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9) 사할린부대장 박일리야 (박윤천,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5.21|조회수1,231 목록 댓글 3

 

박일리야(이명: 박일리아, 박엘리야, 박이리야, 박이리아, 러시아어: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박 일리야 하리토노비치, 혹은 Пак Ильей), 한국명 : 박윤천(朴允天), 1891년경 출생 ~ 1938년 5월 25일경 작고)

는 일제침략기 연해주에서 활동한 한국계 러시아인으로 유명한 독립 운동가다.

1891년 함경북도 경원군 출신으로 알려졌다.

김홍일이 쓴 자서전 등에 따르면,

"사할린 부대장 박일리야는 일찍이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이 설립한 연해주의 학교에서 배운 바 있어 그 독립정신이 투철하고, 만주에서 온 독립군들에게 항상 협조하였다"고 한다.​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스파스카 폭풍의 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의 노래

박일리야 장군도 관련된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콜라옙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일본어: 尼港事件, 중국어 : 廟街事件, Николаевск Инцидент 방송 내용. 

 

니항사건 당시의 파르티잔 부대, 얼음에 갇힌 선박들이 보인다.

1920. 2. 29.일경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킨 직후 환영식장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1920. 2. 29. 니항을 해방시킨 직후의 파르티잔 부대

환영식이 열린 아무르강 강변으로 보여진다.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지역 고려인 소학교 교사

아무르강 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 니콜라옙스크 항구 일대의 고려인 소학교 교사로 일했다.

1918년 8월 2일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니항(니콜라옙스크)을 공격하여, 볼셰비키들을 학살하였다. 러시아 내전기 체코군단 구원 등을 내걸고서는 니콜라옙스크 항구와 사할린 섬 북부와 유전, 동시베리아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다.

박일랴는 고려인 소학교 학감이던 류소심 등과 협조하여 니콜라옙스크에서 한인 파르티잔 부대인 니항부대(훗날의 사할린의용대)를 설립해 볼셰비키 측에 가담했다.

1920. 4. 1. 일경 트리피츤 부대, 중국인 항일 파르티잔, 고려인 니항부대, 리흥진 선생의 장례식이 함께 거행되었다.

 

1920. 2. 29. 니콜라옙스크 해방 참여

1920년 2월 29일경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에 협력해 니콜라옙스크를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다.

그러나 일제 침략군이 평화조약을 어기고 1920년 3월 12일경 파르티잔을 기습 공격해 수백여명을 학살하였다. 한국인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 등이 순국하였다.

구트만과 이오키료조 등은 트리피츤 부대가 니항을 해방시킨 직후부터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해서 일본군이 단순 무장해제를 하기 위해 거류민과 함께 봉기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러시아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트리피츤 부대와 수백여명의 중국인, 한국인 부대, 중화민국 강방함대는 반격해 일본군과 공모한 일본인 약 600여명을 처단하는 데 일조하였다.

https://cafe.daum.net/shogun/2DR/4764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트리피츤 등에 대한 도서가 출판되는 등 소련 시대 숨겨졌던 비밀이 드러나며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니항에서 순국한 조선인들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가 일본군 재점령후 세운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볼셰비키에 의해 파괴된다. 시마다는 니항사건과 관련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독립기념관 공식자료 등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러시아에 설치되었던 니항사건 초혼비, 니항사건 초혼제장, 니항사건 일본군 충혼탑 등은  오늘날 모두 파괴되었다.

트리피츤 부대 본부 건물터에 설치된 니항사건 추모비 오늘날 니항에 설치되어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트리피츤 부대 본부 건물터에 설치된 니항사건 추모비
오늘날 니항에 설치되어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1920년 1월부터 5월말까지 니항사건 기간동안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은 약 680여명에서 850여명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도 한국 신문 등에 톱뉴스 등으로 수백차례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북부, 만주 동청철도, 시베리아 철도를 영구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수립하려던 일제 침략군이 전멸한 것으로 보도되어 청산리,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군이 승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던 3,000~4,000여명 파르티잔들은

1920년 4월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연해주에서 4월 참변을 일으켜 연해주의 한국인들과 러시아인을 대량 학살하고,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과 광산 등을 노리고 다시 니항과 사할린섬 북부를 공격하자 포로로 잡고 있던 일본인 120여명과 일본 천황에서 니항을 공격해달라고 청원서를 보냈던 다수의 백파을 처단하였다.

