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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참변 100주년 (13) 연해주 및 만주지방 독립군들의 자유시 도착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7.11|조회수219 목록 댓글 2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한인부의 계획

1920년 12월 21일경 치타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Дальбюро ЦК РКП (б)) 소속 한인부(상해파)는 비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참석 : 위원장 김진, 박창은, 장도정, 서기 : 박애, 계봉우

 

1. 단일 최고 기관과 사령부를 통합 수립하기 위해, 1921년 4월 1일까지 중국과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모든 한국 독립군들의 대표 대회를 치타에서 소집하고, 그 아래에 군사 의회와 총사령관을 구성한다.​

 

2. 러시아 극동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 독립군 부대들을 극동공화국 군부 총사령관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Дальбюро ЦК РКП (б)) 산하의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에게 직접 예속시킨다.

 

독립군 부대들의 대표와 책임 있는 지도자들로 구성된 임시 군사의회를 만들고, 독립군 부대들을 개편한 후,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더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훈련 후, 전투 지역으로 보낸다.

 

3. 100여명을 위한 사관학교 개설.​

 

4. 독립군 부대들에서 정치 업무를 수행하고, 의용군을 모집하고, 지휘 요원과 정치 위원을 임명 및 해임할 권리는 담당 부서(Секции)의 손에 집중한다.

 

5. 중국과 한국의 독립군을 지원하고 특별 부대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자금. 50,000여명을 위한 무기, 장비, 제복 및 식량의 제공을 위해 극동공화국의 간부에게 청원서를 제출한다.

 

(출처 :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б). 21 декабря 1920 г. // РГАСПИ. Ф. 495. Оп. 154. Д. 39. Л. 30. Машинопись, заверенная копия.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Док. № 31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 (б) г. Чита 21 декабря 1920 г.)   (※필자의 의견 : 이 무렵 달뷰라 소속 한인부의 계획은 그러하였다는 것이다.)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60-protokol-sekretnogo-zasedaniya-koreyskoy-sektsii-pri-dalnevostochnom-byuro-tsk-rkp-b-21-dekabrya-1920-g#mode/inspect/page/1/zoom/4

Док. № 31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 (б)

г. Чита
21 декабря 1920 г.

Присутствуют: Ким Дин, Пак Чан Ын, Тян До Ден, Пак Ай, Ге Пон У.

Председательствует: Ким Дин при секретаре Пак Ай.

Вопрос о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ах

Постановили:

Принимая во внимание, что партизанские отряды, находящиеся в Китае и
на рус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вследствие отсутствия связи и общего плана борьбы,
а также и единого верховного органа и командования лишены возможности
правильно вести партизанскую борьбу, Секция, считая необходимым сейчас же
приступить к согласованию действий отдельных партизанских частей и ведения
в них партийной работы, постановляет: 1) в целях объединения и установления
единого верховного органа и командования созвать съезд из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всех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находящихся в Китае и на рус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к

1-му апреля 1921 года в г. Чите и создать в нем Военный совет и Главный штаб;

2) для урегулирования положения на русском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а) подчинить отряды
непосредственно Главнокомандующему всеми вооруженными силами ДВР
и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бюро ЦК РКП; б) создать временный Военный совет
из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и ответственных руководителей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и в)
переформировав отряды, перевести их в более безопасные места во избежание
дипломатических осложнений ДВР и после обучения переотправлять в район
военных действий; 3) открыть военно-инструкторскую школу на 100 человек; 4)
право ведения политической работы в отрядах, вербовка добровольцев, назначения
и отставания от должности командного состава и политических уполномоченных
сосредоточить в руках Секции и 5) войти с ходатайством в Главный штаб
ДВР об отпуске вооружения, снаряжения и обмундирования и продовольствия
на 50 000 человек и средств, необходимых на поддержку партизанских отрядов,
находящихся в Китае и Корее, и на организацию особых отрядов.

Подлинник подписали:
Председатель заседания Ким Дин.

Секретарь Пак Ай.

С подлинным верно:
Член корсекции Пак Ай.

РГАСПИ. Ф. 495. Оп. 154. Д. 39. Л. 30.

Машинопись, заверенная копия. Подписи-автографы.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비밀회의록. 1920년 12월 21일 (Протокол секретного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секции при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м бюро ЦК РКП(б). 21 декабря 1920 г.)

