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16)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8.23|조회수428 목록 댓글 2
                         자유시 참변의 대략적인 발생 순서
1919. 3. 1. 일부터 3•1운동 발생
1919. 4. 월경부터 1차 세계대전 처리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하였으나 실패
1919. 9. 10. 일경 (확실하지 않은)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지원금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의 분쟁설이 있었다고 함. 러시아측 지원 자금을 둘러싸고는 수차례 다툼이 발생함
1919. 11월경 상해임시정부의 이동휘는 박진순을 모스크바 레닌정부에 파견하여 지원요청. 레닌정부는 금화 약 200만루블 정도와 독립군 부대 지원을 약속했다고 알려짐.
1920. 1월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포고 1호 발표하여 독립군 활동 지원 요청
1920. 2. 7. 일경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일본군이 철수 시작하고, 볼셰비키 군대(赤軍)에 의해 해방됨. 일본군은 3. 3. 일경 자유시에서 전원 철수함
1920. 2. 29. 사할린주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이 평화적으로 해방됨 (류소심, 박일리야 등 참가)
1920. 3월경 볼셰비키 정부가 이동휘와 상해임시정부 측에 자금지원(약 금화 40만루블 추정되며 무게와 환전 문제로 여러 차례 나누어 상해파 측으로 지원됨. 이동휘 등의 1921. 10. 16일자 보고서)
1920. 3. 12.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중립조약을 어긴 일본군이 기습 공격을 가함
1920. 4. 4.일경(혹은 4. 5. 일경)부터 일본군 연해주 한인 밀집지역을 공격, 4월참변 발생
1920. 4. 21.일경 일본군이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로프스크 항구 등을 다시 공격
1920. 4월경 상해파 이한영 등이 코민테른 자금 일부를 휴대하고 상해로 귀환(금화 100만루블은 잘못된 자료임)
1920. 5월경 만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0. 6. 7. 일경 (6. 4일경이라는 소리도 있다) 홍범도, 안무, 허영장 등 봉오동 전투
1920. 7. 9. 께르비에서 니항을 해방시켰던 빨치산 대장 트리피츤과 동료들 다수 학살당함. 박병길이 트리피츤 처형에 가담하였다가 자유시로 도피함.
1920. 7월 25일에서 7월 28일경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 박진순이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과 만남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1920. 9.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시키고 자유시의 보병 19연대에 편입시키기로 결정됨
1920. 10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의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일 수도 있다)에 한인부 조직 (오두제 :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 한인부는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혹은 극동공화국의 산하기관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0. 10월경 상해파(이동휘 등)가 극동공화국 한인부 등에 독립군의 자유시로의 이동 지원을 요청
1920. 10. 12. 일경 박일리야를 비롯한 한인 니항부대 (나중의 한인 사할린 의용대) 자유시 도착
1920. 10. 15. 일경 박일리야 원동공화국 한인부가 있는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로 출발
1920. 10. 21. 일경 홍범도, 김좌진, 안무 등 청산리 전투 시작
1920. 10. 22. 일경 자유시에서 제19연대(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친 부대)가 군율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2군단 및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이 철갑차와 보츠까레워 등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포위한 후 해산시켜, 다른 연대에 편입시킨다. 한인 니항부대(제19연대 제3대대, 박일리야 부대)는 오하묵의 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됨
1920. 9월~10월경 상해파 한형권 등이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러시아측에서 금화 40만 루블 정도를 수령함. 대한국민의회 등과 자금 분배를 둘러싼 갈등 고조되기 시작함. 나중에는 중국•조선내에서도 자금 분배를 둘러싼 문제 발생
1920. 11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 서울이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치타로 옮겨짐
1920. 11월경 연해주의 한인무장부대 자유시 집결 시작
1920년 말경에서 1921년초 원동공화국 정부에서 자유시 일대의 한인부대를 통솔키 위해 김민선을 한인 니항부대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나 한인 니항부대는 19연대가 해산될 때 자유대대에 편입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1920. 12월경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등은 연해주의 독립군을 자유시로 집결토록 하바로프스크의 2군단과 교섭한다.
1921. 1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서 이르쿠츠크에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를 설립하고 고려인 부대의 지도 권한을 코민테른 본부 등에서 동양비서부로 이관함(동양비서부는 1920년 9월경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이라고도 한다)내에 있었던 한인부가 해체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원동비서부)로 고려인 부대 지도권한이 이전되기 시작됨. (한인부는 해체 이후에도 일부 인물들이 수개월간 유지됨)
1921. 1월경 상해파가 재러군사위원회 조직, 상해임시정부측 이용이 경고문 발표
1921. 1월경 이용, 채영 등은 전한의병대의회 소집위원회 결성,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
1921. 1월경 (만주 밀산에서)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시로 집결 시작
1921. 1. 18. 일경 보병자유대대장 오하묵은 트리피친 부대였던 제19연대 해산 및 고려인 부대 등의 문제를 보고하라는 극동공화국 군부 명령에 따라 치타 등으로 보고차 이동
1921. 1. 20. 일경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는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여 체르니고프카(과거에는 『체르니곱스코예』라고도 불렀다.), 크라스나야라바, 마자나바로 이동해 주둔할 것을 명령함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와 협의 없이 총사령관에 박창은, 참모장에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 임명)
1921. 1. 28. 일경(혹은2월경) 니항에서 자유시로 온 박병길이 독립군에 의해 죽음(처단설도 있다. 박병길의 자세한 과거는 알 수 없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자유시로 온 것으로 보임. 일제의 밀정 여부는 확인되지 않음).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도 트리피츤 지지세력으로부터 3차례 살해공격을 받았으나 도주하여 일본군 편으로 넘어감
1921. 2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 슈먀츠키가 취임
1921. 2월초 안무 부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도착