일제 침략자는 니항을 다시 점령한 후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유전 등을 영구 점령할 목적으로​

트리피츤 등이 니콜라옙스크의 일본인 및 백계 러시아인, 유대인 등 민간인 4천 여명 이상을 학살하는 니항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다.

일제 시대에 한국에서 전혀 인정 되지 않은 이론이었으나, 최근 일제와 미국 반볼셰비키 학자의 자료만을 러시아측 자료 검토 없이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을 양심있게 다루는 책도 있다. 구트만과 존J스테판의 자료는 허구로 인정되지 않는다.

2000년대에 들어와 남한의 일부 도서가 일본의 주장만을 인정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일부 도서에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일제의 이오키 료조, 반볼셰비키인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쿠트만 등의 주장이 인정되어 기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1920년도에서 1990년대까지는 백파측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일•한합방과 일•청전쟁 일•로전쟁의 앞잡이인 五百木良三(이오키 료조) 등의 니항사건 문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五百木良三(이오키 료조)는 일진회 이용구와 함께 일•한합방까지 주도한 침략주의자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lcZtp_wTBoE 

최근에도 한국 친일파 연구단체에서 대표적인 침략자로 기재한 五百木良三(이오키 료조)와 구트만(1889~1950, 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등의 이론과 일진회(일•한합방의 일등 공신) 등의 주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러시아 기록은 니항사건에서 러시아 민간인 4,000명에서 1만여명 학살설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니항의 1919년경 인구는 주택수, 면적수, 인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봤을 때,

대략 7천에서 ~ 최대 1만 2천여명이 타당하며, 대부분 대피된 것으로 확인된다.

최근 국내에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진리라고 인식되는 친일파 구트만의 니항사건 관련 책 104쪽, 트리피츤 부대가 1920년 5월경 감옥에 한꺼번에 1500명 수감, 며칠동안 3000명 학살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구트만과 이오키 료조가 주장하는 인구 2만 5천여명중 1만여명 학살설은 1920년도의 주택수나 니항사건 전후의 인구조사에 비추어 볼 때 근거가 없다.

대규모 학살을 인정하는 사람은 친일파, 백파, 최근 발행된 한국독립기념관의 공식도서, 한국내 일부 위변조된 서류를 인터넷에 게시하는 사람들이다.

1920. 7. 9일경에는 께르비에서 니항을 해방시켰던 파르티 대장 트리피츤과 동료들이 다수 학살당했다.

트리피츤 처형을 주도한 안드레예브는 1921년 자유시 참변 무렵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하면서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시키는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안드레예브는 일제 측으로 도망쳤다가 사할린섬 북부에서 일본의 보호를 받았다.

트리피츤을 살해한 안드레예브, 1921년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하였다.

리지택, 최호림, 김낙현 등은 자신들의 비리가 들어날까봐 안드레예브의 비행을 트리피츤의 행동으로 조작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 전혀 인정되지 않는 이론이며, 언급하다가는 욕 먹을 소리이다.

 

사할린주 독립운동단체가 니항에서 발행한 국문신문 '국민성' 의 제 18호 1919년 9월 13일자 보도

 

러시아 내전 시기 러시아계 친일파들
일본에서 러시아 침략의 이유로 대대적으로 선전된 니항사건
백파 콜차크 제독

한국계인 박병길과 김학현(김낙현) 등이 트리피츤 처형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은 1920. 2. 29. 일의 니항해방에 협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바보드니로 온 후 박일리야와 함께하지 않고 대립하였던 이르쿠츠크파 한인 보병자유대대의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에게 협조하였다.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은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으나, 동료 수십여명은 형식적인 절차도 없이 학살되었다.

