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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중국사]펌) 촉 멸망사 5. 꼬리에 불이 붙은 사냥개는 집을 불태우고

작성자松永久秀|작성시간23.08.15|조회수577 목록 댓글 3

 

 

촉 멸망사 1. 강유 부각의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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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2. 막부의 의의와 한중막부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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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3. 제갈량 사망 직후의 혼란과 정계 구조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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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4. 양로원 혹은 막부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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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앞서 : 이 글에서 사용된 "신비주의"라는 용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정의된다. : 인간과 인간이 구성한 체제(사회나 국가 등)의 운명을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초월적인 힘이 결정하며, 이 초월적인 힘의 발현을 신이한 현상의 관측이나 별의 운행 등으로 미리 예언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그 믿음을 구성하고 유지시키는 이론체계.


정치적 진공 속

유선은 이제서야

황제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253년 1월. 촉의 모든 권력을 독점했던 비의가 죽었다. 정해진 후계자도 준비된 대안도 없었다. 기존의 삼각구조에서 살아남은 이는 형주인조차 아닌 진지 뿐이었다. 비록 여예가 죽은 뒤 진지가 행정부의 일을 겸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비의의 '명령을 받아' 황제가 '듣게' 하고 수도에서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을 막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비의의 죽음은 단순한 최고 권력자의 죽음으로 보기 어렵다. 촉에 닥친 사태는 행정과 군사, 외교와 신상필벌을 포함한 인사권, 그 외의 모든 것들을 혼자서 결정하던 대뇌가 갑자기 활동을 정지하고, 척수와 신경계만이 살아남은 모습에 가까웠다. 모든 일들의 책임과 앞으로 할 일들은 규정되지 않은 채였다. 누구도 이 혼란을 어떻게, 누가, 어떤 형태로 마무리지어야 할지 불분명했다.

다른 한 편으로, 비의의 죽음은 촉에 존재하였으나 드러나지 않던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간 막부의 수장은 명목상의 군권을 쥐고 있었으며, 이 군권을 실제로 수행하는 존재는 항장인 강유였다. 막부는 실제 지휘관인 항장이 멋대로 군권을 휘두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수장 자신이 한중 혹은 한중의 지척인 한수에 주둔하여 누름돌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막부의 수장이나 상서령은 항장인 강유의 '전우' 출신으로써 개인적인 유대감을 가진 존재였다. 중앙에 닥친 정치적 혼란을 급히 수습해야 했던 진지에게는 강유와의 개인적 유대도 혹은 한중에 주둔할 여력도 없었다. 한중의 '군대'와 정권을 이어주던 가느다란 실은 이 순간 끊어졌으며, 이는 머지않아 위험천만한 사태를 불러올 씨앗이 되었다.

사태를 수습하기 바빴던 진지는 자신이 이 바스러진 체제의 주인이 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환관인 황호를 통해 황제 유선과 협력함으로써, 기존에 형주 계파가 독점해왔던 권력을 황제에게 되돌렸다. 이 행동을 전통적인 관점에서 선하다고 묘사하기는 쉬우나, 나는 그가 뒷방에서 권신의 명령을 승인하는 존재가 되버린 황제를 배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진지는 아마도 자신의 앞에 갑작스럽게 주어진 이 모든 책임과 부담에 압도당했고, 불가능한 수습을 자신 혼자 떠맡는 대신 황제인 유선에게 공을 넘기기로 마음먹었을 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선은 253년 1월. 즉위 30년 만에야 처음으로 정말로 어떤 일을 결정짓고 선택을 내리는 존재가 되었다. 나이는 이미 불혹을 훌쩍 넘긴 뒤였다. 지금까지 막부 수장들의 거수기에 불과했던 유선은 이제 한 순간에 모든 국정을 총괄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강유는 북벌을 시작한다.


주인의 죽음에

기뻐하는 사냥개

이제 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비의가 죽을 무렵 강유는 불만에 가득 찬 주전파였다.