1921. 2월 중순경 (상해파) 박창은, 그리고리예프 자유시 도착
1921. 2월경 박창은 사면으로 한인부에서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군정위원장에 박일리야를 임명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음(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리야,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자유시 도착.
만주지방 및 연해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혁명군(대한독립군) 조직됨
1921. 4월경에서 5월경 중국 북경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측에서 독립군부대 통합을 위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1921. 4월경 극동공화국 군부에서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 등을 이르쿠츠크로 압송
1921. 4. 14. 일경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 군부에 임시고려군정의회 조직을 통보 (상해파인 계봉우, 박애, 김진,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과 협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1. 5. 2. 일경 이르쿠츠크파가 비밀리에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오하묵 일행 자유시 도착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 임명
1921. 5. 12. 일경 예전 오하묵의 보병 자유대대가 크라스나야라바로부터 원래 주둔지 자유시로 이동
1921. 5. 13. 일경 이르쿠츠크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가 자유시로 이동시작(5월 28일경까지 최종 600여명 이동)
1921. 5. 18. 일경 치타에서 사할린부대로 가던 동림 체포.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측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무력화 시도.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의 지원금인 금은화 약 3만루블 이상이 러시아 관청에 압수됨
1921. 5. 19 일경 까란다리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이르쿠츠크에서 자유시로 출발(독립신문 1922. 2. 27 일자)
1921. 6. 2. 일경 홍범도 부대 일부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탈
1921. 6. 2. 일경 김홍일 단독으로 자유시 도착
1921. 6. 6. 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등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Казаки) 기병 600여명에서 900여명을 인솔해 자유시 도착. 정식 총사령관 선포 (대한혁명군측은 무장해제 명령에 대체적으로 불복)
1921. 6. 6. 일경 까란다리시비리와 통역사 최고려 등은 자유시 주둔 군인 전부를 모아서 설명
1921. 6. 9. 일경 안무 부대 마자나바 이탈후 자유시 도착. 일부 독립군의 주장에 따르면 안무 장군은 홍범도가 떠나자 수차례 자체 회의를 통해 일단 자유시쪽으로 이동하여 내분과 식량난 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함. 안무 장군의 이탈로 사할린 의용대도 통합에 대한 압박이 가중됨
1921. 6. 14. 사할린부대 자유시 도착후 수라제프카로 이동. 사실상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 자유시가 한국 독립군들로 뒤덮임.
1921. 6. 15. 까란다리시비리, 오홀라 및 3명 블라가베셴스크를 방문하여 체포되었던 김규면, 한운용, 박원섭, 마시욱, 주영섭, 안태국, 임상춘 등을 조사하고, 금은화 3만루블 이상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까란다리시비리 등은 6월 18일 자유시로 돌아옴
1921. 6. 19일경 자유시에서 장교회의 개최(분대장 이상 간부) (※이 무렵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와 공격을 반대한 합동민족군대 소속 고려인 간부 투옥)
1921. 6. 20일경에도 군회가 있었다.(※독립신문 1922. 2. 27 일자에 따르면 1921. 6. 20.일경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1921. 6. 21. 그리고리예프, 박일리야 등 장교 7인이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를 축출하면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겠다는 혈서 제출
1921. 6. 22. 일경(※1921. 6. 20일날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까란다리시비리, 최고려 등이 독립군 3천여명을 자유시에 집합시켜 전군의 통합을 촉구.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6쪽에 따르면 최고려가 고려혁명 분열을 막기 위해 분란을 일으킨 자신이 독립군이 쏜 3천발의 총알을 맞고 죽겠다고 하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은 최고려나 까란다리시비리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고, 당시 연설을 하여 화합을 유도한 사람은 홍범도 장군 등이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과거 의병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라는 연설을 하여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 모인 독립군들에게 울음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홍범도가 이순신, 사명당,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박제상 등의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안하고 왜 갑자기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 6. 24. 일경 독립군 부대 편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발생
1921. 6. 25. 까란다리시비리, 류동열 등 수라제프카에서 사할린부대 장교회의 개최
1921. 6. 27. 수라제프카에 주둔중이던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 사면서 제출. 27일 자정이후부터 공격 개시
1921. 6. 28. 상오 한밤중부터 시작된 기습으로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자유시 사건 발생. (사망 수백여명, 포로 등 천여명 이상)
1921년 후반기부터 포로로 잡힌 독립군 다수가 이르크추크 등지로 압송중 사망, 일부는 만주⦁연해주 일대로 탈출, 이동휘⦁만주지방독립군 단체⦁상해임시정부 등의 항의로 결국에는 포로생활을 하던 독립군 대부분 석방됨
1921. 10. 16일경 상해파 측이 러시아 지원 자금의 사용처 등을 보고
1921. 11. 28일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
1921. 11. 월경부터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
1921. 12.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
1921. 12. 18. 일경(혹은 12월 20일경)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 형식적인 퇴진 발표
1922. 1월경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음
1922. 4. 22. 일경 코민테른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이르쿠츠크 대회에서 제명된 모든 당원 복권,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 퇴진, 두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휴식기간 결정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을 획득하고 일본군 철수