1920. 3. 12. 니항에서 전사한 나우모프, 오늘날 나우모프 거리가 있다.  리흥진 선생도 같은 날 전사하였다.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1920년 7월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친과 동료들이 형식적인 재판도 제대로 받지 않고 일제 간첩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다.

1920. 9. 5일경 께르비에서 아무르주에서 온 베즈드닌 등에 의해 트리피츤 부대의 해산이 결정되며,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해 보병 제19연대에 편입할 것을 요구 받는다.

자유시에 도착후 19연대에 편입되었으나, 강요에 의해 해산되며 19연대의 일부였던 고려인 니항부대(박일리야 부대)는 오하묵의 한인 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된다.

 

박병길의 죽음

박병길의 경력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박일랴보다는 나이가 어렸으며, 니콜라옙스크 항구에 오기전에는 부랑인으로 떠돌아 다녔다는 소리가 있다.

니콜라옙스크에서는 백파와 일본인들과 일했다고 한다.​

1920년 10월 12일경 니항부대(훗날의 사할린의용대)가 스바보드니에 도착한 후, 박일랴는 트리피츤과 동료의 학살에 가담한 박병길의 과거의 경력보다는 일단 독립운동을 하려고 스바보드니에 온 것으로 판단하였다.

박일랴의 고종사촌 여동생 홍마리아도 스바보드니로 따라와 자신의 약혼자인 박병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기에 박일리야는 용서를 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독립군에 의해 박병길이 1921년 1월 28일경 처단되었다.

암살되었다는 소리도 있으나 박병길이 일제 간첩 활동을 하기 위해 자유시로 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박병길, 리지택, 김낙현 등과 함께 1920. 7. 9. 께르비에서 트피피츤 처형에 가담한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도 2차례 암살 공격을 받았으나, 나중에 무사히 일본측으로 도피한다.

※ (박일랴의 반대세력에서 작성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니항에서 고려인 사할린의용대 380여명을 조직하여 니항을 해방시킨 것은 박병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박일랴를 ‘아편중독자, 학살범, 강도’로 깎아내리기 위해 조작한 것이 명백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63쪽 등의) 리인섭, 김승빈의 주장에 따르면 박병길은 일본군의 1918년 니항 점령이후 일본인과 백파에 협조한 자였기 때문에 트리피츤에 의해 처형 대상자 명단에 오른 자였다. 그러나 박일야의 비호를 받아 처형을 모면하였고, 께르비에서 트리피츤 처형에 가담하였다가 결국 자유시에 와서 죽었다고 한다. (박병길이 니항의 일본인 상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소리도 있다)

 

 

1920년 3월경에서 4월경 사할린 주 출신 조선인 의용대 사진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

박일리야는 제19연대가 해산된 후, 치타의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산하 한인부와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부대 군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극동공화국 군부의 지원으로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 박일랴, 이용(이준열사의 아들, 월북),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모스크바에 있던 레닌, 지노비예프, 사파라프 등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와 상해파를 지원하였고 군자금과 독립군의 자유시 이동을 지원하였다.

사할린특립의용대의 조직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이 지휘부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대립하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고려군정의회 조직

코민테른에서는 러시아령 독립군의 지도권을 동양비서부에 이관하였다.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한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가 이르쿠츠크파에 협조한다.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하였다.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가 임명된다.

 

자유시 수라제프카 지역으로 이동

1921년 6월 14일경 스바보드니에서 직선거리 60킬로미터 떨어진 아무르주 마자나바에서 주둔중,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게 협조하기 위해 스바보드니로 이동한다.

 

이것은 사실상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까란다리시비리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었다.

볼셰비키의 영웅이었던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의 1922년 장례식과 연설 사진

박일리야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에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고, 상황에 따라 만주나 연해주로 탈출해 일제와 싸우고 국내로 진군할 계획도 세웠던 것으로 보여진다.

