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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펌)공손연의 정체성..공손씨 일족은 선비족이었다?

작성자치우천|작성시간19.09.19|조회수473 목록 댓글 0

*요동에서 군림했던 공손연. 그의 가문 배경에 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어 소개합니다.


출처는 새한국고대사(http://www.histopia.net/zbxe/neo)


▩공손연(燕)의 정체성

백제사 조회 수 2542 추천 수 268 2004.08.27 15:51:22

▩조약돌 *.153.157.167
일찍이 일도안사님이 중국의 삼국시대에 나타난 “공손연(燕)의 주류도 한족(漢族)으로는 보기 어렵고, 이 지역은 과거 백제의 건국지와 가까워 고구려를 따라 동진하지 않고 남은 부여인이거나 한화(漢化)한 선비족의 한 갈래가 아닌가 생각된다. 공손씨 자체도 본래 요동출신이다.”라고 주장하시고, 그 근거로

“공손연(公孫淵)이 3대에 걸쳐 요동에 있으니, 천자가 그 지방을 절역(絶域 :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나 나라 - 옮긴이)으로 여겨, 해외(海外 : 나라 밖)의 일로 위임시켰다.”

는『삼국지』「동이전」의 서문을 드셨는데요, 저는『자치통감』에 나오는 기사를 읽고 그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연나라를 다룬 그 책의 기사들을 살펴봅시다.

“오주(吳主 : 손권 - 옮긴이)가 장군 주하(周賀)와 교위 배잠(裴潛)에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요동으로 가 공손연으로부터 <마필(馬匹)>을 구해올 것을 명했다.”

―『자치통감』

→ 오나라가 연나라(공손연)에게서 말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연나라가 말을 키울 수 있는 곳에 자리잡았음을 뜻합니다. 말은 농경지가 아닌 초원이나 반농반목(半農半牧) 지대에서 잘 자라는 법입니다. 남북조시대의 남조 국가인 송나라도 북위(北魏)를 치려고 고구려에게서 말을 사들였습니다.

“지금 요동은 <융맥(戎貊 : 융족과 맥족)의 작은 나라>일 뿐입니다. <튼튼한 성벽과 방어전술도 없고 병기 또한 가볍고 무딘데다 개나 양처럼 정령도 없으니> 실로 폐하가 조서에서 밝히신 대로 (오나라 군사가 - 옮긴이) 가게 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멀고 거칠어 <곡물이 자라지 않고 백성들 역시 말을 타고 이사하기를 무상하게 합니다>. 만일 (그들이 - 옮긴이) 돌연 대군이 온다는 얘기를 들으면 스스로 대항키 어렵다고 생각해 <짐승이나 새가 깜짝 놀라 달아나듯이 멀리 도망갈 터이니 말 한 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빈 땅을 얻어 지킨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공격이 - 옮긴이) 불가능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자치통감』

→ 이 말은 손권이 공손연이 오나라의 사신들을 죽이고 위나라의 편을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화가 나서 연(燕)나라를 치려고 했을 때, 오나라의 벼슬아치인 설종(薛綜)이 손권을 말리면서 한 말입니다.

그는 연나라를

1. “융맥(戎貊)”이 세운 나라, 그러니까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설명하고

2. 연나라의 군사가 “성벽”에 기대어 적을 막지 않고 병기와 방어구가 가볍다고 하며

3. 연나라가 곡식이 잘 안 자라는 땅에 자리잡고 있고 연나라 사람들은 말을 타고 이사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유목민 정권의 특색입니다.

유목민은 성곽에 기대어 방어하는 전투방식을 좋아하지 않고 대신 가볍게 차려입고 말을 탄 채 활을 쏘면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싸우는데, 연나라는 말을 타고 떠돌아다니면서 가볍게 차려입고 싸우는 “융맥”들이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한족 정권이 아닌 유목민족의 정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공격당하면 성이나 마을에서 적을 막지 않고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달아나 버린다는 점도 전형적인 유목민의 특징입니다. 물론 연나라는 설종의 말과는 달리 위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성곽 안에서 맞서 싸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병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므로 설종의 말은 연나라가 성곽을 지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연나라 사람들이 성에서 싸우는 전법을 잘 쓰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손권을 말리는 다른 사람은 연나라의 기병대에게 오나라 보병들이 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식량을 멘 채 먼 길을 깊숙이 걸어들어가면 적지(:연나라 - 옮긴이)의 <기병>이 길을 막은 채 약탈하려고 무수히 달려들 것입니다.”

―『자치통감』

→ 이 말은 설종과 함께 손권을 말린 육모(陸瑁)가 한 말입니다. 위나라는 조조가 흉노/오환/선비족을 무릎꿇린 뒤 그들을 용병으로 동원할 수 있었으나, 연나라는 유목민을 잡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병대를 두고 있죠. 이는 공손씨가 처음부터 유목민이어서 따로 기병을 키우지 않아도 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야기를 여기까지 진행하면 오나라가 장강 유역 사람들의 정권이라서 요동 사람들을 모두 유목민으로 보았다고 반박하실지도 모르지만, 연나라와 가까운 위나라도 연나라를 ‘외국’으로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손연은 <해표(海表 : 해외 - 옮긴이)>에서 나고 자라서 3대째 자리에 올라 밖으로는 융이(戎夷)를 위무하고 안으로는 병마(兵馬 : 군사와 말 - 옮긴이)를 착실히 정돈해 놓고 있습니다.”

