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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14)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군권 다툼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7.22|조회수194 목록 댓글 2

1921. 6. 28. 자유시 참변의 대략적인 발생 순서

1919. 3. 1. 일부터 3·1운동 발생

1919. 4. 월경부터 1차 세계대전 처리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하였으나 실패

1919. 9. 10. 일경 (확실하지 않은)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 등으로 불려지기도 함) 지원금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의 분쟁이 있었다고 함. 러시아측 지원 자금을 둘러싸고는 수차례 다툼이 발생함

1919. 11월경 상해임시정부의 이동휘는 박진순을 모스크바 레닌정부에 파견하여 지원요청. 레닌정부는 금화 약 200만루블 정도와 독립군 부대 지원을 약속했다고 알려짐.

1920. 1월경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포고 1호 발표하여 독립군 활동 지원 요청

1920. 2. 7. 일경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일본군이 철수 시작하고, 볼셰비키 군대(赤軍)에 의해 해방됨. 일본군은 3. 3. 일경 자유시에서 전원 철수함

1920. 2. 29.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항구가 평화적으로 해방됨 (박일리야, 리흥진 등 참가)

1920. 3월경 볼셰비키 정부가 이동휘와 상해임시정부 측에 자금지원(약 금화 40만루블 추정되며 무게와 환전 문제로 여러 차례 나누어 상해파 측으로 지원됨. 이동휘 등의 1921. 10. 16일자 보고서)

1920. 3. 12.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중립조약을 어긴 일본군이 반자이 야간 기습 공격을 가함

1920. 4. 4.일경(혹은 4. 5. 일경)부터 일본군 연해주 한인 밀집지역을 공격, 4월참변 발생

1920. 4. 21.일경 일본군이 북위50도 이북의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괴뢰정권 수립후 영구 점령 작업

1920. 4월경 상해파 이한영 등이 코민테른 자금 일부를 휴대하고 상해로 귀환(금화 100만루블은 잘못된 자료임)

1920. 5월경 만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0. 6. 7. 일경 (6. 4일경이라는 소리도 있다) 홍범도, 안무, 허영장 등 봉오동 전투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러시아 내전을 틈탄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일대 점령과 사할린섬 북부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

1920. 7. 9. 께르비에서 니항을 해방시켰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과 동료들 다수 학살당함. 박병길이 일본군의 협조아래 트리피츤 체포·처형에 가담하였다가 자유시로 도주

1920. 7월 25일에서 7월 28일경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 박진순이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과 만남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1920. 9.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시키고 자유시의 보병 19연대에 편입시키기로 결정됨

1920. 9월부터 ~ 10월경 간도 훈춘사건(琿春事件,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 발생. 훈춘의 일본 영사관 관련 건물이 공격받음

1920. 10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의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일 수도 있다)에 한인부 조직 (오두제 :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 한인부는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혹은 극동공화국의 산하기관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0. 10월경 상해파(이동휘 등)가 극동공화국 한인부 등에 독립군의 자유시로의 이동 지원을 요청. 상해임시정부와 볼셰비키의 협조가 있었음

1920. 10. 12. 일경 박일리야를 비롯한 한인 니항부대 (나중의 사할린 의용대로 확대됨) 자유시 도착

1920. 10. 15. 일경 박일리야 원동공화국 한인부가 있는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로 출발

1920. 10. 21. 일경 홍범도, 김좌진, 안무 등 청산리 전투 시작

1920. 10. 22. 일경 자유시에서 제19연대(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친 부대의 일부)가 군율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2군단 및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이 철갑차와 보츠까레워 등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포위한 후 해산시켜, 다른 연대에 편입시킨다. 한인 니항부대(제19연대 제3대대=박일리야 부대)는 오하묵의 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됨

1920. 9월~10월경 상해파 한형권 등이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러시아측에서 금화 40만 루블 정도를 수령함. 대한국민의회 등과 자금 분배를 둘러싼 갈등 고조되기 시작함. 나중에는 중국·조선내에서도 자금 분배를 둘러싼 문제 발생

1920. 11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 서울이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치타로 옮겨짐

1920. 11월경 연해주와 만주의 한인무장부대 자유시 집결 시작

1920년 말경에서 1921년초 원동공화국 정부에서 자유시 일대의 한인부대를 통솔키 위해 김민선을 한인 니항부대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나 한인 니항부대는 19연대가 해산될 때 자유대대에 편입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1920. 12월경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등은 연해주의 독립군을 자유시로 집결토록 하바로프스크의 2군단과 교섭한다.

