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중장기병과 Cataphratcs의 비교사적 검토 (상)
- 2000년 10월 13일 공개
- 참고자료
- 고구려 중장기병 관련 국내논문 및 서적은 "2.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간단한 소개" 항목을 참조
- 국방군사연구소 편 , 한국군복식발달사, 국방군사연구소, 1998
- 임동권 외, 한국의 마상무예, 한국마사회/마사박물관 1997
- George Cameron stone, A Glossary of the Construction, Decoration and Use of Arms and Armour
- David Nicolle 外, Attila and the Nomad Hordes, Osprey Military, 1990
- V.Vuksic 외, Cavalry -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AD 1914, Arms and Armour, 1993
- Chris Peers 외, Imperial Chinese Armies (1) 200 BC ~ 589 AD, Osprey Military, 1995
- Chris Peers 외, Imperial Chinese Armies (2) 590 AD~ 1260 AD, Osprey Military, 1996
- S.R. Turnbull 외, The Mongols, Osprey Military, 1980
- General Sir John Hackett 외, Warfare in the Ancient World, S & J, 1989
- John Worry 외, Warfare in the Classic World, Salamanda Book, 1980
1. 서설
최근 한국학계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소위 "중장기병"이 고구려의 군사력의 중요한 구성요소였으며, 나아가 고구려의 대외정복을 가능하게 했던 한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주목할만한 견해가 틀림없으나 아직은 검증되어야 할 점이 많은 주장으로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특히 고구려의 소위 "중장기병"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나아가 고대 세계 각국의 중장기병과의 비교사적 검토를 해보겠다.
2. 기존 연구성과에 대한 간단한 소개
1950~1970년대까지 고구려의 무기체계와 전술에 대한 연구는 북한에서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전주농과 박진욱 등을 들 수 있다. 전주농은 1950년대 후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토대로 고구려 시대의 무기와 무장을 최초로 연구(특히 "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고분벽화 자료를 주로 하여" 1/2, 문화유산 1958-5/1959-1) 했으며, 박진석은 1960년대 이후 발굴된 고구려 무기 유물을 토대로 삼국시대 무기에 관한 논문을 저술한 바 있다. (특히 "3국 무기의 특성과 그것을 통하여 본 병종 및 전투형식", 고고민속론문집2, 1970) 이들의 논문은 90년대 이후 남한 학계의 고구려 군사사 연구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 고대 무기체계 연구의 선구자는 김기웅씨라고 할 수 있다. 김기웅씨는 "삼국시대의 무기 소고", "삼국시대의 마구 소고", , "무기와 화약", "무기와 마구(고구려편)" 등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학계에서 고구려 시대의 무기나 병종구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3년 김성태의 일련의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김성태는 1993년 부터 1995년까지 문화재 26,27,28호에 게재한 "고구려의 무기 1/2/3"를 통해 고구려의 개별 무기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1996년에 이인철은 군사 제33호(국방군사연구소 발행)에 게재한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이란 주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인철은 이 논문을 통해 중장기병이 4~5세기 이래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을 뒷받침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KBS 역사 스페셜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고구려 및 부여사를 전공하고 있는 여호규씨는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이 된 후 부터는 고구려 군사사와 고구려 성곽에 관련된 논문을 주로 저술하고 있는데 특히 1999년 한국군사사연구2집(국방군사연구소 발행)에 발표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을 통해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한 바 있다.
3. 중장기병의 정의
이인철씨는 그의 논문에서 왜 "중장기병(重裝騎兵)"이란 용어를 사용하는지, "중장기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정의 없이 관행적으로 "중장기병"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논문 내용 중에 "갑주와 개마로 무장한 중장기병"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중장기병" 이란 용어를 사람 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주로 무장한 기병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중장기병"이란 용어는 일본 학계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여호규씨는 "개마무사", "중장기병"이란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여호규씨는 기병을 갑주와 구장개(말갑옷을 의미)로 모두 무장한 것을 "중장기병", 무사만 갑주로 무장한 "갑주기병", 무사와 말이 무장하지 않은 "경장기병"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개마(鎧馬)"란 갑옷을 입힌 말(馬)이란 의미이며, 중국에서 대략 서진(西晉)~남북조 시대 부터 사용한 용어이다. 고구려에서도 중장기병을 "개마"라고 호칭했던 것 같다. 고구려 "개마총(鎧馬塚)"의 벽화에 "塚主着鎧馬之像"이란 명문이 적혀 있는데, '무덤 주인이 개마를 타고 있는 모습'이란 의미이다.
이들 학자들이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용어는 중기병과 혼동을 줄 수 있는 용어이므로 약간의 부연설명을 하겠다. 가장 기본적인 기병의 분류법은 중기병(Heavy Cavalry)과 경기병(Light Cavalry)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때 중기병과 경기병의 분류는 갑옷의 무장여부나 보유 무기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갑옷의 유무, 주무기가 창인지 활인지, 정면돌격시의 충격력 위주로 운용하는지 아니면 기동력을 중시한 경쾌한 운용을 중시하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구분하는 것이다. 당연히 특정 기병이 경기병인지 아니면 중기병인지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인철이나 여호규씨가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용어는 이런 분류법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라 말에도 갑옷을 입혔는지 여부에 초점을 두고 구분한 개념인 것 같다. 이런 개념이라면 서구권에서는 Extra-Heavy Cavalry나 Cataphracts, Armoured Horse와 비교할 수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Extra-Heavy Cavalry나 Cataphracts는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기병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은 모두 중기병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중기병이란 개념은 사람이 갑옷을 입었는지 여부 못지않게 운용법에도 초점을 둔 개념이고, 중장기병은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는 점에 초점을 둔 개념이라서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이 글에서도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용어도 단순히 "말에도 갑옷을 입힌 기병"의 의미로 사용하겠다.
4. 고대 유럽과 서남아시아 지역의 Cataphracts
고대 페르시아계 국가의 Cataphractii
다른 많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기병의 역사도 아직은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다. 중장기병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장기병의 뿌리를 탐색하게 위해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은 고대 그리스의 Cataphrcatii이다.
영어에서 중장기병을 의미하는 'Cataphracts'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Cataphractii'에서 유래한 것이다. Cataphractii는 Covered over 즉, 완전히 감싼 것이란 의미이다. Cataphracts라는 말이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중장기병의 기원이 그리스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의 기병은 알렉산더 시절의 마케도니아 중기병(Companion)을 제외하면 그렇게 강력한 편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대표적 병종은 중무장 엘리트 보병 Hoplite였다.) 그리스인들은 사람 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적(주로 스키타이-이란계 종족들)의 기병들을 Cataphrcatii라고 불렀다.
Cataphrcatii를 보유한 국가나 종족들은 아르메니아(Armenia), 파르티아(Parthia), 페르시아, 사르마티아(Sarmatia) 등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 부터 이러한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추정에 불과한 것이고, 그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중장기병은 특히 기원후 3세기 시점부터는 파르티아(고대 이란계 종족의 국가)나 사산조 페르시아제국(고대 이란계 국가) 등에서 엘리트 병종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중장기병은 약 4m 정도의 창(Lance)과 활, 칼 등을 장비했다.
