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식량원조가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고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작성자Albrecht Wenzel von Wallenstein작성시간10.04.26조회수523 목록 댓글 2아래의 글은 제가 쓴게 아니라 http://sonnet.egloos.com/에서 댓글에 대한 충분한 답글+반박으로 제시할수 있는 글을 제가 정리+ 연결한 글입니다. 나머지 댓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북한 경제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
여기서 북한 무역의 중요한 병폐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 문제다. 이 말은 대외경제에 대한 의존을 최대한 줄여 대내지향적 자급자족 경제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활발한 무역은 대외의존도를 높이게 되므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자급자족 경제를 건설하는데 꼭 필요하지만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거나 부족한 것만을 선별적으로 수입하며, 이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조달하기 위한 만큼만 수출을 한다는 것이 무역계획 수립의 전제이다. 즉 북한은 원칙적으로 무역을 좋아하지 않으며, 단지 어쩔 수 없을 때만 무역을 하는 것 뿐이다.
이어서 호혜·평등을 외치는 '상호성 원칙'도 문제다. 여기서 북한이 선호하는 쌍무협정무역과 구상무역(barter)이 등장하게 된다. 북한은 자국의 무역 상대국과 1:1로 무역수지를 맞추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남한과 일본의 무역을 생각해보자. 남한은 지난 수십 년간 일본에 대해 구조적인 무역적자를 겪어왔다. 일본에서 부품이나 자본재를 수입해 가공 수출을 많이 해 왔기 때문이다. 즉 남한은 제3의 나라에 대한 수출로 벌어들인 외환을 갖고 일본에 대금을 지불한다. 북한은 이런 것을 착취(?)라고 주장하며 거부하고자 한다.
그럼 북한이 주장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가? 명목상 자본주의적 무역개념을 거부하는 북한의 무역관은 이윤추구 대신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꿔쓰는(有無相通) 개념에서 출발한다. 말은 소박하고 건전해 보이지만, 이런 개념은 필연적으로 물물교환에 가까운 원시적인 무역 형태를 가져온다.
이 원칙에 따르면 북한이 일본에게 1백만 달러의 물건을 사들이기로 했다면, 일본도 북한에게서 같은 금액의 물건을 사들여야 한다. 문제는 일본이 북한에게 살 만한 물건을 찾을 수 없을 경우다. 이 때는 일본이 북한으로부터 필요 없는 물건을 억지로 사든가 북한이 수입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본 물건 수입을 포기해야만 한다. 즉 이런 방식에서는 무역이 위축될 가능성이 커진다.
순수한 물물교환이 아니더라도, 양 국 사이에 그리 크지 않은 무역거래 한도액을 정해 놓고, 북한이 한도액이 찰 때까지 수입을 하고 나면, 상대국이 북한 물건을 수입해 가서 한도액이 도로 줄어들 때까지는 더 거래를 할 수 없게 되는 청산협정 같은 방식이 북한이 외국과 흔히 맺는 무역관계이다.
북한은 수출품이 부족하고 고질적인 외환부족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함으로서 강제적으로라도 무역수지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그 결과 장기적인 무역발전을 저해하고야 말았다.
2. 북한의 재건과 공산권 원조
북한은 한국전쟁 종전 후인 1950~1960년대 초에 인상적인 경제성장을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는 소위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대규모 원조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의 전후 복구에 대한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지원(길 잃은 어린 양) 참조).

그런데 이런 범 공산권의 원조도 무한히 갈 수는 없는 법, 전후복구가 일단락되면서 무상원조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중소분쟁이 벌어져 공산권의 큰 형과 작은 형 격인 소련과 중국이 서로 다투게 되자, 북한은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어느 편을 들더라도 두 나라가 힘을 합쳐 북한을 도와줄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 와중에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정치적 자주성(=중국이나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난 김일성 독재의 자유)을 확보했지만, 그 대신 원조 부문의 타격은 심각했다.
서방의 차관
이에 북한은 1970년대 초 서방으로 눈을 돌려 '계급의 적들'로부터 자본과 설비 도입선을 찾게 된다. 관대하신 자본가님하들께서는 쾌히 지갑을 열었다. 그 결과 1971년에는 전체의 15%에 불과했던 대서방무역이 1974년에는 대 공산권 무역과 맞먹는 42%까지 뛰어오르게 된다.[최주환:245]
여기서 이 글을 쓰게 된 두 주제 중 하나로 돌아가 보자. "북한의 국제 분업에의 참여를 가로막는 미국의 적성국 교역법이 북한 경제난의 주요 요인"이라면 북한은 이 때 어떻게 서방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끌어 쓰고, 무역규모를 늘릴 수 있었을까?