1921. 1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서 이르쿠츠크에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를 설립하고 고려인 부대의 지도 권한을 코민테른 본부 등에서 동양비서부로 이관함(동양비서부는 1920년 9월경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이라고도 한다)내에 있었던 한인부가 해체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원동비서부 혹은 극동비서부라는 명칭보다는 동양비서부가 적합한 명칭임)로 고려인 부대 지도권한이 이전되기 시작됨. (한인부는 해체 이후에도 일부 인물들이 수개월간 유지됨)

1921. 1월경 상해파가 재러군사위원회 조직, 상해임시정부측 이용이 경고문 발표

1921. 1월경 이용, 채영 등은 전한의병대의회 소집위원회 결성,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

1921. 1월경 (만주 밀산 일대에서)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시로 집결 시작

1921. 1. 18. 일경 보병자유대대장 오하묵은 트리피친 부대였던 제19연대 해산 및 고려인 부대 등의 문제를 보고하라는 극동공화국 군부 명령에 따라 치타 등으로 보고차 이동

1921. 1. 20. 일경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는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여 체르니고프카(=과거에는 체르니곱스코예 라고도 불렀다.), 크라스나야라바, 마자나바로 이동해 주둔할 것을 명령함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와 협의 없이 총사령관에 박창은, 참모장에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 임명)

1921. 1. 28. 일경(혹은 2월경) 니항에서 자유시로 온 박병길이 독립군에 의해 처단됨(암살설도 있다. 박병길의 자세한 과거는 알 수 없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자유시로 온 것으로 보임. 일제의 밀정 여부는 확인되지 않음).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도 트리피츤 지지세력으로부터 3차례 살해공격을 받았으나 나중에 도주하여 일본군으로 넘어감

1921. 2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 슈먀츠키가 취임

1921. 2월초 안무 부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도착

1921. 2월 중순경 (상해파) 박창은, 그리고리예프 자유시 도착

1921. 2월경 박창은 사면으로 한인부에서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군정위원장에 박일리야를 임명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음(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리야,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자유시 도착.

만주지방 및 연해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혁명군(대한독립군) 조직됨

1921. 4월경에서 5월경 중국 북경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측에서 독립군부대 통합을 위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1921. 4월경 극동공화국 군부에서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을 이르쿠츠크로 압송

1921. 4. 14. 일경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 군부에 임시고려군정의회 조직을 통보 (상해파인 계봉우, 박애, 김진,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과 협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1. 5. 2. 일경 이르쿠츠크파가 비밀리에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오하묵 일행 자유시 도착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 임명

1921. 5. 12. 일경 예전 오하묵의 보병 자유대대가 크라스나야라바로부터 원래 주둔지 자유시로 이동

1921. 5. 13. 일경 이르쿠츠크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가 자유시로 이동시작 (5월 28일경까지 최종 600여명 이동)

1921. 5. 18. 일경 치타에서 사할린부대로 가던 동림 체포.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측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무력화 시도.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의 지원금인 금은화 약 3만루블 이상이 러시아 관청에 압수됨

1921. 5. 19 일경 까란다리쉬비리, 류동열, 최고려 이르쿠츠크에서 자유시로 출발 (독립신문 1922. 2. 27 일자)

1921. 6. 2. 일경 홍범도 부대 일부 수십 차례 주둔지 변경후 다시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탈

1921. 6. 2. 일경 김홍일 단독으로 자유시 도착

1921. 6. 6. 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등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Казаки) 기병 600여명에서 900여명을 인솔해 자유시 도착. 정식 총사령관 선포 (대한혁명군측은 무장해제 명령에 대체적으로 불복)

1921. 6. 6. 일경 까란다리쉬비리와 통역사 최고려 등은 자유시 주둔 군인 전부를 모아서 설명

1921. 6. 9. 일경 안무 부대 마자나바 이탈후 자유시 도착. 일부 독립군의 주장에 따르면 안무 장군은 홍범도가 떠나자 수차례 자체 회의를 통해 일단 자유시쪽으로 이동하여 내분과 식량난 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함. 안무 장군의 이탈로 사할린 의용대도 통합에 대한 압박이 가중됨

1921. 6. 14. 사할린부대 자유시 도착후 수라제프카로 이동. 사실상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 자유시가 한국 독립군들로 뒤덮임.

