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조선 전기의 새로운 정치 세력이 지방 향리층 혹은 재지 중소지주층으로부터 등장했다는 입장이 통설로 자리 잡은 뒤, 이에 대한 비판 들이 제기되었다. 먼저 신진사대부론에 대해서는 ‘사대부’와 ‘권문세족’의 용례 분석을 통해 통설의 개념과 실제 통용되었던 의미 사이에 괴리가 크 다는 사실이 지적되는 한편, 신진사대부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회 계층의 성장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권문세족 vs 신진사대부와 같은 대립 구도를 통해 이 시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김당택의 경우 ‘사대부(士大夫)’ 개념은 ‘사족(士族) 출신 인물들로서 관도(官途)에 진출한 문무관료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입장을 제기하였다. 008 원간섭기 원의 후광을 배경으로 왕권 강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치자 계층이 아닌 천계(賤系) 출신들이 부상하였는데, 이 천계 출신 관료들 에게 불만을 가진 부류가 바로 사족이었으며, 이들은 관직 진출에 신분 제 약을 받지 않는 기존의 관료 계층으로서, 그중 관도에 오른 인물들을 ‘사 대부’라 지칭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원간섭기 이후 고려 말까지의 지배 세력을 권문세족과 사대부로 양분하는 것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권문세족 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은 왕비나 재상, 다수의 과 거 합격자를 배출한 전형적인 사대부 가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김광철의 경우, 고려 후기 정치 지배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온 ‘권문세족(權門世族)’이라는 용어에서 ‘권문(權門)’과 ‘세족(世族)’을 분리하 여, 권문은 신분과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 행사하고 있던 권력의 정도를 표현하는 용어였다고 지적하고, 고려 후기 유력한 위 치에 있었던 가문을 ‘세족’이라 지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009 또한 고려 후기 세족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세족에게도 과거를 통한 관인의 배출이 가문의 성쇠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공민왕대 이후로 내려갈수록 세족 가문에서 과거를 통해 관인이 배출되는 경향이 증가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세족들은 원간섭기 폐행(嬖行)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는 국왕 들에 의해 세력이 위축되는 등, 가문 그 자체의 힘만으로 성세를 유지하기 어려웠음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고려 후기 ‘사대부’라는 용어가 관인층 전 체를 지칭하고 있었다는 입장에서 세족과 사대부를 대척적인 정치 세력으 로 설정하기 어려우며, 고려 말의 개혁의 성격이 계층적 이해관계를 둘러 싼 계층 상호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세족층도 개혁 세력으로 활동하여 조선 개국 공신에 세족 출신 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미국인 연구자 던컨의 경우, 중앙 관원을 배출한 가문의 분석을 통해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이행되는 시기에 지배 세력의 전면적인 교체가 있 었다는 통설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였다. 010 그는 관원 배출 수 및 재추 배출 수와 같은 기준을 통해 고려 후기(1260~1392)의 주요 가문 22개를 추출 하고, 이 가운데 2/3(16개) 정도가 조선 초기(1392~1405)의 주요 가문으로 이어 지고 있다는 점, 조선 초기(1392~1405) 관직자와 고위 관원을 배출한 38개 가 문 가운데 불과 8개 가문 정도가 중앙 관원을 배출한 신생 가문에 해당한 다는 점, 아울러 과거 출신 고위 관원들의 비율이 높지 않음과 과거에 합 격한 인사들 상당수가 음서를 통해 관직 생활을 하다가 과거에 급제한 점 등을 근거로 신흥 세력으로서의 ‘사대부’가 주축이 되어 조선이 건국되었 다는 통설을 비판하였다.