마갑 + 사람 갑옷을 한꺼번에 갖추는 것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Cataphrcatii는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엘리트 병종이었다. 고대 그리스 중장보병 Hoplite의 갑옷 한벌을 사는데 드는 비용은 요즘으로 치면 자가용 1대 가격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John Warry 저, Warfare in the Classic World p34참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Cataphrcatii는 Hoplite에 비해 최소한 2~4배의 갑옷 재료가 필요하다. 결국 거칠게 비교하자면 Cataphrcatii 기병의 장비 일체를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이 자동차 2~4대 가격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대단히 거친 비교이긴 하지만, Cataphrcatii 장비를 보유하는데 경제적 부담이 만만하지 않다는 정도로만 이해를 해두자. 동양에서도 선비단부가 후조의 석륵에게 화친을 요청하면서 금은과 함께 개마(鎧馬; 말갑옷을 의미)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금은과 나란히 보낼만큼 말갑옷이 비싸고 가치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Cataphrcatii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지 않아 정확한 갑옷의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제 발굴사례가 있다. 유프라테스 언덕(Euphrates) 에 있는 한 고대 그리스 유적에서 이 시기의 말갑옷(馬甲)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은 기원전 4세기 무렵 건설되고, 기원후 256년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파괴된 곳이다. 따라서, 마갑(馬甲)의 하한선은 대략 기원후 3세기 정도로 볼 수 있고, 그 이전으로 소급시킬 여지도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마갑(馬甲)은 전형적인 찰갑 형태의 갑옷이며, 안면부, 목,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통 갑옷은 말 전체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안장의 앞부분 절반만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고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중장기병의 뿌리

대체로 기원전 3~2세기가 되면 중장기병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중장기병이나 말갑옷이 소급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말갑옷은 아니지만 말갑옷의 뿌리로 생각되는 형태는 그 이전에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들어 기원전 7~6세기의 앗시리아(Assyria) 기병들의 말에는 천이 씌워진 경우가 있다. 이 무렵 앗시리아 기병의 말에는 안장(Saddle)이 없었기 때문에, 이 천은 안장 역할도 부분적으로 하고 장식효과와 부분적인 방호 효과도 있었던 것 같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갑옷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은 기원전 5~4세기 무렵 페르시아 제국에서 출현했다. 기원전 401년 페르시아 제국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벌어졌다. 이때 그리스 중보병 1만3천명이 용병으로 내전에 참전했다가 페르시아 기병과 전투를 벌인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사에서 '일만 용사의 탈출'로 알려진 사건) 이 사건을 언급한 고대 아테네 역사가 크세노폰 (Xenophon)에 따르면 이때 Cyrus the Youonger's (우리말로 키루스2세, 혹은 사이러스2세로 알려진 인물) 근위기병들의 경우 사람 뿐만 아니라 말에도 보호장비가 있었다고 한다. 즉, 말 머리에는 청동제 금속판이 씌워져 있고, 말 가슴에도 청동제 Apron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기원전 5~4세기 무렵의 페르시아 중장기병은 창으로 무장하고 정면돌격하여 충격효과를 노리는 전형적인 중기병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기병이었다. 이들은 그리스식 단검과 제블린(Jevelins, 여기서는 자루가 짧은 던지는 창을 의미)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간에, 기원전 401년의 페르시아 기병 중에는 중장기병의 뿌리로 볼만한 기병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하에 기원전 3~2세기, 보다 확실하게는 기원후 3세기가 되면 전형적인 중장기병이 출현한 것이다.
고대 유럽의 중장기병

한편, 유럽 국가들 중에서 최초로 중장기병을 보유한 국가는 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중장기병은 로마인들이 주축이된 병종은 아니었고, 사르마티아(Sarmatia)인 식민지 병사 혹은 용병들이 주축이 되었다. 사르마티아인들도 스키타이-이란-페르시아계열의 종족이다. 최초로 사르마티아 기병이 로마군에 포함된 시기는 기원 65년 무렵이다. 이후 몇차례의 변화과정을 겪다가 최종적으로는 기원 365년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중장기병 부대가 재건된 바 있다. 로마군의 중장기병도 페르시아제국의 중장기병과 마찬가지로 전체 기병 중에 일부만을 차지 했을뿐 핵심적인 병종은 아니었다. 그림 속의 중장기병은 3~4세기대의 로마제국의 중장기병 (Clibanari)이다. 로마제국에는 Clibanari보다 더 중무장한 Klibanophoroi라는 중장기병도 존재했다.
이러한 로마제국의 중장기병 Cilbanari와 Klibanophoroi는 뒷날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중장기병인 Klibanophpros로 계승되어 10세기까지 명맥이 이어진다. 14~15세기의 고딕 중장기병을 비롯한 유럽의 중장기병은 판갑(Plate Armour)계열의 갑옷을 쓰기 때문에 찰갑 (Scale Armour)계열의 갑옷을 쓰는 페르시아 계열의 로마 중장기병과는 뿌리가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편입니다
고구려 중장기병과 Cataphratcs의 비교사적 검토 (중)
- 2000년 10월 13일 공개
- 참고자료
5.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원 -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원과 3~5세기 중국의 중장기병
국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고구려가 4세기 이래 활발한 대외정복전을 수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면 중장기병의 출현시기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고구려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했는지 아니면 다른 국가로부터 전래받은 것인지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인철씨는 그의 논문(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1996)에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동천왕 20년(246)에 철기 5천을 거느리고 위의 대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군이 개마와 갑주로 무장한 시기는 3세기 전반경이었던 모양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이인철씨는 삼국사기의 동천왕조의 鐵騎(철기)가 중장기병(Cataphracts)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말해 이인철씨는 고구려 중장기병이 최소한 서기 3세기 중엽 경에는 출현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논문에서 이인철씨는 다소 다른 뉘앙스의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시기에 전연으로 부터 동수와 같은 인물들이 망명해옴에 따라 전연으로부터 무기와 무장의 제작기술이 고구려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고국원왕대에는 모용황의 침략을 받았는가 하면, 백제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이는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상관없이 고구려군은 벽화에 보이는 상태와 같은 정도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쇠뇌의 제작이나 그 사용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중략) 낙랑 대방 유민들의 제철제련기술이 고구려의 무기와 무장제조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점도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중략) 고구려군이 벽화와 비슷한 정도로 철제갑주로 무장하고 쇠뇌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된 시기는 광개토왕대로 짐작된다"
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인철씨는 고구려 무기와 무장의 발달에 전연으로부터의 망명객과 낙랑, 대방 유민이 공헌을 했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제시할 뿐 고구려 중장기병이 정확하게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인철씨는 고구려가 중장기병을 보유했던 이유 중에 하나로 중국에서의 쇠뇌의 발달을 들고 있다. 중국에서 후한말~삼국시대까지 쇠뇌의 보급이 대폭 확대되었는데, 이는 기병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쇠뇌에 제압되지 않기 위해 기병의 갑옷이 강화됨에 따라 중장기병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학자 篠田耕一의 "武器と防具-中國編"에서 인용한 주장이다.)
