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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참변 100주년. 김홍일 장군 등이 주장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시작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09.26|조회수449 목록 댓글 2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알고있는 1921년 자유시 사건의 공통된 원인중 하나가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이다. )

독립운동가 김홍일 등이 수백쪽에 걸쳐서 자유시참변과 관련한 내용을 기술하였기에 김홍일 등이 주장하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 원인을 참고삼아 간단히 요약해서 살펴본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김홍일은 자서전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에서 약 100쪽에 걸쳐 관련된 내용을 진술하였다.

광복군과 국군, 야당 등의 이력을 가진 김홍일 장군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륙의 분노 노병의 회상기' 106쪽)

구한국의 군인 출신 이동휘 선생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일본과 가까워졌던 제정 차르정권이 전복되고 1917년 10월 공산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극동(‘원동’이라고도 한다)방면 선전원과 연락이 되어 1918년 6월경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1919년 4월경에 블라디보스톡에서 다시 한인사회당 대표대회를 개최하고 당대표로는 박진순, 박애, 이한영 세 사람을 뽑아 모스크바로 파견하여 코민테른에 가맹토록 하였으며, 이동휘는 중국땅에 설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레닌의 지원을 기대하는 뜻에서 한형권을 임시정부 대표라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 파견하였다. 그 때 레닌은 한형권을 맞이하여 대사 대우로 공관을 내주는 등 우대를 하면서 일체의 경비까지 부담해 주었다고 한다.

그 무렵 레닌의 태도와 그가 쓴 책들을 살펴봤을 때, 레닌이 한국공산당에게 아시아 및 원동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기대한 모양이다.

볼셰비키 혁명직후 러시아는 일본 제국주의나 중국 군벌들과는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은 황국 중심의 군국주의가 한창 판을 치고 있는데 비하여 한국은 바야흐로 망국의 비운을 안고 사람마다 비분강개하는 분위기가 충만한데다가 해외에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그들은 일어, 중국어에도 대부분 능통하니 세계 정세에도 민감할 것이란 점을 고려하여 레닌은 아마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조선과 대만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가 지속되면서, 일제의 기본 목표가 민족말살임이 드러나게 되었고, 한민족과 대만 민족의 저항이 거세지게 되었으며, 조선에서는 1919년 3•1운동이후 무장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형권은 모스크바에 주재하고 있으면서 전로노무자대회에서 임정 대표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20년 7월에 열린 세계공산당(코민테른) 대회에 한형권을 상해임시정부 대표로, 박진순은 공산당 대표로서 각각 참석하여 원동혁명을 위해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소비에트 러시아에 호소하였다.

1920년 7월에 임시정부를 대표한 한형권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는 독립운동 지원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김홍일은 주장한다.

첫째.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둘째. 한국 임시정부는 점차적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다.
셋째. 연해주와 만주 각지에 있는 한국 독립군을 시베리아로 집결시켜 훈련할 것을 허가하며 이에 소요되는 장비 및 보급을 부담한다.
넷째. 한국 독립군은 소비에트 러시아 영토내에 있는 한 러시아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다.

대체로 이러한 골자로 된 협약에 따라 그 후 구체화된 것이 그 국제군 형성의 동기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20년 가을경에 한형권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독립 원조금 금화 60만 루블 가운데 일단 금화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기로 하고 나머지 금화 40만 루블 정도를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치타에 가서 상해 임정의 이동휘가 보낸 김립에게 그 자금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한형권이 치타에 이르자 그 곳에는 이미 이동휘가 보낸 김립이 와 있었다.

한형권은 김립을 통하여 그 동안의 상해 임정 소식을 듣고 그 금화를 전한 후 다시 이동휘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금화를 가지로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김립은 한형권에게서 받은 그 자금을 가지고 외몽고의 북경을 거쳐 1920년 12월경에 상해에 돌아왔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계에 있어서 금화 60만 루블이란 막대한 자금이었기 때문에 이동휘는 그 자금을 가지고 1921년 1월 10일 상해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대회를 열고 고려공산당이라 개칭한 후 그 위세를 살려 당세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것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그 후 김립이 가져온 돈이 상해 바닥에 풀리게 되자 아마 그 때 그 곳 젊은 사람치고 다소나마 그 돈을 안 써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부 인사들은 그 돈을 사생활에 사용하여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동휘는 돈의 여세를 몰아 본국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하고 일본 공산당도 지원해 주는 등 위세가 당당했다. 그러나 이처럼 돈이 풍부하게 돌아가자 일부 인사들의 사생활은 호사가 지나쳐 끝내 공금횡령에 대한 시비로까지 크게 번져 결국 우리 나라 독립운동의 분열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이동휘는 방대한 조직망을 꾸미기에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무렵 시베리아에서 소련 적군이 세묘노프의 친일 백파 지방정권을 타도하자 셰묘노프는 만주로 도망치고 시베리아 치타(※극동공화국의 첫 번째 서울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였고 나중에 치타로 옮겨졌다)에 원동 정부(러시아명 부펠, 극동공화국 정부)을 세웠다.

