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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일본사]헤이안시대 (Rise of Samurai)

작성자폼페이우스|작성시간12.04.04|조회수1,319 목록 댓글 0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씨      다이라씨(헤이시)   →  미나모토씨(겐지)       

 

 

◆후지와라 씨족: 나카토미씨의 분가로 일본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가문으로 800년경부터 400년간 섭정(셋칸케)과 관백을 독점하여 천왕을 대신에 정권을 장악. 2번째 가문의 권력자가 된 후지와라 후히토의 4아들이 남,북,식,경의 영지를 받아 후지와라 4가를 이루었고 처음엔 식가의 권세가 강했으나 후에 북가의 힘이 강해져 북가가 본가의 지위를 얻게 된다.
후지와라씨는 천왕의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합니다.

 


도호쿠지방의 패권다툼  (오슈 후지와라씨의 시작)

무쓰국(우슈)의 유력 호족인 아베씨(아이누족) 당주 아베 요리토키는 두 딸을 다이라 나가히라(이구십랑)와  후지와라 쓰네키요(신리권태부) 시집보내면서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세를 확대해나갔다. 이중 중요한 인물이 후지와라 쓰네키요아베의 딸사이에서 난 아들 키요하라 키요히라의 오슈 후지와라씨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이이다.

 

 

 도호쿠지방의 세력이동:                                 

 아베 요리토키 ▶ 아베 사다토 ▶ 키요하라 다케사다 ▶ 키요하라 사네히라 ▶ 키요하라 키요히라ㆍ이에히라형제( 동母형제) ▶ 후지와라 키요히라(친부의 성으로 개명)

 무쓰노카미: 무쓰국에 파견된 시장이나 도지사의 계급. 해당 지방 관리의 최고위직

 

전9년의 역(1051~10621)


 중앙 조정의 지방관 VS 지방 유력 호족 아베씨
1051년 조세를 거부한 아베씨지방관 후지와라 나리토우가 토벌에 나섰지만 아베씨의 승
1052~1062년 조정에서 무쓰노카미 지방관으로 미나모토 요리요시(가와치국 겐지가문의 2대 당주)를 파견

1052년 미나모토 요리요시를 무쓰로 파견하지만 요리요시가 도착하자 사면령을 받은 아베씨의 족장 아베 요리토키요리요시에 평화적 태도를 보인다.
1056년 미나모토 요리요시 휘하의 후자와라 미쓰사다ㆍ모토사다 형제가 야영중에 기습받는다.
1057년 5월 미나모토 요리요시는 아베씨의 배후에 있던 아베 토미타나, 쓰가루지역의 아이누족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이에 토미타나를 만나러 가던 무쓰 아베씨의 당주 요리토키토미타나의 복병으로 죽는다.
         11월 아베 사다토(아베 요리토키의 아들)4000명 VS 미나모토 요리요시 2500명이 키노미에서 전투를 벌였고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대패하게 된다. *아베씨는 이전투로 고로모가 남쪽까지 세력을 넓힌다. 패한 요리요시는 교토무사단을 재편성하고 간토,도카이,기나이지방의 무사들로 병력을 증강한다.
1062년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지방관 임기를 마치고 후임으로 타카시나 쓰네시게를 무쓰국에 파견했지만 현지에서 따르지않아 교토로 되돌아가야했고, 이에 어쩔수 없이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다시 무쓰국의 지방관을 맡게된다.
       요리요시데와국의 유력호족 키요하라씨의 당주 미쓰요리를 끌어들여 키요하라 미쓰요리키요하라 타케노리(미쓰요리 동생)를 총대장으로 하여 7000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아베씨(무쓰국)4000명?? VS 중앙조정(미나모토 요리요시)3000명 + 키요하라씨(데와국)7000명 총1만의 연합군은  아베씨의 거점 구리야가와(현 이와테현 모리오카시)를 함락시키고 아베 사다토를 참수하고 아베씨는 몰락한다. 후지와라 쓰네키요 역시 참수된다.
      -아베씨 정벌결과: 미나모토 요리요시는 무쓰국에 머물러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조정에서 그를 이요국 지방관에 임명하였고, 키요하라 타케노리는 종5위하 진슈후쇼군에 임명되고 오우 6군의 지배권을 받고 키요하라씨는 무쓰국과 데와국의 패자가 된다.
         *오우: 오슈와 우슈를 합친말로 오슈는 데와국, 우슈는 무쓰국)

 


후3년의 역
1083년

※사전배경

무쓰국 키요하라가문의 당주가 된 다케사다(다케노리의 아들)는 아베 토리요키의 딸을 측실로 삼고 그녀의 아들(키요하라 키요히라/토리요키의 외손자)도 양자로 삼고 토리요키의 딸에게서 아들 이에히라(키요하라씨+아베씨)를 얻는다
 

키요하라 다케사다 사후.. 데와 키요하라씨의 당주는 장남인 사네히라가 이어받는다. 사네히라는 헤이시가문(다이라씨)과 겐지가문(미나모토씨)와 혼인관계를 구축한다.

