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

자유시참변 100주년 (3) 구글지도로 본 자유시 참변 현장의 현재 모습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3.21|조회수324 목록 댓글 2

1921. 6. 28. 발생한 자유시 사건 현장 주변은 대부분 겨울철 활동이 불가능하여 제야강과 대륙횡단 철도를 따라 아래와 같이 도시가 위치한다. (1910년대 수백척의 배가 다녔지만 현재 항구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① 블라가베셴스크 : благовещенск, 블라가베쉔스크 혹은 블라가베쳰스크라고도 한다. 아무르주(Амурская область)의 주도(州都)이다. 제야강을 따라 자유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135킬로미터 아래에 위치, 제야강과 몽고에서 발원한 아무르강의 합류지점으로 중국의 흑하시(黑河市)와 마주보고 있다.

② 자유시 : 러시아어로 스바보드니(Свободный)라고도 불리운다. 1912년 7월 30일경 시내에 최초의 건물이 만들어졌다. 1917년 4월 알렉셰예프스크(Алексеевск)에서 러시아어의 ‘자유’를 의미하는 ‘스바보드니’로 개명되었다.

1920년경 일본군이 점령한 기차역
수라제프카 항구 (오늘날의 자유시 항구)

③ 수라제프카 : Cypaжевкa, 우크라이나 출신 주민들에 의하여 자유시(스바보드니)보다 먼저 만들어진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변의 항구 마을이다. 자유시 항구로 불려졌다. 자유시 중심부에서 약 3~4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은 자유시의 일부분이다.

철도와 도로교통의 발전으로 여객선 항구역할이 감소되었다. 가로 약 4킬로미터 세로 약 4킬로미터 정도의 크기이며, 1921년경 벽돌공장, 양조장, 제분소, 도축장, 기차역과 항구 관련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1928년 아무르강 대홍수로 대부분 침수되었다.

④ 바르다곤 : Бардагон,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7킬로미터 정도 하류에 있는 마을이다. 자유시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도로교통이 발전되자 제야강변 항구로서의 역할이 감소하였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에서 제야강 갱변(강변)을 따라 탈출하던 사할린의용대가 다수 수장되었다고 하며, 박일리야 등 일부는 바르다곤 방향(남쪽)으로 도주해서 중국땅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⑤ 사벳스키 : Советский, 수라제프카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북동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자유시) 러시아인의 공동묘지가 있다. 1937년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전까지 살았던 마을이다. 과거에 카레이스키 마을(корейский посёлок), 혹은 쌀마을, 콩마을 등으로 불려졌으나 지금은 러시아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자유시의 행정구역이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사건 당시 수라제프카를 탈출한 독립군 약 300여명이 마을주변 공동묘지 근처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수라제프카에서 동료들이 죽자, 적군(赤軍, 소련군)에게 스스로 항복하였다고 한다. 사벳스키 마을 공동묘지(Корейского посёлка кладбище)가 옆에 있었는데 1937년 중앙아시아 이주 후 묘지를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다.

⑥ 크라스나야라바 : Красноярово, 자유시에서 제야강을 거슬러 올라가 직선거리로 북동쪽 2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

⑦ 마자나바 : Мазаново, 자유시에서 제야강을 거슬러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 제야강에 의한 상습 침수지대에 위치한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마자노보 혹은 마사노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28년 대홍수로 도시의 대부분을 상류쪽으로 옮겼다. 일제(日帝) 침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마자나바에 있는 일제 침략군에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 민간인 수백여명이 학살당했다. 마자나바 마을은 일제의 대량학살과 홍수로 마을이 거의 사라졌다.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마자나바 학살의 현장이다.)

⑧ 푸짜찌나 : Путятино, 마자나바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2킬로미터 위의 제야강 상류 마을이다.

⑨ 보츠카료프카 : Бочкарёвка, 자유시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60킬로미터쯤에 위치하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블라가베셴스크로 가는 흑하지선(黑河支線)과의 교차점이다.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서 오늘날의 명칭은 벨로고르스크(Белого́рск)이며 철도교통의 요충지이다.

