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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100주년 (10)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사건) 의 주인공. 독립군 사할린부대의 자유시 이동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6.10|조회수214 목록 댓글 2

사할린 부대의 자유시 이동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廟街事件, 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스파스카 폭풍의 밤, Штурмовые ночи Спасска, Николаевские дни   의 노래

 

 

https://cafe.daum.net/shogun/2DR/4764

1918년 9월 18일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스바보드니)를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스바보드니시의 유명한 볼셰비키인 파포프도 이 무렵 사망했다.

(​※파포프 블라디미르 바시례비치(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Попов)는 스바보드니시의 유명한 볼셰비키로, 께르비에서의 트리피츤 동료의 학살 사건을 조사하였던 베즈드닌(Безднин(комиссар)) 등과 함께 자유시 일대에서 볼셰비키 활동을 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스바보드니시 옆의 제야강에서 증기선 무드레츠(Мудрец)가 침몰하고 러시아인 수백여명이 학살당했다. (이 지점에 1967년경 추모비가 건설되어 있다.)

1918년 아무르주 스바보드니를 공격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백파

일본군은 수라제프카와 자유시 일대에 3,000여명이 주둔하였다.

스바보드니 시 제야강변에 설치된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

1920년 2월 4일경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아이훈조약 愛琿條約을 맺었던 아이훈에 인접한 러시아 도시)를 점령중이던 일본군이 중립을 선언하였다.

1920년 2월 7일경 자유시가 다시 볼셰비키에 의해 해방되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는 2월 17일 해방되었다고 기록됨)

일본군은 3월 3일경에는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전원 철수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에서도 철수하기 시작하다.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된다. (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의 일본인

고려인 니항부대 및 과거 트리피츤 부대의 께르비에서 아무르주로의 출발은 1920년 9월경이었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아무르주에서 온 베즈드닌은 1920년 9월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해 아무주의 자유시의 19연대로 편입할 것을 명령한다.(출처:(Дальневосточной Республики) Безднин, приказом № 1 и 05.09.1920 года распустил Ревштаб партизанской армии и принял от Командующего армией Андреева И.Т. все дела Ревштаба21)

트리피츤 사망후 그를 지지했던 많은 빨치산들이 이탈하였고, 아무르주 자유시의 제19연대에 편입하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 12일경 사할린의용대가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1920년 11월경부터 1921년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 간도 독립군, 이르쿠츠크의 고려인부대 등이 자유시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르쿠츠크파와 자유대대 계열에서도 한국인들을 모집하여 자유시에 집결하였다.

 

사할린의용대의 자유시 도착

사할린 의용대는 께르비(Керби, 오늘날의 도시이름은 『실로 이미니 빨리느 아시펜카』, Село имени Полины Осипенко,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서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00킬로미터. 자유시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588킬로미터 정도)에서 타이가 숲과 강을 따라 육로로 자유시 방향으로 이동하였고,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대피한 민간인들은 대부분 아무르강을 통해 블라가베셴스크 등으로 이동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등의 주장에 따르면, 사할린주 출신 고려인 의용대의 선발대중 일부가 흑룡강을 거슬러 상류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일본군과 전투후 1920년 8월경에 흑룡주의 인에 도착하였다.

 