미국을 비롯해 해외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와그너의 경우, 일찍부터 한국사에서 지배 세력의 동질성이 매우 강하였음 을 강조하였다. 그는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가정본(嘉靖本) 분석을 통 해, 사림파가 진출했다고 하는 성종~중종 약 70년 동안의 문과 급제자 중 70%(1,120명)가 이 세보에 올라 있으며 현량과 합격자 28인 가운데 26명이 세보에서 확인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이 시기 지배 세력을 훈구파와 사림파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011 아울러 훈구파 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사화가 일어났다는 통설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 면서, 012 사화는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영향력 강화로 정부 내의 위계 질서가 흐트러지는 과정에서 삼사와 정부 고관 및 국왕 간에 지속되어온 알력이 극적으로 폭발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견해에 대해 통설을 계승하는 입장에서의 재반박도 진행되었다. 신진사대부론의 경우, 이익주는 ‘사대부’와 ‘세족’의 용례 분석을 통해 새로운 정치 세력의 성장 및 그 역사적 의미를 희석시키는 견해에 반박하였다. 013 ‘사대부’가 용어로서 적절한지 여부나 종래 사대부라 지칭되던 집단의 존재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이었다. 이미 ‘사대부’ 라는 용어 대신 ‘신흥유신’이나 ‘신진사류’와 같은 용어가 대안으로 제시 되어 있으며,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고려 후기 새롭게 등장한 세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이상, 신흥유신과 권문세족의 대립 구도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또한 사대부가 반드시 지방의 중소지주층과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비록 사대부를 중소지주층과 동일시 하는 것에는 실증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중소지주층의 성장과 정치 세력 화라는 개연성 있는 가설의 제시 이후 후속 연구들을 통해 고려 후기 새로 운 농법의 도입에 따라 중소지주층의 경제적 자립도가 크게 증가되고 그 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상체계로서 신유학이 수용된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는 만큼, 사대부가 중소지주라는 확증이 없다는 이유로 입론 자체를 섣 불리 폐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수정주의적 입장의 연구 경향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이행을 사회 변화의 결과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는것 에서 기인한다며, 고려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그 주도 세력으로서의 신흥사대부의 존재 및 사회모순에 대한 개혁 의지 등에 대한 서술이 부재 함을 비판하였다
사림정치론의 경우, 최이돈은 통설의 입장에서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 을 기본 전제 삼아 사림이 낭관권과 자천제를 매개로 조정 내에서 영향력 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정치 구조를 형성하고 있던 양상과, 그를 기반으 로 재야 사림의 공론까지 수용해 나갔던 공론정치의 전개 과정을 천착하 였다. 와그너와 정두희014 등이 삼사와 언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 통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자, 사림이 어떻게 삼사 언론을 통해 성장해 나갈 수 있었는지를 보다 정치하게 분석하여 통설의 입장을 보강했다고 할 수 있다. 015
김돈은 출신 기반 및 경제적 기반의 차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초점을 두고 양자의 특성을 도식적이거나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것은 지나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훈구는 조선 초기에 대두하고 중기에는 소멸하는 반면, 사림은 이와 반대의 추이를 보이는 정치 세력으로 주도 시기가 엇갈리는 존재로 이해하면서, 지배층 및 정치 세력으로서의 훈구와 사림의 이질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사회 계층으로서의 동질성을 강조한 연구 경향은 이러한 시기적 차이를 간과한 한계가 있다고 비판하였 다. 016
요컨대, 신진사대부론과 사림정치론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들은 사대부·권문세족·사림·훈구 등의 개념에서 당대적 맥락과 통설에서 사용하는 개념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점과, 동질성이 강한 지배 세력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정치사 서술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조선 건국과 16세기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지배 세력의 교체와 같은 급격한 사회 변동이 있었다는 통설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 할수 있다. 반면 통설을 계승한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러한 변화를 주도한 재지사족 계층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을 배출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대부나 사림 등의 개념 설정에 다소 문제가 있고 대립되는 두 세력 사이의 동질성도 상대적으로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변화와 그에 기초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정치 세력의 존재 자체는
허구가 아니기 때문에, 더구나 이러한 유의미한 사회 변화에 걸맞은 역사발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통설의 기본 구도를 유지하되 한계로 지적된 부분은 보완해 나가자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말~조선 전기 ‘정치 세력의 이해’ 다시 보기 송웅섭-
http://www.kistory.or.kr/index.php?subPage=450
어째 상태가 신흥유신과 권문세족간의 연결성이 매우높다로 정리되기보다는
더 복잡한 상황이네요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헤 센 작성시간 22.09.03 우리가 알던 고려사는 너무 도식화 된게 있지요.
-
작성자라모스 작성시간 22.09.03 집안은 같아도 사상이나 구성원의 행동양식은 얼마든 바뀔 수 있죠
개인적으로 수정주의는 지배세력이 계승되었음을 보인 점이 의미있으나, 그러니 두 집단이 똑같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사고방식이나 경제생활이나 바뀐 점이 보이니까요 -
작성자마카롱 작성시간 22.09.03 고려말기의 문제점은 결국 인맥관계에 크게 좌지우지된 카르텔이 문제였지요. 당장에 불교행사를 이인임을 비롯한 권신들이 왕족들과 합세하여 서로간의 비밀스러운 사교의 장으로 만들었죠.
정도전을 위시한 개혁파들은 이걸 개혁하려 하였죠. 태종이 집권하면서 상당부분 훼손되었으나 본인과 아들은 집현전으로 개혁을 불완전하게나마 이었죠
그러나 세조가 다 망침 -
작성자마법의활 작성시간 22.09.13 정확히는 권문세족 집단에서 개혁파와 중도파가 등장하고, 권문세족 외 집단에서 약간 유입된 계층에서 개혁파와 소수 수구파가 등장하는 거죠.
그러나 개혁을 거부하는 반동 및 보수 대부분이 권문세족 집단이었음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고대 로마도 옵티마테스나 포풀라레스나 그 뿌리는 그닥 다르지 않았고, 최초의 포풀라레스인 그라쿠스 형제야말로 옵티마테스 혈통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