1921. 6. 15일경 까란다리쉬비리, 오홀라 및 3명 블라가베셴스크를 방문하여 체포되었던 김규면, 한운용, 박원섭, 마시욱, 주영섭, 안태국, 임상춘 등을 조사하고, 금은화 3만루블 이상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까란다리쉬비리 등은 6월 18일경 자유시로 돌아옴

1921. 6. 19일경 자유시에서 장교회의 개최(분대장 이상 간부) (※이 무렵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와 공격을 반대한 합동민족군대 소속 고려인 간부 투옥)

1921. 6. 20일경에도 군회가 있었다 (※ 독립신문 1922. 2. 27 일자에 따르면 1921. 6. 20.일경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1921. 6. 21. 그리고리예프, 박일리야 등 장교 7인이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를 축출하면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겠다는 혈서 제출

1921. 6. 22. 일경(※ 1921. 6. 20일날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까란다리쉬비리, 최고려 등이 독립군 3천여명을 자유시에 집합시켜 전군의 통합을 촉구.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6쪽에 따르면 최고려가 고려혁명 분열을 막기 위해 분란을 일으킨 자신이 독립군이 쏜 3천발의 총알을 맞고 죽겠다고 하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은 최고려나 까란다리쉬비리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고, 당시 연설을 하여 화합을 유도한 사람은 홍범도 장군 등이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과거 의병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라는 연설을 하여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 모인 독립군들에게 울음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홍범도가 이순신, 사명당,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박제상 등의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안하고 왜 갑자기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 6. 24일경 독립군 부대 편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발생

1921. 6. 25일경 까란다리쉬비리, 류동열 등 수라제프카에서 사할린부대 장교회의 개최

1921. 6. 27일경 수라제프카에 주둔중이던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 사면서 제출. 27일 자정이후부터 공격 개시

1921. 6. 28. 전날 한밤중부터 시작된 기습공격으로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자유시 사건 발생. (사망 수백여명, 포로 등 천여명 이상)​

1921년 후반기부터 포로로 잡힌 독립군 다수가 이르크추크 등지로 압송중 사망, 일부는 만주·연해주 일대로 탈출, 이동휘·만주지방독립군 단체·상해임시정부 등의 항의로 결국에는 포로생활을 하던 독립군 대부분 석방됨

1921. 10. 16일경 상해파 측이 러시아 지원 자금의 사용처 등을 보고

1921. 11. 28일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

1921. 11. 월경부터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

1921. 12.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 당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사실상 볼셰비키의 최고 명령기관이었음

1921. 12. 18. 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 형식적인 퇴진 발표

1922. 1월경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음

1922. 4. 22. 일경 코민테른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이르쿠츠크 대회에서 제명된 모든 당원 복권,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 퇴진, 두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휴식기간 결정

1922년 10월 25일경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군은 철군.

내전 승리가 확실해지자 볼셰비키는 병력 감축, 고려인 부대 대부분 해산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을 획득하고 일본군 철수. 니항사건에 배상요구 중단.

1925년 5월경 일본 군인은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군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했던 석유, 석탄 광산은 1944년에서야 소련측으로 이전

 

 

 

일제 침략자의 분열책
독립군 간의 지휘권 문제가 다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중 하나는 일제의 분열책이다.
일제는 식민지배를 위해 친일파와 밀정을 지속적으로 양성하여 왔고 한국 독립군의 분열과 대립을 최대한 조장하기 위하여 온갖 거짓말과 이간책만을 일삼아 왔다. 일제의 최종 목표는 앞잡이들을 앞세운 한민족의 말살(몰살)을 통한 식민지 확장과 일본의 번영이었고, 평화로운 공존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자유시 사건 당시에도 독립군 주변에는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자는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1918년경 시베리아 출병과 니항사건. 아시아 평화와 러시아 평화를 위한 정당한 출병이었다. 당시에도 많은 백파계 러시아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오늘날에도 일본 등에 백파계 러시아인 후손의 인터넷 서버가 일본과 백파를 옹호하는 글을 대량으로 게재한다. ​

 


이르쿠츠크파의 군권 상실과 박일리야의 지휘권 획득
자유시일대에 집합한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싼 군권 다툼에서 처음에는 대한국민의회 쪽(오하묵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유리하였다.
처음에는 자유시에 온 니항군대를 이르쿠츠크파에서 흡수한다.