북한은 서방의 돈을 끌어다가 투자를 시작한지 겨우 3~4년 만인 1974년부터 채무상환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1976~77년에는 일본, 스웨덴, 서독,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의 채권단으로부터 채무상환유예(rescheduling) 조치를 받았고, 1984년에는 이자지급도 연기받는다. 그러나 북한은 그 후로도 채무이행에 성의를 보이지 않고 채무이행의 조건으로 신규차관 제공과 상환조건 완화를 요구한 끝에, 서방측 은행 차관단(약 140개 은행으로 구성)은 북한을 채무불이행(default)국으로 선고하기에 이른다. 1975년에 북한의 외채는 대서방 13억 달러, 대공산권 7억 달러로 총 20억 달러에 육박했으며, 그 이후로도 계속 늘어나 2000년 말 현재 무려 125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최주환:247~8]
훗날 북한이 서방시장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북한의 엉망진창인 신용전력 때문이었다. 국제금융가에는 악의적으로 돈 떼어먹고 배짼 북한의 전력이 잘 알려져 있었고, 아직도 부실채권을 들고 기다리는 채권자들이 버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북한에 투자를 하거나 신용을 공여하겠는가? 잠재적 무역 상대는 (무역신용을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북한이 경화결제를 할 수 있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가능하면 북한과의 거래를 피하려 했다.
4. 불만족스러운 후원자 후보, 중국
그렇다면 당시 북한에게 있어 중국은 대안이 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을 따져 보자. 실제로도 오늘날의 중국은 북한에게 제일 큰 원조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나라가 아닌가?
우선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은 덩샤오핑 집권 후 개혁개방 노선이 취해졌다고는 하나 1980년대까지의 중국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규모가 작은 나라였다는 점이다. 위에서 소개했던 북한의 원조-차관 도입 내역을 살펴 보아도 중국은 소련에게 훨씬 미치지 못했다. 또한 중국은 기술 후진국이어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이나 자본재를 공급하기에 적합한 국가가 아니었다.
게다가 북한의 대소무역과 대중무역은 정치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소련 쪽으로 접근하면 대소무역은 늘고 대중무역은 줄며, 중국에게 접근하면 반대의 경향이 벌어졌다. 다음 연설은 당시 중국이 북한을 보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조선을 원조하여 그들의 사회주의경제를 발전시키고 건설시켜야만 하나 이러한 원조를 우리의 능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이를 전제로 삼아야 되며 조선의 경제적 곤란에 대해서는 중국은 오로지 그들을 도와 해결해 줄 의무만을 가지며 이를 도맡을 책임은 없다. 군사 무상원조는 하지 않으나 매매는 할 수 있다. 조선은 우리에게 몇10억의 빚을 지고 있는데 이를 서서히 갚을 수는 있으나 갚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공짜로 주는 것은 공짜로 주는 것이고 빌리는 것은 빌리는 것이다. 공짜로 주는 것과 빌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 중국 외교부장 黃華의 내부 연설 '1980년대 외교정세정책 및 앞으로의 임무' - [최명해:337~9]
이런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북한이 정상적인 무역상대, 즉 '국제분업에 따른 [상호]이익'를 나눌 상대를 찾고 있었다면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은 여전히 나쁘지 않은 파트너였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원조를 줄, 즉 밑빠진 독에 물 부어줄 상대를 찾고 있었다면, 중국은 실망스러운 후원자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소련은 망하기 전까지는 그런 원조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북한이 소련에 밀착했던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1980년대, 소련의 결정적 역할
자 이리하여, 한국전쟁 전후복구를 위한 범 공산권의 원조가 끝나고, 서방세계로부터의 자본도입도 채무불이행으로 끝나자 북한은 전략적 선택을 내려야 했다. 중국은 무역이라면 환영이지만, 과거와 같은 묻지마 원조는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북한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남은 호구소련에 밀착한다.

위 무역 통계를 보면 1975년 경에는 대소무역과 대중무역이 대략 25%씩으로 균형을 이루다가 80년대 들어 북한의 대소무역 비중이 계속 커져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85~90년 사이에 북한의 대소무역 의존도는 50%를 넘어선다.
