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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참변 100주년 (12) 자유시 한인 보병자유대대의 조직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7.11|조회수135 목록 댓글 3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의 합동민족군대와 고려특립부대

동시베리아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던 무렵에 바이칼호 서쪽에서도 한인들이 혁명세력에 가담한다. (시베리아에서는 중국인, 몽골인, 기타 여러 소수민족들도 볼셰비키를 지원해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1920년 2월 7일경 백파인 콜차크가 이르쿠츠크에서 살해되자 이때부터 바이칼호 서쪽은 볼셰비키(혁명세력)들이 장악한다. 볼셰비키는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합동민족군대’라는 국제군 편성이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4쪽 등)

 

1920년 3월경에 이르쿠츠크 지방의 여러 민족이 볼셰비키에 호응하여 동양의 공산혁명에 가담하고자 적군의 군대 소집에 응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략 11개 정도의 여러 민족이 참가하였다. 그보다 약간 앞서 이르쿠츠크의 한인들은 ‘고려특립중대’란 이름의 소부대를 조직하였는데, 중대장은 박알렉세이였으며 대원은 35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신병이었으므로 초보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합동민족군대의 출현으로 즉시 이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적군 5군단 사령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특립중대를 창설한 간부들은 이미 볼셰비키당원이었으므로 이들은 볼셰비키당 안에 ‘고려부’를 부설하고 군대의 사상, 정치문제는 고려부에서 군사문제는 합동민족군대에서 담당하기로 하였다. 그 뒤 백파의 카벨리군이 북으로부터 내습하고 시묘노프(혹은 셰묘노프 : Семёнов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1890~1946)군이 남으로부터 공격하였기에 합동민족군대는 연대편제로 확장하여 출전하게 되었다.

이때에 고려특립중대는 병력이 약 35여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20여명의 당원 군인만이 참전하였다.

 

이 출전에서 승리한 합동민족군 사단은 이 지역의 평정과 더불어 사명이 끝난 것으로 간주되어 해산되었으나 고려특립중대와 중국인부대만은 동양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존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고려특립중대의 병력은 70여명으로 증가되었고, 적군 제5군단본부가 이르쿠츠크에 주둔하게 되자 이 군단의 직속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적군 제 5군단은 ‘해방지구’의 한인 소부대들을 이르쿠츠크로 집결시켰다.

이들은 주로 이르쿠츠크 서쪽의 옴스크, 노보 니콜라예프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에 산재했던 소부대들이었다.

곧 옴스크의 사관학교(러시아 공산당내 고려부 주동자가 설립한 사관학교) 졸업생 81명과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한인부대 40여명을 고려특립 중대에 통합함으로써 고려 특립대대가 만들어졌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37쪽 등)

 

1920년 6월경에 옴스크로부터 다시 30여 명의 한인 소부대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고려특립대대에 편입되면서 병력수는 총 6백여명으로 증가된다. 이로부터 이 부대는 2개 대대로 편성되고, 여기에 중국군대 1개대대를 편입하여 ‘합동민족연대’라 일컫게 되었다.

연대장은 러시아로 귀화한 한인 최길래이였습니다.

l920년 7월에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러시아공산당내 ‘고려공산단체 제1차 대표회의’에서 선출된 고려공산단체 중앙간부가 이 연대에 군정위원을 배치하기로 하고, 군사상의 지휘는 종전대로 제 5군단이 맡게 되었다.

그 뒤 제 5군단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이 연대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고려공산단체 중앙간부의 끈덕진 교섭으로 그 해말까지 자기 산하에 존치시켰다.

 

1921년 1월경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서 동양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혹은 원동비서부라고도 한다)를 극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가 아닌 이르쿠츠크에 설치하자 이 연대는 그 동양비서부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자유시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속하게 된다.

