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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중국사]명나라 멸망후 황족들의 행방

작성자Daum Bark|작성시간09.02.04|조회수873 목록 댓글 1

명나라의 황족 즉 朱氏집안의 많은 사람들은 상당수가 첫 번째 난리중에 농민군(이자성, 장헌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일부는 청나라에 항거하다 순국하였다. 이 2가지 유형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또다시 간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명청교체기에 일부 황족구성원들의 예를 들어, 황태자 주자랑, 주삼태자 주자형, 넷째아들 영왕 주자소, 진왕 주존추, 진왕 주구계등은 먼저 이자성의 농민군에 포로로 잡혀 북경에 있었다. 청나라가 북경을 함락한 후에 이 황족포로들은 난리통에 실종되었고, 생사를 알 수 없으며,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민간전설에 의하면 주삼태자, 즉 定王 朱慈炯은 전란중에 실종되었다. 英王 朱慈炤는 오랫동안 본명을 감추고 사숙의 교사로 생활하였는데, 강희 47년(1708년)에야 비로서 산동 문산현에서 청나라 조정에 체포되었고, 전가족이 몰살당했다. 그리고 청나라 조정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하여 영왕 주자소를 억지로 정왕 주자형, 즉 전설상의 주삼태자라고 주장한다.


청나라의 박해를 피해서 일부 황족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성명을 감추고 산림에 숨거나 유랑생활을 하는 등의 힘든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종실출신인 八大山人은 명나라가 망한 후, 스스로 주씨 성을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명나라가 망한 날을 몰래 자기가 그린 그림 속에 남겨두어 자신이 대명제국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표시하였다.


주씨 번왕의 가지인 안창군왕 주숙차는 안창이 함락된 후, 절동으로 도망쳤다. 주산에서 패배한 후에 전사했다. 안창군왕의 큰 아들인 주모는 나이가 어려서 모친이 안고 도망쳤는데, 나중에 항주 항정사로 가서 활당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후일에 송강일대의 황폐한 암자에 머물며 생활하였다. 모친은 죽을 때 왕의 인감을 아들에게 주었는데, 암자에 있던 다른 사람이 이를 누설하여 관청에 잡혀서 죽임을 장하였고, 암자내의 다른 승려들 수백명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청패류초. 성명류>를 보면 명나라가 망한 후, “황족들은 전전 유랑하여 성을 고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다. <죄유록. 초소왕정전>의 기록에 따르면 초왕의 가지인 기양왕 주모는 명나라 말에 초왕부가 함락된 후, 복건으로 도망쳤고, 그는 엄위라고 부르는 서생과 함께 성을 바꾸고 요족 중에 들어가서 스스로의 몸을 보존하였다. 현재의 요족 중에 명나라 황족의 혈통이 남아있다. 


<죄유록>에는 또한 어떤 종실출신의 사람은 명나라가 망한 후에 절망하여 출가했는데, 처음에는 태자암에서 승려로 있다가 나중에 계등사에서 주지를 하였다. 법호는 개납이고, 시서화에 능하여 유명하였으나, 한번도 과거의 일을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어떤 명나라 종실구성원들은 핍박끝에 청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이로써 만주족의 통치하에 들어가서 대가 끊어지는 것은 피했다. 일찍이 璐王 주상방은 청나라 군대에 항복했으나, 그 후예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가장 마지막으로 청나라에 투항한 사람들은 대만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이었다. 그 때 정성공 부자가 대만을 수복한 후에 종실을 우대하였다. 그래서 1661~1663년 사이에 많은 주씨 종실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 종실의 황자왕손들은 정씨 부자에게 대우를 받았고, 대만에서 수십년을 살았다. 그러나 강희 22년(1683년)에 청나라의 시랑이 대만을 함락시키고 정씨 정권이 청나라에 투항하자, 여기로 도망쳤던 명나라 종실들은 대부분 포로로 잡혀서 투항하여 만주족의 통치를 받았다. 당시 시랑이 대만에 도착했을 때, 바로 이 황족종실의 보첩과 인신을 몰수하였다. 청왕조는 이로써 통일을 완수하였고 너그러움과 인자함을 보이고자 이 명나라 종실의 유민들을 죽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내륙으로 옮겨서 하남, 산동등의 여러 군현에 안치시켰다. 이 일부 종실의 후예들인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후손이 전하여 질 수 있었다.


대만이 함락될 때, 영정왕 주목계는 망국노가 될 수 없다고 하여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는 아들이 없어서 그보다 한 배분이 낮은 익왕 주이호의 아들로 후사를 이었으며, 주엄진이라고 하였는데, 그 때 7세였다. 사료에 의하면 이 주엄진은 내륙으로 강제로 이사한 후에, 1693년 청왕조에 의하여 하남 개봉부 기현에 안치되어 지금도 후손이 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영왕부의 또 다른 종실후예들은 명나라가 망한 후에 여전히 강서에 남아 있었고,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하며, 강서 주씨의 주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청말 민국시기에 <강서팔지주씨종보>를 만들었는데 이게 강서성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다른 호북 개양일대에도 지금까지 명나라 종실후예들이 남아 있다.


강희 7년(1668년)에 강희제는 성지를 내린다.

“명나라 종실의 자손이 많은데, 산속에 숨은 자는 논밭으로 돌아오도록 하고, 성을 바꾸고 이름을 버린 자는 성씨를 원래대로 회복하도록 하라.”

강희 23년(1684년), 38년(1699년)에 강희제의 남순 때에는 두 번에 걸쳐 남경에 가서 명나라 개국황제인 주원장의 효릉에 제사를 지냈고, 명나라 후예를 찾아서 주씨의 제사를 지내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찾을 방법이 없어 결과는 없었다. 다시 옹정 2년(1724년)에 옹정제는 정식으로 명나라 종실의 후예인 주지련을 찾아서 1등후로 봉하고 정백기에 넣어서 세습시켰으며, 명효릉의 봄가을 제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로써 명나라 황족의 한 갈래는 완전히 만주족에 들어가게 되었다.


吳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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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가스가겐고로 | 작성시간 09.02.04 주씨 살아남았군요...... 근데 주윤발이 갑자기 생각나는건;;;;ㅜㅡ'' 좋을글 읽고도 머리는 똥만 한가득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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