그러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1990년대 초 대소무역은 갑작스런 대붕괴를 맞는다. 구소련과의 무역은 1990년까지만 해도 단독으로 북한 전체 수출입의 약 55%를 점유하고 있다가 2년 후에는 약 12%로까지 떨어진다. 소련-북한 간의 무역량만 놓고 보면 거의 90% 하락한 셈이다. 사실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과의 무역량은 이 기간 동안 약간 늘어났다.
따라서 1990년대 초 북한의 대외무역의 붕괴를 묘사하는데 있어 '공산권 혹은 동구권 붕괴'라는 말은 적합치 않다. 그 말은 별 다른 이익 없이 초점을 흐릴 뿐이어서, '대소무역의 붕괴' 쯤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 표는 1960~1987년까지 북한이 소련과 체결한 주요 원조협정을 요약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1)소련으로부터 꾸준히 원조를 받았으며, (2)채무지불 연기를 반복했고, (3)종종 현물상환을 조건으로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받은 개발차관을 꾸준히 떼어먹었음을 의미한다.
1970년대 들어 소련은 원조로 건설한 공장이나 광산에서 나온 생산물로 대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북한으로부터 채무변재를 받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들어 북한으로부터 소련으로 가는 공업수출이 증대되지만, 이는 북한의 제품수출능력이 증대되어서가 아니라 품질이 열악해 세계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는 북한제품을 소련이 떠맡은 결과였다. [木村:232~3]
프로젝트 원조 외에도 '사회주의 우호가격' 즉 국제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원료나 자재를 공급했던 점도 중요하다. 소련이나 중국 등은 북한에 대해 지속적인 흑자를 시현했는데, 이는 무역의 형태로 포장된 '은폐된 원조'였다. 임의로 설정된 '공정' 환율 또한 은폐된 원조를 뒷받침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대소교역의 붕괴에 관해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소련이건 소련의 후계국가(주로 러시아)든 간에 북한과의 무역에 특별한 제재를 가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구소련의 체제전환 후 구소련 시장에 품질 좋은 서방 상품들이 석권해 구소련의 국내 기업들이 초토화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신규업체들이 진출할 여지는 충분했다. 북한 상품이 경쟁력이 있었으면 구소련 시장에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밀려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소련 시절에조차 북한 상품은 소련지역에서 경쟁력이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소련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우방국을 위해 거저 돈을 뿌리느냐, 저질 상품이라도 억지로 받느냐 중에서 후자를 택해 북한 상품을 수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 정치적 이유를 포기하고 막강한 경쟁력을 가진 세계 기업들과의 더 치열한 경쟁에 직면하자 북한 상품들은 러시아 시장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연하청:183~4]
북한이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게 정상적인 상업교역 조건을 제공받은 상태에서는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역을 할 수 없었던 사실은 과거 북한의 대소무역 대부분이 강대국의 원조 성격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뼈를 깎으면서도 수입을 줄인다, 대일무역
하지만 북한처럼 쌍무적 청산 형태를 무역의 기본 원칙으로 삼는 경우, 상대국이 억지로 물건을 사 주지 않을 경우 주된 대안은 원치 않더라도 수입을 줄이는 것이다. 1980년대 대일교역에서 이 패턴을 찾을 수 있다.[연하청:179~80][최주환:253~4]
위에서 소개한 [북한의 권역별 수출/수입] 표를 보면 1980년대 내내 대일수출은 늘리고 대일수입은 절반으로 줄이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일본이 소련처럼 우방국으로서의 정치적 이유에서 북한과의 교역에 응하는 나라였다면,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론1
북한이라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있어 무역을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짜 싫어하는 놈은 없는 법, 북한은 원조는 최대한 많이 받고 싶어했다. 이 무역 최소화, 원조 극대화의 논리가 북한 무역의 큰 그림을 결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은 원조-무역을 다음과 같이 다루었다.
무상원조: 쿨하게 상대가 처음부터 포기하고 주는 원조
유상원조나 상업차관: 일단 받은 후 떼먹어서 만드는 원조
쌍무적 무역: 수입 후 결제대금을 적당히 치르지 않고 뭉갬으로서 얻는 은폐된 원조.