⑩ 트로이츠코예 :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자유시(스바보드니) 방향인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군 지역에 위치하며, 발해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자유시에서 제야강 상류지역인 쉬마나프스크 지역에서도 고대의 석성(石城)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아무르주 이바나프카 군에 있는 민간인 학살 추모비,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이바나프카 학살 추모비다. 일본인도 가끔와서 추모행사에 참석한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양심있는 사람들은 마자나바 학살, 이바나프카 학살, 자유시 민간인 학살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https://ja.wikipedia.org/wiki/%E3%82%A4%E3%83%AF%E3%83%8E%E3%83%95%E3%82%AB%E4%BA%8B%E4%BB%B6

⑪ 사말리(혹은 사만리, 四萬里) : 자유시(스바보드니)에서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470킬로미터 지점의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고려인 마을이었다. 1871년 4월경 한국인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자유시(스바보드니), 마자나바, 바르다곤 등보다 먼저 마을이 생겼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공격 부대명수라제프카를 공격한 주요 인물
(총 8개연대 규모의 1만여명이 공격했다는 설도 있다)
한인(고려인) 보병 자유대대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대대장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등 500명 미만
‘얼마우재’라고 불리우는 20세 정의 고려인 부대가 주력
적군(赤軍) 29연대29연대장 말라호프 등 약 1,000여명
※1920. 6. 28. 일경 극동공화국 군총사령관 : 블류헤르, 2군단장 : 셰르셰프, 4사단장 : 파데예프, 12여단(러시아측은 2여단이라고 일부 기록됨)
장갑열차 부대(자유시 남동쪽의) 보츠카료프카 주둔 장갑열차 부대
(자유시 북서쪽의) 쉬마나프스크 주둔 장갑열차 부대
장갑차2대 이상 경전차(혹은 장갑차)가 공격함
기병 부대기병중대는 남쪽 바르다곤 방향에서 북쪽의 수라제프카 공격
군함(장갑함) 부대블라가베셴스크, 제야시 일대를 운행하며 국경경비 등을 하던 군함인 『3호 장갑함』 등이 바르다곤 방향에서 상류 쪽 섬과 수라제프카 항구를 공격
기타부대최근 공격에 가담한 부대가 대략 8개연대 1만여명 정도라는 설도 있다.
독립군 부대명수라제프카에 주둔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 주요 인물
(최소 1,470명 이상 ~ 2,000여명 주둔)
사할린 의용대
(니항부대)
박윤천(박일리야) 등 400여명 이상 추정
임호(林虎), 김완욱, 손병렬(혹은 송병렬), 김학, 김제문, 채국성, 이다물, 이와실리, 고창률, 기타 독립군 일부도 편입됨
의군부 군대허재욱(이명 : 허영장, 허근, 허은, 허재근), 김재규, 김학, 이해룡(이범준), 강응렬, 김석종, 이춘섭, 남해룡, 안알렉산드라
이만 군대김표도르, 김덕보(金德甫), 김연준(金鍊俊), 박공서(박개서), 김하경
독립단 군대박그레고리(박그리고리), 최빠싸, 전응호
다반 부대최니꼴라이, 이와실리, 박춘봉
간도국민회군 일부(안무를 제외한) 김희영, 정일무, 김광(金匡), 김규찬(金奎燦), 강석진 등 약 수십여명 이상
대한독립군 일부(홍범도를 제외한) 수백여명
00000 군대 일부000(보훈처 주장 친일변절) 부대 일부
연해주 독립군최성학(최파벨)
(이르쿠츠크)
합동민족연대
(자유시에서 수라제프카로 이동한) 안경억, 신춘식
소속 불명확, 북로군정서 등 추정김동한(일제밀정 활동), 이병채, 이택(李澤), 이우석, 김성우, 전영항, 함빠샤, 한권길, 박니콜라이, 황륜
1921년경 자유시 수라제프카 마을의 발샤야 거리와 그 주변. 현재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되었다.
1921년경 존재하였던 양조장. 발샤야 거리 (한국어로는 큰거리 라는 뜻이다. 자유시 참변 당시 최대 거리였다.) 1911년경 건설되었던 수라제프카 구역 양조장은 없어졌다.
1921년 8월경 홍수로 드러난 과거의 항구

 

독립군을 공격했던 볼셰비키의 영웅 셰르셰프 장군의 이름을 딴 셰르셰바 거리

오늘날의 셰르쇼바 거리, 1921년에는 주택가 주변에 독립군의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1909년 건설된 도축장과 육류가공 공장은 아직도 일부 영업중이다

자유시 사건 당시에 있던 벽돌 공장은 폐허로 변했다
자유시 사건 당시에 있던 벽돌 공장은 폐허로 변했다

 

기관차 수리 공장은 아직도 영업중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3.21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흑룡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3.21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