강유는 항장으로써 막부의 주인에게 봉사해왔다. 제갈량의 후계인 막부의 수장들은, 괜찮은 행정관이나 보급관은 될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 지휘관은 되지 못할 이들이었다. 막부에는 유사시 자신들이 쥔 군사력을 활용해줄 사냥개가 필요했고 촉에 어떠한 연고도 없는 강유는 목줄을 쥐기 너무나 쉬운 사냥개였다. 강유는 항장이기에 촉 정계에 과잉충성해야 했고 항장이기에 정치적 지위를 요구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세계는 사방이 막혀 있었고, 그가 할 수 있고 또 요구받는 '일'은 오로지 위국과의 전투에서 군공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막부의 수장들이 강유의 귀에 무슨 말을 속삭였건 간에, 장완과 비의는 북벌이 불가능한 사업임을 인지하고 사냥개의 목줄을 세게 쥐었다. 제갈량 식의 안전주의로 옹양주를 공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지난 수십 년간 명확해졌다. 위군은 보급난에 시달리는 제갈량이 보리가 익는 시기를 노려 쳐들어오리라 예견했고 일은 실제로 그렇게 돌아갔다. 위군이 허겁지겁 보리를 베는 촉군을 물리치면 촉은 보급이 떨어져 터덜터덜, 집까지 먼 길을 되돌아갔다. 북벌이라는 대원정의 실상은 늘 그러했다. 제갈량은 북벌에서 완고할 정도로 안전을 추구했으며 결국 어떠한 변수도 창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죽은 지금이야말로 위험을 감수하고 기책을 내볼 때일까? 장완의 '기책'은 아마도 비의에 의해 거부당했고 그는 계획을 포기했다. 비의는 이미 스러져가는 체제에 또다른 위험요소를 끌어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234년 제갈량의 죽음으로부터 253년 1월까지 약 2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대규모 북벌은 결코 재개되지 않았다. 장완 통치기에 '북벌'은 소규모 병력으로 위나라의 서쪽 변경을 몇 차례 약탈하러 간다는 의미로 축소되었다. 강유의 '전우'였던 비의는 강유의 불만을 의식한 듯, 그에게 가절을 내리고 249년과 250년 출병을 명했으나, 그 병력의 규모는 1만 이하였다. 모두가 진지한 북벌 시도라기보다 사냥개를 위한 산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산책이 사냥개의 욕구를 풀어줬으면 좋으련만, 거대한 북벌 제의가 번번히 거절당하고, 1만도 채우지 못한 병력으로 위국의 국경을 약탈하고 돌아오는 일들의 반복은, 그저 산천에 나가 범의 목을 물어뜯고 싶은 사냥개의 깊은 욕망을 자극할 뿐이었다.

253년 1월 초 비의가 죽자, 정치적 공백으로 인한 혼란이 촉에 휘몰아쳤다. 그의 죽음이 한중 주둔군에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사냥개였던 강유가 한중 군부의 최고 서열이자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는 최고권력자의 사망 후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벌에 나섰다. 수만이라는 묘사를 볼 때 한중에 주둔한 원정군 중 대다수가 투입되었다고 보인다.

성도에서 한중까지의 거리는 각 거점들을 직선으로 이어 약 425km이며, 이중 약 절반여는 산악 구간이다. 파발이 하루에 100km을 이동하더라도 단 한 번의 서신 왕복에만 약 9일이 소요된다. 한 쪽에서 일주일만 논의를 거쳐도 한 번의 서신 교환에 걸리는 시간은 단번에 16일이 된다. 서신 교환은 네 번을 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 20년간의 북벌 기조를 단번에 뒤엎는 원정이 준비되는데는 단 3개월이면 충분했다.