 사네히라의 딸과 겐지가문의 혼사를 축하해주러 온 키요하라일족의 장로 히데타케는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사네히라에 격분하여 선물로 가지고온 사금을 뜰에다 쏟아버렸고 이에 격분한 키요하라 사네히라는 군사를 일으켜 히데타케를 토벌하러 간다.
    이에 히데타케는 키요히라(아베씨와 후지와라씨 피)ㆍ이에히라(아베씨와 키요하라의 피)형제를 부추겼고 형제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사네히라는 키요히라형제를 공격하려했으나 이들이 후퇴하자 다시 히데타케토벌을 준비한다.  이시기에 무쓰국 지방관으로 미나모토 요시이에(요리요시의 아들)가 파견되어, 사네히라는 요시이에 환영식을 사흘간 성대히 열고 출격한다.
 사네히라가 없는틈을 타 키요히라 형제가 사네히라의 본거지를 공격하지만 미나모토 요시이에가 사네히라편을 들어주어 패하여 항복하지만, 행군중이던 사네히라가 급사하고 만다.


이에 사네히라의 영지 오우6군을 키요히라이에히라에게 3군씩 나누어 준다. 영지배분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가 동모형 키에히라의 저택을 쳐서 키에히라 일족을 다죽여버리고 키요히라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미나모토 요시이에에게 도망친다.
  이에히라는 누마요새에서 농성하고 미나모토 요시이에와 키요히라 연합군이 공격했지만 겨울등의 이유로 패하고 만다.


   이에히라의 승리소식의 이에히라의 작은아버지인 키요하라 다케히라가 축하하면서 가담했고 이들은 가네자와 요새로 옮겨간다. 1087년 요시이에와 키요히라 연합군은 가네자와 요새를 포위하였고 양식이 떨어진 이에히라와 타케히라는 도망치다 잡혀죽는다.
       -키요하라씨 처리결과: 조정의 명령에 의한 전쟁이 아니었기에 논공행상은 거부당하고, 미나모토 요시이에는 무쓰국지방관직을 해임당한다. 요시이에가 동원한 간토지방의 무사들은 은상을 받지 못하자 결국 요시이에가 사재를 털어 은상을 주었고 이는 간토지방에서 겐지가문의 명성을 높이게 되어 훗날 겐지가문의 가마쿠라 막부창건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승리한 키요하라 키요히라는 친아버지 후지와라 쓰네키요의 성인 후지와라씨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씨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오슈(데와국) 후지와라가문은 4대에 걸쳐 100년간 무쓰국과 데와국의 대호족으로 군림하고 분가지만 후에 후지와라 본가의 지위를 얻게된다.

 

 

 

 

시라카와 천왕(72대 1053~1129) : 섭관 가문이자 외척인 후지와라 씨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8세 아들(73대 호리카와 천왕)에게 양위하여 스스로 정무에 관여하는 섭정형식의 원정을 하였고 후지와라 씨족의 섭정은 관백(간바쿠)이라는 관직으로 바뀌게 됐을뿐이었다.
하지만 섭관 가문인 후지와라씨족 내부 혼란과 호리카와 천왕의 요절로 손자인 어린 천왕과 미숙한 섭정인 후지와라 다다자네로 인해 시라카와 법왕은 실권을 장악하여 중하류 귀족과 무가(사무라이)계급을 임용하여 후지와라씨를 견제한다.

 

※원정(院政인세이): 상왕이 어린 천왕에게 양위후 정치에 관여하는 섭정을 원정이라 부른다. 이후 왕족으로 권력을 잡는다는건 천왕이 되어 허수아비가 된다는게 아닌 상왕이 되어 원정을 하여야 권력을 잡는식의 인식이 된다. 외척인 후지와라씨의 섭정과는 다른 상왕의 정치 권력.