그 원동공화국 정부내의 최고 책임자는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였는데, 그는 모스크바로부터 파견되어 온 사람이었다.

이러한 동시베리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이동휘는 박애, 정도정(혹은 장도종) 등을 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에 파견하여 볼셰비키 조직(달뷰라 추정) 내에 설치된 한인부를 관장하였던 것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니 이들 상해파에 대립되는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사실 그들 이르쿠츠크파는 상해파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1918년 정월(1월)경에 이르쿠츠크 지방에 살고 있던 한인 2세들인 김철훈, 남만춘 그리고 오하묵 등이 모여 따로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1919년 9월 5일경 이르쿠츠크 일대의 소련 공산당 지부내에서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한안드레이, 최고려, 오하묵, 박이노겐치 등이 모여 전로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시작이다.

(김홍일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가운덴 제정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인 오하묵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1920년의 세묘노프 잔당 토멸 당시에 이미 빨치산을 조직하여 적군과 연합 공격한 바가 있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 천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적군을 도와준 탓으로 소련 공산당 지부에서는 그를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당지부(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차차 당세를 넓히는 한편 본국과 중국 각지에도 사람을 보내어 집요하게 자파조직을 꾀하는 등 대단한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얼마우재’ 라고 불렀다. (마우재란 러시아 사람을 가리키는 뜻이며 얼은 그들이 이세(二世)이기 때문에 붙여준 중국식 말임)

 

그들은 이르쿠츠크 당지부와의 긴밀한 유대를 기회로 치타 정부의 혼란을 이용하면서 당무관계로 코민테른 원동서기국(혹은 ‘동양비서부’라고도 한다) 책임자인 슈먀츠키(Шумяцкий)가 원동공화국(혹은 극동공화국)의 서울격인 치타로 가는 것을 중도에 맞아 그를 이르쿠츠크에 주재케 하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원동공화국의 서울인 치타에 설치할 예정이던 소위 코민테른 원동서기부는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뜻대로 그들의 권내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 코민테른 원동서기부(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를 「동양비서부」라고도 합니다. 이 무렵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기관이었던 코민테른 내부에 약 1년간 존속했던 부서인 동양비서부가 관할한 지역이 극동 지역을 넘어섰기에 동양비서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달뷰라(다른 이름 : 달비라)」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혹은 「극동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슈먀츠키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다가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혹은 달이비로.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의 구성원을 겸임하였기에 헷갈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김홍일, 리인섭 등이 주장하기를) 상해파는 이르쿠츠크파를  "공산주의 운동의 정통을 무시한 반당적인 무리들, 이르쿠츠크파의 일원을 과거 백파에 있었던 자, 친일 매국노라고 소문나서 이르쿠츠크로 도망온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모스크바 중앙정부에 대하여 그들의 활동을 저지시켜달라고 호소하는가 하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상해파를 가리켜 "민족 자본주의적인 기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공박하며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секретариата Коминтерна в Иркутске, ‘원동비서부’라고도 한다)와의 유대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양파 간의 추잡한 세력 다툼을 옆에서 지켜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Дальбюро ЦК РКП(б))의 당국자들은 화해를 유도하는 자, 한쪽 편만을 드는 자 등등 다양하게 갈라져 있었다.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당국자들은 곧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표들을 각각 초치하여 극동혁명에 있어서의 한인들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조속히 양파 간 조직을 일원화할 것을 종용했다.

그 때 그 대책의 일환으로 동양비서부(혹은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의 당국자들이 내놓은 안이 바로 1921년에 고려공산당 대회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이 있자 각자 당세확장을 위한 양파의 싸움은 더욱 가열되어 중상모략이 증가하였다. 양파는 총회에서 제각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각 지방의 대표자 인선에 이르기까지 대립을 빚었다.

(김홍일의 주장 중략함)

1921. 6,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시베리아와 만주, 중국은 물론 심지어 국내에까지 양파 간의 분쟁이 번져갔다. 당시 국내에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이르쿠츠파와 가까운) 화요회, ML당, 서울파, (화요파와 가까운) 남로당, 북로당, (상해파와는 큰 관계가 없는) 동북항일계, 연안파, 소련파, 주체사상파 등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갈라져 대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간의 파벌다툼과 내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남한에서도 이에 관련되었던 수십만명이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반공정권의 ‘보도연맹 집단학살’ 등에 관계되어 죽었다.

