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11) 박일리야 장군과 사할린 특립 의병대의 조직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6.13|조회수363 목록 댓글 0

*****************************************

광복군, 조선의용군,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군, 조선혁명군, 광복회, 의열단, 동북항일련군, 팔로군 등에 비해 덜 알려졌으며,

청산리, 봉오동 전투, 보천보전투, 00사건, 00사건, 장고봉 사건, 등등에 비해서도 덜 알려졌으나, 1919~1930년대 러시아령에서 다수 독립투사를 배출하였으며, 한 때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사할린 의용대 !"....

자유시 참변과 니항사건의 최대 피해자였으며, 결국에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1930년대말 소련 대숙청과 정치 테러의 피해자가 된 "사할린부대"의 조직 과정을 한번 살펴 봅니다.

1930년대말 박일리야(박일랴, 박윤천) 장군이 하바로프크스 감옥에 수감되자,

그 사실을 알게된, 독립운동가들이 소련땅에서 이동휘, 김좌진 등과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박일리야 같은 독립운동가가 수감된 사실에 기가막혀 "당신이 어떻게 여길 오게 되었소.." 하는 장면에서는 박일리야와 함께 했던 니항부대, 사할린의용대가 어떻게 되었을 지는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

 

1918~1919년 러시아 내전기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은 아무르주 자유시 북동쪽 직선 거리 60Km 지점 쯤에 있는 마자나바 군을 공격하여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하였다.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의 마자나바 학살의 현장

세계 역사책에도 가끔 등장하는 마자나바 학살의 현장에서 1~2년뒤 사할린 특립 의병대가 조직된다.

니항부대가 누구인가? 박일리야는 누구인가 ?

바로 사할린주 니항에서 일제 침략군을 전멸시키는 데 일조한 그 독립군 부대다.

아무르주 마자나바 주민들이 러시아 대기근 속에서도 고려인 독립군 사할린 부대를 어떻게 봤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1월경부터 시작된 마자나바 전투 추모비

세계역사에도 등장하는 마자나바 학살 추모비. 독립운동사에 "마사노프","마자노보"라고 등장하는 마을은 사실상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의 만행으로 파괴되었다.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된다. (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1920. 10. 12. 일경 박일랴를 비롯한 한인 니항부대 (나중의 한인 사할린의용대)가 께르비에서 자유시로 도착한다.

 

1920. 7. 9. 처형된 트리피츤과 부인, 최근 무적황군을 격파한 사람으로 러시아에서 다시 평가되고 있다.

 

니항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러시아 방송 내용 2015년

https://youtu.be/SFO3iPZtHJ0?si=jURtBtm38YZveyhC

 

 

1920. 4. 1. 일경 트리피츤과 고려인 니항 부대, 리흥진 선생의 장례식이 함께 거행되었다.

좌측에 태극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니항사건의 독립군 장례식이 열렸던 건물

1920년 4월 1일경 독립군 장례식이 열린 니항의 학교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니항부대와 자유시 자유대대간에 독립군 부대 통합을 논의하였으나, 트리피츤의 처형으로 힘이 약화된 니항부대가 밀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니항 주민들은 아무르강을 통해 하바로프스크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다수는 일제가 물러난 후 고향 니항으로 귀향하였다고 한다.

1920. 10. 15. 일경 박일랴 원동공화국 한인부(상해파와 상해임시정부 인사가 설치한 부서)가 있는 치타로 출발한다. 박일랴는 상해파 독립운동가의 의견을 들으려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1920. 10. 21. 일경 홍범도, 김좌진, 안무 등 청산리 전투 시작한다.

트리피츤 부대의 해산

1920. 10. 22. 일경 자유시에서 제19연대(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친 부대)가 군율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2군단 및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이 철갑차와 보츠까레워 등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포위한 후 해산시켜, 다른 연대에 편입시킨다. ​​

그리고 과거 트리피츤 부대의 일부가 다른 연대에 편입된 것이다.

니항 주민들중에는 자유시까지 따라온 사람들도 많았다.