이인철씨의 주장을 다시 요약해 보면 3세기 중엽 이미 중장기병의 출현했지만, 본격적인 수용이라고 할 수 없으며, 낙랑, 대방유민을 흡수하여 선진기술을 소화한 광개토왕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중장기병이 대량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그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화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4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안악3호분의 행렬도는 5세기초로 추정되는 약수리 고분의 행렬도에 비해 훨씬 등장인물 숫자가 많고 화려한데 이는 안악3호분에 묻힌 사람이 약수리 고분에 묻힌 사람보다 고위급의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장기병(개마무사)의 숫자는 안악3호분이 8명인데 반하여 약수리 고분은 14명으로 두배 가까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서기 4세기 후반 ~ 5세기 초 사이에 고구려 병종구성에 본질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벽화고분을 이용해 병종변화를 추정하는 방법론은 1983년에 일본학자 掘田啓一이 그의 논문"高句麗壁畵古墳にみる 武器と武裝 - 特に安岳3號墳と藥水里壁畵古墳を中心に"에서 제시했던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부연 설명없이 삼국사기의 동천왕조의 철기는 곧 =중장기병이라는 단순한 논리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고국원왕대의 패전이 수준낮은 무기체계 때문이라는 주장이나, 나아가 광개토왕대의 정복 기반이 새로운 무기체계 때문이라는 주장 역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아무리 4~5세기 시점이라고 해도 찰갑과 쇠뇌가 승패를 좌우할만한 결정적인 무기체계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과연 이 시점까지 고구려에서 쇠뇌와 찰갑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스럽다. 나아가 동천왕대에 5천의 중장기병이 존재했다고 긍정한 마당에 동천왕대의 중장기병과 광개토왕대의 중장기병이 어떠한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인철씨의 논리 자체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이인철씨의 주장은 광개토왕대의 정복활동을 중장기병의 본격적인 수용과 무리하게 연결지어 해석하려는데서 나온 것 같다. 다만, 필자로썬 최소한 4세기말~5세기 초 사이의 특정시점에 고구려 중장기병의 비율이 확대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여호규씨는 그의 논문(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1999)에서 중장기병의 기원을 보다 직접적으로 북중국에서 찾고 있다. 여호규씨의 논문을 보면 특별하게 전거를 밝히지 않은체 중국에서 개마무사가 후한 말경 (소설 삼국지의 배경시대)에 등장했다고 적고 있다. 서기 200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한 관도전투 당시 원소군의 기병 가운데 개마는 300필, 조조군의 기병 가운데 10필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시점에선 말갑옷이 상급자의 신분 과시용이거나 측근 호위부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호규씨에 따르면 4세기 이후가 되면 중국에서 개마무사(중장기병)가 대대적으로 유행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진서(晉書)나 자치통감을 보면 312년 후조의 석륵이 선비 단부를 격파할 때 개마 5천필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316년에는 기담을 격파하면서 개마 1만필을 노획한 것으로 나오며, 서기 400년경에는 후진 요흥이 선진 걸복건귀를 격파할 때는 개마 6만필을 노획했다고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개마는 말갑옷을 의미하므로 최소한 서진시대, 즉 4세기 이후가 되면 중국에서도 중장기병을 대량으로 운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연의 수도가 있었던 중국 조양근처에서 최근 300년대초 (4세기초)로 추정되는 마갑용 장식품이 출토된 적이 있다고 한다. 대략 370년경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중국 조양 원대자 벽화고분에도 개마무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남북조 시절의 벽화나 화상석에 보면 고구려 벽화와 비슷한 차림새의 개마무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은 필자가 보유하고 있지 않으나, 진서(晉書)를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위 기록 뿐만 아니고 곳곳에서 개마(鎧馬)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들어 진서 재기의 유요(劉曜)전에도 "乘鎧馬,動止自隨"라는 구절이 보이고, 석륵전에도 "勒笑曰是勇將之計也. 各賜鎧馬一匹"라는 구절이 보인다. 또한, 선비단부를 격파했을 때의 기록을 보면 "獲鎧馬五千匹 (중략) 遺使求和 ,送鎧馬金銀"라고 하고 있어 개마가 화친 요청시에 금은과 나란히 조공물로서도 등장하고 있다. 측근 호위부대의 장비로도, 선물로도, 화친요청시에 제출하는 값비싼 조공물로써도 개마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관심을 끄는 점은 서기 312년 석륵이 선비단부를 공격했을 때에 선비 단부가 이미 개마 5천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선비족은 반농반목의 반유목민족이지만 이 무렵의 선비단부는 어느 정도 정착생활을 했었던 것 같다. 변방부족인 선비단부가 5천필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면 적어도 서기 4세기 전반경에 북중국 일대에서 중장기병이 일반화된 것임이 분명하다.
여호규씨는 이런 북중국의 상황을 설명한 후 고구려 중장기병이 북중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동천왕대의 철기가 중장기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3세기 중엽대에 5천의 개마를 보유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당시 고구려에 중장기병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5천 정도의 대규모 중장기병이 존재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취지인 것 같다.