 

 

1921. 6. 28. 자유시 참변의 대략적인 발생 순서

1919. 3. 1. 일부터 3·1운동 발생

1919. 4. 월경부터 1차 세계대전 처리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청원하였으나 실패

1919. 9. 10. 일경 (확실하지 않은)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 등으로 불려지기도 함) 지원금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간의 분쟁이 있었다고 함. 러시아측 지원 자금을 둘러싸고는 수차례 다툼이 발생함

1919. 11월경 상해임시정부의 이동휘는 박진순을 모스크바 레닌정부에 파견하여 지원요청. 레닌정부는 금화 약 200만루블 정도와 독립군 부대 지원을 약속했다고 알려짐.

1920. 1월경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포고 1호 발표하여 독립군 활동 지원 요청

1920. 2. 7. 일경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일본군이 철수 시작하고, 볼셰비키 군대(赤軍)에 의해 해방됨. 일본군은 3. 3. 일경 자유시에서 전원 철수함

1920. 2. 29.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 항구가 평화적으로 해방됨 (박일리야, 리흥진 등 참가)

1920. 3월경 볼셰비키 정부가 이동휘와 상해임시정부 측에 자금지원(약 금화 40만루블 추정되며 무게와 환전 문제로 여러 차례 나누어 상해파 측으로 지원됨. 이동휘 등의 1921. 10. 16일자 보고서)

1920. 3. 12.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중립조약을 어긴 일본군이 반자이 야간 기습 공격을 가함

1920. 4. 4.일경(혹은 4. 5. 일경)부터 일본군 연해주 한인 밀집지역을 공격, 4월참변 발생

1920. 4. 21.일경 일본군이 북위50도 이북의 사할린섬 북부 알렉산드라프스크 항구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괴뢰정권 수립후 영구 점령 작업

1920. 4월경 상해파 이한영 등이 코민테른 자금 일부를 휴대하고 상해로 귀환(금화 100만루블은 잘못된 자료임)

1920. 5월경 만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1920. 6. 7. 일경 (6. 4일경이라는 소리도 있다) 홍범도, 안무, 허영장 등 봉오동 전투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러시아 내전을 틈탄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일대 점령과 사할린섬 북부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

1920. 7. 9. 께르비에서 니항을 해방시켰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과 동료들 다수 학살당함. 박병길이 일본군의 협조아래 트리피츤 체포·처형에 가담하였다가 자유시로 도주

1920. 7월 25일에서 7월 28일경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 박진순이 코민테른 대회에서 레닌과 만남

1920. 9월경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한인보병자유대대 조직(대대장 오하묵, 군정위원 최고려)

1920. 9. 5일경 트리피츤 부대를 해산시키고 자유시의 보병 19연대에 편입시키기로 결정됨

1920. 9월부터 ~ 10월경 간도 훈춘사건(琿春事件,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 발생. 훈춘의 일본 영사관 관련 건물이 공격받음

1920. 10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의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일 수도 있다)에 한인부 조직 (오두제 : 박애, 계봉우, 김진, 장도정, 박창은), 한인부는 달뷰라(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 혹은 극동공화국의 산하기관으로 조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20. 10월경 상해파(이동휘 등)가 극동공화국 한인부 등에 독립군의 자유시로의 이동 지원을 요청. 상해임시정부와 볼셰비키의 협조가 있었음

1920. 10. 12. 일경 박일리야를 비롯한 한인 니항부대 (나중의 사할린 의용대로 확대됨) 자유시 도착

1920. 10. 15. 일경 박일리야 원동공화국 한인부가 있는 치타(혹은 베르흐네우진스크-오늘날의 울란우데)로 출발

1920. 10. 21. 일경 홍범도, 김좌진, 안무 등 청산리 전투 시작

1920. 10. 22. 일경 자유시에서 제19연대(과거 니항을 해방시켰던 트리피친 부대의 일부)가 군율에 복종치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2군단 및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이 철갑차와 보츠까레워 등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포위한 후 해산시켜, 다른 연대에 편입시킨다. 한인 니항부대(제19연대 제3대대=박일리야 부대)는 오하묵의 보병자유대대에 편입됨

1920. 9월~10월경 상해파 한형권 등이 상해임시정부 명의로 러시아측에서 금화 40만 루블 정도를 수령함. 대한국민의회 등과 자금 분배를 둘러싼 갈등 고조되기 시작함. 나중에는 중국·조선내에서도 자금 분배를 둘러싼 문제 발생

1920. 11월경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 서울이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치타로 옮겨짐

1920. 11월경 연해주와 만주의 한인무장부대 자유시 집결 시작

1920년 말경에서 1921년초 원동공화국 정부에서 자유시 일대의 한인부대를 통솔키 위해 김민선을 한인 니항부대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나 한인 니항부대는 19연대가 해산될 때 자유대대에 편입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1920. 12월경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대대 등은 연해주의 독립군을 자유시로 집결토록 하바로프스크의 2군단과 교섭한다.

