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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덜 알려진 조선중기 국경분쟁. 복수와 복수가 이어지는 혈전 1

작성자배달민족|작성시간20.06.08|조회수305 목록 댓글 3



1552년(명종7년) 7월 27일 함경도에서 급보가 날아듭니다.




 함경도 병사(咸鏡道兵使) 김순고(金舜皐)가, 오랑캐가 경흥(慶興)서수라(西水羅)에 돌입하여 40여의 사람과 가축을 살략(殺掠)한 일을 치계하였는데, 계본(啓本)을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지금 계본을 보니 매우 놀랍다. 평소에 변장이 전혀 조치를 하지 않고 소홀히 한 탓으로 이런 변까지 있게 되었다. 경흥 부사(慶興府使) 김수문(金秀文)이 이미 추격해 갔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마땅히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고 군마(軍馬)를 엄히 갖추어 위엄을 떨치며 갔어야 한다. 그런데도 외로운 군대로 들어갔다고 하니, 대신과 병조·비변사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라."


 당시 조선은 두만강유역의 여진 세력과 안정적인 관계를 수립하여 이와 같은 전투와 피해가 한동안 없었는데,



갑자기 이러한 피해를 받은 것에 조선조정은 매우 놀라서 이 일의 전후사정을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았더니 이 습격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규모가 큰 것이었습니다.


 골간의 수적들이 저피선(가죽으로 만든 배) 200여척을 타고서 서수라보를 침입하여



 목책안에 있는 군민과 한인 잡인 아울러 80여인을 잡아가고,



 소와 말은 중간에 죽여서 고기만 싣고서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경흥부사였던 김수문은 이 소식을 듣고서 서수라보로 달려가지 않고 이응거도(伊應巨島)가 침략목적이라 생각하여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이응거도에 대한 공격은 없었고 여진족은 유유히 돌아갔습니다.

 

 



 조정에서는 여진족에 대한 침입이 갑자기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살펴보고자 하여, 침입 소식이 들려오기전에 북도순변사(北道巡邊使)로 임명된 이준경에게 모든일을 일임하고 조사케 하였습니다



 북도순변사 이준경은 임무를 마치고 10월에 소식을 가져왔는데, 이 일은 조선이 이응거도(혹은 잉거도)에 자모진(子母鎭)을 설치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두만강을 경계로 진을 설치했던 조선이었지만



  현재와는 달리 두만강하류에는 여러 큰 섬들이 있어서(통제공 이순신이 근무했던 녹둔도도 이 중에 하나)




 두만강을 넘어서 진을 설치하고 거기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자는 의견이 여러차례 있었으나,

 


 조종조 이래로 이루어진 두만강의 경계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과,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이 있으니 나중에 원한을 살 수도 있다는 의견이 더해져 강을 넘어 진을 설치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수렴되었습니다.


 하지만 경흥부에 계속되는 수해로 인하여 논밭이 없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지면서,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함경북병사 김순고와 경흥부사 김수문의 주도하에 이응거도에 진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고, 조정에서는 우선 임시로 목책을 치고 상황을 살펴보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 이미 이응거도에는 석성(石城)을 쌓고 관사 까지 지어 놓은 상태였기에,



 관원들은 이를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여겼고, 이 때문에 여진족의 서수라 침입이 일어나기 전에 이준경을 함경도 순변사로 파견하여 이응거도를 살피라 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준경이 가져 온 보고에 의하면,


 진을 설치할 당시 이응거도에 이미 거주하던 약 30여가구의 여진족들이 울면서 쫓겨 갔으며,



 이로 인해 심처호인(深處胡人) 골간추장이 "조선이 이미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해놓고 무단히 호지(胡地)에다 진을 설치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서수라(西水羅)가 허술하다 하니 시험삼아 인물(人物)을 노획해다가 요구해 보자." 하고 이야기하였다 하며



 후라도(厚羅島)에서 잡혀간 인물을 쇄환해 온 호인 만석(萬石)이라는 사람은 "골간추장 또한 경흥부사와 병사를 죽이려 침입했는데 이미 죄를 입었다고 하니 후회한다. 조선이 다시 이전처럼 대우해 주면 귀순하고 인물들을 돌려보낼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명종과 조정은 이미 잡혀온 김수문과 김순고에게 죄를 묻는 것으로 결정하는 한편(아마 가볍게 추국하고 파직하는등의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을 폐지할 것이고, 죄를 뉘우치고 사로잡아간 사람들을 풀어주면 원래 살던곳에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여진측에서는 사람들을 쇄환시키지도 않고 다시 원래 살던 두만강 건너의 초관(草串)지역으로 돌아와 살았습니다.


 그러자 서수라 사건 직후 새로 임명된 함경북병사 이사승을 비롯하여 조정에서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은 조선의 번호(藩胡)라 생각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를 침략한 후 사죄도 없는 것은 국위를 손상시킨 것이며 다른 번호들에도 영향을 미칠수 있다 판단하여, 초관을 정벌 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보복전이 다시금 끝없는 변란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의견과 함께, 지난번에는 진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해놓고 끝끝내 진을 설치하여 침입을 받았는데, 침입을 받은 것 때문에 다시 재상들이 군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 또한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정벌을 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고, 명종9년(1554) 두만강이 얼어붙은 1월


 

초관을 정벌을 위한 조선군대가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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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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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늘 딸뿐이야 | 작성시간 20.06.09 엌 재밌네여ㅎ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20.06.13 오 고퀄의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 작성자센프린 | 작성시간 20.06.14 역사 이야기는 항상 환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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