 

 

 

연해주 및 만주지방 독립군들의 러시아령으로의 이동

1920년 10월 9일 일본군 간도파병에 관한 중국 군벌⦁일본간 교섭이 성립되었다가 그달 12일경에 중국의 친일군벌이 이것에 대한 동의를 취소하자 일본은 자위상 부득이하다는 구실로 기존의 점령지외에도 간도에 대한 침략을 강행하였는데, 일제가 '간도토벌'로 부르는 이 공격의 목적은 독립군 토벌과 조선인 지원세력을 몰살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경 일제의 시베리아 만주 동청철도 침략도

러시아령의 첫 집결지는 이만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측 기록에는 북만주 등으로 북상해서 아무르강 등의 국경을 넘어 이동해온 독립군도 있었다고 한다). 이만은 하바로프스크의 볼셰비키 군대와 블라디보스톡에서 스파스크까지의 일본군과의 중간지대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백파와 친일파의 거점이었던 1920년대 만주의 대도회 하르빈

이만으로 향한 이들 군사단체들은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만주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의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각 부대별로 행군하여 러시아령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이청천의 주장에 따르면, 이청천이 소속되었던 간도 안도현(安圖縣)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홍범도 등의 국민회군과 합작이 성립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이 바로 ‘대한독립군’으로 불려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뒤이어 김동식(金東植)의 ‘광복단(光復團)’, 김혁(金赫)의 ‘흥업단(興業團)’, 신포(申砲)의 ‘야단(野團)’,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의 낙오소대인 ‘함희부대(咸熙部隊)’가 집결하여 총병력 약 8백여명이 이만으로 넘어 갔다고 한다.

그들은 국경 인근에서 러시아·만주 국경선과 동청철도의 일부를 백파와 합세해 점령한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승학 편저 한국독립사 420쪽 등)

김홍일도 간도방향에서 러시아령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톡과 만주리간 동청철도(중동철도)를 일제 침략군과 러시아 백파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하바로프스크 공격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시베리아와 만주 동청철도를 장악한 일제 침략군과 연합군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연합군

1921년 1월 26일경에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다는 소리도 있다.

만주•간도 지방 독립군의 이동시기는 일제경찰 문서와 독립군 부대의 주장마다 날짜가 다르고 집합된 병력수가 다르다. (대체로 이만에 한인무장부대가 도착한 것은 1921년 1월에서 2월초이며, 이들은 그해 3월 중순까지는 이미 자유시로 이동을 완료하였거나 일부는 간도지방으로 돌아 가거나, 러시아령 연해주에 머물렀다.)

이르쿠츠크 파의 문서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9쪽 등에 따르면, 당시 자유시로 집결중인 한인무장부대의 동태를 다음과 같다고 한다.

“당시 노령 각 방면에서 고려의병대가 봉기하여 러시아 군대에 일부 편입된 것을 대한국민의 회에서 제2군단에 교섭 하여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니, 1920년 11월경이다.

이와 동시에 북간도에서도 고려 각의병대가 일본군대와 전투하다가 과부적중(寡不敵衆)의 세로 퇴각하여 노령으로 향한다는 보도가 있으므로, 대한국민의회장 문창범, 재무부장 한창해(韓滄海), 자유대대장 오하묵, 비서 박병길 4인이 동년 12월 초순경에 하바로프스크 제 2군단본부에 가서 간도 각 의병대가 노령으로 오는 사정을 그 군단에 교섭한 후 한창해로 하여금 요하(饒河)에 파송하여 의병대 임시주둔지에 관한 것을 준비하고 각 의병대에 인원을 파견하여 통래(通來)전쟁과 원로(遠路)에 피로하게 된 군심을 위안 겸 환영하며, 또는 제2군단에 교섭한 결과를 보고하고, 전로(前路)를 인도하여 자유시로 향하니, 1921년 1월 중순이라. "

자유시 기차역 (수라제프카 기차역보다 수킬로미터 북쪽에 있다)

자유시 수라제프카 구역 일대 기차역들

 

러시아•중국지방(魯中兩領)의 각 의병대가 일선일후(日先日後) 집합되는 바, 최진동 군대는 동월회간(同月晦間), 안무 군대(安武軍隊)는 2월 초순에 우선 자유시에 도착하여 한인보병 자유대대의 명의하에 제반 공급과 지휘를 수(受)하고, 중로(中路)에서 미급하였던 각 군대도 동년 3월 중순까지 당지에 제제(濟濟)히 회집(會集)해오니, 회집된 의병대 명칭 및 영솔자 씨명은 다음과 같다.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19213월 중순경 자유시 집결 독립군 부대·로시아령 각 의병대
이만군대 김표도르, 박공서(朴公瑞), 김덕보(金德甫)
다반군대 최니콜라이
독립단군대 박그레고리, 최파사
니항군대 임호, 고명수 (사실상의 실권은 박일리야가 가짐)
()자유대대 오하묵, 최고려황하일, 전희서, 유수연, 류선장, 최주동(崔柱東)
 