이 짧은 시간은 과연 이 원정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심층적인 논의가 이뤄졌을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대규모 원정에 필요한 준비 기간을 고려하면, 이 원정이 비의가 죽은 바로 그 순간부터 중단 없이 준비 과정을 거쳤음은 더없이 분명하다. 20년간의 기조가 정치적 혼란 속에 단숨에 뒤집혔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정치적 논란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기록은 주체로 유선이 아닌 '강유'를 지목한다. 이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나는 막부의 수장이라는 대뇌를 잃고 정치적 혼란에 빠진 성도 조정이, 제대로 된 검토과정 없이, '평소에 하던대로', '외부 총지휘관이 작성한 형식적인 건의문'에 승인 도장을 찍었을 뿐이라는 주장이 과하지 않다고 본다. 바야흐로 사냥개가 풀려난 순간이었다.

고작해야 항장인데, 과연 이 원정 전체가 그의 의도가 맞을까? 유선의 의지는 아닐까? 몇몇 독자분들은 여전히 이런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장익전은 이 면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연희 18년(255)에 (중략)강유가 다시 출병할 것을 제의했을 때, 오직 장익만이 조정에서 논쟁을 하여, 국가가 작고 백성들은 피곤하므로 병력을 남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강유는 듣지않고 장익 등을 이끌고 출정하여, 장익의 지위를 진남대장군(鎮南大將軍)으로 승진시켰다.

삼국지 촉서 장익전

첫째로, 출병은 실제로 강유의 의지로 일어났다. 둘째로, 강유의 휘하 지휘관인 장익을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아무도 반복되는 대규모 원정에 대해 강유와 논쟁하려 들지 않았다. 이것은 그간 막부의 통치 아래에서 스스로 생각할 자유를 잃은 조정이 어떤 기구로 변모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자화상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점에서 촉이라는 체제는 단지 커다란 농담이었다.


주인이 사라진 사냥개는

들판과 집을 떠돌고

집에는 먼지가 가득하다


253년 4월에 원정을 떠난 강유는 약 9개월이 지나 254년 1월에 성도로 돌아왔다. 군량이 다해서였다.

254년 1월에 성도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다시 다음 원정을 준비했다. 6월, 그는 다시 원정에 떠났다.

255년 1월. 그가 성도로 돌아왔다. 위나라 변경의 민호를 잔뜩 납치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그해 여름. 강유가 다시 원정에 나섰다. 위의 옹주자사를 대파하는 성과를 내지만, 장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이어나가다 결국 퇴각한다.

256년. 그는 다시 원정에 떠나고 등애에게 상규에서 대파당한다.

257년. 강유는 위나라에 반란이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원정에 나선다.

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온다.

253년부터 258년까지, 근 20년간 유례가 없던 규모의 원정이 5년간 총 5차례나 벌어졌다. 대규모 승전이 있던 반면 대규모 패전도 벌어졌다. 목줄이 풀린 사냥개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정치적 혼란의 조짐은 명백했다. 고작 5년동안 4차례의 대사령이 있었다. 유선의 일생 13번의 대사령 중 약 1/3이 이때에 집중된 것이다.

강유의 잇다른 원정에 대한 내부의 반응도 서서히 냉각되고 있었다. 사실 유비가 익주를 정벌하기 이전부터, 익주의 호족 계층에는 유교 경전을 미래를 예지하는 예언서로 해석하는 촉학이 깊게 뿌리내린 상태였다. 이 학문은 후한 말 정치이론으로 통용된 일종의 신비주의인 참위에 깊은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당시의 관점으로는 미신이 아니라 정치이론에 해당했다. 촉의 '유씨' 정권에게는 곤란하게도, 촉학에는 오행의 순환에 따라 위나라가 한나라를 대체하리라는 이론(당도고)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는 익주 토착 호족집단에서 명망이 높은 '예언자'를 처형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지만, 익주 호족 사회와의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이미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정치이론인 촉학 그 자체를 탄압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과거에 막부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촉학을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제갈량이 손권의 황제 즉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던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현실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이념적 무결성을 포기한 주요 사례 중 하나였다. 제갈량은 '예언자'의 직계 제자인 초주를 권학종사로 임명하였으며, 장완의 대에 이르러서 초주는 주의 학자들을 총괄하는 전학종사에 임명된다. 비록 막부를 위시한 촉 정계는 한번도 그에게 진정한 정치권력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또한 그를 꼭대기로 삼아 퍼져나간 익주 호족 사회에 수술을 감행할 정치적 자원도 없었다.