트리피츤 부대의 해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나왔는지 정확한 것을 현재 알 수 없으나, 당시 러시아 내전기 반란혐의나 무정부주의자로 처벌된 사람들은

결국 1930년대 대숙청 시기 적대세력으로 간주되어 다수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 강제노동수용소나 굴락 등지로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께르비에서 트리피츤의 처형을 주도한 안드레예브의 역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자유시에서는 포병부대 지휘관을 지냈다고 한다

한인 니항부대(제19연대 제3대대, 박일랴 부대)는 오하묵의 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된다.

1920. 9월~10월경 상해파 한형권 등이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러시아측에서 금화 40만루블 정도를 수령하였다. 대한국민의회 등과 자금 분배를 둘러싼 갈등 고조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중국•조선내에서도 자금 분배를 둘러싼 문제 발생한다.

1920. 10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내 치타에 한인부 조직된다.

(오두제 :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

1920. 10월경 상해파(이동휘 등)가 극동공화국 한인부 등에 독립군의 자유시로의 이동 지원을 요청한다.

1920. 11월경 연해주의 한인 독립군부대 자유시 집결 시작한다.

1920. 말에서 1921년초 원동공화국 정부에서 자유시 일대의 한인부대를 통솔키 위해 김민선을 한인 니항부대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박일랴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나 한인 니항부대는 과거 트리피츤 부대가 자유시 일대에 와서 2군단 19연대로 될 때, 제3대대로 편성되었으나, 제19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고려인 니항 부대는 오하묵의 자유대대에 편입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1920. 12월경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등은 연해주의 독립군을 자유시로 집결토록 하바로프스크의 2군단과 교섭한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원동비서국) 조직

1921. 1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서 이르쿠츠크에 동양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원동비서부 라고도 한다)를 설립하고 고려인 부대는 코민테른 본부에서 동양비서부로 이관됨(동양비서부는 1920년 9월경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

1921. 2 월경 동양비서부장에 취임한 슈먀츠키(Шумяцкий)가 사사건건 이르쿠츠파의 편을 든다.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 한인부가 해체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원동비서부)로 고려인 부대 군권 이전 시작됨. (한인부는 해체이후에도 일부 인물들이 수개월간 유지됨)

1921. 1월경 상해파가 재러군사위원회 조직, 상해임시정부측 이용 선생이 경고문을 발표한다.

한인 군사위원회 경고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22쪽)
                                                    경고문(警告文)
구주(歐洲, 유럽)대전의 결과로 세계의 추(趨)는 급전직하의 개(槪)로 변환(變幻)하여 온갖 마력을 휘장(揮張)하던 군국주의는 이미 악운이 진(盡)하고 소양(小羊)같은 약국들은 비로소 귀망(鬼網)을 탈하고 양심적 자유, 평등, 박애의 지상천국을 건설하여서
20세기의 광화(光華)가 되고저 하나니 이는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니 구주 각 소약국이 힘을 합하여 군국주의의 본존(本尊)인 독일을 좌절하고 그 여심(餘心)은 전(轉)하여
군국주의의 괴뢰인 일본을 타파코저하는 전운이 점차로 태평양상에 농결(濃結)함을 보아 족히 증거(證據)하리로다.
​​
아. 아.
이는 상(常?)노 대세의 소추(所趨)이오.
천의의 소사(所使)이니, 무삼 권능 무삼 강력이 능히 이를 저지하며 만집(挽執)하리오. 다만 전일의 강국은 과거의 적악(積惡)을 뉘우쳐서, 그 마심(魔心)을 자계(自誡)하고 낭자(曩者)의 약국(弱國)은 과거의 끽고(喫苦)에 감(鑑)하여 양심적 이상국을 건설하여서 세상에 광영이 되기를 노력치 아니치못할 운명에 제회(際會)하였도다.
​​
이때를 당한 우리들은 각각 다할 바 책임을 생각하라.
이천만 동포가 우리모국에 대하여는 성패간 각 그 책임을 단부(但?負)함은 췌언(贅言)할 바 없거니와 특히 중아(中俄) 양령에 교거(僑居)하는 우리 2백여만의 동포는 이 지귀지위(至貴至危)한 빈기(牝?機)에 제하여 과연 여하한 천직을 다하여야 가히써 조선 백대(祖先 百代)의 위령을 위(慰)하며 자손만년의 복지를 계(啓)할까 생각하라.
​​
아. 아.
2백만의 교류(僑留)하는 동포여 이는 지자(智者)의 언(言)을 대(待)치 아니하여도 동양의 대세와 모국의 형편에 감(鑑)하여 명백하니 즉 국(國)을 실(失)하던 그날부터 선각(先覺)의 사(士)들이 중아(中俄, 중국과 러시아) 양령 동포에 대하여 교육과 군사상 계획으로 그 뇌(腦)와
그 심(心)을 다하던 바 양이(兩?以)가 그 아니뇨.
그러나 이시(伊時)에는 군국주의자들의 악운이 오히려 성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거니와 내금(乃今)엔 세계가 공명(共明?)하고 상천(上天)이 조우(助佑)하사
​​
모국 광복의 최후승리를 기하는 의용군을 마음대로 편성할 호기와 지대(地帶)를 득하고 그 희(喜)를 같이하기 위하여 자(玆)에 장래의 실행사항(實?行事項)을 경포(警佈)하오니 광영 가득한
중아(中俄, 중국과 러시아) 교류동포여 노력할지어다. 2천만 동포여 협력할지어다.