구상무역: 수입 후 결제는 상대가 원치 않는 저질 물품 반강매로 해결하는 무역과 원조의 중간형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북한경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어떻게 이루어 질수 있을지 고민해 보자, 북한경제의 개선을 위해서 우리가 택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우리가 그들이 이런 북한의 경제적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역, 농업상의 문제를 개선하는걸 강제하는 것이다. 이런 수단 없이 북한은 절대로 지금까지의 관행(원조로 먹고 사는 행위)를 멈추지 않고 새로운 호구2 인 남한을 뺴먹을 뿐입니다. 그게 북한 식량 지원은 충분한 대책이 될순 없겠죠. 그럼 북한이 동구권 이후의 식량 지원때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죠.
|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1998년-2005년 기간을 중심으로)
실제로 북한의 지원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북한의 완고한 저항은 여전했지만, WFP는 모니터링이 없으면 원조도 없다는 것을 무기로 북한으로부터 다소의 양보를 얻어냈습니다. 또한 어린이 영양상태 조사나, 농업생산량 예측을 위한 조사 등 북한 기근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기초조사들을 한 것도 중요한 소득입니다. 이런 것은 정상적이라면 북한이 마땅히 제공해야 되는 것이지만, 이미 보셨다시피 북한이 제공하는 자료는 전혀 믿을 수 없기 때문(기근이 진행중인 북한의 어린이 사망률은 미국/유럽보다 낮다!)에 모든 것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경과를 한 번 살펴보지요. 다음 표[13]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UN을 경유한 국제사회의 대북지원 실적을 정리한 것입니다. ![]() 이 표를 그래프로 옮겨 그리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 국제원조실적(만 $) 이제 분명히 구분되는 세 시기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1) 북한의 홍수 구호 요청으로 시작해 상황파악에 어려움을 겪으며 소량의 원조가 제공(1995~96) (2) 구호가 본격화되어 대량의 원조가 제공(1997~2004) (3) 유엔합동호소(CAP) 프로세스가 종료되고 국제사회의 원조가 급락(2005~현재) 최초에 왜 원조가 지연되었는지는 앞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4년까지의 원조가 많았던 시기는 북한 기근을 중단시키는데 중요한 성과를 올렸던 상대적으로 좋은 시기입니다. 문제는 2005년 이후입니다. 북한은 2004년 가을부터 유엔의 대북 인도적 통합지원을 거부하고 WFP를 비롯한 국제원조 조직에게 북한 사무소를 폐쇄하고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은 이렇습니다. 북한은 대북지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유엔기구에 대해 2005년 말까지 현재의 사업을 종료하라는 뜻을 공식적으로 전달하였다. 북한의 최수헌 외무성 부상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금년 작황은 매우 좋다고 밝히면서 이제 북한 당국은 모든 주민에게 식량을 제대로 공급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은 필요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작황이 한 해 좀 좋아졌다고 외부의 지원이 필요 없을 만큼의 곡물생산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정말로 인도적 지원이 필요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우리가 여기서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놓고 떠들 필요는 전혀 없겠지요. 여러 관찰자들은 북한이 중국이나 남한처럼 조건 없는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들의 지원을 믿고 모니터링 같은 껄끄러운 조건을 요구하는 WFP를 몰아내거나, 위협을 통해 WFP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15] 실제로 북한이 UN기구들과 국제 NGO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가달라고 하던 시기에, 북한은 남북 농업협력위원회를 통해서 남한에게는 비료와 쌀 지원을 늘려달라고 요구[16]해 옵니다. 또한 북한은 이제 인도적 원조를 중단하고 개발원조로 전환하자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개발원조 성격의 지원을 제공하는 국제 NGO에 대해서도 나가달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개발원조는 어디까지나 명분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아일랜드 NGO Concern에게 다 걷어치우고 나가든지, 외국인 직원을 모두 빼고 북한인 직원들로만 업무를 진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북한 같은 나라에서 북한인 직원은 북한 정부의 꼭두각시일 수밖에 없습니다. 농촌경제연구원의 북한 농업 연구자 권태진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북 지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지원과 협력이 왜 필요한지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특히 정부의 대북 지원을 둘러싸고 국민 사이에 많은 갈등을 겪고 있는 점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 만일 우리나라의 대북 지원액이 급속히 증가함으로서 북한이 다른 국제사회의 지원을 중단코자 한다면 우리는 대북 지원 방식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와 공조하지 않고서 우리의 힘만으로 북한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의 식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원방향을 모색하고 효과적인 방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17]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WFP 채널로 북한을 지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모니터링 등 요구조건에 있어서는 공동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원조가 WFP를 대체하고 몰아내는데 쓰인다면, 그건 북한 대중은 돕지도 못하면서 우리 부담만 늘리는 꼴이니까요. 그럼 다음 문제라고 할수 있는 북한에 식량 원조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런 나라들 대부분은 국제시장에서 식량을 수입해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습니다. 즉 한 나라의 식량확보능력은 자체생산량 + 상업적 수입능력으로 평가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최저수요선에 미달할 경우에는 원조가 필요해지겠지요.