1921년 6월 28일 상오부터 최고려, 오하묵, 김하석, 까란다리시비리, 오홀라 등의 기습공격에 수백여명의 사할린부대원과 만주독립군들이 학살당하자 몇몇 동료들과 함께 흑룡강을 건너 흑하시 부근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박일랴는 소련측의 일방적인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는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1921. 6. 28. 자유시 참변 발생

박일랴 중심으로 한 사할린의용대 및 만주독립군 약 2,000여명이 수라제프카 구역 주둔중 러시아 적군 및 이르쿠츠크파 한인보병자유대대원들과 장갑열차, 장갑차, 장갑함, 기병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약 300여명에서 600여명의 독립군이 순국하고, 900여명에서 1,000여명의 독립군 포로는 이르쿠츠크 등으로 끌려가 노동형과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이 과정에서도 다수 순국하였다.

​수라제프카 구역 북동쪽 목재 가공소가 있던 곳 인근의 타타르스코예 이슬람교 묘지 인근에 일부 독립군이 매장되었다는 소리가 있다.

 

연해주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자유시 참변의 결과 휘하 사할린부대원이 순국하거나 포로로 압송되었지만, 스바보드니를 탈출한 박일랴는 1921년 11월 연해주, 이만 등에서 임상춘, 한운용, 리인섭, 장기영, 이동휘, 이용, 김규면, 김홍일 등과 연합하여 (제3차로 추정되는) 전한군사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이 되었다.

1922년 8월경에도 독립군 부대 결성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일제 침략군을 사살하였으며, 독립군 상당수가 전사하였다.

1923. 3. 19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23년 3월경에는 김좌진, 박두희, 박기석, 박동규, 황현, 임표, 김룡수 등과 연합하여 대한혁명통군서를 조직하여 연해주와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상해파 리인섭

 

소련 정치 테러의 피해자

1930년대에 동료였던 김좌진 장군 등이 죽었다.​

1936년 1월 24일경 소련 NKVD에 의해 체포되었다.

박일랴의 체포 소식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슬픔이 되었다.

하바로프스크 감옥에 수십년간 이동휘, 김좌진, 구춘선, 안무 등과 소련 땅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박일리야가 수감되었을 때, "당신이 여기 어떻게 왔소" 하는 장면에서는

냉전시대 소련에서, 1921년 자유시 사건을 "한국계 무정부주의 강도들의 반란"으로 규정당했던 박일리야와 사할린의용대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1921년도에 만들어졌던 사할린특립의용대는 러시아령에서 만들어졌던 최대 규모의 독립군 부대였다.

1938년 5월 25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5년 10월 24일 복권되었다.

구소련 붕괴후 소련 정치 테러의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

 

참고 자료 (수정중)

침략주의자, 한•일합방의 주역 五百木良三(이오키료조)와 구트만(1889~1950, 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이 조작한 니항사건 문건, 『尼港問題を通して:所謂時代精神の暴露』, 순로구락부(純勞俱樂部), 1920(대정9년)

박일리아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1922년경》.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114쪽

김승학 편저, 『한국독립사』, 1965, 422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回想記(俄領과 中領에서 進行되던 朝鮮民族解放運動), 최진일 회상담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정보시스템. 김재규, 이종학 등의 수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권 러시아편 I, 62. 한인혁명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전권대표의 보고서』, 오홀라가 코민테른에 1921년 6월이후 보낸 보고서

일한 합방의 일등공신 침략주의자 <五百木良三>,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五百木良三, 한국 合邦說 보도를 전후한 한국 내 동향 종합보고》

미국 하와이 대학 교수 John J. Stephan (일본측의 지원으로 저술활동. 반공 이론가인지 확인이 필요한 사람. 트리피츤 부대에 의한 민간인 4,000명 학살설을 주장함)

http://rgvarchive.ru (러시아정부 문서)

『Доклад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ряда областных корейских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организаций в ИККИ о расправе с отрядом корейских партизан. [Октябрь] 1921 г.』, Доклад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ряда областных корейских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организаций в ИККИ о расправе с отрядом корейских партизан. [Октябрь] 1921 г. // 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28. Л. 6 -9 об. Подлинник, машинопись,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러시아정부문서 열람 사이트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97)

 