1921. 1월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에서 이르쿠츠크에 아시아의 공산혁명을 인도하기 위해 동양비서부를 설립하고 고려인 부대의 지도 권한을 코민테른 본부 등에서 동양비서부로 이관함(동양비서부는 1920년 9월경에 설치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극동공화국(혹은 원동공화국이라고도 한다)내에 있었던 한인부가 해체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원동비서부 혹은 극동비서부라는 명칭보다는 동양비서부가 적합한 명칭임)로 고려인 부대 지도권한이 이전되기 시작됨. (한인부는 해체 이후에도 일부 인물들이 수개월간 유지됨)

1921. 1월경 상해파가 재러군사위원회 조직, 상해임시정부측 이용이 경고문 발표

1921. 1월경 이용, 채영 등은 전한의병대의회 소집위원회 결성,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

1921. 1월경 (만주 밀산 일대에서)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시로 집결 시작

1921. 1. 18. 일경 보병자유대대장 오하묵은 트리피친 부대였던 제19연대 해산 및 고려인 부대 등의 문제를 보고하라는 극동공화국 군부 명령에 따라 치타 등으로 보고차 이동

1921. 1. 20. 일경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Эйхе)는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하여 체르니고프카(=과거에는 체르니곱스코예 라고도 불렀다.), 크라스나야라바, 마자나바로 이동해 주둔할 것을 명령함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와 협의 없이 총사령관에 박창은, 참모장에 러시아인 그리고리예프 임명)

1921. 1. 28. 일경(혹은 2월경) 니항에서 자유시로 온 박병길이 독립군에 의해 처단됨(암살설도 있다. 박병길의 자세한 과거는 알 수 없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자유시로 온 것으로 보임. 일제의 밀정 여부는 확인되지 않음).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 안드레예브도 트리피츤 지지세력으로부터 3차례 살해공격을 받았으나 나중에 도주하여 일본군으로 넘어감

1921. 2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에 슈먀츠키가 취임

1921. 2월초 안무 부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 도착

1921. 2월 중순경 (상해파) 박창은, 그리고리예프 자유시 도착

1921. 2월경 박창은 사면으로 한인부에서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군정위원장에 박일리야를 임명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음(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리야,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자유시 도착.

만주지방 및 연해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혁명군(대한독립군) 조직됨

1921. 4월경에서 5월경 중국 북경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측에서 독립군부대 통합을 위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1921. 4월경 극동공화국 군부에서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을 이르쿠츠크로 압송

1921. 4. 14. 일경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 군부에 임시고려군정의회 조직을 통보 (상해파인 계봉우, 박애, 김진,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과 협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1. 5. 2. 일경 이르쿠츠크파가 비밀리에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오하묵 일행 자유시 도착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 총사령관 까란다리쉬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 임명

1921. 5. 12. 일경 예전 오하묵의 보병 자유대대가 크라스나야라바로부터 원래 주둔지 자유시로 이동

1921. 5. 13. 일경 이르쿠츠크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가 자유시로 이동시작 (5월 28일경까지 최종 600여명 이동)

1921. 5. 18. 일경 치타에서 사할린부대로 가던 동림 체포.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측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무력화 시도.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의 지원금인 금은화 약 3만루블 이상이 러시아 관청에 압수됨

1921. 5. 19 일경 까란다리쉬비리, 류동열, 최고려 이르쿠츠크에서 자유시로 출발 (독립신문 1922. 2. 27 일자)

1921. 6. 2. 일경 홍범도 부대 일부 수십 차례 주둔지 변경후 다시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탈

1921. 6. 2. 일경 김홍일 단독으로 자유시 도착

1921. 6. 6. 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등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Казаки) 기병 600여명에서 900여명을 인솔해 자유시 도착. 정식 총사령관 선포 (대한혁명군측은 무장해제 명령에 대체적으로 불복)

1921. 6. 6. 일경 까란다리쉬비리와 통역사 최고려 등은 자유시 주둔 군인 전부를 모아서 설명

1921. 6. 9. 일경 안무 부대 마자나바 이탈후 자유시 도착. 일부 독립군의 주장에 따르면 안무 장군은 홍범도가 떠나자 수차례 자체 회의를 통해 일단 자유시쪽으로 이동하여 내분과 식량난 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함. 안무 장군의 이탈로 사할린 의용대도 통합에 대한 압박이 가중됨

1921. 6. 14. 사할린부대 자유시 도착후 수라제프카로 이동. 사실상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 자유시가 한국 독립군들로 뒤덮임.

