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환은 명나라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아주 추하게 생겼다고 한다. 錢龍錫이 숭정3년에 올른 상소문을 보면,“원숭환은 처음에 폐하를 배알할 때, 신은 그의 용모가 몹시 추함을 보고..이자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라는 글이 있고, 이 상소문은 <숭정장편>에 기록된 것이다. 張垈라는 사람도 <석궤서후집. 원숭환열전>에서 말하기를, “원숭환은 키가 작고 생긴 모양이 원숭이와 같으며 성격도 다혈질이었다.”고 적었다. 당시 명나라 사람들은 원숭환을 좋게 보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묘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헌제 청나라가 되면서 원숭환은 졸지에 미남이 된다. 현존하는 원숭환의 초상화는 청나라의 건륭제가 사람을 시켜서 그리게 한 것인데 원숭환의 얼굴이 길고, 피부가 하얀 것으로 봐서 만주족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건륭제가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원숭환을 그린 것이라고도 한다.
더욱 기이한 것은 원숭환사건의 명예회복에 있다. 원숭환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것은 그가 충성을 다하던 명나라가 아니다. 바로 청나라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건륭 49년(1772년) 건륭제는 조서를 내려서 원숭환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淸高宗實錄>에는 “원숭환은 계료독사로서 우리 황조를 매우 곤란하게 하였지만 그는 일을 충성스럽게 수행했다. 당시 명나라의 군주가 멍청하여 그를 죽게 만들었으니 진실로 깊이 측은한 점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건륭제의 이 조처는 유학을 중시하여 한족 지식인을 회유하고 만주족과 한족과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측면이 있으나, 여전히 의문이 든다.
만일 청나라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원숭환은 청나라의 反間計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원숭환은 반년동안 감금되었다가 처형되었고, 이는 숭정제가 일시적 기분으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다. 원숭환 죽음의 의문은 바로 모문룡이다. 그가 모문룡을 죽이고 나서 청나라 군대가 북경으로 진공하는 것을 막아줄 장치가 사라지고 말았다. 스스로 장성을 무너트린 것이다. 이 부분이 그가 죽임을 당한 중요한 이유다.
재미있는 것은 청나라의 모문룡에 대한 견해다. 모문룡은 청과 내통하여 원숭환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모문룡을 칭찬하는 <요해단충록>은 청나라때의 禁書였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조상을 이긴 송나라의 악비에 대하여도 미워했다. 모문룡도 마찬가지인데 왜 굳이 원숭환에 대해서는 이리 너그러울까? 원숭환은 과연 영웅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인가?
원숭환의 전공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원숭환이 큰 승리를 두 번 거두었는데 이른바 寧遠大捷과 寧錦大捷이다.
우선 영원대첩을 보자.
원숭환은 1만의 군대(일설에는 3만), 누르하치는 13만의 군대를 대동했다.(일설에는 6만)
전투기간은? 딱 이틀이다!
과정을 살펴보면 누르하치는 영원성을 공격한다. 그러자 원숭환은 성문을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누르하치는 孤城인 영원성 바깥의 모든 군사시설, 군수물자를 무수고 돌아간다. 1:10의 병력으로 고성을 2일간 지켜낸 것이 고작이다. 이런 것도 大捷이라고 부른다면 대첩의 기준은 뭔가? 역사상으로 보면 성을 작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동안 지킨 경우도 숱하다.
1만의 군대로 10만 적군을 맞이하여 성을 2일간 지키고, 적이 성외부의 모든 군사시설을 부수고 순조로이 철수했는데 이게 그렇게 대단한 승리인가?
또한 영원대첩의 핵심인, 누르하치의 죽음도 그렇다.
첫째. 누루하치는 죽을 때에 69세였는데 당시 이 나이에 죽었다면 이상할 일도 없다.
둘째. 청나라 대군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바로 군수물자기지를 공격하여 병사들을 죽이고 모든 식량과 마초를 불살랐는데, 만약 누르하치가 급히 죽었다면 어찌 청나라 군대가 한가로이 군수물자나 부수고 다녔을까?
셋째. 청나라 기록을 보면 누르하치는 죽기 전에 이미 8개월 동안 시종일관 모든 국사를 처리했다. 만일 영원성에서 포탄을 맞지 않더라도 과로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영원대첩에서 청나라 병사는 모두 얼마나 죽었을까? 기록상으로는 겨우 5백명이다!
영금대첩을 보면 더 희한하다.
영금(영원성, 금주성)에는 6만의 군대가 있었고, 청태종의 군대는 10만이었다. 전체 전투는 24일간이다.