―『자치통감』

→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연나라를 치려고 할 때, 위나라의 벼슬아치인 위진이 한 말입니다. 위진은 연나라의 군주 공손연을 ‘해외’, 즉 중국 밖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손씨가 한때 후한의 벼슬아치였다는 이유로 연나라를 ‘중국사’ 안에 집어넣은 기존의 학설이 과연 옳은지를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마의도 연나라를 무너뜨린 뒤 연나라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이들은 연나라를 세운 공손탁(공손도) 때부터 후한의 전란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손탁이 <해외>에서 그 위명(위세와 명성 - 옮긴이)을 날리게 되었는데 해내(국내 - 옮긴이)의 인사 중에서도 상당수가 중원의 난을 피해 그에게 몸을 의탁했다.”

―『자치통감』

“사마의가 … <중국인 출신>중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자에게는 이를 허락했다.”

―『자치통감』

더 결정적인 증거는 위나라가 오와 손을 잡은 연나라를 오환족/선비족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위나라의 명제(明帝) 조예에게 고당륭이 한 말에서도 입증됩니다.

“지금 오와 촉이라는 두 적은 사막(沙漠 : 흉노족)뿐만 아니라 <소로(小虜 : 오환족과 선비족)>와 향촌을 점거한 반적들을 모아 모두 감히 황제라 일컬으며 중국(위나라 - 옮긴이)과 주도권을 다투려 들고 있습니다.”

―『자치통감』

정사『삼국지』와『자치통감』을 읽어보면, 오나라는 지금의 절강성 내륙지방에 살던 산월(山越)족이나 무릉(:호북성)의 원주민, 교주(:광동성과 웬남[월남] 북부)의 남월(南越)인과는 대립했으면 했지 협력하지는 않았습니다. ‘노(虜)’는 유목민족을 깔볼 때 쓰던 말이니, 이 기록을 오나라가 맹획과 협력한 증거라고 볼 수도 없죠.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공손씨가 세운 연나라뿐인데, 그들은 요동군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노(虜)’라고 불리울 수가 있고, 손권은 금은보화나 도장, 수레를 주면서 공손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므로 위 기록에 나오는 “오환족과 선비족”은 연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당륭이 연(燕)이라는 나라 이름이나 공손연이라는 군주의 이름을 들지 않고 “오환과 선비”라는 말을 쓴 까닭은 연나라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모두 유목민족 출신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삼국사기 』 「고구려본기」와「백제본기」가 서진 사람들을 “한인漢人”이라고 불렀듯이, 고당륭은 연나라를 세운 “오환/선비족”을 연나라 사람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옛 이름대로 불렀다는 얘기죠).

그러면 공손씨가 오환족이냐, 선비족이냐는 의문이 남는데, 저는 연나라의 시조인 공손탁(공손도)이 “고구려”와 “오환”과는 싸워도 선비족은 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이 한화한 선비족 출신이 아니냐고 짚어보는 바입니다. 이는 아래와 같은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죠 :  

“공손연이 자립해 연왕(燕王)이 되어 연호를 소한(紹漢 : ‘한나라를 잇는다’는 뜻 - 옮긴이)으로 고치고 백관(문무백관 - 옮긴이)을 두었다. 이어 사자를 <선비족>의 선우에게 보내 옥새를 주고 변경민에게 관직을 나눠 준 뒤 이들을 사주해 위나라의 북부를 침요케 했다.”

―『자치통감』

공손씨는 오환족이나 고구려, 위나라와는 싸워도 선비족과는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비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때에도 선비족의 선우에게 “옥새”를 주는 유화책을 쓰지 힘으로 정복하지는 않죠. 그래서 저는 공손씨가 원래 선비족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후한의 문화를 받아들인 집안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참고자료

―『자치통감 삼국지』[상/하](사마광 지음, 신동준 역주, 살림 펴냄)

―『삼한사의 재조명』(김상 지음, 북스힐 펴냄)




* 아래 블로그는 공손연의 자료들을 찾으려 여기저기 둘러보았는데..

위촉오삼국시대에 대해서는 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을 함께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 같습니다.

관련 내용이 길어서 링크만 추가합니다.


https://blog.naver.com/khtsnv/50172788495  요동으로 가는 길

https://blog.naver.com/khtsnv/50182726757  사마의가 공손연을 죽이고 해동海東을 장악하다

https://blog.naver.com/khtsnv/50182864674  공손연이 최후를 맞이한 곳, 요동군 양평현

https://blog.naver.com/khtsnv/220206236077 모용씨의 요동성과 공손씨의 양평성은 같은 곳이다

https://blog.naver.com/khtsnv/220343189887 연장성燕長城은 조양에서 양평까지

https://blog.naver.com/khtsnv/221538138403 사마의, 제수濟水 북쪽에 있는 양평을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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