그러나 북한의 식량도입 패턴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북한 기근이 발생하기 전(1990~93)의 수입량이 기근(1994~97) 때보다도 많고, 원조가 늘어나자 수입량은 더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북한의 식량 총 도입량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됩니다.
"총 식량공급량 중 수입을 기정사실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 [북한] 정부는 교역을 통한 수입을 계속 유지하는 한편, 인도주의적 원조는 이를 보충하는 형태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원조 받은 식량으로 수입을 대체해 버렸다." (Haggard & Noland, pp.82-83)
이는 선의로 주어진 식량원조가 김정일 정권에 나쁜 인센티브로 작용했음을 의미합니다. 김정일 정권은 외부에서 원조를 받을 수 있게 되자 자국민을 먹여살릴 의무를 방기하고 기존에 자신들이 하던 몫까지 해외에 떠넘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절약된 외환은 북한 정권의 다른 높은 우선순위를 가진 사업, 핵개발이나 군비지출, 엘리트 층을 위한 특혜 등에 돌려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정권 차원의 전용 문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줍니다. 북한 정권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원조받은 식량을 직접 해외에 매각하지 않고도 더 쉽고 표나지 않는 방법으로 처리하는 수가 있다는 거지요.
이런 인센티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는 매칭펀드, 즉 북한이 자국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자기 돈으로 수입하는 곡물의 양과 원조의 양을 연계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량이 100만톤이 부족할 경우, 북한이 해외에서 식량 50만톤을 수입하면 원조국들도 50만톤을 무상 원조하고, 북한이 그걸 30만톤만 수입하면 자구책에 더 힘쓸 것을 촉구하면서 30만톤만 지원하는 그런 식으로 원조를 조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한 가지 가능성이 남습니다. 북한이 정말로 돈이 없어서, 속된 말로 "거덜이 나서" 식량 수입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면 그건 불가항력으로 인정해줄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랬을까요?

이 그래프는 전체 수입 중 식량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줍니다. 북한은 전체 수입 중 식량의 비중이 대략 10%를 조금 넘는 선에 도달했던 게 고작이고, 그나마도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비중이 계속 낮아집니다. 물론 석유라든가 산업원자재 같은 다른 대체할 도리가 없는 필수 수입품들도 있을 수 있기에 북한이 모든 수입을 식량으로만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떻게 봐도 북한의 식량 수입 비중은 높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외환의 배정 순위가 그만큼 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쿠바와 비교해 보면 잘 드러납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쿠바도 소련/동구권과의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80%)하고 있던 국가여서 90년대 초에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았습니다. 쿠바는 1989~90년과 1995~95년 사이에 총수출입액이 70% 이상 감소(같은 기간 동안 북한은 약 50% 감소)합니다. 하지만 쿠바는 식량수입을 총수입의 20%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북한 같은 기근을 겪지도 않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기근의 초반(1994~95)에 북한의 식량 수입이 크게 줄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에버스타트, 정광민, 해거드&놀랜드 등 많은 연구자들은 북한은 기근을 맞이해 (자신들의 비상금을 계속 풀기보다는) '원조극대화 전략'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자기 나라에는 절대 기근이 없으며 외부의 기근 가능성 추측은 모두 "공화국에 대한 음해"라고 주장하며 버티던 1990년대 초반 3년간, 북한은 평균 140만 톤의 식량을 수입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비해 현재의 경제상황이 더 나쁘지 않다고 한다면, 북한은 그 정도까지는 자기 지갑에서 지출할 능력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부실화된 회사에 사재 출연을 요구당한 총수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의 마음도 쓰리겠습니다만.
그럼 다음으로 롱기누스씨가 말씀해주신 북한 지원에 대한 적하효과(지원하면 남는 식량은 인민에게 갈것이다 식의)를 반박해 보죠.
FAD 기근과 FED 기근
기근에 대한 현대적 분석이론은 기근을 크게 두 가지 상황, 식량총공급량감소(Food Availability Decline: FAD)와 식량확보역량감소(Food Entitlement Decline: FED)으로 설명합니다. 그 중 (자연재해 등) 모종의 이유로 식량생산이 급감해서 기근이 발생한다는 FAD는 별 다른 설명이 필요없겠지요.
FED는 꼭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은데도 불구하고,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있어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직관적으로 잘 와닿지 않기 때문에 사례를 좀 들겠습니다.