 

호리카와 천왕(73대 1079~1107) : 8세에 천왕이 되어 아버지인 시라카와 상왕 허수아비였고 병약하여 29세때 요절.

 

도바 천왕(74대) : 호리카와 천왕의 아들....

 

스토쿠 천왕(75대, 1119~1164 고시라카 천왕의 형): 도바 천왕(74대)의 1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인 도바 천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도바 천왕의 아들이 아닌 후지와라 타마코가 시라카와 법왕과 밀통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들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숙부뻘 아들이라 불렀다고 함)
역시 관백이던 후지와라 타타미치의 장녀 키요코와 결혼하였다. 아버지?인 도바 상왕이 후지와라 도쿠코를 총애 1141년 양위 할것을 강요하여 도바 상왕과 후지와라 도쿠코 소생의 아들인 다이히토(고노에 천왕)를 즉위시켜 양위 였지만 사실상 패위되었고 양위된 천왕이 동생이라 원정(인세이)를 하지 못하게 되고 이에 큰 한이 맺힌다.
양위후 스토쿠 천왕은 신인(新院)으로 불리게 된고 신인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을 배다른 어머니인 도쿠코의 양자로 들인다. 고노에 천왕이 17세에 요절하자 다음 천왕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고 신인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이 가장 유력했음에도 도모쿠(비후쿠몬인)의 다른 양자인 모리히토(니조 천왕)가 즉위할때까지 모리히토의 아버지이자 신인(스토쿠 천왕)의 동생인 마사히토 친왕(고시라카와 천왕)이 즉위한다.
※이것은 신인(스토쿠 천왕)이 상왕으로써 원정(인세이)을 할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것을 우려한 후지와라 타마코(비후쿠몬인)와 장인이자 관백이던 후지와라 타다미치(사위가 딸이 아닌 후궁인 미나모토씨인 쓰보네를 총애해서)등 후지와라씨의 견제로 신인의 아들은 천왕이 신인은 원정을 할수 없게 된다.

 

호겐의 난
고시라카 천왕파
VS 스토쿠 상왕파의 대립 천왕가문의 권력다툼으로 분열되자 외척이던 후지와라 가문도 섭정과 가문 계승에 대한 권력 다툼으로 천왕파 상황파로 갈리게 되고, 사무라이계급(부시계급)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사무라이가문의 양대산맥인 미나모토(겐지)가문다이라(헤이지)가문도 분열되어 일본의 지배층은 갈라지고 결국 천왕파의 승리로  미나모토가문과 다이라가문은 공신이 되었다.
※호겐의 난은 같은 씨족 대 다른 씨족의 대결이 아닌 현정권과 전정권과의 대립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겐의 난을 계기로 본격적 사무라이계급의 가문들이 공신이 되어 대두되게 됩니다.

 

1156년(호겐 원년)

7월 2일 도바 법왕이 병사하자 신인이 문병하러 갔지만 대면할수 없었고 이에 분개해야 했다.
     5일 신인(스토쿠 상왕)과 좌부(후지와라 요리나가)가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풍문이 나돔.
     8일 후지와라 타다미치ㆍ요리나가 부자의 영지에서 그들의 모병을 금지한다는 고시라카 천왕의 윤지가

           내려지고,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의 병사들이 셋칸케(섭정가의 저택.섭정=후지와라씨)에 난입하여 저택을 검열함.
       *이러한 조치는 도바 법왕의 측근(타마코, 타다미치)들의 견제 조치.
     9일 이에 위협을 느낀 신인(스토쿠 상왕)은 아들(시게히토 친왕)도 대동하지 않고 처소를 탈출해 교토 동쪽 무네코 내친왕(토바 법왕의 둘째딸로 스토쿠 천왕의 여동생)의 저택에 침입했고 이후 저택을 빠져나와
     10일 신인이 측근인 후지와라 노리나가, 다이라 이에히로, 미나모토 다메요시, 다이라 타다마사등의 무사가 집결했지만 스토오 상왕파의 병력은 열세였다. 
     11일 신인(스토쿠 상왕)이 무사를 집결하자 코시라카 천왕측에선 '풍문이 사실로 드러난것'이라며 무사들을 동원해  신인측이 집결해 있는 시라카와후쿠덴을 공격해 신인은 도망간다.
     13일 도망친 신인은 친동생인 가쿠쇼 법친왕에게 중재를 부탁했지만 거절 당해 옛 암자로 옮겨져 미나모토 시게나리의 감시를 받는다.
      23일 신인은 측근인 후지와라 노리나가와 함께 사누키국(시코쿠서섬의 동북)으로 유배되고 8년뒤인 1164년 유배지에서 4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암살설)
    