(이 것은 니항에서 하바로프스크 사이의 아무르강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을 고려했을 때 불가능한 것이다. 비무장 민간인을 가장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또는 야코프 트리피츤이 친일파에 의해 살해되자 하바로프스크와 인 지역의 다른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하려고 했다가 한국 독립군들이 러시아측의 협조 아래 아무르 주에 집결하는 것을 알고 다시 자유시 일대의 한국 독립군 부대에 합류하고자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3명의 대표(고명수, 선우정? 등)를 블라가베셴스크의 대한국민의회에 파견하여 께르비에서 출발한 사할린주 의용군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자기들을 오하묵(吳夏黙)의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라 약칭)에 임시 편입하여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으며, 이르쿠츠크파의 기록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령에서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당시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인 아무르강 일대를 전투를 하면서 거슬러 올라갔다는 등 허위 진술도 분명 있습니다. 러시아측 기록에는 박병길이 사할린 의용대를 조직하였고 지휘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이에 자유시의 한인 보병자유대대에서는 도로상으로 70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께르비와 중간쯤의 스토이바(Стойба) 방향으로 대표 5명을 파견하여 식량공급 등 니항군대의 자유시 도착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은 이러한 식량보급을 한국계 이르쿠츠크파에서 주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러시아측에서 피난민과 트리피츤의 잔존 부대를 위해 보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장은 허위로 작성된 부분이 많으며, 특히 이르쿠츠크파의 잘못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허위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문건 자체가 다른 사람이 조작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아예 처음부터 엉터리로 쓴 것입니다)

 

최근 공개되고 있는 러시아 정부의 기록에는 께르비에 모였던 러시아계 파르티잔들(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츤 부대) 뿐만이 아니라 한국계 사할린부대의 자유시로의 이동과정에서 지나가는 곳마다 식량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박일리야 부대는 식량 등을 구입할 수 있는 금화(금으로 만든 루블화)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소리도 있다. 다만 적합한 가격이 지불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오늘날의 러시아 기록을 대조해 보면, 조선인 니항부대가 이동과정에서 자유시의 자유대대쪽에서 식량지원 등을 받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독립운동사에서 자주 인용되는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
시베리아나 만주 지방 독립군 중에는 평소 식량 조달의 방법으로,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사냥과 물고기잡기, 약초 채취를 많이 했다고 한다.
먹는 문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사할린부대의 자유시로의 이동기간이 여름철이므로, 사냥과 물고기 잡기, 열매채취가 가능한 계절이나 장기보존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일제 침략군과 백파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을 뿐, 누구도 자유대대와 니항군대 간의 대립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일본군의 협조아래 트리피츤의 체포와 처형을 도왔던 박병길은 트리피츤이 죽을 무렵부터 박일리야와 대립하였고, 께르비에서 단신 혹은 고명수의 선발대와 동행하여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박병길이 찾아간 곳은 한인 보병자유대대였다.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쪽에서는 박병길을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에서 비서에 임명하였다.

(※보통 공산주의 국가에서 ‘비서’라는 호칭은 한 개 부서의 최고 지휘자•책임자를 의미한다.)

비서에 임명된 박병길은 ‘박일리야를 아편중독자이며 무정부주의자로 니항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켜 일제의 보복을 불러온 강도’인 것으로 자유대대 쪽에 이야기했다고 한다.

대한국민의회는 한인 니항부대의 선발대를 자유대대에 소개하는 동시에 극동공화국 군부에 연락하여 이 군대를 자유대대의 1개 중대(중대장 고명수)로 임시 편입할 것을 알선하였다고 주장한다.

한편 트리피츤 부대와 함께 움직였던 고려인 니항군대(고려인 사할린의용대)의 대부분은 흑룡주에 들어서면서 극동공화국의 제2군단 제19연대 제3대대로 편입되었다.

트리피츤의 부대가 원동공화국 아무르주에 도착하여 제2군단 제19연대가 되면서, 고려인 부대는 제3대대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자료총서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홍범도편』, 1995, 398쪽 김낙현저 ‘빨찌산의 수기’ 에서는 19연대 2대대로 편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김낙현의 수기가 기억이 오래되어서 틀리는 부분도 있지만, 아예 거짓으로 작성한 부분이 상당히 있다. 사실과 거짓말을 가려서 읽어야 한다.)

고려인 니항 부대의 대대장은 임호였다. (훗날의 사할린의용대 혹은 사할린특립의용대로 개칭)

제19연대는 극동공화국정부의 방침에 따라 자유시로 향하고 있었다. 트리피츤을 처형한 안드레예브도 스바보드니에 도착한다.