 

https://youtu.be/oVW0pMCV9U0?t=2911 

사할린의용대 출신 독립군들의 활약상을 그린 <국방부 등 제작, 37주년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오성장군 김홍일편>, (...전직 광복군 출신 중에는 과장된 표현도 있다고 함)

 

관련 인물들

구트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영문명 Gutman, Anatoly Yakovlevich, 필명 Gan, A. (Anatoly) 등을 사용함, 1889년경 출생~1950년경 사망) : 1918년경 러시아 내전기 백파로 활동하였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악명 높은 러시아계 친일파 셰묘노프 등과 협력하였다. 일본으로 도피후 니항사건과 관련된 책을 일본에서 출판(영문도서명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하고 반볼셰비키 신문을 도쿄에서 발행했다. 구트만의 책은 일본 등지에서 자주 출판된다. (한국인 이지택의 주장도 일본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에서는 일본 천황에게 볼셰비키를 타도해 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한 러시아계 친일파 102명에 대한 주장이나, 1920년 5월 22일에서 24일까지 3일간 니항 감옥에 한꺼번에 1,500여명이 수용되었으며 감옥에서만 3,000여명이 학살당하고, 결국 1만여명의 니항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구트만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거의 하지 않는다.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니 반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 활동한 적이 있는 유명한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등이 구트만의 주장을 사실로 최근에 인용하였다.

구트만은 한국계인 박병길과 이지택 등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친일파라는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이 일부 맞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1920년 한국의 신문이 톱뉴스로 수백차례 보도한 것 외에도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니항사건을 선전하였다. ​
러시아 민간인 6천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 도서. 잘 팔리지 않는다.
국가의 수치라고 니항사건을 시베리아 침략의 이유로 국가적 차원에서 선전한 일제... 오늘날에는 "침략주의 야욕의 결과"라고 평가된다.

구춘선(具春先, 1957~1944) : 안무 장군의 후원자. 박일리야와도 협조하였다.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1885~1918)

김홍일(金弘壹, 1898~1980) : 유명한 독립운동가, 1921. 6월경 아무르주 자유시를 방문하였으며, 러시아 내전기 사할린부대장 박일리야 등과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활동을 하였다.

니항사건(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にこうじけん)

레비제바(혹은 키야슈카) 니나 미하일로브나(Лебедева (혹은 Кияшко)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1895 ~ 1920. 7. 9.) 1895년경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펜자지방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소리도 있다. 1914년경부터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활동을 하였다. 동시베리아 치타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소리가 있다.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나스타시요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의 비서였다.

레비제바는 키야슈카(Кияшко)라는 성을 쓰기도 하였는데, 백파와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은 키야슈카 주지사의 친척 혹은 양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가족관계 문서에 따르면 키야슈카 주지사와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니항사건 기간중 트리피츤과 동거하였다.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트리피츤의 부인 『레베데바』라고 나오며 최호림, 이지택은 일본의 주장과 일치되게 총독(주지사)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최호림과 이지택의 1945년 해방이후 니항 사건과 관련된 주장들은 일제침략기 일제의 주장과 일치되는 점이 많고, 오늘날 러시아 기록과는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레비제바의 가족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나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총독의 딸이라는 것은 일제의 조작극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 나온 트리피츤 관련 책도 하바로프스크 사진을 니항사진이라고 올리는 등 오류가 많다.)

 

러시아 내전 무렵의 아나키스트들

러시아 내전 무렵의 아나키스트들

러시아 내전 무렵의 맥시멀리스트들

러시아 내전 무렵의 맥시멀리스트들

 

미즌(Мизин Григорий Семёнович) : 1919년경부터 사할린주 니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 1920. 5. 24.일경 트리피츤의 지시에 의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총살되었다.

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 : 께르비 인근 광산에서 백파군대에 있다가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 방화에 참가하였다. 께르비에서 103명 법원의 부의장으로 트리피츤을 처형후 일본측으로 도피함. 1921년 6월 6일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다. 2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구트만의 책에 중요 증인으로 등장한다.