1921. 6. 15일경 까란다리쉬비리, 오홀라 및 3명 블라가베셴스크를 방문하여 체포되었던 김규면, 한운용, 박원섭, 마시욱, 주영섭, 안태국, 임상춘 등을 조사하고, 금은화 3만루블 이상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까란다리쉬비리 등은 6월 18일경 자유시로 돌아옴

1921. 6. 19일경 자유시에서 장교회의 개최(분대장 이상 간부) (※이 무렵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와 공격을 반대한 합동민족군대 소속 고려인 간부 투옥)

1921. 6. 20일경에도 군회가 있었다 (※ 독립신문 1922. 2. 27 일자에 따르면 1921. 6. 20.일경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1921. 6. 21. 그리고리예프, 박일리야 등 장교 7인이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를 축출하면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겠다는 혈서 제출

1921. 6. 22. 일경(※ 1921. 6. 20일날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까란다리쉬비리, 최고려 등이 독립군 3천여명을 자유시에 집합시켜 전군의 통합을 촉구.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6쪽에 따르면 최고려가 고려혁명 분열을 막기 위해 분란을 일으킨 자신이 독립군이 쏜 3천발의 총알을 맞고 죽겠다고 하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은 최고려나 까란다리쉬비리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고, 당시 연설을 하여 화합을 유도한 사람은 홍범도 장군 등이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과거 의병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라는 연설을 하여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 모인 독립군들에게 울음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홍범도가 이순신, 사명당,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박제상 등의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안하고 왜 갑자기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 6. 24일경 독립군 부대 편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발생

1921. 6. 25일경 까란다리쉬비리, 류동열 등 수라제프카에서 사할린부대 장교회의 개최

1921. 6. 27일경 수라제프카에 주둔중이던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 사면서 제출. 27일 자정이후부터 공격 개시

1921. 6. 28. 전날 한밤중부터 시작된 기습공격으로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자유시 사건 발생. (사망 수백여명, 포로 등 천여명 이상)​

1921년 후반기부터 포로로 잡힌 독립군 다수가 이르크추크 등지로 압송중 사망, 일부는 만주·연해주 일대로 탈출, 이동휘·만주지방독립군 단체·상해임시정부 등의 항의로 결국에는 포로생활을 하던 독립군 대부분 석방됨

1921. 10. 16일경 상해파 측이 러시아 지원 자금의 사용처 등을 보고

1921. 11. 28일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

1921. 11. 월경부터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

1921. 12.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 당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사실상 볼셰비키의 최고 명령기관이었음

1921. 12. 18. 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 형식적인 퇴진 발표

1922. 1월경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음

1922. 4. 22. 일경 코민테른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이르쿠츠크 대회에서 제명된 모든 당원 복권,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 퇴진, 두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휴식기간 결정

1922년 10월 25일경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군은 철군.

내전 승리가 확실해지자 볼셰비키는 병력 감축, 고려인 부대 대부분 해산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을 획득하고 일본군 철수. 니항사건에 배상요구 중단.

1925년 5월경 일본 군인은 사할린섬 북부에서 철군하였으나, 일본이 점령했던 석유, 석탄 광산은 1944년에서야 소련측으로 이전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인물들

구트만 아나톨리 야코블레비치(Гутман Анатолий Яковлевич, 영문명 Gutman, Anatoly Yakovlevich, 필명 Gan, A. (Anatoly) 등을 사용함, 1889년경 출생~1950년경 사망) : 1918년경 러시아 내전기 백파로 활동하였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악명 높은 러시아계 친일파 셰묘노프 등과 협력하였다. 일본으로 도피후 니항사건과 관련된 책을 일본에서 출판(영문도서명 The destruction of Nikolaevsk-on-Amur :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1920)하고 반볼셰비키 신문을 도쿄에서 발행했다. 구트만의 책은 일본 등지에서 자주 출판된다. (한국인 이지택의 주장도 일본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에서는 일본 천황에게 볼셰비키를 타도해 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한 러시아계 친일파 102명에 대한 주장이나, 1920년 5월 22일에서 24일까지 3일간 니항 감옥에 한꺼번에 1,500여명이 수용되었으며 감옥에서만 3,000여명이 학살당하고, 결국 1만여명의 니항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구트만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거의 하지 않는다.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니 반박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으로 저술 활동한 적이 있는 유명한 미국 교수 존J 스테판 등이 구트만의 주장을 사실로 최근에 인용하였다.

구트만은 한국계인 박병길과 이지택 등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여,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친일파라는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의 주장이 일부 맞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시베리아 침략사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니항사건을 일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선전하였고 1920년도 한국신문 역시 수백차례 보도하였다.
러시아 민간인 6천여명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의 책들
일본의 수치라면서 니항사건을 국가적으로 선전한 일제

구춘선(具春先, 1957~1944)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1885~1918)

김홍일(金弘壹, 1898~1980) : 유명한 독립운동가, 1921. 6월경 아무르주 자유시를 방문하였으며, 러시아 내전기 사할린부대장 박일리야 등과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활동을 하였다.