1. OOOO 본위원와의 밀약한 사항
갑. 본 OO세력 범위내에서는 한인군대의 편성을 무제한으로 승인하고 무기, 피복, 식량은 본OO의 능력있는 데까지 무제한으로 공급하며
을. OOO세 범위(勢範圍)에서는 한인군사위원회 이외에는 여하한 단체를 물론하고 군권을 허여치 아니함.
​​
2. 본 위원회에서 현방 상시(常?施?)하는 방침
갑. 사관학교를 OO지(地)에 설하고 제1차로 학생 5백명을 모집함
을. 현방(現方) OOOOO세력범위에 있는 한인군대 및 한인으로 편성된 지방대를 우선 정리통할 함. 단(但) 지방대가 없는 곳에는 수의(隨?宜) 증설함
병. 제1회사관학생이 졸업하는 즉일 위시하야 제일 1사단을 편성함.
정. 제2, 제3 이상의 사단은 사관양성의 원수(員數)를 따라 추차 증설함.
무. 사단편성하기 전이라도 필요와 경우(境遇)을 수(隨)하여 소규모의 군대를 불구하고 출전함


대한민국 3년 1월 일 (서력 1921년 1월 일)

한인군사위원회 위원장 : 이용
동위원 : 채영, 한운룡, 장기영, 박원섭, 박영, 주영섭, 박마트베이, 장도정, 김진

1921. 1월경 이용, 채영 등은 전한의병대의회 소집위원회 결성,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을 시작한다.

1921. 1월경 (만주 밀산에서)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시로 집결 시작한다.

1921. 1. 18. 일경 보병자유대대장 오하묵은 트리피친 부대였던 제19연대 해산과정 및 고려인 부대 등의 문제를 보고하라는 극동공화국 군부 명령에 따라 치타 등으로 보고차 이동한다.

러시아령 대표 독립군 부대 : 사할린 특립 의용대 조직 결정

1921. 1. 20. 일경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에이헤)는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여 체르니곱스코예(오늘날의 체르니고프카 추정), 크라스나야라바, 마자나바로 이동해 주둔할 것을 명령한다.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와 협의 없이 총사령관에 박창은, 참모장에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 임명)

그러나 박창은은 이르쿠츠크 파의 계략에 따라 스스로 사면하게 된다.

1921. 1. 28. (정확한 날짜 아님) 독립유공자 박병길의 죽음

1921. 1. 28. 니항에서 자유시로 온 박병길이 독립군에 의해 죽었다.(처단설도 있으나 박병길의 자세한 과거는 알 수 없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자유시로 온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밀정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병길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로 표창된 이지택(한때 화요파 공산당으로 일한 적이 있다)과 러시아계 친일파였던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이 있다.