·간도 각 의병대
총군부군대 최진동허재욱, 이택(李澤), 오병묵(吳秉默)
국민군대 안무, 정일무(鄭一武), 김광(金匡), 김규찬, 강석진(姜錫鎭)
독립단군대 홍범도, 이청천, 이병채(李秉采)
군정서군대 일부 자유시 도착    (김좌진, 서일은 자유시에 가지 않았음에도 도착한 것으로 허위 작성)

 
이상 각 군대의 군인총수 1,900 여명 (출처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9~20).

 

(※참고사항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이라는 문건의 특징은 조금이라도 잘한 것은 모두 이르쿠츠크파가 했다고 허위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르쿠츠크파의 노력만으로 독립군이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다는 것은 러시아측 기록이나 다른 독립군의 주장에 없는 명백한 조작임이 확인됩니다. 니항부대의 지휘관은 박일리야가 명백하고, 이르쿠츠크파가 자유시 참변의 거센 비난을 피하기 위해 조작한 부분이 엄청납니다. 심지어 문건 작성자와 일본에게 제공한 자 즉 이르쿠츠크파에 침투했던 밀정의 이름조차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홍일이 인솔한 군비단(軍備團)군대의 만주 잔류부대가 이만에 도착한 것은 1921년 5월 10일경 이었는데,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이 러시아령으로 넘어간 마지막 부대에 속했다는 것이다. 김홍일의 부대도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았다.

1920년 11월경부터는 연해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일본군의 1920년 4월 참변과 하바로프스크 남쪽의 대규모 공격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자유시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집결과 통합논의 시작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 적군(赤軍,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셰르쇼프가 1921년 1월 3일 작성한 명령서를 보면, 자신의 구역으로 온 모든 한인 무장부대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회수된 무기들은 2군단의 보급부서로 보낸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의 상당수는 관할 2군단에게 무장을 반납하게 된다.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들의 무장해제는 약속과는 다른 것이어서 독립군들도 쉽게 응하지는 않았다.

결국 무기 반납이 잘 되지 않았는지, 1921년 3월 9일에도 2군단에서는 독립군의 무기를 회수하고, 불응하면 러시아령 넘어오지 말게 하고, 떠날 것을 요구하라고 명령하였다.

나중에 자유시에 도착한 독립군들이 다시 소총 등을 지급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 국경을 넘자마자 무장해제를 시키는 등 독립군들은 러시아 영토에서 볼셰비키의 허락 없이는 식량공급, 이동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없었고, 더군다나 무장을 갖춘다고 할 지라도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할 수 없었다.

이르쿠츠크파, 한인 보병자유대대, 원동(극동)공화국 군부의 결탁
독립군의 러시아령 입국시 진행된 무장해제는 결국 오하묵과 최고려, 김하석 등의 이르쿠츠크파가 주로 20세 미만과 초반으로 구성된 불과 10%도 안되는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다시 무기를 지급하고, 식량을 지급하고, 군복을 지급하고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리를 가지다 보니,
이르쿠츠크에서 온 합동민족군대, 간도계 독립군, 상해파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1921년 1월 18일경 자유대대장 오하묵이 제2군단에 호출되어 하바로프스크로 떠나간 이후에도 자유시에는 만주와 연해주로부터 한인무장부대들이 계속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 11월경 적군이 모스크바 아랫쪽의 크림반도를 해방시키자 백군 사령관 브랑길(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Вра́нгель)은 뱃길로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한인무장부대의 자유시 집결은 레닌의 노농정부가 극동혁명의 수행을 위하 국제군(인터내셔널 오트랴드)을 조직한다는 소문 등과도 관계가 있다.

국제군 창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소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37쪽을 살펴보면)

1919년 11월경 이르쿠츠크는 백파의 세력하에 있었으나, 고려인들인 비밀리에 군사혁명단체를 조직하였고, 1920년 초에 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커지자 합동민족(11개 민족)의 ‘합동민족군대’가 편성되어 백파를 격퇴하는데 참여하였으며, 백파군이 격파된 이후에 고려인과 중국인부대만 남게 되어 이르쿠츠크 주둔 5군단의 관할에 속했다. 그리고 원동에 진출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중국군 1개 대대와 고려인 1개 대대를 합한 약 6백여명으로 합동민족연대라고 하고 연대장은 최길래이가 선임되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여러 독립군들이 1921년 2월 초순에 우선 자유시에 도착하여 한인 보병대대 명의 하에 제반 공급과 지휘를 수령하였다고 적었고... (중략)...