여호규씨는 고구려 중장기병 기원을 탐색하면서, 고구려가 4세기 초에 선비 단부와 접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319년 고구려는 선비 단부, 우문부와 함께 전연의 극성을 포위한 적이 있는데, 선비 단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기 312년에 이미 개마 5천필을 보유했던 집단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빠르면 4세기 초(319년의 극성 포위전), 늦어도 342년의 對전연 전쟁 시점까지는 최소한 중장기병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는 중장기병이 등장한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대해 설들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안악3호분 완성시점(서기 357년)에는 고구려인들이 중장기병이 존재를 알았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여호규씨는 동수를 비롯하여 북중국, 선비계열 왕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망명객들이 고구려에 중장기병을 전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동수는 전연 모용황의 사마(司馬; 국방장관 격)였으므로 북중국에 유행하던 개마를 고구려에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두 학자의 주장은 모두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원을 북중국 내지 한화된 선비족 국가들에게서 찾고 있다. 고구려의 중장기병과 중국의 중장기병이 거의 동일한 이상 이들 중장기병이 각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구려에서의 중장기병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직까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중장기병 출현이 기록상 대략 서기 3세기 초이고, 고구려의 경우에도 올려보면 동천왕대(3세기 중엽) 정도이므로 기록상의 누락을 감안하다면 선후관계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동천왕은 246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에 맞서 싸울때 철기(鐵騎) 5천을 이끌고 싸웠다는 기록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進而擊之") 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철기는 단순히 사람만 갑옷으로 무장한 경우나 단순히 정예기병을 의미로도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동천왕의 이 철기가 반드시 중장기병일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서기 4세기 초에 선비족 계열집단이 이미 최소한 5천명의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서기 3세기 중엽 (약 50년전) 동천왕 시절에 고구려가 5천명의 중장기병을 보유했다고 가정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즉, 고구려는 빨리 잡으면 최소한 3세기 중엽대에 이미 중장기병을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늦게 잡아도 최소한 5세기 초에는 중장기병을 상당비율로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중국의 중장기병은 기술적으로 보았을때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일까? 중국에서의 중장기병 발전 과정도 아직 명쾌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형태상으로 보아 중국의 중장기병이나 페르시아의 중장기병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발견하기 어렵다. 최소한, 페르시아의 중장기병이 서역 지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본학계에서는 후한~삼국시대에 걸쳐 중국에서 쇠뇌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게 되자, 서역국가들이 중국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마갑을 채용하게 되었고, 중국도 이를 보고 마갑을 도입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만, 유럽과 서남아시아지역의 경우 기록에 비해 말갑옷 실물이 그렇게 많지 않고,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실물이 늦게 잡으면 서기 3세기대의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비해 그렇게 시기가 앞서지는 않는다. (중국도 명확한 실물 유물은 아직도 없음) 더구나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의 戰車용 말에 부분적으로 말갑옷을 입힌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3세기대의 유프라테스의 말갑옷은 말의 절반만 가린 형태이다. 어쩌면 말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완전한 말갑옷의 뿌리는 페르시아계 국가가 아닐지도 모르므로, 중장기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열린 마음으로 발굴성과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현재로서는 중장기병이 페르시아에서 출현해서 서역->중국->한국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6. 말갑옷 관련 용어와 말갑옷의 분류
말갑옷 관련 용어

무경총요(武經總要)는 증공량曾公亮, 정도丁度 등이 1040~1044년에 걸쳐 집필한 종합적인 병법서적이다. 특정 개인이 기획한 책은 아니며 송나라의 황제인 인종仁宗의 명령에 따라 집필한 것이므로 북송시대의 국가적 프로젝트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말갑옷의 상세한 그림과 세부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말 갑옷 종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사용된 말갑옷은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재료상으로 보았을 때 가죽으로 만든 가죽제 말갑옷과 철로 만든 철제 말갑옷으로 분류할 수 있다.
둘째, 모양과 구조를 기준으로 나눈다면 경갑, 흉갑, 신갑 등이 하나로 되어 있는 일체형 말갑옷과 경갑, 흉갑, 신갑, 고갑 등이 각각 분리되어 있는 조립식 말갑옷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조립식 말갑옷이란 용어는 필자가 임의로 만든 용어이다.) 이 두가지로 분류할 수 없는 중간적인 형식의 말갑옷도 존재한다.
흔히 일체형 말갑옷은 4~6세기대의 북중국에서 주로 사용한 것이고, 조립식 말갑옷은 같은 시기 남중국에서 주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경총요(11세기경의 책)에 나오는 말갑옷은 조립식 말갑옷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조립식 말갑옷은 남중국에서 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대 페르시아의 중장기병용 말갑옷의 경우에도 중국의 말갑옷과 완전 동일한 구조는 아니지만 일체형과 조립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말갑옷이 둘다 존재한다. 따라서, 조립식 말갑옷이 남중국에서 출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남중국에서 조립식 말갑옷을 많이 사용한 것은 사실이고 이런 전통이 송나라 시대에까지 이어졌던 것은 분명하다.
7. 고구려 고분벽화의 중장기병과 말갑옷
고구려 중장기병의 말갑옷은 가죽제일까 아니면 철제일까? 일단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나 가야의 말갑옷은 철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말갑옷도 기본적으로 철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 가죽제 말갑옷을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흔히 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벽화에서 색깔로 가죽제인지 철제인지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철제 말갑옷이라해도 칠을 하는 경우 겉모습만으로 가죽제 말갑옷과 구분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고고학,역사학,복식사 전공자들은 일반적으로 약수리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중장기병 중에 굵은 선이 표시된 말갑옷은 가죽제로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일체형과 조립식 말갑옷을 모두 사용했던 것 같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말갑옷의 형태를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는 벽화는 몇개되지 않지만, 일체형, 조립형, 절충형 등 겉모습으로 구분가능한 몇 종류의 갑옷이 확인된다.
벽화상에 등장하는 중장기병은 거의 대부분 철제 찰갑을 입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중장기병은 가죽제 갑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외견상 명백하게 가죽 갑옷으로 식별가능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통구 12호분의 중장기병이 입고 있는 갑옷도 판갑이라고 추정하는 의견이 있는데, 외견상 명백하게 식별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또한, 벽화상에 등장하는 중장기병은 거의 예외없이 창을 들고 있으며, 창 이외의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나 기타 보조무장을 하고 있는 경우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래에 도면이 나오지 않지만 평남 대동군의 팔청리 고분 (5세기 초로 추정) 벽화, 평남 용강군 대안리 1호분 (5세기 중엽으로 추정) 에 나오는 중장기병들도 모두 찰갑을 입고 있으며 창을 들고 있다. 적어도 벽화상으로 본다면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창을 주무기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쌍영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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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영총 중장기병 (남포시 용강군 용강읍) 5세기 말(末)로 추정 |
쌍영총에 등장하는 말갑옷은 조립형 말갑옷에 가깝지만 무경총요의 말갑옷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목 갑옷(경갑,계항)과 가슴갑옷(흉갑, 탕흉)은 구분되지 않고 일체형으로 되어 있으나 목 갑옷과 몸통갑옷(복갑,마신갑)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갑옷으로 되어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엉덩이 윗덮개(마수면렴)와 엉덩이 갑옷(고갑,탑후)도 몸통갑옷과는 구별되는데, 그림이 희미해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일부러 구분되게 그린 것인지는 분명한 것 같지 않다.
엉덩이 윗덮개의 장식 혹은 깃대꽂이(기생 奇生)로 생각되는 그림이 기괴할 정도로 커다랗고 요란하게 그려져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쌍영총의 벽화는 현대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세련되고 사실적인 그림풍을 보여주므로 이 커다란 장식이 실제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천으로 된 깃발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마구로는 안장이 확인되나, 등자는 그림이 희미해져서 식별되지 않는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의 투구는 이른바 '만곡종장판주(구부려진 가늘고 긴 판을 연결해서 만든 투구)'다. 투구의 볼가리개는 투구와 같은 재질로 된 금속제 처럼 보이지만 분명하지 않다. 투구의 복발 위에 장식용 술이 달려 있다. 투구 좌우 측면에 뿔 모양의 장식이 보이는데 단순히 얇은 판 형태의 장식인지 아니면 뿔모양의 장식품을 부착한 것인지는 잘 식별되지 않는다. 목에는 나팔 모양의 경갑이 뚜렷하게 식별된다. 몸통의 갑옷은 찰갑이다. 특이하게도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의 팔 전체가 찰갑편으로 쌓여있어 단순한 상박갑(上膊甲)이 아니라 통수개(筒袖鎧)처럼 팔의 소매 자체가 찰갑으로 만들어진 형태의 갑옷 같다. 허벅지에서부터 발목 부근 까지도 찰갑이 감싸고 있다. 복식사 전공자들은 유고형 갑옷(바지형태의 갑옷)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엔 상갑(치마갑옷)의 측면 모습인지 아니면 유고형 갑옷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것 같다. 무장은 창인데 모 혹은 삭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창에도 깃발이 부착되어 있다. 창 이외의 보조무장은 보이지 않는다.