(오탈자 수정중입니다)

슈먀츠키(슈먀츠키 바리스 자하라비치(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1886년 11월경 출생 ~ 1938년 7월 29일경 처형되었으며 1956년 2월 22일경 구소련에서 복권됨)는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1921. 6. 28. 일경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참변 무렵의 슈먀츠키의 직책은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지도를 담당하였던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혹은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간부, 극동공화국 5군단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러시아 외무 인민위원회 시베리아국 위원, (러시아 공산당의 허수아비 국가였던)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 등을 지내는 바람에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달뷰라(혹은 달비로, 달이비로, 달비료), 달뷰라 산하 한인부, 극동공화국, 극동공화국 군부,극동공화국 5군단, 코민테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이르쿠츠크 파간의 관계를 해석하게 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부랴트, 시베리아, 몽골 공화국 등지에 활동
소련 영화산업의 최고위급 간부
이란(페르시아) 등의 공산주의 운동에도 관여함
1921. 6. 28. 자유시참변 당시 한국계 독립군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슈먀츠키
자유시 사건 당시 사살 명령에 관계된 슈먀츠키
지금은 없어진 소련이라는 나라의  예술, 영화산업의 최고위급 간부

그는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최고 권력자에 근접해 있어, 러시아 권력 투쟁에도 관계된 인물이었으며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사파라프, 몰로토프 등과 더불어 1921. 6.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러시아계 인물이므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자료는 단순 참고용으로 작성되었으며, 역사적 사실이나 학자들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슈먀츠키의 경력 ※※※※

1886년 오늘날의 시베리아 지방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과거 명칭 :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가난한 집 자식으로 출생

1896년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사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 단체에 가입

1906년경 차르 러시아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후 탈출

1906년경 시베리아 울란우데 공산주의 단체 간부, 신문 등 발행

1907년경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거주

1912년 아르헨티나 망명

1917년 2월혁명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 회원

1917년 8월경 상트 페쩨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17년 10월경 시베리아 및 몽골 담당 대표로 파견됨, 이르쿠츠크에서 백파계 반란 진압

1919년 8월부터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극 위원

1920년 6월부터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혹은 달비료, 달이비로) 의장 및 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

1920년 7월부터 (러시아 공산당의 허수아비 국가인) 극동 공화국 장관 회의 의장, 10월부터 시베리아 혁명위원회 부의장

1920년 12월부터 예니세이 지방 집행 위원회 의장

 

1921년 2월부터 극동 외교 인민위원회의 승인 등을 받은 이르쿠츠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일시적으로 러시아령내 한국계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일명 코민테른 원동서기국 국장)

1921-1922년에 (극동공화국내) 제5군단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1921. 6. 28. 자유시 참변 당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자유시 참변의 러시아측 최고 책임자로 지목됨.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자유시 참변 때문에 1년정도만에 폐지됨. 자유시 참변의 러시아측 최고 책임자로 지목됨