이렇게 익주 내부에 촉학이 살아남은 상태에서 강유는 1년 1북벌이라는 광포한 원정을 감행했다. 원정은 제갈량의 대보다 훨씬 더 모험주의에 치우쳤고 상당히 많은 손실을 초래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촉학의 수장에 해당하는 초주는 진지와의 논의를 거쳐 유명한 구국론을 집필했다. 구국론은 놀랍게도 세 명의 황제가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했는데, 간략히는 이미 3국의 통치가 공고화된 이상 급격한 형세 변화는 어려우므로 뚜렷한 근거가 없는 원정은 국력을 소진시킬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그간 제대로 결집한 적 없던 익주 토착의 불만이 터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반복되는 원정은 군부의 중진인 장익의 입에서마저 반대 의견이 토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공공연히 강유에게 반대했고 회전에서 승리한 상황에서조차 위국의 영토를 장악할 가능성에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군부의 중진인 그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다시 풀어 말하자면, 이 원정이 '위군 몇 명을 죽였다' 이외에 다른 의미있는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의미였다. 원정은 점차 군공 그 자체를 위한 행동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군부 중진마저 이에 염증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한편 비의의 사망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촉 조정은 서서히 조정이 원래 수행했어야만 하는 기능들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사냥개가 위험한 모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대사령과 함께 연호를 고치고 사냥개의 목줄을 잡으며 혼란한 정국을 쇄신하려 들었다.


다시 목줄이 잡힌 사냥개는

들판을 그리워한 나머지

선을 넘는다.


258년, 막부 최후의 조각인 진지가 죽으면서 정권은 황호를 전면에 내세운 유선의 손에 들어갔다. 유선은 처음으로 그에게 권력을 '허락'했던 진지를 애도하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유선은 이 시점에서 자신에게 권력을 허락하지 않고 행동을 제약했던 동윤에게는 깊은 원한을 느끼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권력의 맛을 알고 휘두르려 드는, 진정한 황제의 복권이었다.

형주계인 동궐은 상서령(행정부 수장 정도)에 올랐고, 동시에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이 중도호(이엄이 맡았던 직책으로, 명목상 내외 군사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다.)에 올랐다. 진정한 '통치 경험'이 있는 형주계가 모두 소진된 상황에서도 형주계는 익주계의 중앙 진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선은 기나긴 세월 끝에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을 그들에게 다시 넘겨줄 생각이 없었으며 황호를 무기삼아 국정을 주도하였다. 형주계파의 부스러기인 동궐과 제갈첨,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형주계파인 번건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황제는 단호했다. 촉에서 아주 드문 황제 친정 시기의 도래였다.

매년 이어지던 북벌은 중단되었다. 강유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강유는 258년부터 262년까지 마지못해 중앙정계에서 황호와 경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 촉 정계에서는 특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흔히 오호대장군이라 불리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그리고 방통에게 시호가 추증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촉 정계에서 전설적인 창업공신이자 군사적 능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조운별전에서는 강유가 조운의 시호를 건의한 일이 나와 있다. 따라서 강유가 수도에 목줄이 잡힌 시기에 벌어진 이 급작스러운 시호 추증은, 곧잘 강유가 촉 정계에 북벌의지를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시도로 해석되곤 한다.