 

1920년 10월 12일경에 한인 니항부대(사할린의용대)가 자유시에 도착하자 그곳의 자유대대는 전부대를 출동시켜 군례(軍禮)로서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10월 13일경에 자유대대 쪽에서는 니항부대의 간부일동과 회동하여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단결과 혁명성취를 다짐하였다.

 

이 회합에는 쌍방의 대대장을 위시하여 분대장 이상의 장교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10월 14일경에 니항군대의 실권자인 박일야(박윤천)가 자유대대본부를 방문하고, 오하묵, 최고려, 황하일(黃河一), 유수연(兪洙淵) 등의 자유대대 쪽의 수뇌들과 군사상의 협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박일리야와 최고려의 자유시에서의 첫 만남에서 형식상은 서로 간에 자유대대와 사할린의용대를 통합하려고 하였고 지휘권을 양보하여 통합을 시도하였다.

박일야가 식량문제와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는 하는 중요한 문제 이외에도 군사상의 문제를 논의하려고 자유대대를 방문하자 자유대대의 군정위원장 최고려는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과거 문화운동만을 전력하던 그 시대에도 별별 파당이 분립하여 빈번한 충돌이 없지 않음은 우리가 공지하는 바 사실이며, 또는 유감이 막대한 그 여습(餘習)으로 기분의 파 랑 이 쉬지 못한 차제에, 마침 시세를 인연하여 우리가 대업을 목적하고 아니치 못할 무기적 행동에 각각 착수한 것이 또한 사실이라. 그러면 대업을 표준하는 동시에 구일(舊日)사회 악습이 혹이나 군계에 파급될 것을 예방함은 물론이고, 따라 군벌적 수립이 시대와 처지에 절대로 부당함을 자각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상으로 말할지라도 현재 양 군대를 연합통일하여 일치한 명의하에서 동일한 주의와 동일한 방침으로 기본대(基本隊)를 완전히 조직하여, 군인들로 하여금 정신적 혁명사상을 주입하여 일정한 궤도로 운전하고야 우리 잔약한 처지를 불구하고 혁명의 진취를 도모하려니와, 만일 그렇지 못하고 군대의 명의상 분열로 인하여 나의 군대니 너의 군대니 하고 일반 군인들의 심리를 분열시켜 각개의 군벌을 그리거나 파당을 옹호하게 되면 이 화단(禍端)이 과거 문화운동 당시의 충돌에 비할 것이 아니며, 역시 우리 혁명전도는 어찌될 것인가, 이에 더 불행은 없을 것으로 아노니, 그러므로 우리가 군사상에 대하여 신중히 처리할 것이며, 원만히 토의할 필요가 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髙麗革命軍隊沿革)』 7쪽에서 인용)

최고려의 이 설득은 사할린의용대가 니항에서 이동중 트리피츤과 지지자들의 처형으로 힘이 약화된 상태에서 장거리 행군으로 이미 탈진하였고 자유시에 도착하여 자유대대 측의 지원을 요청한 상황에서 최고려가 답변으로 한 말인지라, 일단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20년 폭파되기 전의 니콜라옙스크 항구의 석조건물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사할린섬 일부를 점령한 일본군