니항사건(尼港事件,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にこうじけん)

 

레비제바(혹은 키야슈카) 니나 미하일로브나(Лебедева (혹은 Кияшко) Нина Михайловна, 1895 ~ 1920. 7. 9.) 1895년경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펜자지방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소리도 있다. 1914년경부터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 활동을 하였다. 동시베리아 치타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는 소리가 있다.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아나스타시요프카(Анастасьевка) 마을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의 비서였다.

레비제바는 키야슈카(Кияшко)라는 성을 쓰기도 하였는데, 백파와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은 키야슈카 주지사의 친척 혹은 양딸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가족관계 문서에 따르면 키야슈카 주지사와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니항사건 기간중 트리피츤과 동거하였다. 1920. 7. 9.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트리피츤의 부인 『레베데바』라고 나오며 최호림, 이지택은 일본의 주장과 일치되게 총독(주지사)의 딸이라고 주장한다. 최호림과 이지택의 1945년 해방이후 니항 사건과 관련된 주장들은 일제침략기 일제의 주장과 일치되는 점이 많고, 오늘날 러시아 기록과는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레비제바의 가족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나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총독의 딸이라는 것은 일제의 조작극일 가능성이 크다

미즌(Мизин Григорий Семёнович) : 1919년경부터 사할린주 니항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 1920. 5. 24.일경 트리피츤의 지시에 의해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총살되었다.

바라비요프(Воробьёв Пётр Яковлевич) : 께르비 인근 광산에서 백파군대에 있다가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니항사건 당시 니항 방화에 참가하였다. 께르비에서 103명 법원의 부의장으로 트리피츤을 처형후 일본측으로 도피함. 1921년 6월 6일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었다. 2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구트만의 책에 중요 증인으로 등장한다.

 

박일리야(박윤천, 朴允天,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 니항부대를 조직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북경군사통일회(北京軍事統一會) : 1921년경 북경 인근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되는 측에서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 통일을 위해 개최하였던 회의였으나 독립군부대 통합에 실패하였다.

비첸카(Биценко (Орлянковский)) : 니항 인근 백파군대에 있다가 트리피츤 부대에 항복하였다.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께르비로 대피하면서 볼셰비키인척하고 사람들을 살해함. 1920년 6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됨

부진-비치(Бузин-Бич Дмитрий Семёнович, 1887년경 출생 ~1938년경 하바로프스크에서 처형. 1957년 구소련에서 복권됨) : 1908년경 이르쿠츠크 사범학교 졸업, 하바로프스크 인근에서 교사 생활. 1차 세계대전에 차르군대 장교로 출전. 러시아 내전기 니항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함. 1920년 3월 12일경 니항에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트리피츤이 부상당한 후 함께 사진 촬영한 사람이다. 트리피츤 부대의 간부로 께르비에서 처형되지 않고 생존하여 니항사건에 관한 회고록을 남김.

부진-비치

사소프(34세쯤에 사망. Сасов-Беспощадный Ефим Варфоломеевич) :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으로 구성되었던 부대의 부대장(1920 г. - командир корейского партизанского отряда, 부지휘관은 박일리야 및 류소심), 니항의 징발위원회 위원장. 1920년 5월경 사할린주 바가로드스크 지역 지휘관(командовал Богородским фронтом). 1920년 7월 9일경 께르비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처형됨

시마다(島田元太郎, Симада(Мототаро)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일본인. 1870년경 일본 나가사키현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 니항에서 시마다 상회를 운영하며, 화폐까지 발행했다. 당시 자원의 보고였던 사할린주와 니항의 일본 민간인 진출을 이끈 사람이다.

1920년경 니항사건 당시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생환한 여성들의 구제와 일본정부에 대한 보상소송에 앞장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여성이 일본으로 귀환했는지 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니항의 조선인회 서기였던 박병길 등에 대한 진술을 남겼다.

1920년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의 니항사건에 대한 회고록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1886년경 출생 ~ 1938년경 사망) : 오늘날의 동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1년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을 지낼 당시, 한국계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을 편들어 자유시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의 반발로 동양비서부장에서는 해임되었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 제외되었다.

셰르쇼프(Серышев Степан Михайлович, 1889 ~1928년 사망) 차르 러시아 장교출신이다. 러시아 내전기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지역에서 군대 지휘관이 되었다. 1921. 6. 27.일경 자유시를 관할하던 볼셰비키 군대 제2군단장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현장에 셰르쇼바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26년경 일본주재 대사관 무관으로 일했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안드레예브(Андреев Иван Тихонович, 1884~1933) : 안드레예브가 주장하기를 제정러시아 시대 니항인근 치니르라흐 요새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 결과 장교도 아니었다고 한다.

