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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고려는 어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나라로 인식됐을까

작성자松永久秀|작성시간22.04.26|조회수494 목록 댓글 10

실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지, 혹은 고려 사람들이 고구려 계승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본고의 관심사가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밝힐 수 없는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고려전에 그러한 서술이 있다는 것까지이다. 이를 현대 한국의 연구자들은 “당대의 중국인들이 그렇게 인식했다.”고 ‘해석’하였고, 현대 중국의 연구자들은 “정사 편찬에 오류가 있었다.”고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고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구오대사부터 명사까지 중국의 역대 정사 고려전은 왜 고려가 고구려와 계승관계에 있는 것으로 설명했을까?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2) 고려가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에

3) 무언가 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본고의 결론은 3) 무언가 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고려의 연혁에 대한 송대 자료의 내용을 편찬 시기 순으로 추적하면서, 고구려와 고려의 계승관계를 잘못 인식한 데서 비롯된 기술(記述)이 정교해지고, 또한 확산되는 과정을 추적해보도록 하겠다. 검토할 자료는 역대 정사의 고려전을 비롯한 사서(史書)들과 송대에 크게 유행했던 유서(類書)들이다. 이런 공신력이 있는 자료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고구려와 고려의 계승관계에 대한 확증편향을 강화해가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시기상으로는 오대와 북송 시기를 중심으로 하되, 그 직전과 직후, 그러니까 당 말부터 원대까지 작성된 자료까지를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

 

 

태조 16년(933) 후당의 명종은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였다. 중국 왕조가 고려의 군주를 책봉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 조서에서는 왕건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주몽(朱蒙)이 나라를 연 상서(祥瑞)를 계승하여 그 군장이 되었고, 기자(箕子)가 번국을 이룬 자취를 뒤밟아 은혜와 교화를 펼쳤다.”21) 즉 왕건이 주몽의,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인정’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가 후당을 상대로 자신의 역사성, 자신과 고구려의 연관성을 주장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그런데 다음의 자료는 그러한 합리적 추측에 의문을 던진다. 이 무렵 고려의 문서를 받은 후당 측에서 남긴 기록으로, 오대회요에 실린 다음의 기사를 검토해보자

 

 

가. 그 해(天成 3년(928)) 12월 2일, 학사원(學士院)의 기사(記事): “추밀원(樞密院)에서 근래에 권지고려국제군사(權知高麗國諸軍事) 왕건이 보내온 표문(表文)을 보내면서, 조서(詔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고려국에서는 일찍이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온 적이 없었으므로, 한림학사원(翰 林學士院)에도 그 나라에 보내는 조서 양식이 전혀 없어 <그를 가리켜> ‘경卿)’이라고 해야 할지 ‘여(汝)’라고 해야 할지, 아울러 어떤 색깔의 종이에 써야 할지, 봉투를 싸는 사례는 어떤지 등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참작해서 상정하여 한림원에 알려달라고 삼가 청하였다. 중서성(中書省)에서 태상예원(太常禮院) 임기(林祈)에 첩(帖)을 보내 당(堂)에 신(申)하도록 하였다. 장신(狀申)을 받아보니, ‘삼가 살피건대, 본조의 태종황제(太宗皇帝)께서 친히 그 나라를 평정한 후 후사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려에 하사한 서조(書詔)의 양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다만 신라국에만 문서를 보냈던 것이니, 청하건대 대략 신라국왕에게 내리는 서조의 양식에 따라 쓰십시오.’라고 하였다. 칙(勅)을 받들었으니, ‘고려국에 하사하는 서조는 마땅히 신라와 발해 두 번(藩)에 하사하는 서조의 양식에 따라 수사(修寫)하라.’라고 하시었다

 

 

위 기사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928년에 왕건이 권지고려국제군사라는 명의로 후당 황제에게 표문을 보냈다. 답장으로 보낼 조서를 준비하라는 명을 받은 한림원은 고려에 문서를 보내는 일은 전례가 없으므로 어떤 종이에, 어떤 구절을 써서 보내야 할지 알려달라고 중서성에 요청하였다. 이에 중서성은 이를 조사하는 임무를 태상예원에 맡겼다. 태상예원은 당시 후당 조정에서 예제와 관련된 업무를 전담했던 기관이다. 태상예원에서는 고려를 가리켜, 본조, 즉 당의 태종이 평정한 후 후사를 세우지 않았던 나라라고 하면서 신라나 발해에 보내는 문서양식과 동일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23)

 

위의 인용문에서 후당이 자신과 고려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본조의 태종황제가 친히 그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구절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말할 것도 없이 668년에 당이 고구려를 평정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고구려 멸망 당시는 당 고종(高宗)의 재위 기간이었으므로, ‘태종황제’라는 위의 언급은 사실과 다르다. 아마도 당말~오대 당시에 혼란한 정세 속에서 문적(文籍)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진 탓에 사실을 잘못 기억, 기록한 것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후당 조정은 자신은 당을 계승한 국가임을 자임하면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인식하였던 것이 된다. 즉 과거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던 정치체의 후계자로서 자신과 고려를 위치지웠던 것이다

 

 

.....................

 

그러다 보니 위 기사에서 후당 조정은 고려를 가리켜 당 태종이 평정한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로서 오랜만에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언급은 당시 예제와 역사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태상예원과 한림학사원에서 나온 것이었다.25) 그리고 위 일화는 오대회요에 실림으로써 훗날 고려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전거’로써 널리 쓰이게 되었다

 

 

 

 

...........