개마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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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총 총주착개마지상 (평양시 삼석구역 로산동) |
그림 가운데를 보면 '총주착개마지상(塚主着鎧馬之像)'이란 한자가 보일 것이다. '무덤 주인이 개마(鎧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란 이란 뜻이다. 이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서도 말갑옷을 입은 말, 다시 말해 중장기병용 말을 개마(鎧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목부분이 희미하여 확실하지 않지만 목갑옷(경갑,계항)은 장착하지 않은 듯하다. 가슴갑옷(흉갑,탕흉)은 사람에 가려서 몸통갑옷(복갑,마신갑)과 일체형인지 별도의 갑옷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엉덩이 윗덮개(마수면렴)과 엉덩이 갑옷(고갑, 탑후)는 몸통갑옷과 분리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말갑옷 그림 중에 조립식 말 갑옷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엉덩이 윗 덮개 혹은 깃대꽂이(기생)에는 쌍영총 보다 더 요란한 장식물이 부착되어 있다. 장례용품인지 평상시 부착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구로는 안장과 등자가 선명하게 식별된다.
삼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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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실총 (중국 집안현 통구 태왕향 우산촌) 4세기 말~ 5세기초로 추정 |
삼실총 벽화의 중장기병 그림은 희귀하게도 실제 전투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벽화에는 두명의 중장기병이 등장하고 있는데 사람의 갑옷과 말 갑옷 모두 형태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오른쪽 중장기병이 고구려인으로, 왼쪽의 중장기병은 중국 혹은 신라나 백제의 중장기병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쪽 중장기병의 말갑옷은 목 갑옷(경갑,계항)이 몸통 갑옷과 분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가슴갑옷(흉갑, 탕흉)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중장기병 말갑옷의 뒷부분을 보면 몸통 갑옷과 분리된 갑옷을 식별할 수 있는데 말 엉덩이 덮개(마수면렴)를 표현한 것인지 엉덩이 갑옷(고갑, 탑후)을 그린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여하간 기본적으로 조립식 말갑옷의 일종인 것 같다.
말에 타고 있는 기병은 찰갑을 입고 있는데 상박갑의 경우 일반적인 덮개 모양의 상박갑인지 아니면 소매 형태를 가지고 있는 통수개 형태의 갑옷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반신에도 찰갑을 입고 있는데 갑옷의 길이로 보아 상갑(치마갑옷)이 아니라 유고형 갑옷(바지형태의 갑옷)인 것 같다. 투구는 어떤 투구를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뿔 모양의 장식만은 잘 식별된다. 무기는 창을 들고 있으며 다른 보조 무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약수리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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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리 고분의 중장기병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 5세기초로 추정 |
약수리 고분벽화의 중장기병 그림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말갑옷이 식별된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금속제의 찰갑 형태의 갑옷과 무늬가 없는 말갑옷(굵은 줄만 보인다) 두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무늬가 없는 말 갑옷은 가죽제 말갑옷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람의 갑옷은 잘 식별되지 않으나 말 갑옷 종류에 상관없이 투구모양과 무기(창)가 동일하다.
안악3호분

안악3호분 행렬도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 서기 357년, 4세기 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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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중장기병 (확대) |
안악3호분에 나오는 말갑옷은 목갑옷과 가슴갑옷은 일체형으로 되어 있다. 목갑옷과 몸통 갑옷이 별도로 되어 있는지는 사람의 다리로 가리워져 있어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목갑옷과 몸통갑옷의 찰갑편(갑옷 조각)의 모양,크기,색깔은 쉽게 구별된다. 엉덩이 윗덮개와 엉덩이 갑옷은 몸통 갑옷과 별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잘 식별된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은 찰갑을 입고 있는데 투구는 '종장판주'이며 복발에 장식용 술이 달려 있다. 어깨에서 팔꿈치에까지 갑옷이 확인되는데 일반적인 상박갑의 형태여서, 쌍영총의 갑옷과는 형태가 다르다. 허벅지에서부터 다리까지도 찰갑이 확인되는데 쌍영총의 갑옷과 유사한 형태이다. 역시 상갑의 측면인지, 아니면 유고형 갑옷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유고형 갑옷 처럼 보인다. 무기는 창을 들고 있고, 다른 보조무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덕흥리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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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행렬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서기 408년, 5세기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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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 고분 중장기병 (확대) |
덕흥리 고분 벽화의 말갑옷은 희미하긴 하지만 일체형 말갑옷 처럼 보인다. 말 엉덩이 윗덮개의 장식 혹은 깃대꽂이(기생)에 부착된 장식물은 쌍영총이나 개마총의 것보다 작고 간단한 편이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창을 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병사들의 갑옷도 쉽게 식별되지 않는데, 색깔이 갈색인 점을 들어 가죽제 갑옷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2편입니다
고구려 중장기병과 Cataphratcs의 비교사적 검토 (하)
- 2000년 10월 18일 공개
- 참고자료
8. 중장기병의 전제조건
중장기병의 전제조건
약간 논점을 바꿔 페르시아에서 중장기병이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자. 일반적으로 중장기병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세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말갑옷을 버틸만한 우수한 종자의 말이 필요하다. 오늘날 경마경기의 기수들은 하나같이 50kg 안밖의 체중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경마용 경주마들은 말 중에서도 가장 혈통이 좋은 말들만 고른 것인데도 10~20kg 정도의 기수 체중에 따라 말의 속도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착용하는 갑옷은 10~30kg 이상 나가는 것이 보통이고, 말갑옷은 20~50kg 정도가 된다고 한다. 결국 중장기병용 말의 경우 사람 2명을 태우고 전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아시아 지역은 고대 명마의 산출지였고, 이들의 혈통은 현대 명마의 대표종인 아라비아말로 연결된다. 페르시아제국은 전성기에 소아시아를 그 영토로 하고 있었으므로 좋은 말이라는 조건은 기본적으로 충족이 된 셈이다.