아마티아 센은 1974년의 방글라데시 기근은 전후 5년 중 가장 식량가용량이 많았던 해에 일어났다고 지적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해 홍수로 논이 쓸려나가자 농촌에서는 모내기 일감이 없어져서 실업이 발생합니다. 이 실업자들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한계선상에 있던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편 곡물부족을 예상한 시장에서는 가격이 폭등합니다. 수입은 끊어지고 가격은 폭등하니 이들은 굶어죽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추수 때가 다가오자 생각보다 홍수 피해로 인한 손실이 많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식량가격은 떨어지고, 기근은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쯤에는 굶어죽을 사람들은 이미 다 굶어 죽은 후였습니다. 그 해 추수가 시작되기 전에 기근이 끝이 났다는 것은 그 홍수로 인한 식량 총공급의 감소는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기근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이 기근은 감자마름병으로 인해 식량산출이 줄어들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자마름병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가 포함된) 영국 전체의 식량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식량산출이 줄어들면서 식료품 가격이 오르자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은 대금을 치를 수 없었고, 아사자가 나오는 중에도 꾸준히 아일랜드에서 구매력이 더 앞서는 잉글랜드 등으로 식료품이 수출되었던 것입니다.
1943년의 벵갈 기근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식료품 구입에 우선권을 두어 불요불급한 지출, 좀 미뤄도 되는 지출을 줄이기 시작하고 이발사들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 해 이발비와 곡물의 상대가격은 70~80%나 하락합니다. 이발사들이 다른 직종에 비해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었을 거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자 이제 FED 기근으로 돌아가지요.
FED의 E(entitlement)는 번역이 좀 애매한 단어인데 각 개인의 종합적인 식량획득능력을 말합니다. 안정적인 수입을 주는 직장이 있거나, 집에 재산이 많은 것도 인타이틀먼트이고, 연금이나 배급수급권을 갖고 있는 것도 인타이틀먼트입니다. 좀 과격하게 말하면 매춘을 해서라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인타이틀먼트가 됩니다.
정리하자면 FED 기근은 적절한 분배가 보장된다면 모두가 굶어죽지 않게 분배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강한 인타이틀먼트를 가진 경쟁자들에게 밀려 약한 인타이틀먼트를 가진 주민들만 집중적으로 굶어죽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북한의 FED 기근 가능성
그럼 이제 북한의 기근이 FAD인지 FED인지가 문제가 되겠군요.
학계의 논의는 FAD 주도설과 FED 주도설이 모두 있습니다. FAD론의 대표격으로는 『1994-2000년 북한기근 발생, 충격 그리고 특징』(이석)을 꼽을 수 있고, FED론으로는 『북한기근의 정치경제학』(정광민)이나 『북한의 선택』(Stephan Haggard, Marcus Noland)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어느 쪽이 보다 지배적인 요소냐 하는 식의 차이이고, 공식통계를 중심으로 FAD 설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석도 실제로 읽어보면 정광민이 주장하는 것 같은 인위적 FED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pp.169-173)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앞서 소개한 해외의 FED 사례들을 보면 시작은 식량생산 감소(또는 그런 예상) 같은 공급충격으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FAD와 FED가 맞물려 있거나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북한의 기근 문제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적어 의견이 백출합니다만, 대부분의 연구자가 동의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북한 기근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지역적으로는 함경도가, 유형별로는 농촌보다는 중소도시가, 직군별로는 노동자(와 그 가족)가 제일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탈북자들도 이 지역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 특징을 해명하는 것이 북한 기근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배급제의 붕괴
북한은 지난 반 세기 동안 기본적으로 주민들이 배급제를 통해 식량을 얻는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식량 배급은 꾸준히 나빠져 왔습니다. 홍수 피해를 이유로 공식적으로 기근이 선언된 것은 1995년의 일입니다만, 실제로는 1987년부터는 식량수입이 급등하고 1991년부터는 전 주민을 대상으로 '두 끼 먹기 운동'을 진행하는 등, 90년대 초반 들어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한 기근 동안 WFP등 유엔 구호기관이 최소 칼로리 섭취를 위해 457g/1일을 목표로 구호활동을 펼쳤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이 배급량은 이미 한계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북한은 노동자 농민 위에 여러 층의 특권층이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계급사회입니다. 당간부, 관료, 군간부 등을 위해서는 각각 별도의 공급소가 있어 훨씬 풍족한 식료, 생필품, 주택 등이 공급됩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배급의 편차가 있는데 특권층이 사는 평양 등 대도시가 다른 곳보다 더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의 노동자에게 있어 배급은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급여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어지간한 노동자의 급여가 먹고 살 만큼은 되는데, 혹시 그중의 저소득층이 굶을까봐 배급을 준다면 그건 사회보장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실질급여가 같은 사회주의권 대비로도 지독하게 낮아, 배급이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이니까요.