 

 

자유시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조직

만주 동청철도를 활용해 흑룡강(아무르강)을 건너 블라가베셴스크 방향에서 자유시를 공격해 수년간 점령했던 일본군과 백파군대가 1920년 2월 7일경(『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2월 17일경) 철수하자 볼셰비키(적군)가 자유시를 해방했고, 일본군은 1920년 3월 8일경 동쪽 하바로프스크로 철수 완료하였다.

 

이로부터 흑룡주(아무르주) 일대에는 공산당 지도 아래서 흑룡주 임시정부가 건설되며, 군권은 볼셰비키가 장악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려인들이 아무르주 주도였던 블라가베셴스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자유시로 피난 목적 등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친일파 셰묘노프, 만주에서 친일활동을 하다가 1946년경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친일파 셰묘노프,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과 함께 활동하였다.
백파의 우두머리 콜차크 제독.  1920. 2. 7. 일경 처형되었다. 2021년 현재 이르쿠츠크에 동상도 세워졌다.  ?

 

 

스바보드니의 유명한 향토사학자 파포프 선생. 1980년대 한국신문에도 보도되었다. 1980년대 촬영된 자유시 참변 급수탑 사진에 이분이 등장한다. 오늘날 러시아 고려인 역사에 이분의 자료가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한국뿐 아니라 러시아측에도 어떤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조상이나 친척중 누군가가 일제와 백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파포프 선생은 1980년대 동아일보와 인터뷰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이바나비치... 라고 알렸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동 이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한 것이다.
보통 사람을 부를 때, 홍선생 홍형 홍군으로 부른다.
가까운 사람이. "길동아" 라고 부른다.
그외 "동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비하할 목적의 사람 아니면, 부모와 같이 매우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부를 수 있다.

가끔 미국이나 러시아 방송을 보지만, "푸틴, 케네디, 트럼프, 바이든" 을 부를 때 성이 아닌 이름이나 러시아식 부칭, 미들네임으로 부르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파포프 선생은 1980년대에도 한국인에게 굉장한 호의를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요즘 스바보드니의 기록에서 한국계 독립군을 예전처럼 "반란군,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는 자료가 안나올 정도이다.
최근에 발행되는 거의 대부분의 기록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누명을 썼다. 무적황군을 격파한 박일리야. 무덤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등등으로 적고 있다.
(​※파포프 블라디미르 바시례비치(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Попов)는 스바보드니시의 유명한 볼셰비키로, 께르비에서의 트리피츤 동료의 학살 사건을 조사하였던 베즈드닌(Безднин(комиссар)) 등과 함께 자유시 일대에서 볼셰비키 활동을 하였다.)

 

스바보드니 마자나바 인근 항일 유격대

흑룡주 고려 주민들도 독립운동의 기회가 오자, 자유시에서 3•1독립선언기념식을 거행하고 흑룡주 주민대회를 소집하여 최고려, 박주련, 이훈, 이영섭, 최군실, 김진보, 김인현 등의 발기하여, 1920년 3월 20일경에 자유시(알렉셰프스크, 스바보드니)에서 ‘흑룡주 한인대회’가 소집되고, 이 대회 결과 흑룡주 한인총회라고 하는 혁명기관을 조직하고, 한인군대를 모집하였다.

한인들중에는 재산을 혁명운동에 써 달라고 내맡기는 사람이나 군대에 응모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고 하며, 총회는 약 4백명의 1개 대대를 단시일 안에 편성할 수가 있었다.

이 부대는 처음부터 적군의 제도를 따르게 되어 군정위원은 정치•문화를 담당하고 지휘관은 군사 부분만을 담당하였다.

이리하여 군정위원에는 전희서(田希瑞), 대대장에는 승훈(承勳), 참모장에는 안훈(安勳)이 취임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4쪽 등)

이 때의 흑룡주 한인총회는 이 부대를 적군에 내맡기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지할 생각이었으나, 주민의 경제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으리만큼 강한 것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군량과 피복은 한인사회에서 공급하기로 하고, 무기는 흑룡주 임시정부에서 공급받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하바로프스크에 주둔하고 있었고, 치타는 세묘노프의 백파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1920년 2월에 문창범 등의 대한국민의회가 아무르주의 블라가베셴스크로 이전하여 왔다.