둘째, 기본적으로 기병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어야 한다. 중장기병은 고대 세계에선 극도로 비싼 무기체계였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말에 갑옷을 씌운 것은 그 만큼 기병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고대 기마민족은 스키타이족이었다. 오늘날 서구학계의 통설은 스키타이족을 이란계 종족으로 간주하고 있다. 페르시아는 다름아닌 이란의 옛이름이며 대표적인 고대 이란계 국가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은 스키타이족 같은 이들 친척뻘되는 기마민족들과 많은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기병을 중시하는 전통이 만들어져다. 이는 마치 전국시대 조趙나라가 흉노족에 시달리다가 기마전투를 중시하게 된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경기병 전통이 강한 페르시아에서 중장기병이 출현한 것은 어떻게 보면 그 만큼 기병을 중시하고, 기병전통이 뿌리 깊은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가 그리스처럼 중보병을 중시하는 국가였다면 중장기병이 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째, 말갑옷을 만들만한 기술과 경제력이다. 철제 찰갑(Scale Armour, Lamellar Armour)은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말갑옷으로 쓰기 위해선 고대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발전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비용문제는 누차 강조했으므로 말할 것도 없다. 중장기병을 실전적 병종으로 운용할 정도로 일정규모 이상 보유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수적이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고대 세계에서 중장기병은 극도로 비싼 고급 무기체계였다. 이를 뒷바침하기 위해서는 중장기병 구성원이 고급 귀족출신이어서 스스로 자신의 장비를 조달할 수 있거나, 아니면 상당히 부강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페르시아제국은 세계 문명의 근원인 고대 서남아시아 문명의 정통 계승자였으며, 부강한 제국이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이런 요건이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첫번째, 삼국시대 사용한 말은 최소한 두 종류 이상으로 추정된다. 하나는 주몽이 탔다고 알려진 유명한 과하마(몽고말의 일종으로 생각됨)이고, 또하나는 서역계의 호마(胡馬)이다. 호마(胡馬)의 경우 중장기병용으로 아무런 무리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과하마를 비롯한 몽고말의 경우 상당한 지구력과 힘이 있기 때문에 말갑옷의 무게 자체는 충분히 견뎌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키가 작기 때문에 정면돌격시의 충격효과 위주로 운용하는 중장기병용 말로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키가 작은 말은 근접전 시에 보병이 대항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과하마가 중장기병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필자의 막연한 추정에 불과함)
두번째, 고구려의 경우 주몽의 건국신화에서부터 말과 관련된 전승이 풍부하게 전승된다. 고구려의 경우 대단히 이른 시기부터 기병을 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만큼 기병도 중시했던 것 같다.
세번째, 고구려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할 기술력과 경제력이 있었는가? 우선 기술적 측면에 볼때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말기에 이미 찰갑이 사용되었으므로 적어도 3세기 대의 고구려에서 찰갑을 제조할만한 능력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경제력 문제는 쉽게 판단하기 쉽지 않다. 4세기말~5세기 이후의 고구려라면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충분히 대규모의 중장기병을 뒷받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안산 철산으로 대표되는 만주의 철산지는 고구려의 철제 무장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했을 것이다. 하지만 3세기의 경우는 어떨까? 이는 고구려의 성장 과정을 평가하는 사학적 논점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서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고구려 중장기병도 귀족적 성격의 군대라고 가정한다면 3세기대에 대량의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도 고구려 사회의 성격을 둘러싼 사학적 논점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쉽게 단정지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고구려는 어떤 필요성에 의해 중장기병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는 4세기 이후 북중국에서 중장기병이 유행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성급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앞에서 이인철씨가 인용한 일본학자의 주장, 후한~삼국시대에 걸친 쇠뇌의 발달이 중장기병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이러한 사학적 가설을 검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쉽지만 이러한 역사적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현재로서는 그런 식의 해석도 존재한다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장기병은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병종이다.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기병에서 대표되듯이 경기병(특히 궁기병) 전통이 뿌리 깊은 국가이다. 그러한, 경기병 전통이 뿌리 깊은 국가에서 중기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 중장기병이 출현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는 고구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의문이다. 고구려는 어느 국가보다도 활쏘기를 중시하는 나라이며, 명궁으로 이름이 높은 나라가 아닌가?
일반적으로 서구의 군사사가들은 흔히 유럽은 중기병의 전통이 강하고, 아시아 국가들은 경기병의 전통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페르시아나 중국 등에서 중기병으로 분류할만한 기병부대가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중앙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유목민족의 경우에도 갑옷으로 무장한 궁기병(Heavy Horse Archer)가 지속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단순히 아시아권 국가의 기병을 경기병이란 범주로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아시아=경기병, 유럽=중기병식의 상투적인 이해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필자도 오랜기간 아시아 기병=경기병이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굳이 중기병과 경기병의 이분법 시각으로 볼 필요가 없이 오히려 아시아권 국가들에서는 궁기병 (弓騎兵;Horse Archer)이 항상 기병부대 중에 상당 비율을 차지한데 반해 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궁기병이 빈약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중장기병의 경우 기병을 중시한 정주국가(定住國家)에선 간간히 사용된 병종이었던데 반해 순수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중기병은 보유해도 중장기병을 보유한 경우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나 중국 같은 아시아권 정주국가들이 활을 기반으로한 경기병적 운용방식 (기습, 교란, 정찰, Hit and Run)에 익숙했지만 보병이나 중기병 기타 병종을 총집결하여 정면대결을 펼치는데도 익숙한 국가였다. 이에 반해 순수 유목민족의 경우 정주국가에 비해 항상 숫적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Hit and Run 식의 전투를 선호 할 수 밖에 없었다. Hit and Run 형태의 전투에서 말갑옷은 그렇게 적합한 장비는 아니다. 또한, 한명의 기병이 여러 말을 보유한다고해도 중장기병용 말갑옷은 기병 특유의 장거리 기동에는 결코 적합한 장비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순수한 유목민족의 경우 드물게 중장기병을 보유하기도 했지만 중장기병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인 병종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목민족이라고 해도 중장기병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귀족이나 지휘관급의 인물의 경우 중장기병 장비를 갖춘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여러 기록들을 감안하여 보면 유목민족이라하더라도 인접 정주민족들의 국가를 정복한 경우거나, 단순한 부족집단 수준이 아니라 강력한 유목제국을 건설했을 경우에는 어김없이 중장기병도 출현했던 것 같다.
