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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1921년 자유시참변과 관련된 니항사건(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의 세계적인 연구동향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9.06|조회수1,384 목록 댓글 11

※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 니콜라옙스크 사건 = 니항사건) 관련자료

요약편 : 1920년 러시아 내전기 일제 침략군이 전멸한 니항 사건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개요

장편)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니항사건 :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통합본 1)

장편)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니항사건 :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 (통합본 2)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1

시베리아의 가라유키상 상인 시마다 모토타로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2

사할린섬 조선인 여자 매매의 악행 (동아일보1924.09.02.자 2면)

 

요점

근래 러시아에서 1990년대 이전 냉전시대, 공산주의 시대 미공개되었던 자료를 중심으로 니항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을 활발하게 연구하여, 기존의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들을 정리하고 있다.

니항사건의 핵심 인물인 트리피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책과 연구자료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자주 참고한다.

 

 

1. 러시아측 연구동향

러시아의 연구가 상당히 진행됨에 따라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트리피츤(일본에서는 주로 "트랴피친"이라고 발음)에 대한 평가가 좋아지고 있는 편이다.

최근의 연구동향에 따르면, 트리피츤을 살해한 안드레예브와 러시아계 친일파 등의 행적이 밝혀지고 있으며,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잘못 알려지거나 일본에서 과장된 부분이 수정되고 있다.

2. 일본의 연구동향

일본의 연구 동향은 과거에는 1920년 3월에서~ 5월경 730여명 일본인 대학살, 러시아 민간인 4천명 이상에서 ~ 3만5천여명 학살이 니항사건의 본질이며, 일본의 시베리아 출정을 정당화 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최근에는 러시아측 기록들을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에서 한국측의 자료를 참고하는 것을 보면 1970년대 이지택, 김창순이 써 놓은 글을 참고하는 편이다.

아직도 이지택과 구트만(러시아계로 일본에서 저술활동)의 주장인 "트리피츤 부대에 의한 러시아 민간인 대학살설과 참다못한 일본군의 봉기, 한국계 박병길과 리지택에 의한 니항 평화" 등의 잘못된 자료가 많다.

대략, 일본의 주장은

니항사건은 러시아계 파르티잔과 중국계 반일 불량배, 같은 연합국이었고 시베리아 간섭의 동료였던 중화민국 강방함대가 합세해 일으킨 사건이었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으나

근래 한국에서 한국계 니항부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함에 따라, 한국측 자료를 일부 인용하여

박일리야의 부대는 조선인 부대중 제1중대였으며, 약 300~ 900명 정도였고, 약탈과 학살을 했다.

박병길과 리지택의 부대는 조선인 부대중 제2중대였으며 약 100명이었고 규율이 있고, 원만하며 약탈 살인을 안했다는 주장이다.

(이 무렵 니항에 있었던 일본군 유곽의 조선인 여성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든다. 지나사변이나 태평양전쟁 조선인 위안부도 기록이 부족한 형편인데 시베리아 출정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의 자료는 더 없다.)

그러나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니항사건 당시 박병길과 이지택(리지택)의 역할은 기록조차 없을 정도로 미미했으며, 고려인 부대는 1920. 2. 29. 일경 니항 해방시 애국지사 류소심과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약 100~200명 정도가 트리피츤 부대에 있었으며,

1920. 2. 29. 일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의 평화적 해방이후 조선인들이 다수 가담하여 약 400명 가까운 인원에 이르게 된다.

박병길과 이지택도 이무렵에서야 가담한 것이다.

1920. 6월초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1920. 7월경 께르비로 대피하여 안드레예브, 비첸카,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등의 공격에 트리피츤이 살해되자 조선인 부대도 역시 와해되기 시작하여, 자신의 고향 등지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으며

1920. 9. 5. 일경 트리피츤 부대가 해산되어 아무르주 자유시의 보병 제19연대에 편입되기로 결정되자

1920년 10월경 자유시에 도착한 니항출신 조선인(고려인) 니항부대는 400여명 정도로 줄어들었으며, 고려인(조선인) 민간인들도 다수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따라온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자유시에서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의 일부로 편성되었던 조선인 니항부대는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볼셰비키 군대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되며

박병길, 리지택 등의 소수인원과 박일리야 부대로 알려진 사할린의용대 간의 다툼이 심화된다.

