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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볼세비키의 영웅 까란다리시비리가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이 되는 이유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8.06|조회수228 목록 댓글 6

1921. 6. 27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볼셰비키의 영웅 : "까란다리시비리"

사할린의용대에게 "무적 황군을 싫어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이 있다면, 이르쿠츠크파에게는 "볼셰비키의 영웅 까란다리시비리" 가 있었다......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의 다툼에 휘말렸던 사람들....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년 사망)

(까란다리시비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1973년 구 소련 제작)

https://youtu.be/I_YP4wxH80A

까란다리시비리가 주인공인 영화 "시베리아의 할아버지"

무적 황군을 싫어한 파르티잔 대장 : 트리피츤 : https://youtu.be/lcZtp_wTBoE

 

1922년 까란다리시비리 의 장례식

까란다리시비리는 코카서스 지방의 그루지아(조지아)출신으로 러시아어로는 “까란다리시비리”라고 발음되나, 그루지아어 등으로는 다르게 발음되거나 다른 이름도 있었던 모양이다.

까란다리시비리는 소련시대인 1973년 영화(Каландаришвили. "Сибирский дед". Фильм 1973 г.)로도 만들어진 적 있었던 볼셰비키 혁명시기 빨치산의 영웅으로 옴스크에서 치타까지의 전선 일대에서 백파군을 격퇴한 용장이었다.

또한 까란다리시비리는 여태까지 한인의 어느 파에도 가담한 일이 없기 때문에 공정을 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모양이다.

                             이르쿠츠크파의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등장한 까란다리시비리의 총사령관 선정 이유

까란다리시비리를 총사령관으로 선정함은 몇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동양비서부의 정견과 같이 불편불의를 취함이니 이것은 이상 각 기관의 내막을 상찰(詳察)할지라도 상해정부에서나 대한국민의회에서 선정한 장교이면 하시 인물을 물론하고 현장에 있는 군대를 통솔키 난할 것이니 그럼으로 국외의 입장에서 다만 고려혁명의 진취를 목표하고 일반군인을 통일하려하는 것이며
둘째는 까란다리시비리는 원래 로시아 의회정부에 대공을 공헌한 의병대 수령으로 의병식전투에 경험이 풍부한 장관이니라.

다시 말하면 백전노장이라 과거 1920년도에 일본군대와 백파 셰묘노프군이 시비리(치타로부터 옴스크까지)를 점거한 것을 까란다리시비리가 의병대장으로 코카서스 기병 3천여명과 보병 수천명을 영솔하고 일제 침략군대와 셰묘노프군을 연해주로 격퇴하였으며 따라 일본군대의 전투적 방식을 당지로 분?철한 것이며
셋째는 원동정부 지대에서 군대를 출동 또는 주둔 등 제반 동정에 대하여 로시아 의회정부의 후원을 원만이 득할 것이니 즉 의회정부의 신임과 원동정부의 신임에 하시 군벌을 물론하고 감히 흔동치 못할 까란다리시비리의 굳은 지위를 겸하였으며

또는 자기가 맹언하기를 로시아의 무산혁명은 성공되였으니 이로부터는 동양혁명에 피를 흘릴터 임으로 우선 동양혁명에 도화선이 될 만한 고려혁명에 헌신하여 고려의병대와 흥망을 같이하려하고 자기가 다년 전선에서 친이 영솔하였던 코카서스기병 6백여명을 인솔하고 자원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원수(怨?)를 대항하려고 실성이 되도록 부르짖고 힘이 있는 데까지 뛰면서 세계를 둘러보자.
까란다리시비리와 같은 동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면황 내정외세가 이와 같이 급박한 처지와 소우(所遇)에 난회(難會)의 장관(長官)이 아닌가. 까란다리시비리가 총사령관에 선임된 것은 이상의 사유이니라.

(※일부 글자를 현재의 표기방법으로 수정하였습니다.)

부사령관 오하묵과 임시 참모부장(혹은 참모장) 유수연은 이르쿠츠크파인 자유시의 한인보병 자유대대 소속이며 (두 사람은 1921년 1월 18일경에 같이 극동정부 군부를 같이 방문한 적이 있다), 이르쿠츠크에 와서 새로운 군사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총사령관만 유명한 까란다리시비리를 데려다 놓았을 뿐이며, 나머지 간부들은 상해파나 만주·연해주·이르쿠츠크 합동민족군대 소속이 없었다.

심지어 간도 지방의 유명 독립운동 단체 소속 간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이르쿠츠파의 문건들의 작성자인 최호림, 최고려, 김낙현, 리지택, 기타 홍범도 등의 문서들을 읽을 때에는 항상 대립했던 상대방을 "무정부주의자, 학살범, 강도, 강간범, 종파주의, 민족주의자" 등으로 기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해파를 옹호한 김홍일 등의 문건을 읽을 때는 "독립운동도 한 적이 없는 친일파들에게 누명을 썼고, 000년에는 일본군 00과 싸우고, 000년에는 교도소에 갔다오고, 000년에는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했고... " 등등 나름 자신들이 일제와 항상 싸운 것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표현들에게도 과장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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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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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06 까란다리시비리..
    자유시 참변으로 본인의 경력에도 흠이 났지만,
    결국 대화를 통하지 않고 무력 기습공격을 결정한 것은,

    상대방을 제거하려는 한쪽의 의견만을 들은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만..
    대체로

    이 사람은, 한국계 독립군간의 다툼에 휘둘린 점이 매우 강합니다.
    얼굴마담으로 와서...본인도 불행해진 점이 있어요.
  • 답댓글 작성자서프라이징너글맨 | 작성시간 21.08.06 신룡기2 안타깝긴 하네요. 여담으로 이 사람이 조지아 출신이라는 게 흥미로운데 당시 결국 점령당한 자신의 조국의 처지를 한국에 대입해서 총사령관 자리를 수락한건지, 아니면 세계혁명적인 측면에서 수락한건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06 서프라이징너글맨 제가 추측하건데
    당시 1917년 10월 러시아공산혁명 이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레닌은 특이하게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진 외국의 몇 안되는 지도자중 한명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러시아나 코카서스 출신 혁명가들도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한 차원, 세계 공산혁명 이전에 동양의 한국혁명(공산화?)과 독립부터 해보자는 차원에서 까란다리시비리가 총사령관을 수락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 까란다리시비리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통역사들에게 너무 휘둘린 것 같습니다.

    조지아..출신 혁명가로는 스탈린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고, 당시 차르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조지아 농노 출신들의 저항감도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서프라이징너글맨 | 작성시간 21.08.06 신룡기2 아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당시 소비에트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이 있었다는 건 들어 본 적 있습니다!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8.06 까란다리시비리가 한인의 어느파에도 가담한 일이 없기 때문에 공정을 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모양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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