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동양사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나간 이각의 행동에 대하여 간단한 소고

작성자배달민족|작성시간21.07.15|조회수461 목록 댓글 1

임진왜란 개전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보였던 조선장수들의 추태에 대하여 많이 욕들을 하지요.

 

 

대표적으로 욕을 먹는 사람들 세사람을 꼽자면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경상좌병사 이각 입니다(경상우병사 조대곤도 있기는 한데 저 세사람에 비하면 선녀.....).

 

 

그 중에서 이각 같은 경우 송상현이 죽음으로 동래성을 지켰던 것에 반하여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일본군이 도달하기 전에 송상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갔던 일로도 욕을 먹지요.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동래부 순절도(1760년, 1834년 작 모두)에 까지 자세히 묘사가 되어있고, 이후 학자들의 문집등에서도 동래성에 들어왔다가 나간 이각의 행동에 대하여 비겁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나중에 동래부사로 임관되어 간 민정중이 그림을 그릴때 이각의 형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권징의 뜻을 나타낼 정도

 

 

숭정 무술년(1658, 효종9)에 민후 정중(閔侯鼎重)이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어 그 당시의 사실을 찾아 물어보았는데, 그때의 노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이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때의 사실을 이와 같이 말하였으므로, 마침내 돌을 다듬어 그 사실을 기록하고, 또 집을 짓고 그림을 그려서 이각(李珏)이 도망치던 형상을 아울러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권징(勸懲)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였다...... 

 

송자대전 제171권 / 비(碑) 동래성(東萊城)의 남문비(南門碑)

 

 

나중에는 근왕하겠다는 명분으로 경상도 전역을 버리고 임진강까지 갔다가 잡혀 참수되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이각이 동래성에서 나간 것 자체가 과연 욕을 먹을 행동이었을까요?

 

 

 이각의 지위는 경상좌병사이고 그의 임무는 한 지역의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경상좌도의 전체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략군을 막아내는 것 이었습니다. 반대로 동래성에서 있다가 전사하였다 하더라도 을묘왜변 초기에 달량성으로 들어가 왜군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전사했던 전라병사 원적처럼 대대로 무능한 장수라고 욕먹었을 가능성이 더 컸습니다. 을묘왜변 당시 조선조정은 원적이 달량성에서 전사하자 전라도 육군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었고 이 때문에 을묘왜변의 초동대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오죽하면 나중에 방어사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던 양사준이 자신의 가사문학인 남정가에 "혜욤 업 뎌 兵使야  네 딘을 어 두고 達島로 드러간다(생각없는 저 병사 놈이 지 진을 어디다 놔두고 달량성으로 들어가고 있냐)" 라고 써놓을 정도. 

   

 

이각이 동래성에서 나간 명분이었던 '소산역에 주둔하며 후방에서 공격하겠다'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삼국지에서도 하비성전투 당시 진궁이 여포에게 병력의 일부를 빼내어 조조군의 후방을 치라고 간언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성을 나가 동래성 근처 소산역에 주둔하고 있던 밀양부사 박진과 합류하고, 일본군의 후방에 주둔한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 '주둔' 만 한 것이 문제였죠  이각이 성을 나온 명분은 어디까지나 핑계였을 따름이지 그것이 전략적 판단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게 문제였던 것이죠;; 소산역에 있다가도 동래성을 지원하려는 박진을 방해하기만 하다가 경상좌병영으로 도망치고 맙니다. 밀양부사 박진도 소산역에 있다가 중과부적이라 판단하여 밀양방면으로 후퇴하고요.  

 

 

우리가 흔히 변명으로 치부하고 마는 '작전상 후퇴' 라는 말은 사실 매우 중요한 전술 행위중의 하나입니다. 전력을 보존하고자하는 목적의 후퇴라던가 적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을 위한 후퇴 등등 후퇴 또한 상황에 따라 엄연히 취해야할 것이죠.

 

 

중요한 건 이각의 저런 후퇴들은 작전상의 혹은 전략적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도망'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이각이 혹여 동래성을 후방에서 지원하지 않았더라도 그 목적이 동래성을 희생시키면서  시간을 벌고 자신의 권한으로 후방의 병력을 동원하고서(ex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취한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렇게 동원된 병력을 재배치하고 반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더라면 비정하다고 욕은 먹었을 지언정 이런식으로 무능하다고 대대로 까이지는 않았겠죠.

 

 

실제로 이각이 도망쳐서 도착한 경상좌병영에는 제승방략에따라 모인 '13개 읍의 군사들'이 있었음에도 또 기각지세로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겠다는 명분으로 나가서 도망치고 좌병영은 함락되고 동래성의 희생으로 번 시간동안 병영에 모인 병사들은 부질없이 희생되고 맙니다;;

 

 

상대가 안되어서 맞붙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동원된 병력이라도 제대로 끌고 다니며 온전하게 유지시키고 있다가 나중에 오게 되는 이일, 신립등과 합류하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의미없는 가정도 해봅니다만.....  왜냐하면 조선조정은 장수의 '후퇴'와 '도망'을 철저히 구분하였기때문이죠. 그 대표적 사례중의 하나가 송상현처럼 '부사'였던 밀양부사 박진의 경우죠.

 

 

소산역에 있다가 밀양방면으로 후퇴한 박진은 양산과 밀양 사이에 있는 황산의 좁은 길목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맞아 싸워서 잠시 시간을 지연시키지만(작원전투) 패색이 짙어지자 밀양으로 후퇴, 동래에서 순절한 송상현과는 달리 밀양의 창고를 불태우고 군사를 몰아 퇴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조정도 사정을 잘 몰라서 박진도 이각처럼 그냥 도망치기만 하는 장수로 판단하였다가, 박진이 계속해서 싸움을 하며 전략적 판단하에 후퇴를 한 것임을 알게되고, 박진을 경상좌병사로 임명하였고 훗날 박진은 박의장과 함께 비격진천뢰로 경주성을 탈환하는 전공까지 세우게 되지요.

 

 

 참고로 동래부 순절도이야기가 나왔는데, 일본 와카야마현 현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임진왜란 병풍도에는 조선의 성을 공격하고 있는 일본군과 성에서 싸우는 조선군, 그리고 그 일본군을 뒤에서 '협공'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 모습이 일본에서는 의병들의 후방공격으로 성을 지킨 1차 진주성전투를 묘사한 그림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비쳤지만, 노영구 교수님은 그림에서 묘사한 성의 모습과, 후방을 습격하고 있는 조선군의 모습들이 관군의 모습이었던 점 등을 보고 동래성 전투를 묘사한 것이라 주장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1.07.15 재밌게 읽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각의 지위상 작전상 후퇴도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었군요. 문제는 그 다음이겠구요 ㅋ
    좋은 지적이라 생각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