박병길(朴秉吉, 박바실리, Пак Василий, ワシリー朴. 1921. 1. 28. 일경 사망) 1918년경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기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의 한인회 서기였다. 이지택, 최호림, 김창순,000 등의 대략적인 주장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인 니항부대 380여명을 조직한 사람으로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는데 가담하였으며, 성품이 원만하고 살인과 약탈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일리야와 니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다수 기록에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부랑인으로 일본인 상점에서 일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일본인 및 친일파들과 결탁하였다가 1920. 2. 29.일경 트리피츤의 니항해방 이후 파르티잔에 의해 일제에 협력한 죄목으로 처형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조선인 부대장 박일리야의 비호로 처형을 모면하였다.

박병길은 박일리야의 사촌여동생의 약혼자였다는 소리도 있다. 박병길은 니항해방 이후에서야 조선인부대에 가담하였다.

1920. 7월경 께르비로 대피하여, 친일파 안드레예브, 조선인 김낙현 등과 트리피츤 등을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 일본군의 방조아래 기습공격해 결국 살해하였다.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니항부대원들의 반발 때문에 아무르주 자유시로 도피하여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호림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가담하였으나, 여기서도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하는데 관여하였고 결국 조선인 사할린부대원들에 의해 1921. 1. 28.일경 살해되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 되는 중요 인물이며, 1920년 니항사건 당시 김홍일, 이범석, 리인섭, 박일리야, 이용 등과 사할린부대원들의 평가와 오늘날 남한의 000 등의 이론이 정반대 의견으로 대립된다.

북경군사통일회(北京軍事統一會) : 1921년경 북경 인근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되는 측에서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 통일을 위해 개최하였던 회의였으나 독립군부대 통합에 실패하였다.

비첸카(Биценко (Орлянковский)) : 니항 인근 백파군대에 있다가 트리피츤 부대에 항복하였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께르비로 대피하면서 볼셰비키인척하고 사람들을 살해함. 1920년 6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됨

부진-비치(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1887년경 출생 ~1938년경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 1957년 구소련에서 복권됨) : 1908년경 이르쿠츠크 사범학교 졸업,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교사 생활. 1차 세계대전에 차르군대 장교로 출전. 러시아 내전기 니항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3월 12일경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트리피츤이 부상당한 후 함께 사진 촬영한 사람이다.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로 께르비에서 처형되지 않고 생존하여 니항사건에 관한 회고록을 남김.

부진-비치

사소프(34세쯤에 사망. 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던 부대의 부대장(1920 г. - командир корейского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부지휘관은 박일리야 및 류소심), 니항의 징발위원회 위원장. 1920년 5월경 사할린주 바가로드스크 지역 지휘관(командовал Богородским фронтом). 1920년 7월 9일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됨

시마다(島田元太郎,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를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끈 사람이다.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이 일본으로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니항의 조선인회 서기였던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1920년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이었던 시마다의 니항사건 회고록 ​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1886년경 출생 ~ 1938년경 사망) : 오늘날의 동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1년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을 지낼 당시, 한국계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을 편들어 자유시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의 반발로 동양비서부장에서는 해임되었고 한국의 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 제외되었다.

셰르쇼프(Серышев Степан Михайлович, 1889 ~1928년 사망) 차르 러시아 장교출신이다.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지역에서 군대 지휘관이 되었다. 1921. 6. 27.일경 자유시를 관할하던 볼셰비키 군대 제2군단장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에 셰르쇼프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26년경 일본주재 대사관 무관으로 일했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 안드레예브가 주장하기를 제정러시아 시대 니항인근 치니르라흐 요새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 결과 장교도 아니었다고 한다.

1920년경 볼세비키에 가담하여 트리피츤 부대에서 간부가 된다. 1920년 7월경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대피해 께르비 인근에 머무르던 중 일본군의 방조 아래 바라비요프, 압친니코프, 000 등과 께르비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공격해 체포후 살해하였다.