전투전개과정은, 청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영금성 2백리에 와서 한번은 금주를, 한번은 영원을 공격했다. 원숭환은 역시 나가지 않는다. (한번 나갔다가 대패하고 돌아온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청태종은 영원, 금주 바깥의 모든 군사시설을 부수고 돌아갔다.
이런 전투가 대첩인가? 이는 위충현이 전공을 자랑하기 위하여 낯두껍게 벌인 일이다. 기본적으로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것들이 대첩이 아닌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위충현은 변방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하여 과장하여 칭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졸전이 以小勝多의 대첩으로 바뀐 것이다. 그 결과 위충현은 명나라를 구원할 유일한 공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충현은 영원을 방어하지 못한다면 산해관이 위험하고, 산해관이 무너지면 북경도 위험하다는 논지를 폈다. 그러나 영원도 함락하지 못한 병력이 어찌 영원의 몇갑절 강력한 산해관 요새를 돌파한단 말인가? 만일 청나라가 산해관을 함락할 전력이 있었다면 영원이나 금주등은 쉽사리 함락하였을 것이다.
위충현은 이러한 날조극을 위하여 다른 고급장교들에게 과실을 전가한다. 고제는 산해관으로 물러나서 지켰는데, 영원성으로 들어가서 원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 전략적으로 고제는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이다. 만약 산해관을 방치했다면, 그래서 영원성으로 들어갔다면 이는 전략적으로 엄청난 실수이다. 만약 청나라 군대가 마음먹고 영원을 포위하면 고제의 군까지 포함한 10만 대군이 얼마나 버텼을까?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포위망을 뚫기 위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야전에서 명나라 군대는 청나라군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명나라의 10만과 청나라의 10만이 겨룬다면 명나라 군대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제가 군대를 보내어 영원성을 가는 것보다는 산해관을 든든히 지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위충현은 이런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제를 깎아 내렸다. 나중에 고제가 금주와 영원을 포기한 것은 전략적인 고려였다. 영원과 금주로 통하는 길목이 막힌데다가, 주변을 파괴한 때문에 보급도 여의치 않은 외로운 성을 사수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충현은 대단할 것도 없는 전투를 과장하여 칭찬하는 바람에 원숭환은 행운아가 된다. 그래서 숭정제는 황제에 오르자 곧 원숭환을 중용한다. 원숭환은 특유의 장담으로 황제를 현혹한다.
그러나 이런 큰소리는 순진한 숭정제나 속일 수 있을 뿐이었다. 허예경이 그에게 “네가 5년만에 요동을 평정하겠다고 했는데, 어찌 계산한 것인가? 계획이 무언가?”라고 묻자 원숭환은, “그저 내가 보기에는 황제가 마음이 급한 것 같아서 되는대로 말한 것이다.”라고 대꾸한다. 결국 원숭환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위인인 것이다.
헌데 이런 큰소리가 한두번 나오다 말았다면 다행이다. 나중에 그는 스스로 뽑은 자기와 가까운 장교들을 임명할 때나, 요동군대의 재편성을 단행하거나, 모문룡을 죽였을 때나 입만 열면, “이는 요동을 5년내에 평정하기 위함이다.” “내가 조대수등의 사람을 뽑은 것도 5년만에 요동을 평정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5년내로 요동이 평정되지 못한다면 나는 내 손으로 부하들을 처단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마찬가지로 저를 죽이십시오,” “내가 모문룡을 죽인 것도 5년내로 요동을 평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나의 요동평정계획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를 죽였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때까지도 요동을 평정하지 못한다면 신을 죽이십시오.” 마치 진짜 5년 내로 요동을 평정할 것처럼 떠들었다.
사실여부야 어떻든 간에, 특유의 장담으로 원숭환은 최고지휘관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최고 지휘자에 오르자마자 그가 저지른 짓은 계문의 조솔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모문룡을 죽인 것이다. 왜 모문룡을 죽이기까지 했을까? 청나라 초기의 사서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청태종에게 원숭환이 속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숭환은 뒷일은 그냥 생각지도 않고 모문룡을 죽여버린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보면 건륭제는 그저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이 부분을 부인하고 신원을 회복한 것일 뿐이다.
청나라 대군이 10월 24일에 장성을 돌파하여 11월 20일에 북경성아래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 원숭환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격을 가하지도, 어느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이른바 5년만에 요동을 평정하겠다는 최고지휘관의 실상이었다. 웃기는 것은 그 전에 원숭환은 청나라 군사를 만나자 바로 계주성으로 도주했다. 아마도 적군이 계주성을 공격하여 주기를 기다린 것 같다. 다시한번 영원, 금주와 같은 전과를 기대했겠지만, 청나라군대가 북경이 코앞인데 계주성 따위에 관심을 가질 리가 있는가?