위 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배급이 끊어질 경우 한 달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식량은 기껏 5일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근이 시작되었는데 식량 가격이 그대로 있을 리 없겠지요. 기근 중에 식량 가격은 적어도 다섯 배(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10~12배) 정도로 폭등합니다. 결국 한 달 월급으로 살 수 있는 식량은 단 1일분입니다.

이제 함경북도 북부탄전 지역의 탈북자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보지요.
여기 사람들도 식량난 이후에 어디 다른 지방으로 도망도 못가고 거의 다 죽었다. 농촌을 끼고 있지만 탄광 노동자는 노임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까 농촌에서 식량이 나오더라도 못 사먹고, 이 식량이 외지로 빠진다. 식량가격이 10원을 하든 20원을 하든 돈이 없으면 못 사먹는 것이고 100원을 해도 돈이 있으면 사 먹는 것이다. 돈이 있어야 사먹지? 그렇게 되어 있다(좋은벗들, 2000:347)
이는 전형적인 FED 기근 상황의 묘사입니다. 나치오스는 "기근으로 죽거나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식량을 재배하든, 식량으로 바꾸기 위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 노동, 서비스를 갖춰 이러한 신흥 시장의 경제적 현실에 적응할 수 없었던 이들"(pp.4-5)이었다고 말합니다. 배급제가 붕괴되고 무슨 수를 써서든 각자 알아서 식량을 구해야 상황이 펼쳐지자, 이런 식으로 원초적인 적자생존의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2) 선별: 살릴 놈과 죽일 놈 고르기
앞서 북한 기근은 함경도, 노동자, 중소도시가 집중적으로 타격을 받았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문제를 한 번 살펴보지요.
농민-노동자
소련이나 중공도 대기근을 겪은 적이 있지만 그들은 늘 농촌에서 떼죽음이 일어나는 농촌 기근이었습니다. 북한처럼 도시 노동자들이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경우는 유례가 없습니다. 과거 소련이나 중공은 빠른 공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식량공급의 우선권을 도시 노동자들에게 주는 한편, 농촌을 쥐어짜 긁어들인 농산물을 수출해 공업화에 필수적인 기계류 같은 자본재를 수입하곤 했습니다. 따라서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가장 약자인(인타이틀먼트가 밀리는) 농민이 떼죽음을 당하는 FED 기근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농민이 살아남고 노동자가 집중적으로 희생된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소련/중공과는 인타이틀먼트의 우선권이 반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가 농민을 조직적으로 수탈하지 않을 경우, 농민은 노동자에 비해 몇 가지 유리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농민은 곡물을 빼돌리기에 좋은 입장에 있습니다. 실제로 수확 전에 들판에서 곡식이 도난당했다든가 하는 증언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텃밭 등 자급자족을 위한 부업 식량생산도 농민이 유리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농민은 협동농장에서 1년치 곡물을 몰아서 받기 때문에, 주어진 식량을 장기계획에 맞춰 계획적으로 소비해 나갈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은 그들 고유의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북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의 연속이었고, 산업 붕괴로 공장 가동률은 20~30%를 맴돌았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실제로는 반실업 상태에 있었고, 임금통장(돈을 찾을 수 없는 통장에 미지불급여액만 적어주는 것) 과 같은 형태로 급여를 지불받지 못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게다가 북한 경제의 특성상 북한인들은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도 거의 없었습니다.
함경남북도
일반적으로 북한 기근의 시작은 1994년으로 봅니다. 그런데 다음 표를 보면 함경남북도 지역에서는 그보다 훨씬 일찍 배급이 줄어들었고, 기간도 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도시화율이 높고, 농업에 부적합한, 즉 노동자들이 많은 곳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런 지역에서 배급의 중단은 거의 모든 소득의 상실을 뜻합니다.

여러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궁지에 몰린 북한 정권이 정권 생존에 비교적 덜 중요한 지역을 전략적으로 버렸다고 봅니다.
그 증거로 ①동북부에 식량을 할당하는 WFP의 계획에 정부당국이 완강히 반대했다는 점, ②최초로 홍수가 발생하였던 1995년 8월부터 WFP 간부가 동북부를 방문한 1997년 5월까지, 외국 혹은 WFP의 인도적 식량지원, 상업 수입품이 동북부의 도나 동안의 항구에는 전혀 배급되지 않았다는 것, ③동북부 출신 난민의 다수가 무상원조 식량을 받은 적도 본 적도 없다고 하는 보고를 들고 있다.