 

                
고시라카 천왕(77대, 1127~1192 스토쿠 천왕의 동생)은 호겐의 난 이후 권력을 장악하여 1158년 양위후에도 권력을 유지하였고 외가이던 후지와라 씨족을 약화시키고 사무라이의 권력을 강화시켜 다이라 기요모리가 권력을 잡게된다. 말년에 와서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라쿠마 막부를 여는걸 묵인함 이후 일본은 700여년간 무사계급의 지배를 받게됨.

 


헤이지 난  고시라카 상왕파(미나모토씨족) VS 니조 천왕파(다이라씨족)
1159년 고시라카 천왕이 왕위를 니조 천왕에게 물려 주어 귀족,무가(사무라이계급) 등은 고시라카 상왕파와 니조 천왕파로 대립하였고 12월 상왕파(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선제공격을 치열한 접전끝에 천왕파(다이라 기요모리)가 승리하여 고시라카 상왕은 유배되고 천왕파를 대표하는 다이라 기요모리가 무가정권(막부의 원형)을 세우고, 오랫동안 후지와라씨족이 독점한 외척의 자리를 대신한다. (외척인 후지와라정권->무가인 다이라정권수립) 
      

 

다이라 마사카도 (903~940) 간토지방의 다이라일족간의 항쟁을 끝마치고 간토지방의 패권을 잡고 스스로 천왕에 올라 교토의 천왕에 맞섯으나 즉위 두달만에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다이라노 사다모리에게 토벌된다.

 


★다이라 기요모리(1118~1181)

 다이라 타다모리의 장남으로 헤이시가문의 수장이 된다. 호겐의 난때 고시라카와 천왕의 신뢰를 얻지만 헤이지 난때는 니조 천왕파로 승리를 얻어 사무라이계급 최초로 태정대신의 자리에 오르고 딸 도쿠코를 다카쿠라 천왕(80대, 1168~1180 고시라카와 천왕의 4남)에 시집보낸다. 


 호겐의 난에서 양모인 이케젠니가 스토쿠 상왕 아들의 유모였기에 난처한 입장이었으나 가문의 결속을 위해 고시라카와 천왕측에 가담하고 공적으로 대재대신이 된다.


     헤이지의 난에서 정권을 장악한후 후지와라 노부요리, 쓰네무네, 코레카타등 반 신세이파를 일소하면서 정치권력을 쌓았으며. 이 과정에서 미나모토 요시토모, 시게나리, 스에자네, 미쓰야스등 미나모토씨족의 유력무사가 멸망하여 무사들중 1인자가 되었고 헤이씨(다이라) 일족은 주요관직을 독점하여 일본 전국에 500여개 장원을 보유하며 경제력은 물론 군사 경찰권을 장악하고 무가정권의 기초를 쌓는다.


      하지만 기요모리(다이라=헤이시 씨족)에 대한 불쾌감을 고시라카와 법왕을 시작으로 천왕가의 원정세력이 느끼게 됐고 점점 기요모리와 대립하게 된다. 1179년 기요모리는 딸을 잃었고 고시라카 법왕은 기요모리 딸의 장원을 몰수한다. 또한 가문의 후계자였던 다이라 시게모리(기요모리의 장남)가 42세에 병사하자 또 고시라카 법왕이 시게모리의 에치젠국을 몰수하고 셋칸케(섭정)가문의 지위도 마쓰도노가가 계승할것임을 명백히 하자.


      이에 두고 볼수 만은 없었던 기요모리는 1179년 11월 14일 후쿠하라(고베시)에서 군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반 헤이시 세력을 모두 해임하고 헤이시측 관리를 임용시킨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고시라카 법왕은 기요모리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11월20일 법왕을 도바도노로 유폐시키고 고시라카와 법왕의 원정은 정지한다.


  후속조치를 다카쿠라 천왕, 다이라 무네모리. 코노에 모토미치등에게 맞겼으나 이들이 미숙했기에 표면에 나서 일문의 결속과 후지와라씨족의 회유에 힘쓰고 1180년 다카쿠라 천왕의 양위로 노리히토 친왕(안토쿠 천왕)이 즉위하여 헤이시의 괴뢰정권을 세운다.       *하지만 법왕의 유폐로 반 헤이시(다이라) 세력이 더 많이 나타난다.