 

1922년 1월부터 1925년 1월까지. 페르시아(이란) 주재 전권대사 및 무역대표

1926년 말부터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

1928년 말부터 볼셰비키 전 연합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아시아국 선동선전부장

1929년 3월부터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30년 11월 21일 영화촬영 국가위원회 의장

1933년부터 영화 및 사진 산업의 본부장

1936년부터 소련 예술 업무 위원회 부위원장

1938년 1월 17-18일 밤. 반혁명 테러 조직 구성 및 간첩 혐의로 체포됨

1938년 7월 29일경 총살당함

1956년 2월 22일경 복권

※※※※ 슈먀츠키의 경력 끝 ※※※※

 

슈먀츠키는 1921년 6월 28일 전후에 아시아 공산혁명을 선도하기 위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장으로, 중국, 몽골,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페르시아, 일본 등의 공산주의 전파 및 확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슈먀츠키는 단순히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령을 수행한 것으로만 볼 수 없으며, 러시아 공산당내의 최고 권력층과도 관련된 상당한 지도권을 가진 자였으며, 자유시 참변이후에 책임자로 지목되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와 상해파, 만주지방 독립운동단체 등의 항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슈먀츠키는 1921년 한국계 독립군 부대들을 지도하며,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이르쿠츠파 계열을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바 있었으며, 1917년 러시아내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러시아 내전이 발생하자 중국, 인도, 페르시아, 일본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도함에 있어서도

비타협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들과 민주적 절차 등을 무시하고 신상필벌에 소홀했다고 비난받기도 하였습니다.

1917년경 시베리아 지역은 원래 러시아 서부에서 농노에서 해방되어 온 사람들이 대다수 거주하였습니다.

또 시베리아 주민들중 다수는 러시아내의 귀족과 부르조아 계층, 러시아계 친일파 등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며, 고려인 중국인 시베리아 민족 등 여러 민족들에 대한 차별대우로 인한 반감, 러시아계 민족들의 높은 문맹률, 식량난 등으로 볼셰비키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는 아시아 각국들의 공산주의 혁명을 인도하는 요직에 앉아 볼셰비키 내부에서 벌어진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사파라프, 몰로토프 등의 권력 다툼에까지 관계하여,

자신이 책임졌던 아시아 중국, 몽골, 베트남, 라오스 등의 공산혁명 성공에도 일부는 기여하였으나,

아시아권 공산주의 계열의 종파간 투쟁 발생, 폭력행위 만연, 권력투쟁 조장에 관계되어 중국, 한국, 이란,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인도 등지에서 불필요한 민간인 희생이 있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1921. 6. 28. 자유시 참변이 바로 슈먀츠키 등의 지도하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전해져 오지만, 오늘날 공개된 관련 러시아측의 책만 수백여권이며
2010년 이전 한국계 자유시 참변을 다룬 러시아 책이 없다는 것은 옛말이며, 수십여권이 다루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제 이르쿠츠파, 상해파, 화요파, 주사파, 연안파, ML파, 서울파, 민족주의, 조선의용대, 광복군, 팔로군, 동북항일련군 등의 한쪽말만을 듣고,
사실에 허구를 보태기 보다는

...사실만을 탐구해 볼 시기인 것 같습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약한 사람들중에서 자살까지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존J스테판,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 구트만과 몇명이 주장하는 대로 "한국계 악마"의 단순한 소동 혹은 폭동이었는지, 아니면 "일방적인 학살극" 이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고,
돌이켜 볼 필요가 있으며, 항상 열린 자세로 사실을 찾아볼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수백에서 수천권에 달하는 시베리아 지역 러시아내전의 역사책중 한두권만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최근 국내에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사실인 것처럼 종종 인용하는 친일파 구트만의 니항사건 관련 책 104쪽, 트리피츤 부대가 1920년 5월경 감옥에 한꺼번에 1500명 수감, 며칠동안 3000명 학살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버스만한 감옥에 1500명을 넣으면 총살되기 전에 전원 압착사를 했을 것이다..

 

출처 : https://ru.wikipedia.org/wiki/%D0%A8%D1%83%D0%BC%D1%8F%D1%86%D0%BA%D0%B8%D0%B9,_%D0%91%D0%BE%D1%80%D0%B8%D1%81_%D0%97%D0%B0%D1%85%D0%B0%D1%80%D0%BE%D0%B2%D0%B8%D1%87

 

참고인물

박바리스 : 고려인 역사학자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Пак, 1931년 1월 4일 소련 블라디보스토크 출생. 2010년 12월 24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작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8.23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8.24 감사합니다 ^^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