1960~1970년대 남한에 온 이지택의 주장을 화요파 공산당에서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니항사건과 자유시참변에 관해 증언을 하는 사람이 작다보니 이지택의 주장만이 사실인 것처럼, 남한에 잘못 알려졌고, 이것이 일본 학자들에게 까지 알려진 것이다.

일본의 연구는 한국보다는 훨씬 활발하다.

3. 한국의 연구동향

한국의 연구동향을 살펴보면, 학문적 연구라고 불릴만한 정리가 없어 보인다.

1960~1970년대 1920년 니항에 있었던 이지택의 진술과 유명한 반공학자 김창순의 이론 등으로 주로 정리되어 왔으나, 현재 과거 신문보도와 러시아 측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수정을 가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러시아, 일본측과는 달리 한두명만이 간단하게 다룬다.

최근 미국의 반볼셰키 학자였던 존 J스테판 이론을 일부 인용하지만 스테판 역시 냉전시대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활동을 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1990년대부터 재러학자였던 이인섭 등의 자료 등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큰 관심도 없었고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느 자료를 참고했느냐에 따라 평가가 바뀌는 등,

러시아, 일본, 미국 등과는 달리 아직도 1970년대의 잘못된 내용이 사실인양 인용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해관계에 따라 위변조 서류까지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 목적에 따라 짜깁기 하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잘못된 자료가 있다.

 

 

4. 중화인민공화국의 연구동향

몇줄의 설명외에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청나라 영토였던 사할린섬과 아무르강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다.

1920년초 니항에 머무르든 5척의 중화민국 군함과 2,000여명의 중국인, 중국영사관의 역할에 대해 특별히 기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1920년도 한국신문에는 중화민국(당시 일본과는 시베리아 출정을 함께한 연합군) 강방함대가 일본군에게 함포사격을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 유명한 박일리야는 일본 영사관에 도착해 보니, 어린이는 이미 집단 자살과 방화로 이미 죽은 뒤였다고 주장하였다.

니항 일본 영사관터

조선 평양에서도 성매매업을 했던 시마다모토타로의  상회와 원안의 일본군 병영건물

니항을 점령하고 행군하는 일본군

니항의 일본군

영구점령과 괴뢰국가 건국을 위해 건립한 일본군 병영 건물

(니항에 있었던 일본군 유곽건물의 사진은 아직 인터넷에 보이지 않아. 유사한 1930~1940년대 육군여자정신대와 위안소 사진으로 대체함)

 

 

(*수정중입니다.)

니항사건 관련 주요 인물

구트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영문명 Gutman, Anatoly Yakovlevich, 필명 Gan, A. (Anatoly) 등을 사용함, 1889년경 출생~1950년경 사망) : 1918년경 러시아 내전기 백파로 활동하였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악명 높은 러시아계 친일파 셰묘노프 등과 협력하였다. 일본으로 도피후 니항사건과 관련된 책을 일본에서 출판(영문도서명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하고 반볼셰비키 신문을 도쿄에서 발행했다. 구트만의 책은 오늘날 니항에 있던 한국인 000과 더불어 일본과 미국, 러시아에서 자주 재출판되고 인용된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에서는 일본 천황에게 볼셰비키를 타도해 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한 러시아계 친일파 102명에 대한 주장이나, 1920년 5월 22일에서 24일까지 3일간 니항 감옥에 한꺼번에 1,500여명이 수용되었으며 감옥에서만 3,000여명이 학살당하고, 결국 1만여명의 니항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구트만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거의 하지 않는다.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니 반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 활동한 적이 있는 유명한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등이 구트만의 주장을 사실로 최근에 인용하였다.

구트만은 한국계인 박병길과 이지택 등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친일파라는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이 일부 맞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니항사건(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にこうじけん)

레비제바(혹은 키야슈카) 니나 미하일로브나(Лебедева (혹은 Кияшко)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1895 ~ 1920. 7. 9.) 1895년경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펜자지방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소리도 있다. 1914년경부터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활동을 하였다. 동시베리아 치타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소리가 있다.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나스타시요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의 비서였다.

