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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임오화변 최악의 비극 <10>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

작성자롱기누스|작성시간11.08.19|조회수576 목록 댓글 2

"소신 왔소. 소신 왔소."

 

-한중록 중에서-

 

<천연두>

 

 천연두. 1979년 이후 발병자가 사라진 인류가 최초로 정복한 전염병이지만 정복되기 이전에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이다. 오죽하면 전 세계 사망자 중 10%가 이 병으로 죽었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전염성이 강한이 병에 걸리면 처음엔 고열이 왔다가 수포가 생기고, 이것이 고름이 가득찬 물집이 남았다. 간혹 살아남은 사람들한테서는 이 천연두로 인한 흔적이 남기도 했다. 일반적인 경우 사망률은 30%였으나 아메리카에서는 그 이상의 사망률을 자랑. 너무나도 많은 원주민들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1)

 

 

- 천연두에 걸린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묘사한 그림. -

 

 조선의 경우 천연두가 오래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수준의 재앙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매우 위험한 병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1756년 11월. 세자가 이 병에 걸렸다! 사도세자가 천연두에 걸리자 영조는 강서원에 의관들을 식숙하게끔 하였다. 의원들의 정성어린 치료때문인지 사도세자는 한달간 끙끙 앓기는 했지만 병이 나았다. 한중록이나 실록을 볼때 간혹 나타나는 상흔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치료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성왕후의 불행한 최후>

 

 그런데 이것이 어쩌면 잇따른 초상의 전주곡이었을지도 모른다. 1757년 2월. 정성왕후가 병에 걸렸다. 정성왕후는 평소 병에 걸리면 그러했듯이 평소 거주하던 대조전의 큰 방에서 건넌방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검은 색 피를 한 요강이나 토한 것이었다.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정성왕후는 "종사를 이을 왕손을 낳을 대조전이 중한데 어찌 내 이집에서 생을 마치리" 하면서 대조전 서쪽의 관리각으로 옮겼다. 몸에 무리가 갈 수 밖에 없는 행위였다.

 

 평소 정성왕후가 사도세자를 아꼈고 애초에 호적 상으로는 사도세자는 정성왕후의 아들이었다. 당연히 사도세자는 정성왕후를 간병하였으며 혼수 상태에 빠지자 "소신 왔소" 하며 울부짖는 한편 의관에게 정성왕후가 토한 피를 보이며 울부짖었다.

 

 그런데 정작 남편 영조의 행보는 문제 투성이였다. 영조는 평소 정성왕후와 금슬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니 관심도 두지 않았다. 정성왕후의 환갑도 안 챙겨줬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려나. 오죽하면 정성왕후를 진찰한 의관이 왕비의 병이 심각함을 알았는데 이를 왕에게 아뢴게 아니라 시종 내시한테 이를 말했고, 내시는 이를 내의원 제조에게 전하고 내의원 제조가 왕에게 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조가 얼마나 정성왕후한테 무심했는지를 주변에서도 너무나도 잘 알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기록이 1743년 기록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기록에서 영조는 왕비의 병이 단순히 담증일 뿐이라며 그러려니 여겼다. 이미 14년 전에 정성왕후의 병이 심상치 않은 상태였는데 이를 알고도 남편이 방치한 것이었다!

 

 1757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성왕후가 병상에 들었다고 했는데도 영조가 문병을 하지 않더니, 위독해졌다고 소식이 와서야 그제야 문병온 것이었다. 더군다나 문병을 와서는 정성왕후를 돌보고, 슬픔에 겨워 옷매무새를 미처 다듬치 않은 세자의 상태를 보고는 세자의 옷매무새에 관해 꾸중할 정도였다. 평소 옷매무새에 신경을 많이 쓰던 영조라지만 도가 지나친 행위였다.

 

 그러다가 신시(오후 3시~5시)에 정성왕후가 죽었다. 초혼까지는 바로 진행됬지만 발상을 해야 되는데 영조는 내인들에게 정성왕후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장황히 말하기만 하였다. 왕이 이러고 있으니 발상이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화완옹주의 남편인 부마 정치달의 부음이 들려왔다. 영조는 그제서야 정성왕후를 위해 통곡한 뒤 바로 정치달의 집으로 가려고 했다! 아무리 화완옹주가 가장 총애를 받던 딸이라고 해도 이건 문제가 있었다.

 

 당연히 신하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영조는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오히려 삼사의 신하들을 모조리 체차해버리고 정치달의 집으로 갔다가 한밤중에나 돌아왔다.