오늘날 일본과 미국에서 자주 출판되는 책들. 요즘에 들어서 너무 과장된 표현은 일부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상해파(박애의 한인부 등)의 극동공화국 등에 대한 외교활동에 따라 오하묵은 한국계 독립군 부대들의 군권 문제 때문에 2군단 본부에 호출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독립군 부대들이 속속 자유시에 집결하게 되었고, 이 부대들은 일단 이르쿠츠크파의 지휘하에 움직이게 되었다.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등에 따르면)
상해파와 친밀한 극동(원동)공화국 한인부 및 한인군사위원회는 니항군대의 지휘자였던 박일리야와 협력하게 되었다.
한인부에서는 극동공화국정부가 김민선을 대대장으로,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자유시에 파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하묵 등이 현지 러시아 기관들과 결탁하여, 니항군대를 흡수해 버렸으므로, 이러한 처사는 명령 불복종 및 불법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에 대하여 오하묵 등의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 오하묵 등이 제2군단 본부로부터 자유시의 군사 진상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바로프스크로 호출되어간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었다.
블라가베셴스크 지방에는 상해파의 한인부와 연락이 있는 블라가베셴스크(흑하 부근)지방공산당내 고려부에서 근무하는 임상춘, 최태열 몇 사람과 이용, 장기영, 채영, 김민선, 박일리야 등으로 합세하여 2월 중순에 자유시에 도착하여 군대를 관리하려 하였다.

상해파 독립운동가 이용, 이동휘, 리인섭, 계봉우


 

 

박창은 사퇴
총사령관에 임명된 박창은은 일반 군대를 소집하고 자기가 총사령관의 직임으로 왔으니 자유시의 일반 군인들은 명령에 복종하라 하였다.
한인 보병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한인부의 5두제중 박창은은 군사상 지식과 사회상 경험이 없음을 일부 군인도 아는 바이며 또 어려서 구상유취(口尙乳臭)를 겨우 면한 일개 경박(輕薄) 청년이었다고 한다.
일반 군인들의 태도가 불온하게 되자, (아마 이르쿠츠크파 한인보병 자유대대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박창은은 마음을 바꿔 곧바로 블라가베센스크로 돌아가 총사령관 사면서를 한인부와 원동정부(극동공화국) 군부에 제출하였다.


(그후 박창은은 상해파에서 파를 바꾸어 이르쿠츠크파인 대한국민의회에 비서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박창은의 사면서을 접한 한인부에서는 다시 원동정부에 교섭하여 참모부장으로 파견하였던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야로 군정위원장을 지정하여 다시 사할린의용대(니항군대)와 각 의병대를 관할하라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박일리야와 그리고리예프는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는바 주둔지를 변경하여 마자나바로 정하고 한인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된 니항, 다반 군대를 우선 이주시켰다.


(※마자나바는 자유시의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60킬로미터, 도로상으로는 80킬로미터 이상 되는 한인촌락과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마을, 호수는 수백호에서~수천호 정도인 농촌,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150호라고 마을 규모를 축소하였으나, 실제로는 주변의 주택들을 합하면 몇배에서~10배 정도의 크기였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간도계 독립군들이 마자나바 이동에 반발하였다고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 및 이동휘 등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만주⦁간도지방 독립군들이 반발한 것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만주 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대응책
만주, 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태도는 중립적이었다.
다만 주택, 의복, 무기, 식량, 훈련 등의 문제에 대하여 각 독립군 부대에서 간도와 연해주일대에서 이동해 올 때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먹고 자는 문제조차 해결되지 못하자 각 독립군 부대에서는 군대 대표를 선정하여 원동정부 군부와 주둔지, 식량, 무기, 훈련, 주거 등의 문제를 완전히 교섭하기로 결정하였고,
1921년 2월 27일에 대표6인(자유대대의 김하석, 최고려. 총군부에 김표돌. 국민군에 김규찬, 강석진, 김광)을 파견하였다.