레비제바는 키야슈카(Кияшко)라는 성을 쓰기도 하였는데, 백파와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은 키야슈카 주지사의 친척 혹은 양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가족관계 문서에 따르면 키야슈카 주지사와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니항사건 기간중 트리피츤과 동거하였다.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트리피츤의 부인 『레베데바』라고 나오며 최호림, 이지택은 일본의 주장과 일치되게 총독(주지사)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최호림과 이지택의 1945년 해방이후 니항 사건과 관련된 주장들은 일제침략기 일제의 주장과 일치되는 점이 많고, 오늘날 러시아 기록과는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레비제바의 가족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나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총독의 딸이라는 것은 일제의 조작극일 가능성이 크다

미즌(Мизин Григорий Семёнович) : 1919년경부터 사할린주 니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 1920. 5. 24.일경 트리피츤의 지시에 의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총살되었다.

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 : 께르비 인근 광산에서 백파군대에 있다가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 방화에 참가하였다. 께르비에서 103명 법원의 부의장으로 트리피츤을 처형후 일본측으로 도피함. 1921년 6월 6일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다. 2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구트만의 책에 중요 증인으로 등장한다.

박병길(朴秉吉, 박바실리, Пак Василий, ワシリー朴. 1921. 1. 28. 일경 사망) 1918년경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기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의 한인회 서기였다. 이지택, 최호림, 김창순,000 등의 대략적인 주장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인 니항부대 380여명을 조직한 사람으로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는데 가담하였으며, 성품이 원만하고 살인과 약탈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일리야와 니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다수 기록에는 과거를 알 수 없는 부랑인으로 일본인 상점에서 일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일본인 및 친일파들과 결탁하였다가 1920. 2. 29.일경 트리피츤의 니항해방 이후 파르티잔에 의해 일제에 협력한 죄목으로 처형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조선인 부대장 박일리야의 비호로 처형을 모면하였다.

박병길은 박일리야의 사촌여동생의 약혼자였다는 소리도 있다. 박병길은 니항해방 이후에서야 조선인부대에 가담하였다.

1920. 7월경 께르비로 대피하여, 친일파 안드레예브, 조선인 김낙현 등과 트리피츤 등을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 일본군의 방조아래 기습공격해 결국 살해하였다.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니항부대원들의 반발 때문에 아무르주 자유시로 도피하여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호림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가담하였으나, 여기서도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하는데 관여하였고 결국 조선인 사할린부대원들에 의해 1921. 1. 28.일경 살해되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 되는 중요 인물이며, 1920년 니항사건 당시 김홍일, 이범석, 리인섭, 박일리야, 이용 등과 사할린부대원들의 평가와 오늘날 남한의 000 등의 이론이 정반대 의견으로 대립된다.

박일리야(박윤천, 朴允天,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 니항부대를 조직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비첸카(Биценко (Орлянковский)) : 니항 인근 백파군대에 있다가 트리피츤 부대에 항복하였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께르비로 대피하면서 볼셰비키인척하고 사람들을 살해함. 1920년 6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됨

부진-비치(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1887년경 출생 ~1938년경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 1957년 구소련에서 복권됨) : 1908년경 이르쿠츠크 사범학교 졸업,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교사 생활. 1차 세계대전에 차르군대 장교로 출전. 러시아 내전기 니항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3월 12일경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트리피츤이 부상당한 후 함께 사진 촬영한 사람이다.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로 께르비에서 처형되지 않고 생존하여 니항사건에 관한 회고록을 남김.

사소프(34세쯤에 사망. 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던 부대의 부대장(1920 г. - командир корейского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부지휘관은 박일리야 및 류소심), 니항의 징발위원회 위원장. 1920년 5월경 사할린주 바가로드스크 지역 지휘관(командовал Богородским фронтом). 1920년 7월 9일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됨

시마다(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를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끈 사람이다.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이 일본으로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니항의 조선인회 서기였던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 안드레예브가 주장하기를 제정러시아 시대 니항인근 치니르라흐 요새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 결과 장교도 아니었다고 한다.

1920년경 볼세비키에 가담하여 트리피츤 부대에서 간부가 된다. 1920년 7월경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대피해 께르비 인근에 머무르던 중 일본군의 방조 아래 바라비요프, 압치니코프, 000 등과 께르비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공격해 체포후 살해하였다.

