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황제 주유검은 망국지군같지 않은 망국지군이고, 10여년을 조정과 나라를 위해서 분투했던 사람이다. 그는 단점과 장점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숭정제의 조정업무에 대한 근면성과 생활에 있어서의 검소함은 중국역사상 어느 황제에게도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의 한 단면을 보면, “그는 재위 17년간 근면하게 정사를 처리했고, 닭이 울 때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종종 너무 일을 많이 하여 병이 나기도 했다. 근검절약하였으며 스스로 규율있게 행동했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궁전내에 연회나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역사서의 송정제의 이런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기록이 있지만, 그 중의 3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숭정제는 궁중에 보관해오던 요녕산삼을 시장에 내다팔아서 수만냥의 은자로 바꿔서 국고에 보탰다. 둘째, 어느날 강관이 숭정제에게 강연을 하는데, 내의의 소매가 닳아서 찢어져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다. 황제는 이를 감추기 위하여 계속 옷안으로 밀어넣었다. 셋째, 숭정15년 7월 9일, 몸이 좋지 않아서 아침 조회를 조금 늦게 하겠다고 통보했다. 내각보신이 이를 비판하자, 숭정제는 한편 감격하고 한편 부끄러워 하면서 친히 붓을 들어서 보신을 칭찬하고 스스로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반성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성격상 단점도 명확하며 강렬했다. 자기주장이 강하며, 체면이 조금이라도 깎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성격이 조급하고 의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숭정제의 재위기간동안 내각보신은 주마등처럼 갈아치워서 50명에 이르렀다. 병부상서는 14명이나 바뀌어서 안정적인 내각을 운영하기 어려웠다. 죽인대신도 많아서 총독이 7명, 순무가 11명이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은 숭정제의 자존심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어도 체면만은 잃지 않으려 했다. 이런 그의 성격은 4가지로 나타나는데, 남천, 후금과의 화의, 원숭환 살해사건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3가지의 재앙은 명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가며 그의 죽음도 가져온다.
첫째, 南遷
숭정17년 3월 14일, 이자성의 대순군대가 북경을 향해서 밀려오고, 거용관을 지키던 명나라 총병 당통이 투항했다. 이자성의 농민군은 직접 북경성을 포위하는 형국이 되었다. 숭정제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고 南遷(남의로의 피난)을 모색한다. 원래 남천과 같은 일은 황제본인의 생명에 관계되므로 황제가 스스로 결정하면 그만이고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으나, 숭정제는 죽어도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남천은 바로 도망치는 것이었고, 조종의 종묘사직을 돌보지 않는 것이 되어 후세의 비웃음을 살 것을 겁냈다. 그의 본 뜻은 신하들이 남천을 간청하면 두세번 사양하다가 최종적으로 마지못해 승인하면서 체면을 살리면서 북경을 떠나는 것이었으나, 이런 뜻을 직접 신하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신하들은 눈치없이 적지 않은 자들이 남천을 반대했다. 황제는 북경을 지키고 태자로 하여금 남경에서 監國을 하도록 주장했다.
3월 17일 아침, 북경은 이미 이자성의 맹공에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황제는 문무백관회의를 소집했는데, 신하들은 서로 바라보면 눈물을 흘릴 뿐, 속수무책이었다. 눈물만 흘리고 있는 신하들을 보면서 탁자위에 “문신들은 하나하나 다 죽일 놈들 뿐이다.”라고 써서 사례태감에세 보여준 뒤, 지워버렸다. 이로써 명나라 말기의 명나라, 대순군, 후슴세력의 3각 구도가 무너져 버리게 된다. 만약 명나라가 강남으로 파천했다면 적어도 이런 구도는 유지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숭정제가 스스로 죽고, 태자도 죽으며 역량이 분산되고 내부 갈등이 표출되면서 남명왕조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둘째, 후금과의 和議
남송당시의 악비와 진회사이의 사건으로 인하여 이후의 왕조에서 북방오랑캐와의 화의는 곧 매국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숭정 14년 말에 홍승주가 송산을 겨우 지키고, 송산과 금주의 상황이 나날이 악화되었다. 숭정제는 병부상서 陣新甲의 건의를 받아 후금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몰래 화의를 논의한다. 그러나 이일이 어쩌다가 새어버렸고, 신하들의 격론이 분분했다. 체면을 생명보다 중희 여기는 숭정제는 자기의 결백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진신갑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웠고, 결국 그를 죽여버린다. 원래 청태종과 맺었던 우호정전협정은 이로 인하여 무산된다. 결국 명나라는 내후외환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 두개의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
셋째, 袁崇煥寃案
숭정제가 왜 원숭환을 죽였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어떤 이들은 원숭환의 과실과 잘못을 드러내려 하지만 그래도 논리적인 설득이 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간혹 숭정제의 심리문제도 거론되기도 한다. 이것은 숭정제의 체면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원래 원숭환은 5년 내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큰 소리쳤으나, 이루지 못한 바가 있었고, 모문룡을 임의로 죽여버린 적도 있었으며, 동림당과 가까운 사이였고, 후금과 화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문제는 모문룡과 같은 장수를 죽이면서 숭정제의 사전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은 숭정제의 체면을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물론 숭정제의 묵인하이기는 하나, 후금과의 화의를 진행하였는데, 청태종이 북경을 포위했다가 물러나면서 이 일을 공개해 버리자, 숭정제가 주도한 화의가 되어버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숭정제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원숭환을 죽이는 쪽으로 결말을 내린 것 같다.
그러나 원숭환의 죽음은 변방의 명나라 군대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충성스러운 신하도 죽여버리는데 명나라에 왜 충성하여야만 하는가? 결국 많은 유능한 자들이 청에 망명하고 만다.
숭정제도 마지막으로 자살하기 전에 오삼계가 산해관에서 15일이 지나도록 북경에 오지 않은 것을 보면서 왕년에 원숭환이 영원에서 이틀만에 3백여리를 달려와 청태종의 포위를 풀어준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