‘집합된 군대중 자유대대는 원래 주의자(主義者) 단결에서 조직된 군대니 무산혁명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고, 기타 각 군대도 세계대세에 각성이었든지 또는 이와 같은 각성은 없었을지라도 군국주의 포악무도한 일본을 적으로 삼는 우리의 잔약(殘弱)한 처지를 진실로 동정함에는 러시아 적군(赤軍) 그 밖에는 없음을 알았든지, 주의의 철저와 불철저는 변명할 것 없이, 이와 같은 집합을 유일한 기회로 인(認)하고, 자유대대를 인연하여 적색(赤色)의 기치 하에 동일한 적군(赤軍)으로 세계자본가를 대적하는 혁명군대의 군율에 복종하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내용이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의 문서들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은 것은 당시 이르쿠츠크파와 아시아 공산혁명을 주도하였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극동공화국 군부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한국계 독립군부대의 극동공화국내 자유시 일대의 집결에는 중국, 만주, 러시아, 일본 등에서 알려지기로는 레닌정부 혹은 극동공화국정부와 러시아령에 집결한 독립군부대 사이에 어떤 군사협정 혹은 묵시적 동의가 있는 것처럼 당시에 알려졌다.

※이 군사협정 문제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채근식 저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 공보처 발행)는 ‘1921년 2월에 치타(원동공화국의 서울은 1920년 11월경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에서 치타로 옮겨진다)에 있는 완충 정부수석 카라한(실제는 극동공화국 수반이 아님)과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협정을 성공시킨 이면에는 일찍이 고국을 떠나 공산군에서 활약하고 있던 오하묵 장군의 공이었다.
이 군사협정에 있어서 독립군은 적계군을 도와 아직도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백계군을 격멸할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대상(代償)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조약에 서명하였다.’ 고 주장하였다. 사실과는 많이 다른 이러한 여러 주장들에 비추어 볼 때 이르쿠츠크파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도 초기에는 한국에서 진행되었던 3⦁1운동을 지켜봤고 한국의 독립군을 지원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② 기타 극동공화국과 문창범의 대한국민의회간에 조선독립의용군을 지원한다는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정확한 협약내용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독립군이 백파군 혹은 외국 침략군(일본군) 공격에 가담하고, 러시아 정부는 나중에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의 독립을 돕는다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소문들과 오늘날의 러시아 정부 문서들에 따르면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의 지휘하에 있었던 자유시의 한인 보병자유대대가 만주 독립군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의 자유시 이동에 노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레닌의 중앙정부든 (허수아비)극동공화국이든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이든지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자유시에 집결하게 된 독립군들은

① 모스크바의 공산당 중앙위원회, 코민테른 본부
② 러시아 볼셰비키의 (허수아비인) 극동공화국 정부와 군부
③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와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내의 한인부
④ 중화민국 북경정부와 만주 친일 군벌
⑤ 체코군단, 중화민국, 미국 등 연합국 (일본은 제외)

위의 국가들로부터도 어떻게든 지원를 받고자 했으며, 

크게 ①상해파 고려공산당, ②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③만주•간도 잔류 독립군부대, ④상해임시정부, ⑤미국 망명자 등이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1921년 2월경은 오하묵이 상해파와의 군권 다툼 때문에 2군단본부에 호출되어 갔고, 군권을 차지하려던 상해파의 박애 등의 노력이 승리하여, 극동공화국 정부가 자유대대의 지휘권을 한인부 5두제의 일원인 박창은(총사령관), 러시아인 그레고리예프(참모장)에게 넘겨주었다.

하바로프스크 소재 제2군단 본부에 호출되었던 오하묵은 이것에 반발하여 극동공화국 정부와 담판하려고 치타로 갔다.

1920년 극동공화국의 수도 베르흐네우진스크 (오늘날의 울란우데).. 치타와는 다른 도시이다. 치타는 1920년 11월경 극동공화국의 서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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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7.11 간도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였군요 한인 무장부대의 무장해제 명령을 약속과는 다른 것이어서 독립군들도 쉽게 응하지는 않았고 불응하면 떠날것을 요구하라고 명령하였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12 예, 자유시 참변과 관련되어 기록을 남긴 분들과 오늘날 러시아 공개되고 있는 정부 문서들의 기록이 그러합니다.
    실제 자유시에 집합한 독립군들중 무장조차 하지 못했던 분들도 많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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