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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참변 100주년) 1921. 6. 28. 자유시 참변은 수라제프카에서 일어났다.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6.29|조회수209 목록 댓글 2

1921. 6. 28.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연재하며 드리는 말씀​

이 다음 '토탈 워 카페'의  연재물은
1921년 자유시 참변 무렵 동시베리아 이르쿠츠크,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만주 흑하 등지에서 사망자 등을 조사하였던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기준으로 작성되고 있습니다.

동일한 증인의 자료를 인용하는 기록들은 1922년경 이르쿠츠크파에서 작성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965년 김승학이 쓴 [한국독립사] , 김홍일이 쓴 [대륙의 분노], 리인섭이 쓴 기록 등등이 있으며,
2020년경부터는 러시아에서 발행한 도서들에서조차 1921년 대한독립군(일명 대한혁명군, 사할린특립의용대)측의 사망자 조사결과를 사실로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략적인 사망자 외에도, 피해자도 오늘날 러시아 정부측 기록과도 일치됩니다.

또 2010년 이후 한국에서 최근 발행된 도서들도 다시 인정하기 시작하여, 사실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강준만 등의 한국현대사편 중 자유시 참변 부분)

그리고 도와 주신 러시아측 학자가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구글 등을 검색하면 바로 한국 일부 도서의 저자보다 적게 알려진 인물이 아님을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서력 2021년 지금도, 러시아 아무르주 스바보드니시(자유시) 주변의 일부 도로는 1921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포장의 도로가 유지되고 있으나, 자유시 북쪽의 인공위성발사장인 코스모드롬 보스토치니가 건설되고 자유시 북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중화인민공화국에 천연가스를 수출하는 시설이 대규모로 건설되고 있어 주변이 빠르게 아스팔트 포장도 이루어지고 있다.
자유시 주변은 높은 산이 없는 평원지대로 한국에서는 유사한 지형이 거의 없다. 또한 자유시 우측의 제야강은 구렁이처럼 흘러가면서 홍수에 따라 물줄기가 바뀌곤 하였다.
수라제프카 지역 남쪽⦁북쪽⦁서쪽에 우각호가 여러 개 있어서, 수라제프카 좌측편의 고려인 마을에서 논농사에 이용하였다.​

1918년경 러시아 내전기 자유시(스바보드니) 기차역을 점령한 일본군
1920년경 자유시의 친일파와 그 가족들
수라제프카 구역
오늘날의 자유시 항구 (수라제프카 항구)
자유시 우측의 제야강은 폭이 약 600미터로 평소 흐르는 유량은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두만강, 압록강, 청천강을 합한 것보다 많다.

바로 보이는 섬이 독립군이 대피하였다는 섬으로 보여진다.

최근 러시아측 학자들중 일부는 독립군 공격에 가담했던 이르쿠츠크파측 러시아군 부대가 대략 8개 연대 10,000여명에 육박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여, 1921년 대한독립군측 조사 결과가 사실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
당시 최대 피해자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요 공격목표였던, 사할린부대로서 수백여명이 현장에서 죽고, 생존자 대부분이 노동수용소 등지로 끌려갔다가 나중에 소련대숙청과 정치 테러의 피해자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을 입게 된다.

1920. 2. 29. 니항사건 당시 한인 사할린부대원중 무장을 했던 병력은 200여명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니항의 한국계 주민도 남녀노소 포함 최대 1,000명이었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에서 피해를 본 사람은 최소 1,500명이 넘는다.

1921. 1. 28.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박병길의 처형 방법은 독립군이 밀정을 처형하던 방법과 유사하나, 이미 박일랴가 용서하기로 한 후 처형이 이루어져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본 자료는 전투에서 '왜적을 때려 죽이 죽이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알던 독립군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다보니 오늘날 기준과는 맞지 않는다.
다만, 1940년대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죄수가 동료 유태인 죄수의 떨어진 빵한조각을 훔쳐 먹을 경우, 장발장 시대처럼 징역 5년형 정도로 가볍게 처벌되지 않고, 오직 동료 유태인 손에 즉결 처형으로 다스려 졌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사정상 빵 한부스러기도... 훔쳐 먹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가 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과 마찬가지로 독립군에게도 전투에서 왜적 목을 잘라오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었으며, 일제에 단순 협조한 자도 즉결 처단으로 다스려 진 경우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낮에는 높은 언덕이나 고려인마을(오늘날의 사벳스키 마을)에서는 수십에서 수백킬로미터까지 눈으로 관측이 가능하다.
사건이 일어난 자유시에서 3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수라제프카 마을과 자유시 항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유시 시내와 고려인 마을의 주변 언덕에서는 쉽게 관측도 되었고 총소리도 자유시 전 주민이 들을 수 있었다.