1920년 4월경 동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정부의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20년 7월 1일 흑룡주 한인총회는 ‘제2차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한국민의회를 따르기로 결의하고, 고려인 군대를 대한국민의회에 인도하였다.

얼마 뒤, 일본군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철수하였고 친일파인 세묘노프의 백파군도 치타에서 패퇴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에 따르면 대한국민의회에서는 고려인 부대에 대한 일반 교육의 급무를 위하여 원동정부(혹은 극동정부) 제2군단에 교섭하고, 볼셰비키 정부와 일본사이의 한국인 독립군 부대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2군단의 특립대대로 편입하여 관할을 받게 하고, 다만 정신상으로만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에서 지도하기로 하였다고 주장한다.

최고려. 통역사로 일했다. 고려군정의회 군정위원.
미하일로 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일명 수라제프카 기차역)
자유시 참변 무렵의 수라제프카 구역 (오늘날과 지형이 약간 다르다)
제야강을 운행하던 여객선
1917년경 미하일로 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일명 수라제프카 기차역)
오늘날의 미하일로 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일명 수라제프카 기차역)

 

어째든 특립대대로서의 한인부대는 1920년 9월에 간부진용을 개편하여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라 일컫게 되었다.

대대장에는 오하묵(吳夏默), 군정위원장에는 최고려(崔高麗)가 임명되었다. 오하묵은 당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단 제6연대장 겸 블라가베셴스크 지역의 수비대장으로 있다가 이를 겸한 채 한인보병 자유대대장으로 옮겨왔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러시아 극동에서 상당히 알려진 책인,

1974년 아기예프(АГЕЕВ А. В.)가 쓴 '아무르지역 파르티잔'에 오하묵의 활약상과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최고려는 대한국민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 대대의 군정위원장으로 배치되었다.

이 무렵 스바보드니 지역은 볼셰비키가 완전 장악하였고, 스바보드니의 고려인 부대 역시 의무적으로 공산주의 교육을 받으며, 각 중대마다 군대내 정치를 담당하는 세포조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인보병자유대대의 대대장 『오하묵(Огай Христофор Николаевич, 1895~1937)』은 러시아 연해주 출생으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고, 1914년경 1차 세계대전에 제정 러시아군으로 참전하였다.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에서는 그가 장령(장군)계급까지 진급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최종 계급은 여단장 혹은 연대장 정도였다.

1918년경 1월 22일경 김철훈과 함께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0년 7월 7일경에는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의 발기로 ‘전로한인공산당 제일대표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 이르쿠츠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일부와 바이칼 연안의 러시아 공산당 조직 산하에 있는 일부 한인 공산주의 조직들의 중앙기관에 불과하였다.
1921년 5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일본군과의 교전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1921. 6. 28. 자유시 사건 당시 사할린의용대와 한몸처럼 움직이는 대한혁명군(일명 대한독립군)을 공격하도록 ‘무정부주의자, 강도, 학살범’ 등의 누명을 씌웠고, 실제 사할린부대 공격에도 앞장섰다.
1921년 7월경 독립군의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자 독립군 부대 여단장을 지냈다. 오늘날 러시아 스바보드니시의 기록에서는 소련군의 연대장급 이상의 장교를 지낸 것으로 확인되어, 한국계 러시아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출세한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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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7.11 적군의 군대소집에 응해 고려특립중대라는 소부대를 조직하였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12 아마 1918~1922년 러시아 적백 내전 기간중 양측에서 군인들을 모집하였고, 일제가 백파편을 들자 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반대세력이었던 볼셰비키 편을 들어 독립군 부대를 조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7.12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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