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다께시마라 썼냐며 하시겠지만, 잠시 들고 있던 돌은 놔주시고 ^^;
우리나라와 일본은 다께시마 관련해서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분쟁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엔 일본이 울릉도를 보고 다께시마라고 했습니다. 특히 대마도주 종씨가문에서 관심이 많았죠. 독도에다가 일본애들이 다께시마란 명칭을 붙인 것은 한참 뒤 근대의 일입니다. 고로 다께시마 분쟁이라하면 울릉도와 독도 분쟁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되죠.
어쨋든 처음으로 가서 신라시대 지증 마립간 님의 수하 장수 그 이름도 유명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합니다. 이것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모두에 나와있는 기록이지요. 당시 나라 국자까지 써가며 표현한 걸 보면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후의 역사에서 드라나듯 인구자체는 굉장히 작았습니다. 근 100명 왔다갔다. 우리 역사 기록에는 아마 울릉도에 인구 100명이 넘는 기록은 없을 겁니다.
어쨋든 그 후 다시 기록에 등장한 것이 고려 태조 때 새로운 국가가 생긴걸 알리는 목적으로 울릉도에가서 조공을 받아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조선시대 태조 4년 그러니까 1407년의 일이지요. 대마도는 당시 특수한 위치를 이유로 한일간에 외교적인 루트역할을 하는 등 근 1000년동안 한일관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곳으로 특히 宗씨가문이 아주 오래 다스렸습니다. 여하튼 태조 4년 이 종씨가문이 왜구한테 잡혀간 조선인을 돌려주는 댓가로 울릉도(일본명 다께시마)를 좀 달라고 합니다. 목적은 아마 거기서 나는 산물, 전복과 물개 등등 때문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당연히 조선정부는 거절하지요. 그리고 울릉도 담당 안무사를 뽑습니다. 안무사는 특별치안장군 정도...그 후 아마(기록은 없습니다) 대마도주나 다른 왜구들의 울릉도 공격이 이어져, 조선정부는 김인우 등을 울릉도로 보내 조사시키고 끝내 울릉도의 모든 주민을 육지로 데려옵니다. 이 때 울릉도민은 15호 86명의 인원이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일명 空島정책, 섬을 무인지대화합니다. 조선의 힘이 강성할 땐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 전의 나라가 어지러울 시기 다시 울릉도가 문제시 됩니다.
1614년 대마도주로 부터 막부에서 내린 명이니 '주민들을 다께시마로 보내려하는데 큰 풍랑을 만날까 두려우니 바닷길을 잘 아는 조선인을 좀 보내라'라고 전합니다. 아마 이것은 대마도주의 창작물이 아닐까 싶은데, 뒤에서도 드러나듯 에도의 막부는 사실 다께시마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대마도주 종씨가문이 관심이 많았지요. 당연히 조선정부는 반발 예조에서 그건 우리땅이다는 외교문서를 보냅니다.
그 일이 있은지 삼년 후 1617년 일본 돗또리현의 상인가문인 오오타미(大谷)씨의 상인단이 동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울릉도에 잠시 피신합니다. 그 때보니 물산이 많고 땅은 안정적이어서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네 현 다이묘에게 거기서 어업을 해도 되냐고 문의합니다. 여기 다이묘는 당시 이께다(池田)가문으로 이께다는 자기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고 에도에 있는 막부에게 물어봅니다. 그 결과 나온 대답이 '거기가 무인지대라 하니 조선정부에 안걸리면 괜찮다'입니다.
오오타미네가 혼자 가긴 리스크도 크고 힘도 들고해서 역시 상인인 무라카와(村川)가문과 격년으로 울릉도에 어선을 보내기로 합니다.
쓰기가 힘드네요. ㅡ.ㅡ 일단 나중에 다음 내용 올리지요. 다음 내용엔 조선 최고의 담력꾼 안영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 진짜 굉장하죠.
우리나라와 일본은 다께시마 관련해서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분쟁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엔 일본이 울릉도를 보고 다께시마라고 했습니다. 특히 대마도주 종씨가문에서 관심이 많았죠. 독도에다가 일본애들이 다께시마란 명칭을 붙인 것은 한참 뒤 근대의 일입니다. 고로 다께시마 분쟁이라하면 울릉도와 독도 분쟁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되죠.