수라제프카 마을은 당시 자유시 시내와 거주민 수가 비슷한 수백호 이상 ~ 1,000호 수준의 마을로 우측 자유시 항구와 좌측 수라제프카 기차역(오늘날의 이름 : Михайло-Чесноковская ​Станция, 미하일로 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이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당시 수라제프카 구역에는 제분소, 양조장, 과일 주스 공장, 도축장, 벽돌공장 2개, 학교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노동자의 수는 4킬로미터 북쪽의 자유시 시내지역과 비슷한 1,500여명 이상이 일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1921년경 수라제프카 구역을 포함한 자유시의 총인구는 대략 1만명에서~ 1만 2천여명 정도였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자유시와 수라제프카 지역만을 봤을 때 약 1만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자유시 시내에는 700여명을 고용할 수 있는 목재가공 공장 등의 산업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제야강을 운행하는 선박의 석탄과 나무 공급이 자유시 항구(수라제프카 항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상류의 제야(Зея)시, 스토이바(Стойба), 쉬마나프스크(Шимановск), 크라스나야라바(Красноярово), 마자나바(Мазаново), 푸짜찌나(Путятино) 등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목재나 자원들도 제야강(Река Зея)을 통해서 쉽게 블라가베셴스크나 육로로 1천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하바로프스크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으로 갈 수 있는 제야강의 교통요충지이다.

최초 아무르강의 지류인 제야강이 개발될 때부터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마을이 건설되어 하류의 바르다곤 마을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개발되었고 홍범도, 안무장군 부대가 주둔하였던 자유시보다는 먼저 개발되었다.

미하일로 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수라제프카 기차역 이라고도 한다)
간혹 독립운동사에 수라제프카 구역
(수라세프카, 스랍스크, 쓰랍스크 라고도 한다)을   ‘슬라비안카, 혹은 슬라브스카야’  라고 잘못 적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국인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림타타르인, 그루지아(조지아)인, 백러시아인, 체첸인, 유대인, 독일인 등 유럽계를 구분하기 힘들어서 러시아인이 사는 마을을 뜻하는 ‘슬라비안카’ 라고 적었는데,
그러나 수라제프카는 우크라이나인이 개척한 마을이다.

수라제프카를 개척한 최초의 주민들.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우크라이나 (체르니고프(Чернигов) 지방의 드네프르강 주변의 수라제프카)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건설한 마을이다.

서력 2021년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다른 나라다.
분쟁지역으로 유명한 흑해와 크림반도가 누구의 땅인지는 한국인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러시아에서 한국인이 일본인, 중국인, 태국인과 구분이 안된다고 ‘이폰스키’라고 부르면 한국인들이 기분 나쁠 수 있다.

‘수라제프카’ 를 ‘슬라비안카 혹은 슬라브스카야’ 라고 부르는 것은 독립운동사의 명백한 오류이다.

그리고 대륙횡단 철도가 부설되면서 자유시의 항구(수라제프카 항구) 역할에다가 기차역까지 함께 함으로써 중요성이 더 커졌다.
1921년경에는 수라제프카 구역은 좌측의 고려인마을이나 북쪽 자유시 도심에 비해서는 약간 저지대에 위치하며 자유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1928년 아무르강 대홍수 때 수라제프카 마을이 대부분 침수되었다.

따라서 1921년 수라제프카 지역의 번화가이던 발샤야 거리가 오늘날에는 가장 낙후된 지역처럼 보인다.

이러한 환경상 수라제프카에는 벽돌공장, 도축장, 양조장 등 산업시설, 기차 수리시설,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항구 시설 등이 있었다. 그래서 도축장, 양조장, 항구, 철도역을 중심으로 세로 4킬로미터 가로 약 4킬로미터 크기 정도인 수라제프카 구역은 당시 자유시 시내와 비슷한 크기였으며, 큰 공장건물을 비롯하여 능히 수백에서 수천명을 독립군들을 수용할만한 건물들도 1921년에 있었던 것이다.

1918년경에는 일제 침략군이 3,000여명 주둔하였다.
그러나 내전기 극심한 주택난, 식량난 등으로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이동해온 독립군 부대가 자유시 인근 지역까지 분산배치된 것은 당시나 오늘날의 군사전술로 봐도 타당한 것이었다.

1921년 자유시 사건 무렵 이르쿠츠크파는 대체로 일본군과의 전투 경험이 없었고, 지휘권 문제에 대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고집한 점을 모면키 어렵다.

자유시 사건 당시 상당수의 독립군이 탈출에 성공한 이유는 마을의 크기가 컸고 포위망에도 탈출할만한 틈이 있었기 때문에 박윤천(박일리야, 혹은 박일랴) 장군을 비롯하여 다수가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 수 파악이 오늘날까지 곤란한 것이다.

1920. 4. 1. 일경 리흥진 선생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할린 의용대원 등등
사할린의용대원과 니항주민


참고자료
1920 일제침략군이 전멸한 니항 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1)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https://blog.naver.com/hwachan20/222410753009

(2) 니항의 평화적 해방 

https://blog.naver.com/hwachan20/222410810359

(3) 트리피츤 부대의 반격

https://blog.naver.com/hwachan20/222410819832

(5) 니항사건의 평가 

https://blog.naver.com/hwachan20/222410828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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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6.29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6.3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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