이후 트리피츤 부대가 해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여 경찰서장을 했다고 안드레예브의 가족이 주장하나 오늘날 러시아측 학자들 연구결과 거짓말이라고 한다.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자유시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시 일대에서 트리피츤 지지자들로부터 3차례 정도의 살해공격을 받았으며. 일제측으로 도피하였다가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직계후손들은 현재 미국에서 구트만과 같은 각종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최호림은 일제 앞잡이 안드레예브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트리피츤이 니항에서 포병대장으로 5년~6년간 근무했다고 거짓말했으나 이것은 남한에서 과거 인정조차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남한의 000 교수 등이 논문에서 인용한다.

(참고자료 : 윤상원 교수의 고려대학교 2010년 박사학위논문(논문명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115쪽과 118쪽 및 2001년 석사학위논문(논문명: 自由市事變 前後 朝鮮人 武裝部隊 統合運動) 7쪽, 24쪽 살펴보면 이지택과 최호림의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고명수, 임호, 류소심, 엄지영에 의한 니항해방설’을 비롯한 허위 주장을 전부 인정한 것외에도, 니콜라옙스크 시의 공식 홈페이지를 인용하여 남한의 경기도보다 훨씬 넓은 니항의 1917년 인구는 1만 5천여명이었는데 니항사건 이후 니항에는 잔류 인원 2천여명만 남게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트리피츤과 함께 상류 마가촌과 께르비 등지로 대피하지 않고 백파와 일본군에게 투항한 니항 인구가 2천명 정도가 되면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사건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1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오늘날의 러시아 역사학계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호림•이지택이 주장하는 트리피츤이 니항 포병대장을 했다는 설 등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거짓말이다.)

압치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 께르비(Керби)에서 트피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간부. 일제측으로 도피후 1935년경 미국에서 니항사건 관련 도서 출판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1894년경 출생) 1918년경 아무르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20년경 니항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볼셰비키 활동. 니항에서 체포되었으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조선인들과 이동중 탈출. 1923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복권되어 공산당 활동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중국 운남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경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에 가담하였다. 1971년 자서전 『우등불』을 출판하였다.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 참가 사실은 일제 강점기 중국계 반일투사들에게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남한에 와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초대 국무총리 등의 고위직 관리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러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 등에 관한 이범석의 주장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져 신뢰성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만주에서는 중국의 000과 관련된 적이 있음을 사실대로 진술하였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일부 한국계가 만주의 친일파들과 결탁하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령과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주장을 검증함에 있어서, 과장된 허위주장들을 교차검증해 볼 수 있는 기록중 하나이다.

이범석은 주목받고 있는 000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 연구에 있어서는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 최고려 등의 주장 등에 비해서는 사실대로 쓴 부분도 많이 확인된다.

이지택(李智澤, 1899~1976) : 독립유공자. 이르쿠츠크파. 남한에 온 후 1947년경부터 1920년도에 동아일보 등에 1면 톱뉴스로 수백차례 이미 보도되었던 니항 사건에 대한 다른 주장을 하였다. 다른 화요파 공산당 관계자들과는 다르게 ‘삼천리’, ‘신동아’ 등의 잡지에 대립하였던 박일리야 부대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설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베리아 출병사를 다룸에 있어서 니항조선인회서기(韓人会書記) 박병길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가담한 것 외에 러시아 기록 등과 대조하면 확인되지 않는 주장을 많이 하였다.

화요파 공산당내에서도 이지택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최근 남한의 박경리, 김창순, 000 등은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20년도 한국의 신문은 니항사건에 관해 이지택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을 제1면 특별보도로 수십차례 이상 보도하였다.