이때부터는 자유대대 쪽에서 일방적으로 러시아 지방 행정기관 등과 교섭하거나 군대에 대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불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하묵은 1921년 1월 18일에 군부명령에 따라 군대사정의 보고로 치타에 체류중이었다.) 자유대대는 자유시 일대에 근거지가 있어, 식량과 주택 등의 보급에서는 다른 독립군부대를 회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나, 독립군 부대들이 대표단을 구성하여 식량, 주택, 무기, 훈련 등의 문제를 원동공화국 정부 및 군부와 교섭하기로 하자, 자유대대의 지휘권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상해파인 박일리야와 (러시아인 부대장) 그리고리예프는 이 지방 러시아 수비대에 교섭하여 일부 군대에 3일간 식료를 단절하기도 하였다고 주장한다.
자유시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에게 식량, 무기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은 자유의 사정이 자신들이 듣고 있던 것과 다르게 전개되자 박일리야 등의 상해파외에도 치타 쪽에 보낸 대표와 (이르쿠츠크파 및 대한국민의회의)오하묵 등의 연락을 기다리면서도 기아의 곤란 등의 문제로 마자나바 등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러시아 대기근의 시기였고,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고 알려졌다.
현재 공개된 러시아 정부와 군관련 문서에 따르면, 당시 독립군 부대를 분산 배치하려는 박일리야와 그레고리예프의 주장이 맞다.


미투리, 홋바지를 입은 독립군이 무슨 수로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견디며, 러시아 정부·원동공화국 정부·군부에서 식량보급도 안해주는 데 자유시에만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시기 오하묵의 한인보병 자유대대와 이르쿠츠크파는 독립군의 기본적인 먹고 자고 싸우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해파나 상해임시정부가 러시아 측의 허가 없이 독립군 부대를 만주나 한국 북부지방으로 진출시켜 일제와 싸울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독립군 주둔지 문제
러시아 대기근 시기 자유시(스바보드니) 한곳에 장기간 주둔하는 것은 한곳의 농민에게 피해를 가중시키는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대대에서는 장교와 군인 일동이 반항하면서 “우리 군대 대대장과 군정위원장이 군대사건으로 인하여 치타에 갔으니 좌우간 회보를 접한 후에 이주하겠다” 하니 박일리야와 그리고리예프는 위협의 수단으로 자유대대의 기관포 2문, 마차와 대대본부 문부(文簿)를 압수하고 임시 대대장 서리 황하일 기타장교들을 포착(捕捉)하여감으로 이에서 군인들은 어찌할 수 없으므로 역시 명령대로 자유시를 떠나 크라스나야라바(자유시 동북쪽 도로상 거리 약 30킬로미터의 러시아인 항구마을)에 이주하게 된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에 따르면, 니항 다반 양군대가 자유대대를 포위하고 기관포를 사면에 걸고 무장해제를 강박하니 자유대대는 그와 같은 무리한 강박을 당하면서도 일시의 분개를 참는 것은 유혈의 충돌을 면키 위해서였고 별양(別樣)의 항거가 없이 무장해제를 당하니 니항군인 중 몇십명은 박일리야의 명령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유대대 무장해제만으로 만족치 못하여 내복과 신발을 강탈하며 또는 군인을 난타하여 불구자가 몇십명에 달하고 자유대대군인 전수(全數)를 처벌하기 위하여 지방수비대에 인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방 러시아인수비대와 오하묵 등이 조직한 한인 보병자유대대는 아는 사이였고, 부당한 처벌을 시행치 아니하고 중립적 태도를 지켰다고 한다.
그들은 박일리야의 편을 들지 않고 한인보병자유대대의 주둔지 이전에 간섭하지 않았고 자유대대 군인들을 체르니고프카(자유시 동북쪽 12킬로미터 거리의 러시아인 촌락)에 주둔시키고 이 러시아인수비대에서 임시로 지휘와 기타 공급을 (니항부대, 다반부대, 만주⦁간도지방 독립군 보다 우선하여)제공하였다.
한인보병 자유대대는 박일리야와 그리고리예프의 명령에 마지못해 따라야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사할린의용대에서 자유대대 비서장 류선장을 포착하여 포살하려는 중에 그때 홍진수, 최태열, 장기영 등이 과거 개인상 정분으로 인하여 극력 주도한 결과 미결에 있었다.
그러던 중 자유대대장 서리 황하일은 사할린의용대에 포착되어 간 후 박일리야에게 외면상 얼마간 긍종(肯從)하는 태도를 보임에서 그 군대에 잠시 연대장대리의 지위를 얻었던지라 이 기회를 타서 생명이 경각에 있었던 류선장을 풀어주었다가 이 사건으로써 황화일은 연대장의 면직은 물론이고 즉시 구금되였다가 방면되었다고 한다.