 

 

 

-영조는 아내의 죽음에 너무나도 무심했다. 정말로 영조는 정성왕후를 아내로 여기기는 한걸까?-

 

 

<인원왕후의 죽음>

 

 그런데 아직 궁궐 내의 초상이 남아있었다. 숙종의 아내이자 왕실의 웃어른 인원왕후 역시 곧 몸이 위독해진것이었다.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인원왕후의 나이 71. 이 당시로는 장수한 편이었다. 아마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며느리가 먼저 간 것에 충격을 받았던게 아닌가 싶다. 어찌되었든 정성왕후가 죽은 지 한달이 지난 3월 26일. 인원왕후 역시 세상을 영영 떠나버렸다. 그나마 인원왕후의 최후는 괜찮았다. 그녀는 생전에 숙종에게서 어느 정도는 사랑받았고 영조 역시 그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 그녀를 각별히 대우해줬다. 물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세자 역시 인원왕후에게는 매우 호의적이었고. 적어도 정성왕후 같이 불행하게 살다간 여인은 아니었다.

 

<의대증과 가학증>

 

  한편 사도세자는 상례를 치루는 동안에도 영조에게 숱한 꾸지람을 들었다. 보통 이런 꾸지람의 내용은 세자의 옷매무새에 대한 것이 많았다. 원래 영조 자신이 옷매무새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2) 안그래도 세자가 미워죽을 판이니 꾸중이 가혹했다. 거기에 슬픔까지 겹쳐져서 그랬는지 세자의 광증은 더욱 심각해졌다. 의대증과 가학증이 나타난 것이다.

 

 일단 의대증부터 먼저 설명하겠다. 의대란 궁궐에서 옷을 가리키는 궁중 용어였다. 그런 의미에서 정병설 교수는 "의대증은 '옷병'인 셈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한중록에 의하면 이 무렵 세자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가 벗은 옷을 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한번 어떻게 맞는 옷을 찾으면 그 옷이 더러워질때까지 쭈욱 입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 맞는 옷을 찾으려면 심하면 20여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간혹 태우기까지 해야 했던 것. 너무나도 많은 비용이 지출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의대증은 나았다. 훗날에는 상황이 심각해져 의대증이 발동될 때 사람을 죽일 정도였지만 적어도 이 때 당시에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는 가학증이었다.

 

 1757년 6월. 즉 아직 상중일때 사도세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번내관(3) 김한채와 그를 포함한 6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김한채의 목을 혜경궁과 내인들에게 두루 보였다고 전해진다. 너무나도 잔혹한 살인이었다. 그리고 이 이후로도 간혹가다 살인을 일삼아 나중에는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거기다가 세자 주변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세자의 폭력에 노출되는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현고기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장성하기 전부터 살인을 여러번 저질렀다고 하는데 한중록이나 실록에서 1757년 경까지 관련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현고기는 야담을 기록한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장성하기 전부터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이 퍼질 정도라면 그 만큼 사도세자가 살생을 많이 저질렀다는 뜻이 될 것이다.

 

 특기할만한 것은 영조가 이를 꽤 늦게 파악했다는 것이다. 영조가 이를 파악한 것은 이듬해인 1758년 초엽. 살인을 저지른게 6월 혹은 가을(4)인데 기록에 따르면 이듬해에서야 이를 파악한 것이다. 세자의 지위와 그 상징성때문에 모두가 두려워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사도세자는 작은 폭군이 되어가고 있었다.

 

 

 

- 광증이 심해진 사도세자는 자신의 공간에서 점차 작은 폭군이 되어갔다. - 

 

 

 

(1) 다만 여기서는 고려해야될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피쿤체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지 않던 마푸체 간의 사망율 차이가 상당한 편이었으며 스페인-원주민 사이 혼혈인 메스티소 수의 증가도 눈여겨봐야 될 의외로 복잡한 주제이다. 어찌됬든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확실하지만. 자세한 것은 http://formerhwan.egloos.com/2140592 를 참고하기 바란다.

 

(2) 사도세자와 막 결혼한 혜경궁에게 한 3가지 훈계 중 2가지가 옷과 관련된 것이었을 정도이다.

 

(3) 궁궐에 유숙하며 일하는 내시.

 

(4) 한중록은 6월로 기록되어있으나 실록에서 세자는 가을의 일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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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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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제국의명장 | 작성시간 11.08.20 영조 어진의 하단이 명암때문인지는 몰라도 진짜 용포처럼 보이는군요. ㅎㄷㄷ
    그리고 직접 아랫 사람을 참하여 수급을 들고다니는 세자는...
  • 작성자임의찬사 | 작성시간 11.10.01 저상태에서 안미치는게 이상할지도요,.. 뭐만하면 꾸중이니.. 정신적으로 대미지가 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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