이오키료조(五百木良三. 일본의 유명한 시인) : 침략주의 이론가로 러일전쟁 개전, 히비야방화사건, 한일합방 여론 조성, 장작림폭살에 관여하였다. 1920년경 니항사건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리흥진(ЛИ ХУН ЧИН, 혹은 리흥징, 리흔진) : 1920. 3. 12. 일경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한국계 독립군들과 전사

하나테루유키(原暉之, 원휘지) : 일본인으로 『尼港事件 の諸問題』 등을 저술함. 니항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박병길과 이지택을 언급하였고 일본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됨

최호림(1896~1960, Цой Хорим) : 러시아에서 자유시 참변에 관계하였고, 이르쿠츠크파에게 일방적인 기록을 남겼다. 최호림 본인은 자유시 참변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나 일본군과의 교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대립하였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기록들이나 러시아의 트리피츤 기록에는 대립하였던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강도, 강간범, 아편중독자, 학살자’ 등으로 참무하고 살해한 ‘독립운동도 한 적이 없는 친일파’라고도 한 때 불려졌다.

최근 공개된 기록물에서 최호림은 1920년 니항사건을 주도한 트리피츤을 니항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수년간 지낸 인물로 묘사하여, 이지택,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사실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그런 허위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거센 반발에 결국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소련시대 결국 최고려 등과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와 오호츠크해 지역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은 1920. 2. 29.일경 니항을 해방시켰고, 약2주 후인 1920. 3. 12. 일경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니항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수천여명 빨치산 대장이었고 오호츠크해 방면 파르티잔 사령관이었던 트리피츤은 2주정도의 기간안에 000 등이 주장하듯이 당시 러시아말도 모르던 조선인 000과는 알고지낼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20. 7.월경 대피한 께르비에서 일제의 방조아래 안드레예브, 000 등의 기습공격을 받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체포되어 부인 및 파르티잔 동료들과 함께 7월 9일경 처형되었다.

트리피츤과 동료들, 검은색 장식을 가슴에 단 사람들은 아나키스트이다.

五百木良三(이오키 료조), 『尼港問題を通して:所謂時代精神の暴露』, 순로구락부(純勞俱樂部), 1920(대정9년)

 

니항사건(니콜라예프스크 사건) 관련 참고문헌과 간단한 해설

(1) 일제 참모본부 편(参謀本部 編), 「시베리아 출병사(西伯利出兵史 : 大正七年乃至十一年)」, (大正13年印刷の複製 限定版) 新時代社, 1972

(2) 일본육군 장령 출신 菅原佐賀衛, 「시베리아출병요사(西伯利出兵要史)」, 偕行社, 1925

(3)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시마다모토타로(島田元太郎 :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니항사변 회고 자료(尼港在住の実業家で日本軍への協力者). 니항사건 이후 순난자비 건립 및 가라유키상 유곽 운영

(4) 니항사건에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이시다 토라마츠 영사대리 부영사 石田虎松(Исида Торамац) <尼港事件のときの尼港副領事>관련 기사

(5) Hosoya Chihiro(1920년생~2011년 사망), “ORIGIN OF THE SIBERIAN INTERVENTION, 1917—1918.” / The Annals of the Hitotsubashi Academy, vol. 9, no. 1, 1958, pp. 91–108. // JSTOR. (дата обращения 21.03.21)

(6)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만주의 친일파 ‘시묘노프’의 활약상을 기술한 Борисов Б.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атаман Г. М. Семенов и его борьба за освобождение России от большевиков. — Вена, 1921. 62쪽.

(7) (친일파) A.Y.구트만(혹은 ‘굿맨’ : ГУТМАН А. Я.), 「니콜라예프스크의 죽음(ГИБЕЛЬ НИКОЛАЕВСКА НА АМУРЕ, 영문도서명은 ‘니콜라예프스크의 파괴’)」

(Английский перевод: Gutman, Anatoly. Ella Lury Wiswell (trans.); Richard A. Pierce (ed.)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 Limestone Press, 1993. — ISBN 0-919642-35-7.)​ : 한국 독립군이 약 1~2명의 민간인을 처형했다고 주장함.