이후 트리피츤 부대가 해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여 경찰서장을 했다고 안드레예브의 가족이 주장하나 오늘날 러시아측 학자들 연구결과 거짓말이라고 한다.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자유시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시 일대에서 트리피츤 지지자들로부터 3차례 정도의 살해공격을 받았으며. 일제측으로 도피하였다가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직계후손들은 현재 미국에서 구트만과 같은 각종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최호림은 일제 앞잡이 안드레예브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트리피츤이 니항에서 포병대장으로 5년~6년간 근무했다고 거짓말했으나 이것은 남한에서 과거 인정조차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남한의 000 교수 등이 논문에서 인용한다.

(참고자료 : 윤상원 교수의 고려대학교 2010년 박사학위논문(논문명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115쪽과 118쪽 및 2001년 석사학위논문(논문명: 自由市事變 前後 朝鮮人 武裝部隊 統合運動) 7쪽, 24쪽 살펴보면 이지택과 최호림의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고명수, 임호, 류소심, 엄지영에 의한 니항해방설’을 비롯한 허위 주장을 전부 인정한 것외에도, 니콜라옙스크 시의 공식 홈페이지를 인용하여 남한의 경기도보다 훨씬 넓은 니항의 1917년 인구는 1만 5천여명이었는데 니항사건 이후 니항에는 잔류 인원 2천여명만 남게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트리피츤과 함께 상류 마가촌과 께르비 등지로 대피하지 않고 백파와 일본군에게 투항한 니항 인구가 2천명 정도가 되면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사건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1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오늘날의 러시아 역사학계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호림•이지택이 주장하는 트리피츤이 니항 포병대장을 했다는 설 등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거짓말이다.)

박일리야와 대립하였던 최호림, 이지택 등이 니항의 포병대장이라고 주장하는 안드레예브

압친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 께르비(Керби)에서 트피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간부. 일제측으로 도피후 1935년경 미국에서 니항사건 관련 도서 출판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1894년경 출생) 1918년경 아무르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20년경 니항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볼셰비키 활동. 니항에서 체포되었으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조선인들과 이동중 탈출. 1923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복권되어 공산당 활동

오하묵(吳夏默, Огай Христофор Николаевич, 1895~1937) : 제정 러시아 차르군대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0년경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한인 보병자유대대장을 지냈다. 자유시 참변에 얼마우재 부대로 불려지는 한인보병자유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립했던 사할린부대 및 독립군들을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 역사상 보기 드물게 이르쿠츠크에서 2,000여명 이상의 한국계 독립군 부대의 여단장을 지냈다. 소련군 최종계급은 대령 정도였으며, 장령은 아니었다. 1937년 소련 대숙청 당시 처형되었다.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중국 운남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경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에 가담하였다. 1971년 자서전 『우등불』을 출판하였다.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 참가 사실은 일제 강점기 중국계 반일투사들에게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남한에 와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초대 국무총리 등의 고위직 관리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러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 등에 관한 이범석의 주장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져 신뢰성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만주에서는 중국의 000과 관련된 적이 있음을 사실대로 진술하였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일부 한국계과 만주의 친일파들과 결탁하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령과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주장을 검증함에 있어서, 과장된 허위주장들을 교차검증해 볼 수 있는 기록중 하나이다.

이범석은 주목받고 있는 000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 연구에 있어서는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 최고려 등의 주장 등에 비해서는 사실대로 쓴 부분도 많이 확인된다.

이용(李鏞, 1888~1954년경 북한에서 세거) : 박일리야의 동료

이지택(李智澤, 1899~1976) : 독립유공자. 이르쿠츠크파. 남한에 온 후 1947년경부터 1920년도에 동아일보 등에 1면 톱뉴스로 수백차례 이미 보도되었던 니항 사건에 대한 다른 주장을 하였다. 다른 화요파 공산당 관계자들과는 다르게 ‘삼천리’, ‘신동아’ 등의 잡지에 대립하였던 박일리야 부대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설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베리아 출병사를 다룸에 있어서 니항조선인회서기(韓人会書記) 박병길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가담한 것 외에 러시아 기록 등과 대조하면 확인되지 않는 주장을 많이 하였다.

