다.

약대동에 있는 안동네 뒷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골동산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언뜻 들으면 무덤이 많은 동산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해골’이라는 고대어를 풀어보면 ‘해씨가 모여사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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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진씨(西山眞氏)

진로(眞老), 진남(眞男), 진무(眞武), 진의(眞義), 진정(眞淨),

조선씨족통보에 진씨는 백제 8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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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씨(木氏)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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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씨(國氏)

금성, 대명, 영양, 풍천, 전주, 현풍 국씨가 있다. 하지만 백제 국씨와의 연관성을 찾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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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씨(燕氏)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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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묘씨(星山苗氏)

백제계인지 정확하지 않다.

*굿

신이로다 왕아 신은 가명이로구나

동네들어 동네가망 방네들어 방네가망

왕아 신은 가명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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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조선은 전라좌도(左道)요 관은 선관이요

군으로는 화순군이요 면으로 능주 도암면이요

앉으시던 좌우칠성 거안(居安) 명당은 모(某)부작(락)이요

가문은 모씨 나래찬 가문이요

원같고 나래같고 한림 당신 안에

가급수령같은 묘부락 명당이요

  <o:p></o:p>

가문은 묘씨 나래찬 가문이요 묘씨는 정중이요

다른 정성 아니옵고 다른 축원 아니오라

묘씨 귀남 자손 수가 사나와 그러는가

액이 불길해서 그러는가

신의 운수가 사나와서 그러는가

  <o:p></o:p>

  <o:p></o:p>

협씨(協氏)

-현재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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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일본 백제계성씨(신찬성씨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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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王(くだらのこきし)。

百済国の義慈王(ぎじわう)より出づ。

  <o:p></o:p>

菅野朝臣(すがののあそみ)。

百済国の都募王(とぼわう)の十世孫、貴首王(きすわう)より出づ。

  <o:p></o:p>

葛井宿禰(ふぢゐのすくね)。

菅野朝臣と同じき祖。塩君(しほのきみ)の男(こ)、味散君(みさのきみ)の後なり。

  <o:p></o:p>

宮原宿禰(みやはらのすくね)。

菅野朝臣と同じき祖。塩君の男、智仁君(ちにのきみ)の後なり。

  <o:p></o:p>

津宿禰(つのすくね)。

菅野朝臣と同じき祖。塩君の男、麻侶君(まろのきみ)の後なり。

  <o:p></o:p>

中科宿禰(なかしなのすくね)。

菅野朝臣と同じき祖。塩君の孫、宇志(うし)の後なり。

  <o:p></o:p>

船連(ふねのむらじ)。

菅野朝臣と同じき祖。大阿郎王(たあらわう)の三世孫、智仁君(ちにのきみ)の後なり。

  <o:p></o:p>

三善宿禰(みよしのすくね)。

百済国の速古大王(そくこたいわう)より出づ。

  <o:p></o:p>

鴈高宿禰(かりたかのすくね)。

百済国の貴首王より出づ。

  <o:p></o:p>

安勅連(あちきのむらじ)。

百済国の魯王(ろわう)より出づ。

  <o:p></o:p>

城篠連(きしのむらじ)。

百済国の人、達率支母末恵遠(だちそちきもまつゑゑん)より出づ。

  <o:p></o:p>

市往公(いちゆきのきみ)。

百済国の明王(めいわう)より出づ。

  <o:p></o:p>

岡連(をかのむらじ)。

市往公と同じき祖。目図王(もくとわう)の男、安貴(あんき)の後なり。

  <o:p></o:p>

百済公(くだらのきみ)。

鬼神感和(きしんかんわ)の義によりて、氏を命じて鬼室と謂へり。廃帝の天平宝字三年に、改めて百済公の姓を賜ひ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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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伎(くだらのてひと)。

百済国の都慕王の孫、徳佐王(とくさわ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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広津連(ひろきつのむらじ)。

百済国の近貴首王(きんきすわう)より出づ。

  <o:p></o:p>

清道連(きよみちのむらじ)。

百済国の人、恩率納比旦止(おんそちなふひたんと)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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広海連(ひろうみのむらじ)。

韓王信(かんわうしん)の後、須敬(すきや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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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破連(ふはのむらじ)。

百済国の都慕王の後、毘有王(ひいうわ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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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田連(あさたのむらじ)。

百済国の朝鮮王淮(てうせんわうじゆん)より出づ。

  <o:p></o:p>

広田連(ひろたのむらじ)。

百済国の人、辛臣君(しんしんくん)の後な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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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野連(はるののむらじ)。

百済の速古王(そくこわう)の孫、比流王(ひるわう)より出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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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氏(めんし)。

春野連と同じき祖。比留王の後な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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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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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08.09.11 마지막에 무가는 성주풀이 같군요...?
  • 작성자가스가겐고로 | 작성시간 08.09.12 실전되지 않고 고증할수 있으면 좋을텐데...ㅠㅜ;
  • 작성자초록마르스 | 작성시간 08.09.20 저기 나와있는 남양홍씨는 당홍계네요. 두개의 서로 다른 가문이 하나의 같은 본관을 쓰는게 남양홍씨입니다. 남양홍씨는 토홍계와 저기 나와있는 당홍계 두개의 가문이 같은 성을 쓰는 특이한 가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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