(8) 에치(В. Эч), <사라진 도시(Исчезнувший город)>, 블라디보스토크, 1920. 70쪽. 일본군 점령지를 방문해 볼셰비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

(9) 이르쿠츠크파 문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1922년경,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발행,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2, 1980) 및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항일운동자료 일본외무성기록, 在露 反日鮮人團體 機密文書 送付에 관한 件)

(10) (친일파) 예밀야노프(К. А. Емельянов), <지옥의 사람들> (A.Y.구트만과 라비치의 백파군대 소설에도 자주 등장함)

(11) (만주의 친일파, 미국 이주) 라비치(Яков Львович Лович), <적(Враги) : 소설 이름임​>, 가공의 인물을 통해 만주·연해주·사할린주에서의 백파군대와 일본군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볼셰비키의 만행을 폭로

(12)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 일본군 북사할린섬 점령선언을 1920년 7월로 기재. 북사할린섬 공격은 1920년 4월부터 시작되었고 파르티잔 토벌후 1920년 7월 점령을 선언한 것임. 점령선언과 공격은 다른 것임)

(13) 김홍일,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니항사건을 일제의 터무니 없는 생떼라고 주장)

(14) 아무르 주(州) 마자나바 군(郡), 고쉬 전투(Гошский бой) 관련 자료

(15)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아메리카의 시베리아에서의 모험 1918-1920(America’s Siberian Adventure 1918-1920)」 (일제의 시베리아에서의 만행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진술)

(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7, [니콜라예프스크에서의 朝鮮獨立示威行列 請願 拒否의 건], (在ニコラエウスク領事代理 副領事 石田虎松), 1919년 04월 03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6_1640

(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國民의 聲이라는 週刊新聞의 발행에 관한 건], 石田 (領事代理), 1919년 05월 05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100

(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8, 朝鮮新聞 再刊에 관한 건, 石田(니콜라예프스크領事代理 副領事), 1919년 10월 20일

https://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07_0830

(19) 세르게이 프치츤(С. Птицын), <니콜라예프스크에서 20일간. 유격대원의 회고록>, 하바로프스크, 2013. 208쪽. 니항사건 참여자 회고록

(20) 드니프로프스키(Днепровский С. П.), <골짜기를 지나 언덕을 넘어>, 하바로프스크, 1956. 232쪽. 소련 공산주의 입장에서 니항사건을 기술

(21) 루빔 프라예르만(Р. И. Фраерман), 「황금색 수레국화(Золотой Василек)」, 1976. 400쪽.​ 근래 러시아의 유명작가로 니항사건 참여자

(22) 리피킨(Левкин Г. Г.), <그랬지만, 현실과 함께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르 지리 학회, 하바로프스크, 1999.​

(23) 유리 제코타프(Юрий Жекотов) 저, ​「그 슬픈 아무르의 날들 Те печальные амурские дни.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시의 역사 연구」, 2016~2017년경 출판​. 총104쪽~108쪽 분량. (일본의 민간인 학살과 조선인 노예 노동을 기술)

(24) 주코프스키-주크(И. И. Жуковский-Жук), <레비제바와 트리피츤 : Н. Лебедева и Я. Тряпицын (Партиз. движение в низовьях Амура)> Материалы и документы, 1922, 101쪽

(25) 스말야크 저, 「아무르강 하류 비극의 발자취(내전 МЕЖДОУСОБИЦА)」, 하바로프스크 지역 전승 박물관, 2009

(26)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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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군강 주변의 추모비. 께르비 마을의 명칭은 오늘날 변경되었다.

께르비 암군강 주변의 추모비

께르비에서 피난도중 친일 반란군의 공격에 의해 살해된 야코프 트리피츤.

오늘날 러시아에서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께르비의 트리피츤이 묻혔던 곳. 공산주의 시대에 시신이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야강 주변 자유시 참변의 현장 모습.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수라제프카 마을

오늘날 러시아에 남아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중 하나.

니항사건 추모비 중 하나

https://youtu.be/SFO3iPZtHJ0?si=bngVtVNVmthFBXs7

1920 니콜라예프스크 사건,  니항 사건 언론 보도내용

https://youtu.be/Yejk7xCy5nA?si=kGZkrVlo-TpcH7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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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롱기누스 | 작성시간 21.09.06 롱기누스 아. 정정합니다. 글 삭제 안 했고 단지 시기가 9월이 아닌 작년 5월 일이었네요
  •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진만 볼 수 있습니다.
  •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진만 볼 수 있습니다.
  •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9.06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자유시 참변과 관련되어, 가끔 나오기도 하는 사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관심 없는 사건이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의 원인과는 관련이 있습니다.
    다들 건강하십시오 ^^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9.06 러시아와 일본의 연구가 활발한데 반해 한국과 중국은 심도있는 다루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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