맺음말

 

본론에서 많은 자료를 검토하며 멀리 돌아왔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시기의 중국 서적에서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인 것으로 서술한 것은 우연한 상황에서 시작된 오해가 수정 없이 그대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한 연구에서는 본고에서 활용한 몇몇 자료를 인용하여 “5대 시기 사람들을 비롯한 동북아인들이 우리나라의 역사가 고구려=전고려(前高麗)에서 후고려(後高麗)로, 다시 거기에서 고려로 계승되었다고 인식하”였다거나,75) “이러한 서술은 무지(無知)의 소치라기보다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는, 다시 말하면 고려는 고구려를 승계한 국가라는 당시 사람들의 역사인식의 표현이었다”고 설명하였다.76)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수정하고 싶다. “오대부터 송대, 그 이후까지 중국인들은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오해)하였다. 이는 당말-오대 시기의 혼란 속에서 문적과 지식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한 탓에 발생한 사소한 오류에서 비롯되어 점차 확대되었다.”

 

북송・남송을 막론하고 송의 지식인들은 고려의 역사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유서, 정서, 혹은 역대 정사의 고려전을 활용하였다. 거기에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전승이 반복적으로 실리고, 새로운 자료를 편찬하면서도 거기에 약간씩이나마 정보를 추가, 변용해가면서 이전의 정보를 그대로 인용해가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오류는 점차확대, 재생산되었다. 게다가 그 중간 중간에 구양수와 같은 권위있는 학인의 명성이 끼어들고, 서긍과 같은 이들이 실제 고려에 가서 그 문물을 확인하고 온 사실이 추가되면서 이 ‘사실’은 점차 흔들리지 않는 지식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착오가 현전하는 자료, 현실의 정세 등과 직접 충돌한다면 어느 시점에선가 문제 제기가 일어나고 검증을 거쳐 교정이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1082년에 증공이 던진 의문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변의 책임이 있던 고려의 사신 최사제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재확인시켜주었다.

 

75) 박용운, 2006 앞의 논문, 32~33쪽

76) 안병우, 2004 앞의 논문, 131쪽 254 역사와 현실 121

 

 

http://www.koreanhistory.org/dbpia

 

고려는 어쩌다가 고구려를 계승한나라로 인식됐을까*

정동훈(鄭東勳)**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인식한 이유가

그냥 그 사이의 역사에 대한 오해로 인해서라는 학설이 나왔네요

 

문외한이라 이문제 관련해서 카페회원분들의 고견이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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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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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LUNKHEAD | 작성시간 22.04.26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후예를 자처한 집단은 많았지만 실제로 살아남은건 왕건의 고려뿐이죠. 그래서 그렇게 된거라고 생각합니다.

    옛고려가 망하고 유민들은 타지로 이주당해 정체성이 녹아 사라지고, 오랜 전란에서 피해가 적었던 동부를 중심으로 고려를 자칭한 발해가 다시 들어섰었죠.

    그리고 발해도 망해버리고 요나라 내내 부흥운동을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금나라가 들어서면서 화살받이로 쓰이고, 타지로 이주당하며 결국 국체를 다시 일으키는데 실패했죠.
  • 작성자배달의 민족 | 작성시간 22.04.26 이 분 다른 논문을 찾아보니 중심 연구가 전근대 한중간 외교관계 입니다. 이 논문의 초점을 오대시절 고려와의 첫 접촉과 그 당시 발생한 외교의례 현상파악에만 한정시켰다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텐데 이걸 가지고 고구려 - 고려 계승관계 분석으로까지 확대를 시키니 문제가 되는 것 같네요.
  • 답댓글 작성자havoc(夏服ㅋ) | 작성시간 22.04.27 22.
  • 작성자돈데기리 | 작성시간 22.04.30 중세사람들이 똘추들도 아니고(…)

    다른데도 아니고 외교만 전문적으로 파는 예원에서 그런 판단이 나왔다는건 이미 국가레벨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자료를 다 풀어놓고 판단했다는 뜻이고… 그때 그 시절에 ‘오해’를 벗어나 중국인들에게 고려가 고구려를 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실체가 있었다는 거겠죠. 그렇지 않으면 발해, 신라와 같은 격으로 외교문서를 꾸며 보내라- 라는 센스있는 판단이 나올리가 없으니까요.
  • 답댓글 작성자배달의 민족 | 작성시간 22.04.30 당시 고려와 접촉한 5대들이 고구려 - 고려인식에 대해서 논문저자가 이야기 한대로 우왕좌왕한 거 자체는 사실이긴 합니다. 5대라는 혼란기에 몇백년전에 멸망한 고구려 관련 자료보관이 제대로 되어있을리가 없었던 데다가 신라상황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이 안되었던 상황이고.... 뭐 이런식으로 전근대 타국에 대한 정보부재가 낳은 오해 사례들은 많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일도 아니고요(주원장 : 이성계는 이인임 아들.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자기 왕인 카네요시에게 반기를 든 역적이야!) . 근데 그것만 언급 했으면 충분했을텐데 그걸 가지고서 결론을 '고구려 - 고려 연계성은 없음' 이라고 자기 연구 범위와 상관없는 주장까지 해버리니 문제가 되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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