최근에도 한국의 반병률, 박민영, 김용삼, antifascimgood, 소설가 박경리, 김창순 등이 쓴 인터넷 글들과 책, 그들이 작성한 한국위키백과자료, 나무위키 자료, 기타 인터넷 백과사전이 그러한 주장을 대량으로 한다. (니항사건 등에 대한 러시아 위키백과와 일본 위키백과의 동일항목은 한국과는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

이르쿠츠크파와 일부 친일파 주장

1920. 2. 29. 니콜라옙스크에서 380여명의 독립군 부대를 조직해 평화적 해방에 가담한 사람은 박병길이었고, 트리피츤과 4,000여명에서 1만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사람은 박일리야이며, "박일리야는 무정부주의자, 백파 밀정, 아편중독자, 강도였다.

일본이 저지른 1920년 4참 참변은 니항사건의 보복에서 시작된 것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선생은 니항사건 때문에 살해되었고, 간도참변과 자유시 참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도 니항사건 때문에 일어났다.”가 그들의 대략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러시아측 기록, 일본의 인터넷 자료, 김홍일, 오광선, 리인섭 등 대부분의 독립군 주장은 "당시 박병길과 이지택이 러시아 말를 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외지인이었으며, 3.1운동 이후에도 니항에서 일본인, 친일파들과 일하는 등 경력이 의심되는 점이 있다."

그리고 러시아측 기록에는 이지택(남한에서 화요파 독립운동가로 활동), 박병길, 김낙현 등이 아예 등장도 하지 않는다.

니콜라옙스크 항구의 고려인 사회의 핵심 인사였던 류소심과 박일리야는 니콜라옙스크 사건, 자유시 사건 등과 관련하여 러시아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

박일리야 등의 주장은

트리피츤과 그의 부인, 동료들은 께르비에서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비첸카(Биценко), (트리피츤 등을 학살하고 사할린섬으로 도망친) 백파 등과 같은 볼셰비키에 침투한 백파와 러시아계 친일파 등의 무고를 당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그들중 상당수는 재판 받지 않았음에도 '무정부주의'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리피츤과 사할린의용대 등에 의해 주로 사살된 사람은 빨치산 부대를 기습 공격한 일본군과 일본 거류민, 그리고 과거 1918년경 일본 천황에게 니항을 공격해 볼셰비키를 타도하라고 청원서를 보냈던 니항 주민 102명과

1918년 8월 2일경 일본군의 니항 점령시 니항에 남아있던 볼셰비키와 지지자들을 색출해 살해하였던 러시아계 친일파 등이 인민재판 등을 거쳐 적법하게 처형되었다

는 것이다.

니항을 불태우고 께르비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수 어린이들의 사망한 것은 러시아 내전기의 식량부족, 의약품 부족 등으로 인한 것이며, ‘친일파가 주장하는 트리피츤 부대의 니항 민간인 수천명(대략 6,000여명 이상) 학살은 일본군, 백군, 친일파가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시베리아, 사할린섬 북부와 유전, 간도, 동청철도 등을 영원히 점령하기 위해 조작해낸 거짓말이다’라는 것이 박일야 측의 주장이다.

박병길이 사할린부대에서 재판을 받고 총살형이 집행된 것인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는 주장마다 다르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1921년 1월 28일경 사망한 듯하다.

주택 1,200여채에,
인구 7천에서 여름철 최대 1만 5천여명의 도시인 니콜라옙스크(니항)가 불탔다고 모든 주민이 사망한 것은 아니다.
1950년 6.25 사변에 서울이나 평양, 원산, 함흥 등의 대도시가 니항보다 더 파괴되었으나 주민의 1/3에서 1/2까지 죽은 것은 아니다. 또 나폴레옹 전쟁 때 모스크바 등이 모두 불탔으나 주민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다.
니항의 감옥은 1,500명이 수용될 만한 건물도 아니었으며, 생환한 일본 여성도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일본 여성의 기록에는 100명도 수감되지 않았다고 나온다.
오늘날 러시아측 기록은 트리피츤에 의해 처형된 사람도 100명이 안된다고 한다.

1920년 니콜라옙스크 항구 주민중 가족이나 이웃이 트리피츤 부대에 의해서 죽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친일파들이나 하는 소리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이오키 료조, 우치다 료헤이, 흑룡회, 낭인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 등과 이들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이다.

※ 러시아계 친일파인 A.Y.구트만의 책에는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해방 이후에 조선인 독립군들은 일본계 민간인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군기가 엄격하고, 몰수, 징발, 약탈 등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오날늘 공개된 러시아의 모든 기록들에서 박병길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친일단체 조직자였다는 증거는 있습니다.