과거 의병전쟁시기 등의 독립운동의 경험상 지휘권문제 등을 쉽게만 생각하면 모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최고려의 설득하는 말은 결코 쉽게 해결되지 못할 일을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부족에서 나온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나중에 확인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전반적인 내용은 최근 러시아 정부 문서(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권 러시아편 I, 62. 한인혁명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의 전권대표의 보고서』, 오홀라가 코민테른에 1921년 6월이후 보낸 보고서)에서 공개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전권대표 오홀라가 작성한 장문의 문서와 일치되어, 이르쿠츠크파의 한인보병자유대대 측에서는 최소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오홀라 등과는 교감을 한 후 사할린의용대를 무장해제 및 지휘관(박일랴)을 사살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자유대대와 니항군대의 통합 부대 구성은 볼셰비키 정부와 각 독립군 부대들 간에도 그 필요성에 따라 제기된 문제였다. 일제라는 침략자를 상대로 소규모 유격대가 아닌 연대, 사단 급의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려면 지휘체계와 보급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髙麗革命軍隊沿革)』 에 따르면 최고려의 주장에 대하여 박일리야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기는 원래 사회상 경력이 부족하고, 또는 군사상 지식은 더욱 어두우니, 군대에 대한 교육과 인도에 자기의 능력으로는 감당치 못할 것이며, 또는 자기는 사할린주 한인으로 니항사건후 생활이 갈 때가 없어 흑룡주로 이주한 한인의 대표로 원동정부 국민대회 소집에 응하여 오늘(本日)로 치타에 향하겠으니 군대를 관할하라.

(그러나 사할린부대는 실제로는 자유시에 있는 동안 줄곧 박일랴의 지도에 따라 움직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인용) 자유대대의 최고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니항군대(사할린의용대)가 지금 러시아 제2군단 제19연대 제3대대로 임하니, 군율상으로는 물론이고 다만 정신상으로도 자유대대에서 관계키 불가능하니, 박군이 이와 같이 한인군대로 하여금 동일한 지도하에 집중하려는 진정한 의의가 있고 보면 지금 치타행을 중지하고 직접으로 제 2군단에 교섭하여 이에 대한 승락을 득한 후, 일반군인에게 이유와 진의를 설명하고, 양군대의 군인심리를 우리와 같이 협동적으로 융화시키는 것이 니항군인의 신임상에도 없지 못할 것이며, 또는 박일야군이 군정위원장으로 근무하는 것이 지휘자 책임이 그러하고 양군대의 요절(要切)한 융화책에 대하여서도 하나의 방침이라.”

1915년경 수라제프카 남쪽의 제야강 횡단 철교
1960년대 제야강 수라제프카(자유시) 항구. 1960년대의 지형도 오늘날과 다르다

이에 대하여 박일야는 자기는 앞에 말한 주민대회 소집에는 신의상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타에 갔다오는 동안만 임시 군정위원으로 배치하여 달라고 하였다.

 

박일리야의 치타행

최고려는 박일리야(혹은 박일랴)의 치타행을 적극적 만류하였다.

그러나 박일리야는 다음날(10월 15일)에 치타로 갔다고 한다. 아마 박일리야가 치타로 간 것은 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에는 이동휘계의  (달뷰라 산하) 한인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 치타의 (달뷰라 산하) 한인부에 가서 사할린의용대의 활동방향을 의논하고 싶었을 것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박일리야는 치타로 가기에 앞서 사할린 부대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고 한다.

“우리 군대의 장래가 금번 나의 치타행에 전연 관계가 있으니 군인 일동은 그동안 여하한 풍파와 변동이 있을지라도 백절불굴하는 정신으로 잠시 쉬데(姑息), 나의 전보 및 서신 또는 왕환(往還)할 때까지 기대하기를 바라노라.”

박일리야와 사할린의용대는 이미 니항을 해방하고 일제 침략군을 격퇴하였으나 대규모 공격에 어쩔 수 없이 께르비 등으로 대피하여 수개월~수년을 함께 한 사이기 때문에 사할린의용대가 박일랴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자유시의 얼마우재 부대로 불려졌던 자유대대와 박일랴가 대립한다면 누구편을 들 것인지는 쉽게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려나 박일리야는 처음에는 원만하게 독립군 통합을 논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니항의 러시아계 빨치산 부대와 박일리야가 지휘하는 사할린의용대의 자유시 이동은 이미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및 달뷰랴(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극동공화국 영토내의 공산당 최고기관), 극동공화국 정부, 극동공화국 군부,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와도 이미 합의가 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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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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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6.10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6.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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