어쨋든 처음으로 가서 신라시대 지증 마립간 님의 수하 장수 그 이름도 유명한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합니다. 이것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모두에 나와있는 기록이지요. 당시 나라 국자까지 써가며 표현한 걸 보면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 후의 역사에서 드라나듯 인구자체는 굉장히 작았습니다. 근 100명 왔다갔다. 우리 역사 기록에는 아마 울릉도에 인구 100명이 넘는 기록은 없을 겁니다.
어쨋든 그 후 다시 기록에 등장한 것이 고려 태조 때 새로운 국가가 생긴걸 알리는 목적으로 울릉도에가서 조공을 받아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조선시대 태조 4년 그러니까 1407년의 일이지요. 대마도는 당시 특수한 위치를 이유로 한일간에 외교적인 루트역할을 하는 등 근 1000년동안 한일관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곳으로 특히 宗씨가문이 아주 오래 다스렸습니다. 여하튼 태조 4년 이 종씨가문이 왜구한테 잡혀간 조선인을 돌려주는 댓가로 울릉도(일본명 다께시마)를 좀 달라고 합니다. 목적은 아마 거기서 나는 산물, 전복과 물개 등등 때문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당연히 조선정부는 거절하지요. 그리고 울릉도 담당 안무사를 뽑습니다. 안무사는 특별치안장군 정도...그 후 아마(기록은 없습니다) 대마도주나 다른 왜구들의 울릉도 공격이 이어져, 조선정부는 김인우 등을 울릉도로 보내 조사시키고 끝내 울릉도의 모든 주민을 육지로 데려옵니다. 이 때 울릉도민은 15호 86명의 인원이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일명 空島정책, 섬을 무인지대화합니다. 조선의 힘이 강성할 땐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으나 임진왜란 후 병자호란 전의 나라가 어지러울 시기 다시 울릉도가 문제시 됩니다.
1614년 대마도주로 부터 막부에서 내린 명이니 '주민들을 다께시마로 보내려하는데 큰 풍랑을 만날까 두려우니 바닷길을 잘 아는 조선인을 좀 보내라'라고 전합니다. 아마 이것은 대마도주의 창작물이 아닐까 싶은데, 뒤에서도 드러나듯 에도의 막부는 사실 다께시마에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대마도주 종씨가문이 관심이 많았지요. 당연히 조선정부는 반발 예조에서 그건 우리땅이다는 외교문서를 보냅니다.
그 일이 있은지 삼년 후 1617년 일본 돗또리현의 상인가문인 오오타미(大谷)씨의 상인단이 동해에서 큰 풍랑을 만나 울릉도에 잠시 피신합니다. 그 때보니 물산이 많고 땅은 안정적이어서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네 현 다이묘에게 거기서 어업을 해도 되냐고 문의합니다. 여기 다이묘는 당시 이께다(池田)가문으로 이께다는 자기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다고 에도에 있는 막부에게 물어봅니다. 그 결과 나온 대답이 '거기가 무인지대라 하니 조선정부에 안걸리면 괜찮다'입니다.
오오타미네가 혼자 가긴 리스크도 크고 힘도 들고해서 역시 상인인 무라카와(村川)가문과 격년으로 울릉도에 어선을 보내기로 합니다.
쓰기가 힘드네요. ㅡ.ㅡ 일단 나중에 다음 내용 올리지요. 다음 내용엔 조선 최고의 담력꾼 안영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 진짜 굉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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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이찬선 작성시간 05.03.24 안영복? 안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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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picysoop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5.03.24 일본에 끌려갔던 안영복 어민요. 이름 맞을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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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움쿰재 작성시간 05.03.24 안용복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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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picysoop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5.03.25 제가 틀렸나 보군요. 어쩌다가 ㅠ,ㅠ 예전에 알던 내용들이 막 짬봉이 되고 있는 형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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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혁수 작성시간 05.03.25 '다케시마'는 원래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본의 옛 지도에서도 '다케시마'는 '울릉도'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울릉도=독도 인줄 알고 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