금주나 영원성을 공격한 청나라군대도 실상은 성을 함락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지, 공을 들여서 공격했다면 원숭환은 지키지도 못했다. 실상은 몽고나 조선 때문에 장기적인 공성전을 벌이지 못했을 뿐이다. 원숭환이 금주, 영원성을 수리할 때에도 청태종은 그저 놔두고 보고만 있었다. 우선순위는 조선의 정복과 몽고의 복속에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청나라가 마음먹고 영원, 금주를 둘러싸고 장기전으로 싸웠다면 양식때문에라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명나라가 산해관에서 지원군을 보내더라도 야전을 하여야 하는데, 이는 명나라 군대가 버틸 수 없다.
원숭환은 영원, 영금대첩이후에 하나의 군사정보를 얻는다. 바로 성을 높이고 대포를 이용하여 적과 맞서는 것이다. 이런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공성과 수성의 난이도는 천지차이다. 수성하는 측에 대포가 없더라도 유리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적군이 너의 성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다. 만약에 적군이 성바깥의 모든 지역을 통제하면 고립되어 버린다. 성내의 식량과 마초는 곧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억지로라도 나아가서 야전을 벌여서 결말을 봐야 하는 것이다. 적들이 사방에서 둘러싸는데 결국은 내 울타리에 내가 갇혀서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적들이 왜 무조건 죽어라고 내 성을 공격하여야 할까? 바보도 아닌데.
청나라의 군대는 장성돌파후 겨우 20일만에 북경성 아래에 이른다. 원숭환은 겨우 적보다 하루먼저 북경에 도착했다. 그 동안 한번도 싸우지 않고서. 이게 뭐 그리 대단한가?
결국 청나라는 북경을 포위했고, 황제는 원숭환에게 20만의 근위대군을 이끌고 적을 격퇴하라고 했다. 원숭환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적과 조약을 맺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다. 원숭환은 애시당초 야전능력이 결여된 지휘관이었다.
이 이후에 원숭환의 명성은 철저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숭정제는 그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고 결국은 그의 장담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다만 나중에 건륭제가 명나라를 더욱 무능하게 보이기 위하여 다시 한번 원숭환을 추켜세운 것일 뿐이다.
원숭환 신화의 본 목적은 모든 이들이 명나라를 증오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건륭의 이러한 의도는 대성공이었다. 후세인들이 원숭환을 거론할 때마다 무능한 명황조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으니까.
妖小遠
이것으로 명말 청초관련 업로드는 종결하겠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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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문기 작성시간 09.02.14 원숭환의 예를 보면 임경업 장군과 같이 실증적인 역사 연구보다는 이미지가 민중들에게 먹힌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는 정치적 혹은 민중적 요구로 인하여 그 인물의 실제 모습이 왜곡되고 나중에는 소설, 드라마, 영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실증적 역사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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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길가메쉬 작성시간 09.02.16 산해관 산해관, 유명한 지명인데 도대체 지리적 위치가 어딘지 몰라서 구글어스로 확인해보니 와우 세상에, 천혜의 요새군요. 동쪽은 서해고 서쪽은 끝없이 펼쳐지는 산맥들 거리를 재봤더니 약 10킬로가 나오더군요. 성벽과 성문들의 흔적도 아직 그대로 있고요. 여기가 뚤리면 베이징까지는 그냥 허허벌판이고, 덧붙여 베이징은 북쪽 동쪽이 완전히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같은 형태고 들어올곳이 남쪽과 서쪽밖에 없다는... 역시 군사적 요충지는 지도랑 같이봐야 실감이 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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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길가메쉬 작성시간 09.02.16 그 10킬로의 길목에 10만명이 몰린다고 생각하면 야,,, 장관인데요. 근데 중국에서 대병력이 조선을 치거나 요동의 나가는 길목이 이 길 외에는 없는 것 같더군요. 그 땅덩어리 넓은 중국이지만 북쪽으로 가는 길목이 이곳 하나밖에 없다는 게 새삼 놀랍군요.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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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멋진눈동자 작성시간 09.02.17 저도 구글검색해봤는데 북경에서 동쪽으로 족히 400키로는 떨어진곳을 보여주더군요, 이곳이 그곳인지 모르겠어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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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러기 작성시간 09.11.14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