활을 보유한 궁기병을 중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가 중장기병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 보면 그렇게 특이한 점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시아- 궁기병 중시 / 유럽- 궁기병 전통 빈약,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중장기병 보유 / 순수한 유목민족-중장기병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일 것 같다. 어느 국가 못지않게 활쏘기를 중시하고, 기마상태에서의 활쏘기에 능했던 고구려에서 중장기병을 보유한 것은 고구려가 순수한 유목민족국가가 아니라 기병을 중시한 정주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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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장기병 갑옷> 그림 속의 몽골 중장기병은 원나라에 살던 유럽인 카르피니의 언급을 참조하여 그린 상상화이다. 위에도 나오는 9세기 경의 티벳 중장기병의 장비를 많이 참조하여 그린 그림이다. 갑옷과 말갑옷은 철제가 아니라 가죽제 찰갑 (札甲: Leather Lamellar Armour)의 일종이다. 이 가죽제 찰갑 Lamellar 갑옷은 몽골의 고유장비가 아니고 중국,일본, 티벳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 흔히 사용한 갑옷이다. 이그림도 굳이 몽골의 중장기병 그림이라고 생각할 필요없이 중세의 표준형 아시아 중장기병 갑옷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명재상이었던 유성룡 집안에서 전혀 내려오는 갑옷도 이 가죽제 찰갑의 일종으로 생각되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된 갑옷이라고 할 수 있다. |

9. 실전에서의 중장기병의 운용
중장기병은 무적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인철씨도 중장기병의 한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실제 전투에서 중장기병은 적이 쏘는 화살에 과감하게 대응하면서 적진을 향해 돌진할 수 있으나 경무장의 기병에 비해 질주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퇴각할 시기에 적의 경무장 기병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또, 전투에서 기병이 보병에 비하여 반드시 유리한 것도 아니다. (중략) 중무장한 고구려의 기병이 적의 보병 대열을 향하여 돌진함으로써 적의 전열을 흩뜨리면서 적에 대해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기병은 주로 정찰을 위한 목적이나 상대적으로 취약한 적군의 측면 또는 후면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 정찰이나 적군의 측면이나 후면 공격은 기동력이 빠른 경무장 기병이 훨씬 유효하다. 기병 공격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보병의 근접지원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인철씨의 설명은 중장기병과 중기병의 개념을 구별없이 설명한 내용인듯 하나 중장기병의 한계를 비교적 잘 설명한 것 같다.
사실 중장기병이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실질적인 효과는 말에게도 방호력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 말 위에 탄 기병이 아무리 갑옷으로 중무장했다해도 말이 노출되어 있다면 화살 몇 발에 기병의 말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전투 직전까지는 기병의 효과를 살릴 수 있지만 전투 순간에는 커다란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 기병이다. 중장기병은 그러한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 주는 효과를 거둔다. 하지만, 얻는 것 만큼 잃는 것도 많다. 페르시아 중장기병들도 그 무거운 무게 때문에 돌격시에도 빠른 속도로 돌입하지 못하고 Trot (속보 정도의 속도를 의미하는 승마용어)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기병은 경기병에 비해 속도를 덜 중시하지만 정면돌격을 통한 충격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속도는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중장기병은 기병의 중요한 이점인 속도를 상당 부분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중장기병은 장거리 기동에 많은 제한이 따른다.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몽골족들이 기본적으로 경무장 궁기병이었음에도 장거리 원정시에는 여러 필의 말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말의 지구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 당시 한국군 기마대대는 말발굽 손질없이 2주 정도 연속적으로 작전한 결과 대부분의 말들이 군마(軍馬)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중장기병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중장기병은 많은 한계가 있다. 실제 전사를 보아도 바투와 수보타이가 인솔하는 몽골군에는 상당수의 중장기병이나 중기병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경무장 궁기병이 다수였다. 이러한 몽골군과 유럽의 중기병, 중장기병들이 대결했을 때 몽골군이 압승을 거둔 바 있다. 또한, 그리스의 중보병들도 주변의 중장기병을 상대하는데 그렇게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비잔틴제국 (동로마제국) Tagmata (근위대)가 자랑하던 정예 중장기병 (Klibanophoros)도 투르크계의 셀주크 경기병과의 전투에서 완패를 당한 바 있다.
중장기병은 일반적인 중기병(사람만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이나 경기병, 보병 등과 결합했을 때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중장기병 자체만으로는 중보병이나 중기병, 경기병에 비해 전투효율이 떨어지는 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 일정 기간 중장기병이 핵심병종이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는 중장기병 vs 중장기병 형태의 전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만약 당시에 경무장 궁기병을 수준급으로 운용하는 국가가 유럽에 있었다면 순식간에 중장기병의 왕자적 지위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몽골군의 승리는 그 점을 더욱 잘 보여준다. 페르시아의 중장기병도 항상 경기병과 함께 운용되었지, 중장기병 자체가 핵심병종으로 운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활을 기반으로한 경기병 못지 않게 창을 기반으로한 중기병의 장점도 많다. 그러나, 속도를 중시하는 일반적인 중기병이냐, 아니면 말의 방호력을 더 중시한 중장기병이냐는 관점에서 볼때 중장기병이 중기병에 비하여 항상 우월하다는 증거는 마찬가지로 없다. 이런 모든 요소를 감안하고도 비용이 많이드는 중장기병을 선택하는 것은, 중장기병이 가지는 기본적인 가치(방호력 +충격력) 못지않게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효과, 특별한 귀족적 무사계층의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기병에 대항해서 전투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군대라면 중장기병 + 경기병의 조합은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 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 한정 시켜서 보았을 때 중장기병의 장단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한반도의 지형에서 중장기병이 가지는 약점 중에 하나는 지형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도로 사정은 악명이 자자한 편이다. 산이 많고, 좁고 험준한 지형, 더구나 변변한 다리 조차 없는 수많은 중소하천을 가진 한국의 지형에서 중장기병은 별로 적합하지 않는 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좁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 비틀거리면서 다리도 없는 개천을 건너가는 중장기병을 상상해 보라. 설사 전투전 갑옷을 말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수송한다해도 전반적인 부대기동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경우 평원이 많은 만주에도 영토가 많았으나 산악지역이 많은 대신라전이나 대백제전, 혹은 광개토왕대의 가야원정 같은 전투에서 중장기병이 가지는 효과는 의외로 제한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거리 전투가 아닌 어느 정도 정적인 성곽전투라면 중장기병이 효과를 거둘만한 부분이 있다. 각자 성곽에 거점을 둔 군대가 가까운 거리 내에서 제한적인 교전을 실시한다면 중장기병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다. 수성守城전투시에 성문 주변에서의 제한적인 추격전이나 교전이라면 중장기병의 이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문 주변에서의 공성攻城전투도 속도보다는 방호력이 요구되는 경우이다. 한국은 과거부터 성곽전을 매우 중시하여 왔고, 고구려 또한 축성술에서 수준급의 기술을 가진 국가이므로 이러한 성곽전에서 중장기병은 나름대로의 역할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들판에서 벌어지는 형태의 전투일 경우 중장기병과 일반적인 중기병, 경기병, 중보병, 보병을 정교하게 조합한다면 나름대로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장창을 보유한 숙련된 중보병이나 Hit and Run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궁기병이 존재하지 않는 군대라면 중장기병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동예에서 장창을 능숙하게 운용했다는 중국측의 기록을 보거나, 신라의 쇠뇌와 장창당(장창을 보유한 부대로 추정,직접적으로 고구려 중장기병에 대항해서 창설한 부대는 아님), 백제와 가야 신라의 중보병용 갑옷(판갑/短甲), 백제의 구겸(갈고리창), 신라나 가야의 가지극(가치창) 등을 보면 고대 한반도 상의 제국가들은 기병을 상대하는데 상당히 능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대기병 방어책은 고구려의 중장기병과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하게 발달했을 것이므로 그러한 상호작용의 미묘한 균형이 무너지는 시점에서는 전투의 승패를 넘어서서 국력의 성쇄와도 연결되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대의 폭팔적인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이러한 미묘한 상호작용의 균형이 무너진 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개연성만 인정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이 곧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근거는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빠르면 3세기 중엽, 늦어도 4세기 중엽이면 출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4세기말 이후 고구려 대외정복의 중요한 기반이었다는 주장은 가설일뿐 검증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누가 알겠는가? 실제로 고구려에서 중장기병은 왕의 근위대나 일부 귀족적 무사집단, 단위부대 지휘관의 전유물이었을 뿐이었는지...