시호 추증이 강유의 의식적인 행동이었건 아니면 다른 정치적 맥락이 있건 간에, 강유의 불만과 불안은 커져만 갔다. 군공으로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던 그의 입지는 북벌이 줄어들수록 함께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으며 정권은 이제 자신의 '전우'조차 아닌 생면부지의 인간들로 채워져 있었다. 강유에겐 자신을 입증할 수단이, 너무나도 간절히 필요했다. 그는 이러한 일념 하에 국가의 방어 체제를 일시에 뒤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강유의 한중 방어 개편

: 뼈 내주고 살 얻기


당초 선주(유비)가 위연을 남겨 한중을 진수하게 할 때에 (한중 주변의) 여러 위(圍)에 모두 군사를 충실히 채워 외적을 막아, 적이 쳐들어오면 (한중의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244년에] 흥세 전투에서 왕평이 조상을 막을 때에도 이 제도를 모두 (그대로) 계승하였다.

촉서 강유전.

촉의 한중 방어 전략은 유비 대에 성립되었고 한중 인근에 여러 보루들을 설치하여 위군의 한중 접근을 저지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방어전략이 실제로 가동한 흥세 전투의 사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확인하여 불필요한 오해들을 걷어낼 수 있다.

첫 번째로, 국경 없이 휴전선만을 가진 현대 한국인은, 한중을 둘러싸고 설치된 여러 보루라는 서술에서 막연히 그것이 국경지대의 주요 길목을 따라 설치된 방어용 요새이며, 적이 한중에 접근하기 전에 요새들을 방어선으로 삼아 수비하였으리라는 인상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흥세 전투에서 나타난 양상은 전혀 다르다. 보루들에서 지연전을 벌인 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오히려 한중의 바로 지척(약 25km)인 흥세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두 번째로, 촉군은 적군이 한중으로 오는 입구인 낙곡에 닿은 시점에서 적의 접근을 이미 파악했으며, 그조차도 이미 뒤늦은 파악으로 받아들여졌다. 세 번째로, 보루들에서 별도의 수성전을 벌인 흔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루들의 병력이 강유의 작계 변경까지 유지되었음은 확실하다.

당시 촉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발명품으로 여겨진 목우(산악용 외바퀴 수레)의 속도를 보더라도 한중으로 오는 길목을 따라 설치된 수십 개의 보루들이 수백에서 수천의 병력이 항시 주둔하던 대규모 국경 요새라고 보기 아주 어렵다. 목우의 운송 속도는 하루 8k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장안과 한중의 사이, 약 100km 거리에 천명의 병력이 주둔하는 보루가 설치되었다면, 보급을 위한 왕복 과정에서만 수레 한 대당 25일치의 식량이 길에서 낭비되게 된다. 목우가 실을 수 있는 곡물의 양은 1인의 1년치 식량으로 적혀 있으나 수나라대 2인이 끄는 수레의 적재량이 180kg에 불과한 것을 볼 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상당히 무리한 가정으로 수나라대 2인용 수레의 적재량과 1인용 수레인 목우의 적재량이 같다고 해도 운송과정에서의 식량 소모는 치명적이다. 한서 식화지에 따르면 인간 한 명이 한달을 버티기 위해 1석 반이 필요하고, 이는 현대 무게로 환산해 45.5kg에 달한다. 왕복에 걸리는 시간이 25일이므로 운송 과정에서만 수레 한 대당 약 40kg의 식량이 소모되며 140kg만이 목표지에 전달된다. 한서 식화지에 따르면 한 사람이 1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곡물의 양은 546kg이다. 한 사람분의 1년치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서 4대의 수레가 필요하다. 정리하면 고작 보루 하나, 천명의 1년치 식량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4000대가 넘는 수레와 동일한 수의 수레꾼이 필요하다. 천 명이 주둔하는 국경 중간지대의 보루가 고작 5개만 있어도 한중은 그 유지를 위해 20000명의 보급 전담 인원이 필요하며, 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형태가 아니다.