박일리야는 이 무렵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군권을 장악한 것이다.

1920. 4. 1. 일경 트리피츤과 중국인 항일 빨치산 부대, 고려인 니항 부대 (박일리야 부대) ​

 

오늘날의 크라스나야라바



1921년 3월 15일 전한의병대 의회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개최

극동공화국 서울 치타의 한인부 잔존 인원(상해파)과 사할린의용대의 주도로 1921년 3월 15일경부터 연해주와 서⦁북 간도에서 이동해 온 한인 군대 대표자들이 참석한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가 자유시 북동쪽에 있는 마자나바(마사노프)에서 개최되어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사할린특립의용대의 명칭은 1921년 1월에서~3월경(러시아측 기록으로는 1921년 1월 20일경 명령하였다) 당시 원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의 명령(제 37호 등)으로 허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병력수는 박일리야가 사실상 지휘하던 독립군 니항부대를 비롯하여, 홍범도, 안무 부대 등 당시 자유시 일대에 도착하였다가 마자나바로 이동한 독립군 약 1,770여명에서부터 ~ 1,900여명 이상이며 피난민이나 비무장 독립군은 제외한 수로 보입니다.

 

러시아측의 기록에 따르면

1921년 3월 15일 크라스나야라바 마을에서 달뷰라(Дальбюро) 주도로 제1차 한민족 파르티잔 대회가 열렸으며, 참석한 대표들은 왜적과 백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연설하였으며, 자유시 주변에 집결한 모든 독립군 부대를 단일 지휘하에 놓기로 하였다.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의 지도 기관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인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인지 코민테른 본부인지, 아니면 레닌 정부인지 극동공화국 정부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측 기록도 관련되는 부서간의 다툼이 있다보니 1921년 3월 15일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의 지도 기관이 틀리게 기재된 경우가 많습니다.)

1919년 1월부터 사작되었던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의 마자나바 학살의 현장에서 사할린특립의용대가 설립된다.


이르쿠츠크파의 반격 : 새로운 통합 임시정부, 새로운 최고 국가기관인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 시도

이르쿠츠크파는 1921년 1월경부터 3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지도하에 원동공화국 군부와 연합하여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나중에는 정식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전체 한인 의병대를 통합하려 하였다.

이로써 1921년 전반기에 전한군사위원회(상해파)와 고려혁명군정의회(이르쿠츠크파)라고 하는 두개의 한인 군사조직이 러시아령에 설립되었다.

또 1921년 5월 4일경 이르쿠츠크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설립되어 상해파 고려공산당과의 대립이 격화된다.

1921년 3월초 이르쿠츠크파가 조직하려던 고려혁명군의 구성

상해파에 대항하여 이르쿠츠크파가 조직한 고려혁명군은 다음과 같다고 알려져왔다.

고려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 회장 겸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사령관 서리 오하묵, 위원에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원동비서부 전권위원인 오홀라(오홀라 마르트 야코블레비치), 최고려, 류동열, 후보 위원 김하석, 서기 최성우, 정치부장 채동순, 사관학교장 이청천, 사관학교 군정위원장 최호림, 정치학교장 채그레고리, 참모장 유수현, 제1연대장 전희세, 제2연대장 최메포지, 제3연대장 황하일 등이었다.

(최호림은 이것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

※ 참고자료 :

자유시 참변 당시 직접 독립군을 공격하거나 지도한 러시아인 오홀라, 슈먀츠키, 셰르셰프, 최호림, 오하묵, 최고려, 이지택,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문건 작성자들의 주장은 오늘날 러시아 기록 및 일본 자료와 대조하여 검증한 바 허위로 작성하고, 한국 독립군을 살해하려고 무고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이를 인용하는 것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 초기 당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르쿠츠크파’라는 조직의 창설 내력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기에 인용합니다.

그리고, 과거 국내외 자료부족으로 한국에서 자주 인용되었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문건 작성자도 일제 밀정으로 변절했거나 나중에 일본에 협조헸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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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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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7.23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7.2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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