비잔틴제국 Klibanophoros전투대형
일반적인 중기병과 경기병의 전투대형에 대한 기록은 세계 각국 역사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순수한 중장기병의 전투대형에 대한 기록은 흔하지 않다. 중장기병은 대부분의 경우 실전적인 병종이라기 보단 귀족이나 군 지휘관급이 위용을 과시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로는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Klibanophoros의 전투대형에 관한 기록이 거의 유일한 기록인 것 같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잔틴제국의 Klibanophoros는 중장기병의 일종이다. 중장기병용 장비의 가격이 극도로 비싸기 때문에 이들 Klibanophoros는 제국 근위대인 Tagmata에만 편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Klibanophoros의 전투대형은 Weage(쐐기형) 형태이다. 쐐기형 진형은 알렉산더 제국의 중기병 Companion 등 중기병 계열에서 전투대형으로 흔히 사용하는 형태이다. 첫째줄에는 20명이 서고, 열마다 4명씩 추가하여, 둘째줄에는 24명, 세째줄에는 30명...식으로 증가하여 열두번째 줄에서는 64명이 서게 된다. 또한 네번째나 다섯번째 병사는 창이 아닌 활을 소지한다. 이들 궁병들은 전투대형에 섞여 있다가 돌격 시에 후방으로 약간 빠져나와 쐐기의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실시한다. 실제 전투대형에서 이 표준대형이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고 10열 384명으로 구성된 대형도 사용하였다. 근위대인 Tagmata 내에는 2~3개의 Klibanophoros 부대가 존재하여 총 병력은 1000~1500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 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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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요나라 중장기병의 배치형태 | (우) 금나라 중장기병의 배치형태 |
아시아권 국가의 경우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 관련 진형 자료가 남아있다. 요나라에서는 제1선에 갑옷을 입지않은 경장기병이, 제2선에는 사람만 갑옷을 입은 갑주기병이, 제3선에는 중장기병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다. (원문의 표현은 제2선에 Armoured Cavalry, 제3선에 Man on Armoured Horse)
금나라에서는 좌우익의 날개에 중장기병을 배치하였다. 금군은 이들 중장기병을 이용해 양익포위전술을 주로 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들은 이들이 진정한 중장기병인지 아니면, 단순히 갑주기병(사람만 갑옷을 입은 기병)에 불과한 것인지 추가적으로 다른 자료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요나라와 금나라가 중장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한 것이 확실하다면 아시아권, 특히 중국 문화권의 중장기병 운용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를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추정 복원한 고구려 중장기병의 전투대형
그렇다면 고구려 중장기병의 전투대형은 어떤 형태였을까? 아쉽게도 어떠한 직간접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중장기병은 커녕 일반 기병이나 보병의 전투대형 중에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고구려 뿐만 아니고 조선시대 이전의 어떠한 전투대형 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경우 몇권의 진법 서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지만, 그 이전이라면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KBS 역사 스페셜 "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에서 제시한 고구려 전투대형은 무슨 근거로 나온 것일까? 한마디로 그 전투대형은 추정은 커녕 상상에 가까운 전투대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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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단계 전투전 포진 상태 | 제2단계 보병 궁수의 화살 공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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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계 중장기병 우익이 적 측면을 강타 | 제4단계 경무장 창기병 좌익의 측면 우회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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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단계 경무장 창기병이 적의 배후를 차단 | 제6단계 총공격 |
이 전투대형은 고구려 벽화고분 (안악3호분, 약수리 고분 등)의 행렬도를 기초로 병종을 결정한 후, 병종별 특성을 고려하여 만든 추정 복원도이다. 하지만, 의장병력이 분명한 행렬도가 실제 병종구성을 대변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기병과 보병이 앞뒤로 포진하는 형태의 진형도 상당히 "독특"해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병과 보병을 좌우, 혹은 중앙과 양익형태로 포진하든가, 아니면 보병의 후면에 기병이 포진하는 형태는 몰라도 병종별로 중장기병 1열, 경장 창기병 2열, 보병 창수 3열, 보병 환도수 4열, 보병 부월수 5열, 보병 궁전수 6열로 포진하는 형태라면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포진은 아니다. 이런 "이상한 진형"이 직접적인 근거가 있는 진형이라면 좀더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스페셜의 진형은 단순한 상상 복원도에 불과하며, 그것도 상당히 의심스러운 복원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시대의 전투대형을 복원하려는 시도 자체는 매우 참신하며, 경의를 표할만한 일이다)
더구나 애당초 중장기병 일부가 적의 배후나 측면 공격을 위해 운용된다면 처음부터 진형의 양익에 배치하는게 당연한데, 굳이 제1,2선에 배치하여 적에게 측면을 노출하면서 기동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위의 상상도가 전장 상황에 따른 우발적인 상황이라면 몰라도 애당초 측면공격을 위한 부대를 처음부터 정면 제1,2선에 배치한다고 설정하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고구려에 중장기병의 존재를 인정하고, 실제 전투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병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해도 고구려군에 궁기병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수렵도를 제외하고 궁기병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도 고구려가 궁기병을 포기했다고까지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구려에서는 대대적인 기마사냥대회를 통해 장수를 선발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인재 선발 시스템이 존재하는 국가에서 궁기병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조차 어렵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그림에서 궁기병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행렬도에 등장하는 고구려군은 의장병적이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실제 병종구성과는 전혀 다른 것은 아닐까?
원래는 글3개로 나눠져 있었지만 1개로 이었씁네다
아마도 가독성이 많이 떨어질꺼라고 생각하지만 잘읽어 주세요,그림도 포함되있었찌만 스크랩 불가라 어쩔수없이
이렇게 돼네요, 일경인데도 시간이 남아도네요ㅠㅠ
http://cafe.daum.net/byzantine출처는 여기고 이도형님이 이카페로 퍼왔따네요
혹시 제가 이렇게 퍼오는거 마음에 안드시는분들 말해주세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안퍼올께요







<투르크 중장 기병 갑옷> 그림 속의 투르크 중장기병 갑옷은 각종 자료를 기초로한 상상 복원도이다. 금속제 갑옷 처럼 그려놓았지만 도판에는 가죽제 찰갑 (Leather Lamella Armour)을 그린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때 주로 참고한 자료는 몽골 Situ Char-Chad 지역에 위치한 6~7세기 무렵의 암각화인데, 암각화 원화는 아주 간단한 그림이다. 따라서, 이 복원도는 말그대로 상상 복원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래 그림은 Char-Chad 암각화의 일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