1920년경 볼세비키에 가담하여 트리피츤 부대에서 간부가 된다. 1920년 7월경 일본군의 재공격으로 대피해 께르비 인근에 머무르던 중 일본군의 방조 아래 바라비요프, 압친니코프, 000 등과 께르비의 트리피츤과 동료들을 기습공격해 체포후 살해하였다.

이후 트리피츤 부대가 해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로 이동하여 경찰서장을 했다고 안드레예브의 가족이 주장하나 오늘날 러시아측 학자들 연구결과 거짓말이라고 한다.

1921년 한국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자유시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포병부대 지휘관을 한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시 일대에서 트리피츤 지지자들로부터 3차례 정도의 살해공격을 받았으며. 일제측으로 도피하였다가 중국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직계후손들은 현재 미국에서 구트만과 같은 각종 주장을 하고 있다.

이르쿠츠크파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최호림은 일제 앞잡이 안드레예브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트리피츤이 니항에서 포병대장으로 5년~6년간 근무했다고 거짓말했으나 이것은 남한에서 과거 인정조차 되지 않았으나, 오늘날 남한의 000 교수 등이 논문에서 인용한다.

(참고자료 : 윤상원 교수의 고려대학교 2010년 박사학위논문(논문명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115쪽과 118쪽 및 2001년 석사학위논문(논문명: 自由市事變 前後 朝鮮人 武裝部隊 統合運動) 7쪽, 24쪽 살펴보면 이지택과 최호림의 ‘박병길, 이지택, 김낙현, 고명수, 임호, 류소심, 엄지영에 의한 니항해방설’을 비롯한 허위 주장을 전부 인정한 것외에도, 니콜라옙스크 시의 공식 홈페이지를 인용하여 남한의 경기도보다 훨씬 넓은 니항의 1917년 인구는 1만 5천여명이었는데 니항사건 이후 니항에는 잔류 인원 2천여명만 남게 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트리피츤과 함께 상류 마가촌과 께르비 등지로 대피하지 않고 백파와 일본군에게 투항한 니항 인구가 2천명 정도가 되면 트리피츤에 의한 니항사건의 민간인 희생자 수는 100명도 되지 않는다는 오늘날의 러시아 역사학계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호림•이지택이 주장하는 트리피츤이 니항 포병대장을 했다는 설 등은 오늘날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거짓말이다.)

최호림, 이지택 등이 니항에서 포병대장을 했다고 주장하는 안드레예브

압친니코프(А. Овчинников) : 께르비(Керби)에서 트피피츤을 처형한 법원의 간부. 일제측으로 도피후 1935년경 미국에서 니항사건 관련 도서 출판

야한토프(Яхонтов Иван Андреевич, 1894년경 출생) 1918년경 아무르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볼셰비키 활동. 1920년경 니항에서 트리피츤과 함께 볼셰비키 활동. 니항에서 체포되었으나 블라가베셴스크로 조선인들과 이동중 탈출. 1923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복권되어 공산당 활동

오하묵(吳夏默, Огай Христофор Николаевич, 1895~1937) : 제정 러시아 차르군대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0년경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한인 보병자유대대장을 지냈다. 자유시 참변에 얼마우재 부대로 불려지는 한인보병자유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대립했던 사할린부대 및 독립군들을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 역사상 보기 드물게 이르쿠츠크에서 2,000여명 이상의 한국계 독립군 부대의 여단장을 지냈다. 소련군 최종계급은 대령 정도였으며, 장령은 아니었다. 1937년 소련 대숙청 당시 처형되었다.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중국 운남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경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에 가담하였다. 1971년 자서전 『우등불』을 출판하였다.

김좌진과 청산리 전투 참가 사실은 일제 강점기 중국계 반일투사들에게도 사실로 인정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남한에 와서 대한민국 건국 당시 초대 국무총리 등의 고위직 관리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러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 등에 관한 이범석의 주장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져 신뢰성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만주에서는 중국의 000과 관련된 적이 있음을 사실대로 진술하였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일부 한국계가 만주의 친일파들과 결탁하였음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령과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주장을 검증함에 있어서, 과장된 허위주장들을 교차검증해 볼 수 있는 기록중 하나이다.

이범석은 주목받고 있는 000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러시아령에서의 독립운동 연구에 있어서는 최호림, 이지택, 김낙현, 최고려 등의 주장 등에 비해서는 사실대로 쓴 부분도 많이 확인된다.