 ●기요모리에 대한 반란
  모치히토 왕(고시라카 법왕의 3남)은 친왕이 될기회가 키요모리에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자 반란을 획책한다. 미나모토 요리마사, 미나모토 나카이에, 아시카가 요시키요, 시모코우메 유키요시등과 고호쿠지(법상종), 온죠지(천태종)들의 사원세력도 계획에 가담하지만 발각되어 후지와라 카게타카, 타다쓰나의 300병사들로 토벌된다. 그러나 친 헤이시였던 엔랴쿠지(천태종)도 이때문에 반헤이시 움직임이 있었 유력 사원세력에 둘러싸인 교토(수도)를 포기하며 일문의 반대를 누르고 1180년 헤이시가문의 거점 오오와다노토마리(고베시)를 바라보는곳으로 천도를 강행한다. 하지만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전국 각지에 번져나가 미나모토 요리토모, 다케다 노부요시가 가이겐지에서, 시나노국에서 기소 요시나가가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기요모리는 미나토모씨의 세력확대를 막기위해 다이라 코레모리를 총대장으로 대군을 간토지방에 파견하지만 후지가와 전투에서 교전하지 않고 패퇴한다. 이를 계기로 온죠지, 고후쿠지의 사원세력이 반란의 움직임을 보였고 온죠지, 엔랴쿠지 세력은 물류의 요충지 비와호수를 점거하고 옛수도인 교토를 공격할정도의 세력으로 반란이 확대된다.


        또한 규슈에서도 반란이 발발해 헤이시 일문과 엔랴쿠지의 친헤이시 세력들도 천도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가 확대되어 기요모리는 교토로 귀환하여  다이라 도도모리, 스케모리, 후지와라 기요쓰나를 파견해 온죠지를 불살라버리고, 오우미국의 야마모토 요시쓰나, 카시와기 요시카네를 격파하고 오우미를 평정한다. 

 

이후 기요모리는 기나이(긴키, 수도권)지방의 최대 반 헤이시 세력이던 고후쿠지 사원세력을 목표로 다이라 시게히라를 총대장으로 하여 대군을 보내 고후쿠지, 도다이지의 사찰을 불태웠다. 이것으로 긴키지방의 반헤이시 움직임은 진정되었으나 '남도소토'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헤이시 씨족의 세력기반인 시고쿠에서도 이요국의 코우노 미치키요ㆍ미치노부 부자가 병사를 모았고 규슈 분고국의 오가타 코레요시, 우스키 코레타카, 사가 코레노리등의 호족이 병사를 모았고 이세지마에서도 반란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한 간토지방의 사타케가문이 미야모토 요리토모에게 토벌 당하여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이에 기요모리는 다시 교토중심의 체제를 구축하기위해 정비하여 임전체제를 구축하고 에치고국의 죠 스케나가, 무쓰국의 후지와라 히데히라에게 미나모토 요리토모, 다케다 노부요시 토별명을 내렸다.
                   반란을 토벌하기로 결정한 다음날 기요모리는 급사하였고 헤이시(다이라)가문의 가권은 3남 다이라 무네모리에게 맡겨졌다. (1남과 2남은 일찍 죽었기에..)
                  
                 다이라 무네모리가 헤이시의 가문의 가장이 되었으나 전국각지로 번져가는 반란에 대처하지 못해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고 말았고 대기근이란 자연재해도 잇따라기때문에 1183년 쿠리카라토우케 전투에서 헤이시군이 괴멸된후 미야모토 요시나카의 공세에 준비도 하지 못하고 교토가 함락당한다.
                   2년후인 1185년 단노우라 해전에서 패하여 헤이시가문(다이라 씨)은 멸망한다.
                


★미나모토 요리토모


★미나모토 요시나카

 

 

☆나중에 수정해서 이어 쓸게요. 전 한 글에 다 꾸겨 넣는 경향이... 그림도 만들어서 좀 넣고.. 센고쿠시대는  신장의야망이란 게임때문에 호기심에 정리겸 공부겸 찾아서 정리해보았었는데 헤이안시대는 처음이군요.. 역시 동기는 게임입니다. 쇼군2 라이즈오브사무라이... 3개 가문이 나오는데 뭐지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들어봤는데?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사원세력이 무시못하더군요. 아직 어떤 식으로 정리하는게 쉽게 느껴질지 몰라서 늘어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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