대조적으로 북한의 특권층은 이 선별전략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우선적으로 배급을 받았다. 수해가 있었던 1995년도의 수확이 있은 뒤 조선노동당은 전국민의 약 4분의 1에 상당하는 조선인민군, 사회안전부, 군수공장, 각급 당기관원 등에게 과거의 지배, 결배 분을 포함하여 1년분의 식량을 배급하였다. 잔여 식량은 주로 에너지 전략부문의 탄광노동자를 중심으로 분배되었다. (정광민, p.190)
앞에서 롱기누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북한을 지원하고 남는 자원이 나머지 북한 인민에게 돌아갈수는 있겠죠 하지만 FED 기근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모두 구매력을 유지하는 동안은 시장이 아주 강력하고 효율적인 기근대책이 될 수 있고 이 점은 활용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구매력(인타이틀먼트)을 상실한 집단에게 이건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북한의 기근의 형태의 경우 FED기근에 더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적하현상을 통한 기근의 퇴치는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북한 기근에 따라 식량이 부족해지자. 북한 내부에서 가진것이 부족한 사람들은 가진 모든것을 팔아 식량을 사는데 쓰고 있습니다. 즉, 적하현상을 통한 원조가 가장 식량이 필요한 사랍들에게는 돌아가지 못하는 거지요.
|
|
하지만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에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자"는 제안을 팔기도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불우이웃돕기 모금함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들 중 반 쯤은 가짜라는 이야길 들었다고 하면 당신은 그럼 조금 있다 만난 모금함에 돈을 내고 싶어지겠습니까? 좀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바꾸자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원조에 대한 빈번한 협잡이나 전용 사례는 원조 그 자체의 의도된 효과를 잠식할 뿐만 아니라 원조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의지를 손상시킵니다. 심지어 그것이 훌륭한 인도적 목적을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북한에서 활동하던 잘 알려진 국제 NGO 단체들 - 세계 의사회, 국경없는 의사회, 기아퇴치운동, 케어 인터내셔널, 옥스팜 등 - 이 북한의 악질적인 농간을 비난하면서 철수했다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이 분야에는 국제적으로 많이 논의된 일련의 원칙이 있죠. 예를 들면 도움이 가장 절실한 주민에게 인도적 원조가 도착함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고, 사전검토(assessment), 모니터링, 결과평가(evaluation)가 가능해야 하고, 이를 위한 접근이 허용된 지역에만 원조가 배급되어야 하고, 주민의 인도적 관심사를 보호해야 하며, 현지의 역량 구축을 지원해야 하며, 프로그램 계획과 실행에 수혜자를 참가시켜야 하고, 국제기구 요원의 정원이 충분해야 하며, 국제 인도주의 단체의 건강과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이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원조 전용과 맞서 단호하게 싸우는 이유는 전용을 차단하고 인도적 원조를 성공시키기 위함이지, 단순히 그것을 핑계로 사업을 걷어치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원조 전용 문제와 맞서 단호하게 싸우는 입장을 고수해야만 원조 전용이 근절되지 않은 환경에서 계속 일해 나가는 데 대한 정당성을 적절히 방어할 수 있다. 문제는 개선되고 있으며 싸워서 문제를 해결할 전망이 있기 때문에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을 정리하자면 정권 교체에 관계 없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정책이 견고하고 연속된 공통 기반을 갖기 위해서는,
(1)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즉 북한 취약계층의 필요에 적절히 대응하면서도
(2) 의도치 않은 국외자들(북한 정권과 당정군 집단)이 지원을 가로채 이익을 누리는 일이 없도록 효과적으로 배제
해 나간다는 두 조건을 동시에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이 두 가지 목표는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며, 또한 어느 한 쪽에 집중하는 대신 다른 한 쪽을 배제하는 선택은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원래 대립하던 두 입장 사이의 타협의 파기를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두 목표는 원칙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또 두 목표가 동시에 성취될 때 최선의 결과가 도출됨은 명백하다. 따라서 대립하는 양 진영 모두에게 이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공통의 원칙이 받아들여지고 뿌리내린 후라면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이 집권 중이거나 아니거나에 관계없이 (공개적 논쟁에서 부인할 수 없는) 공통의 원칙에 호소함으로서 정책논쟁에서 서로의 관심사를 보다 잘 보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공동의 기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지금 보듯이 정부나 의회 다수당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요동은 훨씬 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