 

한국의 김창순 등 일부 반공학자들에 의하여 박병길이 마치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독립군부대를 조직해 트리피친과 함께 니항을 해방시켰다는 기록도 있으나 오늘날 이런 것은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의 기록도 일제시대 조선총독을 지낸 재등실(사이토마코토)의 일기류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독립운동을 부르짖으며 뒤에서는 일제에 협력하였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1921. 2월초 안무 부대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에 도착한다.

자유시일대에 집합한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싼 군권 다툼에서 처음에는 대한국민의회 쪽(오하묵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유리하였다. 자유시에 온 니항군대를 이르쿠츠크파에서 흡수해 버렸다.

그러나 상해파(박애의 한인부 등)의 극동공화국 등에 대한 외교활동에 따라 오하묵은 한국계 독립군 부대들의 군권 문제 때문에 2군단 본부에 호출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한인무장부대들이 속속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고, 이 부대들은 일단 이르쿠츠크 파의 지휘하에 움직이게 되었다.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등에 따르면)
상해파와 친밀한 극동(원동)공화국 한인부 및 한인군사위원회는 니항군대의 지휘자 박일야와 협력하게 되었다.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정부가 김민선을 대대장으로, 박일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자유시에 파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하묵 등이 현지 러시아 기관들과 결탁하여, 니항군대를 흡수해 버렸으므로, 이러한 처사는 명령 불복종 및 불법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에 대하여 오하묵 등의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오하묵 등이 제2군단 본부로부터 자유시의 군사 진상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바로프스크로 호출되어간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상해파의) 한인부 당국은 자기들의 외교상 세력만 믿고 대한국민의회와 한인 보병자유대대당국과는 한마디의 협의도 없었다고 한다.

상해파는 원동정부(극동공화국 정부) 군부에 교섭하여 박창은(한인부 5두 중1인)으로 총사령관, 그리고리예프(로인)로 참모부장을 임하여 자유시로 파송하는 동시에 니항군대의 명칭을 변경하여 사할린의용대라 하고 그외 고려 각 의병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 등 군대는 사할린의용대의 관할을 받으라는 원동정부군부의 명령을 대동하고 일행이 블라가베셴스크(『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는 흑하로 기재)에 도착하니 1921년 1월 말경(晦間)이었다.

1921. 2월 중순경 (상해파) 박창은, 그리고리예프 자유시 도착한다.

1921. 2월경 박창은 사직한다.

한인부에서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군정위원장에 박일랴를 임명한다.

박창은은 나중에 이르쿠츠크파로 넘어간다.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는다.(개최지를 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한다.)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한다.

 

******************************************

사할린 특립 의용대 조직

******************************************

※ 이 때 조직된 사할린 특립 의병대는 ‘사할린 의용대’, 혹은 ‘사할린 특립 의병대’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박일리야 등을 주요 지휘관으로 하고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출신 독립군(일명 ‘니항부대’ 혹은 ‘고려인 사할린부대’)과 만주, 간도, 시베리아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며 자유시 및 아무르주 일대에 집결했던 여러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조직되었습니다.

1921. 3. 15. 일경 사할린 특립 의용대 조직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랴,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한다.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한다.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등이 자유시에 도착한다.

1905년 사할린섬의 일본인

1920년 파괴되기 전 니콜라옙스크의 건물.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의 제정 러시아군 병영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기 블라디보스톡의 일본인

1910~1920년대 마자나바 주민, 1928년 대홍수와 일제의 학살로 마을이 없어짐

마자나바 일대에서 활동했던 항일 빨치산. 마자나바 주민들은 오늘날까지 일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사진의 빨치산 사진중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 아무르 지역 주민중 리씨 한씨 등 한국계 성씨도 있다.

오늘날의 마자나바 군

마자나바 박물관

마자나바 항구, 하류 자유시, 블라가베셴스크 등과 연결된다. 오늘날과 지형이 다르다. 오늘날 항구 기능은 상실되었다.

마자나바 항구의 과거 모습. 오늘날은 도로 교통의 발전으로 항구 기능이 상실되었다.

마자나바 항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