화요파 공산당내에서도 이지택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최근 남한의 박경리, 김창순, 000 등은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20년도 한국의 신문은 니항사건에 관해 이지택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을 제1면 특별보도로 수십차례 이상 보도하였다.

이오키료조(五百木良三. 일본의 유명한 시인) : 침략주의 이론가로 러일전쟁 개전, 히비야방화사건, 한일합방 여론 조성, 장작림폭살에 관여하였다. 1920년경 니항사건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하나테루유키(原暉之, 원휘지) : 일본인으로 『尼港事件」の諸問題』 등을 저술함. 니항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박병길과 이지택을 언급하였고 일본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됨

파포프 니콜라이 이바나비치(Попов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1924 ~ 2005) : 남한의 동아일보 1989. 8. 15. 일자 7면은 파포프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파포프는 1921. 6. 28. 자유시 참변이 자유시 수라제프카 구역의 미하일로-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급수탑 주변과 제야강 쪽인 오늘날의 셰르쇼프 장군의 거리 등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또 기사는 러시아계 유명 파르티잔 까란다리시비리 등이 관계되어 발생하였음을 보도하였다. 파포프는 수라제프카 구역 타타르스코예 묘지 주변에 독립군이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타타르스코예 묘지 인근이 사할린 의용대 출신 독립군 무덤이라고 주장한 파포프

 

최고려(崔高麗) :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 예수교 전도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진술하였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볼셰비키들을 지원하였다고 하지만, 대립하던 측에서는 연해주에서 친일파라고 소문이 나서 조선인들이 살지 않은 이르쿠츠크 등지로 도피하여 볼셰비키에 가담하였고 권력을 누리기 위해 종파를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1921년 5월경 자유시 참변 무렵,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최호림, 오하묵, 류동열, 이청천 등과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군정위원장의 요직에 앉았다. 자유시 참변 직전에는 홍범도가 동조한 데 이어, 안무 등도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한 때 협조하였다.

사실상 자유시 참변의 주도한 최고 지휘관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러시아계 까란다리시비리, 슈먀츠키, 오홀라의 통역사로 활동하였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최고려는 자유시 참변이후 잠시 득세하여 공산주의 서적 등을 번역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소련 시대 최호림 등과 종파를 조성해 동료를 무고하다가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최호림(1896~1960, Цой Хорим) : 러시아에서 자유시 참변에 관계하였고, 이르쿠츠크파에게 일방적인 기록을 남겼다. 최호림 본인은 자유시 참변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나 일본군과의 교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대립하였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기록들이나 러시아의 트리피츤 기록에는 대립하였던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강도, 강간범, 아편중독자, 학살자’ 등으로 참무하고 살해한 ‘독립운동도 한 적이 없는 친일파’라고도 한 때 불려졌다.

최근 공개된 기록물에서 최호림은 1920년 니항사건을 주도한 트리피츤을 니항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수년간 지낸 인물로 묘사하여, 이지택,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사실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그런 허위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거센 반발에 결국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소련시대 결국 최고려 등과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와 오호츠크해 지역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은 1920. 2. 29.일경 니항을 해방시켰고, 약2주 후인 1920. 3. 12. 일경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니항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수천여명 파르티잔들 대장이었고 오호츠크해 방면 파르티잔 사령관이었던 트리피츤은 2주정도의 기간안에 000 등이 주장하듯이 당시 러시아말도 모르던 조선인 000과는 알고지낼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20. 7.월경 대피한 께르비에서 일제의 방조아래 안드레예브, 000 등의 기습공격을 받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체포되어 부인 및 파르티잔 동료들과 함께 7월 9일경 처형되었다.

부상당한 트리피츤과 동료들
니항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
1920년 니항사건에 대한 오늘날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

까란다리시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년 사망) :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혹은 까란다라쉬비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5.21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nkvd에 의해 체포되었고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당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목단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5.21 제가 알기로는 박윤천 장군을 일제 시대에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평가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일본에서 활동한 미국 하와이 대학교수, 일제 측의 자료만이 인정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5.22 목단강 ㅇㅇ 그렇군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