정리해보면, 촉의 방어전략은 국경지대 산맥에 늘어선 요새에 대규모 주둔군을 유지하거나, 지연전을 실시하는 형태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다. 관측 초소 역할을 하는 소규모 보루들에서 적군의 동정과 진군로를 확인하여, 적이 진군해오는 길목에서 한중으로 나오는 입구를 요새로 삼아 병력을 집중시킨다. 이렇게 적이 평지로 못하게 막아서고 시간을 끌면, 위군은 장안에서 한중까지의 인구밀도가 대단히 낮은 산맥지형으로 인해 금새 보급이 한계에 도달하여 퇴각해야만 한다.

촉군의 한중방어 전략 요약. 빗금친 부분은 한중 분지(평야에 가까운)를 나타낸다.

이 전략은 흥세에서 아주 잘 작동했지만,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흥세의 사례에서 보이듯, 적의 접근을 거부하고 접촉을 최소화하며 퇴각을 강요하는 전략의 특성상, 아군의 손실을 막기 쉬운 만큼이나 적에게 손실을 강요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교차검증이 전혀 되지 않는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촉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위군에게는 어떠한 유효타도 가할 수 없었다. 이는 자연스레 거둘 수 있는 군공의 규모를 제한하는 요소였다.

이는 사실 촉과 위의 전력차를 생각하면 단점이라고도 하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촉은 위와의 국경을 형성하는 산맥지대 없이 정면으로 싸워서는 생존할 수 없는 약소한 체제였고, 적이 몇 만을 끌고 오던 보급으로 공세종말점을 형성해 되돌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위의 침공을 예방하는 대단히 훌륭한 패였다. 대촉 전선에 투입되는 위군의 수는 대오 전선의 약 절반여 선을 유지하는데 그쳤으며 흥세만이 유일한 예외였다. 유비의 접근거부 전략은 말 그대로 촉을 구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제에 최선인 전략이 반드시 구성원 개개인에게도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간의 성과없는 원정과 패배로 군부를 향한 회의적 시선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겨도 "대박"이 나기는 어려운 방어 전략은 지휘관들의 아쉬움과 불만을 자극해 불필요한 모험주의를 야기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잇다른 실책을 만회할 "대박"을 간절히 바라는 지휘관은 누구보다도 이런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인물이었다.

여러 위(圍)를 조수(錯守,설치하여 수비함)하는 것은 비록「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중문(重門)’의 뜻에 부합하지만 적을 막을 수 있을 뿐 큰 이로움(→대승)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위(圍)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漢), 낙(樂) 두 성(→한성漢城과 낙성樂城)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게 하면서(※) 아울러 중요한 관(關)을 진수(鎭守)하며 적을 막느니만 못합니다. 사고(변고,변화)가 있을 때에 유군(游軍,기군奇軍으로 활용하는 기동부대)으로 하여금 함께(*원문은 並.자치통감에서는 傍(측면으로부터)으로 기술) 진격해 그 허점을 노리게 해야 합니다. 적은 관(關)을 공격하여 함락하지 못하고 들에는 흩어져있는 곡식이 없어 천리 떨어진 먼 곳으로 군량을 운반해와야 하니 자연 피핍(疲乏,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적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날이 되면 그 연후에 여러 성(城)에서 아울러 출격하여 유군(游軍)과 힘을 합쳐 그들을 공격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적을 전멸시키는 전술입니다.

촉서 강유전

한성과 낙성은 한중 평야지대의 중심에 위치하는 성이다. 강유는 적군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대신 평지로 들어오게 놔두고, 청야를 실시하며, 한성과 낙성에서 버티자고 주장했다. 강유의 작계에서 적은 완벽한 청야가 이뤄진 한중에서 한성과 낙성을 하릴없이 포위하며 배를 주리고 있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그때야말로 이 작전의 스타인 자신이 등장할 차례였다. 그는 어디선가 마술처럼 주력군을 이끌고 나타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위군을 일시에 섬멸하고 촉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는 역할을 맡으려 했다.

강유의 한중방어 전략. 강유는 거대한 군공을 바라고 한중을 '오픈'하자고 주장했다.