이용(李鏞, 1888~1954년경 북한에서 세거)

이지택(李智澤, 1899~1976) : 독립유공자. 이르쿠츠크파. 남한에 온 후 1947년경부터 1920년도에 동아일보 등에 1면 톱뉴스로 수백차례 이미 보도되었던 니항 사건에 대한 다른 주장을 하였다. 다른 화요파 공산당 관계자들과는 다르게 ‘삼천리’, ‘신동아’ 등의 잡지에 대립하였던 박일리야 부대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설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에서 시베리아 출병사를 다룸에 있어서 니항조선인회서기(韓人会書記) 박병길과 함께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1926년 6.10만세 운동에 가담한 것 외에 러시아 기록 등과 대조하면 확인되지 않는 주장을 많이 하였다.

화요파 공산당내에서도 이지택이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최근 남한의 박경리, 김창순, 000 등은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1920년도 한국의 신문은 니항사건에 관해 이지택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을 제1면 특별보도로 수십차례 이상 보도하였다.

이오키료조(五百木良三. 일본의 유명한 시인) : 침략주의 이론가로 러일전쟁 개전, 히비야방화사건, 한일합방 여론 조성, 장작림폭살에 관여하였다. 1920년경 니항사건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하나테루유키(原暉之, 원휘지) : 일본인으로 『尼港事件」の諸問題』 등을 저술함. 니항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박병길과 이지택을 언급하였고 일본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됨

파포프 니콜라이 이바나비치(Попов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1924 ~ 2005) : 남한의 동아일보 1989. 8. 15. 일자 7면은 파포프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파포프는 1921. 6. 28. 자유시 참변이 자유시 수라제프카 구역의 미하일로-체스나코프스카야 기차역 급수탑 주변과 제야강 쪽인 오늘날의 셰르쇼바 장군의 거리 등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또 기사는 러시아계 유명 파르티잔 까란다리시비리 등이 관계되어 발생하였음을 보도하였다. 파포프는 수라제프카 구역 타타르스코예 묘지 주변에 독립군이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타타르스코예 묘지 인근이 독립군 무덤이라고 주장한 파포프

최고려(崔高麗) :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 예수교 전도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자서전에서 진술하였다. 본인의 주장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볼셰비키들을 지원하였다고 하지만, 대립하던 측에서는 연해주에서 친일파라고 소문이 나서 조선인들이 살지 않은 이르쿠츠크 등지로 도피하여 볼셰비키에 가담하였고 권력을 누리기 위해 종파를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1921년 5월경 자유시 참변 무렵,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최호림, 오하묵, 류동열, 이청천 등과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군정위원장의 요직에 앉았다. 자유시 참변 직전에는 홍범도가 동조한 데 이어, 안무 등도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한 때 협조하였다.

사실상 자유시 참변의 주도한 최고 지휘관이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러시아계 까란다리시비리, 슈먀츠키, 오홀라의 통역사로 활동하였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최고려는 자유시 참변이후 잠시 득세하여 공산주의 서적 등을 번역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호림(1896~1960, Цой Хорим) : 러시아에서 자유시 참변에 관계하였고, 이르쿠츠크파에게 일방적인 기록을 남겼다. 최호림 본인은 자유시 참변 이전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나 일본군과의 교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 일대 독립군 부대 조직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다.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나, 대립하였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기록들이나 러시아의 트리피츤 기록에는 대립하였던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강도, 강간범, 아편중독자, 학살자’ 등으로 참무하고 살해한 ‘독립운동도 한 적이 없는 친일파’라고도 한 때 불려졌다.

최근 공개된 기록물에서 최호림은 1920년 니항사건을 주도한 트리피츤을 니항에서 포병부대 장교를 수년간 지낸 인물로 묘사하여, 이지택, 000 교수 등에 의해서 사실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그런 허위 주장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거센 반발에 결국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소련시대 결국 최고려 등과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고 한다.

트리피츤(Тряпицын Яков Иванович, 1897년경 출생 ~ 1920. 7. 9. 사망) : 니항사건 당시 사할린주와 오호츠크해 지역의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은 1920. 2. 29.일경 니항을 해방시켰고, 약2주 후인 1920. 3. 12. 일경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니항사건의 최고 책임자로 수천여명 빨치산 대장이었고 오호츠크해 방면 파르티잔 사령관이었던 트리피츤은 2주정도의 기간안에 000 등이 주장하듯이 당시 러시아말도 모르던 조선인 000과는 알고지낼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1920. 7.월경 대피한 께르비에서 일제의 방조아래 안드레예브, 000 등의 기습공격을 받고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체포되어 부인 및 파르티잔 동료들과 함께 7월 9일경 처형되었다.

까란다리시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년 사망) :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1920년 일제 시베리아 출병사에 그 유명한 니항사건의 러시아측 공식 입장
니항사건에 대한 러시아측 공식입장
자유시 참변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 까란다리시비리 와 동료들
자유시 참변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 까란다리시비리 와 동료들
자유시 참변 당시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 까란다리시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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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09.26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9.2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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