이 전략은 한중을 거대한 미끼로 삼아 위군을 끌어들이고, 자신이 격파해 적을 전멸시키겠다는 의도가 아주 뚜렷하다. 오로지 적의 전멸이라는 목표만으로 한중을 적의 앞에 내주는 이 계획에서, 촉의 가장 중요한 전략 거점인 한중은 위군의 손에 의해서건, 혹은 촉군의 손에 의해서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운명이었다.

강유 계획의 핵심은 한중 전역의 완전한 청야이다. 만일 청야가 실패한다면 적군은 그간 촉군의 북벌 기지이자 막부의 수도로 기능해온 한중에서 막대한 식량을 조달하게 될 것이다. 한중은 후한대부터 익주의 수도권이라 할 수 있는 성도와 부현에 이어 촉의 제 2 인구밀집지역이었고, 관중에서부터 막대한 인구가 유입되온 전례가 있었다. 비록 조조의 강제이주로 상당한 백성이 이탈한 정황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은 촉의 건국 이래 여전히 최대 십만 원정군의 보급기점으로서 작동할 여력이 있었으며 가까운 흥세 당시에도 주둔군만 3만 미만이었다. 이는 한중에 상당한 인구가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한중에 거주하는 인구가 생존하기 위해선 당연히 매 끼마다 뭔가를 먹어야 한다. 전근대의 인구가 평시에 모든 식량을 전략거점에 비축해두고, 매 끼니 때마다 인근 관아까지 며칠을 걸어가 식량을 받아오는 식으로 생활하기란 당연히 불가능하다. 결국 민간이 소모하는 식량은 한중 전체에 걸쳐 분포한 민간 취락에 분포할 수밖에 없으며, 전근대 군대는 이런 취락들을 돌며 식량을 징발해 '보급'을 수행했다. 따라서 위군의 현지 보급을 막기 위해 '청야'를 하겠다는 강유의 계획은, 결국 촉군이 한중 전체의 민가를 돌아다니며 최소 십수만에 달할 백성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비축한 식량을 모조리 징발해 한성, 낙성으로 옮기고, 불가능하다면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두 불태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한중 민간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약탈과 파괴행위로서, 아사 위기에 놓인 수십만 단위 민간인의 광범위한 저항을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시간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장안에서 한중까지의 거리를 감안할 때,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2~3주 정도이다. 한중의 규모는 경상도와 유사하며, 강유가 한중에 배분한 군대는 1만에 불과했다. 1만 군대가 경상도 전체의 취락을 돌면서 민가의 모든 식량을 불태우고 약탈할 수 있는가? 이런 계획을 실제로 수행하기 위해선 단지 마술이 필요했다. 설령 한중의 모든 백성들이 촉에 대한 애국심을 불태우며 식량을 등짐으로 지고 한성, 낙성으로 향한다고 해도, 개인이 등짐으로 질 수 있는 양은 건장한 성인 남성 기준 60kg에서 수렴되며, 이는 한달 반 소모량에도 채 못 미친다. 취락에는 겨울을 버티기 위한 식량이 저장되어 있을 터이므로 식량의 절반조차 청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만다.

촉의 제 2수도인 한중을 청야를 통해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이 계획의 두번째 문제는, 놀랍게도 적군이 퇴각할 경우 이를 막아설 수단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적군은 한성과 낙성에서 지리한 공성전을 이어나가는 대신, 촉군의 증원이 도착하기 전에 한중의 백성들을 강제로 데리고 돌아갈 수 있었다. 조조가 형주에서 수행한 사례에서 보듯 수만 단위의 강제이주는 거점의 여력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었고, 이 경우 '왕의 귀환'을 수행하는 강유는 텅 빈 한중과 사라진 적의 흔적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될 터였다.

이 계획은 철저하게 청야가 '당연히' 성공하고, 위군이 '당연히' 배를 굶주리며 증원군인 강유가 '왕귀'할 때까지 한성과 낙성에 대한 공성을 기계적으로 이어나간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분명 촉군의 계획임에도 침공군인 위군에게는 너무도 많은 옵션이 열려 있었고, 촉군은 전제가 완벽히 실현된다는 가정 하에서만 성공할 수 있는 이상한 계획. 위군이 별도의 부대로 구원군을 막아서거나, 촉군의 청야가 실패하거나, 혹은 위군이 너무 많아 강유의 군대가 지원군으로 나서도 걷어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B플랜이 존재할 수 없는 기묘한 계획.

가장 좋게 표현해도 도박적이고 태만하며, 직설적으로 지휘관 개인의 군공을 위해 촉의 제 2 중심지를 포기하는 계획을, 강유는 밀어붙였다. 258년 촉군의 한중 방어 작계는 수정되었다. 한중에는 한성, 낙성 주둔군을 합쳐 단 1만여만이 남았으며 나머지 군대는 한수까지 물러났다. 강유는 성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미친 계획을 내는 지휘관과 미친 계획을 불허할 능력이 없는 정부. 그것은 멸망을 확정짓는 최후의 도장이었다.

 


정치적으로 자살하는

가장 빠른 방법


방어계획을 바꾸고 황호와 대립하던 강유는 262년, 결국 참지 못하고 미친 짓을 벌였다. 유선의 면전에서 대놓고, 진지의 살아생전부터 유선을 도와 촉의 정치를 재건해온 황호를, 정치계의 거두로 성장하여 제갈첨과 동궐마저 협치하는 바로 그 황호를, 어떤 명분도 맥락도 없이 아무튼 그냥 죽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 유약하던 황제가 그를 향해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이 정치감각 없는 사냥개는 자신이 바로 지금 정치적으로 자살했음을 깨달았다. 강유는 황급히 사과하고 물러났으나 황제는 이례적으로 조서를 내려 황호에게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유선의 치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공격적인 정치적 행위였다.

이 무렵에 강유의 정치적 입지는 이미 나락까지 떨어졌다. 황호와, 그리고 놀랍게도, 제갈첨 양 쪽이 대장군을 형주계 인사인 염유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는 사실상 모든 파벌에서 미친 전쟁광 취급을 당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조차 의심받고 있었다. 그의 기반이어야 했을 군부에서조차 더이상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강유는 이러한 모든 현실에서 도망치듯 262년 원정에 나섰다. 촉에서도 아마 가장 늙었을 노장인 요화는 그 모습을 보며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우게 된다더니, 백약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도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전쟁을 멈추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겠는가."라고 한숨 속에 중얼거렸다.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당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실각을 두려워한 이 대장군은,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촉의 주력군을 이끌고 답중에 머물렀다.

왼쪽 상단 하얀 원이 답중의 위치다. 한중까지의 거리는 500km를 간단히 상회한다.

실각을 두려워한 '대장군'이, 촉의 제 2 수도 방어전략에서 핵심을 맡은 바로 그 군대, 촉의 주력군인 북벌군을 이끌고 국경 깡촌에 틀어박혔다. 실각당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단지 돌아오지 않았다. 한중을 방어할 군대는 사라졌고 수도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작동을 정지했다.

비의 이후로 끊겨버린 일선 지휘관과 정권의 유대감,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정권, 자신만이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수행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일선 지휘관의 유아적인 태도가 모두 겹쳐, 촉은 스스로 멸망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착실히 밟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종회와 사마소는 활짝 미소지었다. 멸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출처] 촉 멸망사 5. 꼬리에 불이 붙은 사냥개는 집을 불태우고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 작성자 황제펭귄

https://cafe.naver.com/booheong/22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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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법의활 | 작성시간 23.08.16 쩝 .....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8.16 잘 보고 갑니다
  • 작성자BACCANO | 작성시간 23.09.17 미친 강유 개새끼네여
    나관중에 의해 충신으로 보여진거군요
    그에 비해 황호는 간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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