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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18) 임시 고려혁명군정의회의 군권 행사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08|조회수182 목록 댓글 2

1921년 5월경 임시 고려혁명군정의회의 군권 행사 시작

(※요즘 묘지이장과 관련하여 인터넷에 자주 이야기 되고 있는 홍범도의 1921년 자유시 참변 관련설 등에 대하여 살펴봤을 때)

실제로 홍범도는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와 마자나바,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의 독립군 부대에 관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홍범도 장군 (무수정 원본)
안무 장군

최근 남한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자유시 참변에 관한 글들은 저자들이 여기저기서 베껴서 반대측 의견은 아예 검토도 한 적이 없었고, 짜낍기 수준으로 편집후 검증도 안하고 거기다가 자기 의견도 사실인 것처럼 적은 부분이 있다.

그래서 되지도 않는 『00 스테판의 니항 민간인 4,000명 학살 주장』, 『레닌 자금의 정확한 사용처 등 역사학계 최초 발견』, 『자유시일대 독립군의 만행』 등을 최초 발견했다고 적는 자료도 있는 모양이다.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가 니항에 세운 추모비, 나중에 볼셰비키에 의해 파괴된다. 시마다 등은 일본군 점령기 니항의 박병길이 서기였던 조선인민회(조선인회)를 협력단체로 알고 있었다.

 

니항사건 당시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는 많은 기록을 남겼다. 박일리야는 니항 이시다 영사의 딸은 일본 영사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함포 사격으로 죽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강방함대는 함포사격을 안했다고 주장했다.

1920. 3. 12. 일본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나우모프, 오늘날 니항에 나우모프 거리가 아직도 있다. 한국 독립군 리흥진 선생도 같이 전사하였다.
일제 시베리아 침략사에 반드시 나오는, 1920년 니항사건 추모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부대 본부 건물터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날 니항지역에는 친일파인 셰묘노프, 콜차크, 안드레예브, 구트만 등의 기념물은 전혀 없다.  니항사건 기간중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는 여러개 있다.)

오늘날 니항에 설치되어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중 하나

그러한 내용은 책을 쓴 사람이 자기가 못 들어본 내용을 처음보고 나서 자기 멋대로 남한의 역사학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 『니항사건, 레닌자금, 한인 공산당의 조직, 자유시 참변 원인 등등』은 일제가 작성한 최소 수백개 이상의 문건이나 당시의 책자와 일본, 미국, 러시아, 한국 신문 등에도 톱뉴스로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불과 수십년전까지도 남한에서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도 자주 언급하던 이야기였다.

 

1921년 자유시 참사 당시 홍범도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홍범도 등을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고, 홍범도, 안무를 ‘류동열, 이청천, 오하묵, 최고려, 박일리야’와 같이 다룰 수는 없었다.

그분들의 행동은 자유로웠으며 전 독립군들에게서 ‘한없이 우러러 존경받았다’고 한다.

이르쿠츠크에서 발행된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잡지

그런 홍범도 장군 마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묘지에 묻히기까지 3차례 이장을 거쳤고, 1945년 이후 크즐오르다 묘지에 이장될 때는 북한에서도 관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유골은 DNA유전자 감식이 가능하여 후손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인데, 오늘날 독립유공자 유족연금은 과학기술인 DNA유전자 감식에 근거하여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결국 2021년경 남한으로 오기까지 정치에 이용되기도 한 모양이었다.

 

오늘날 남한의 유명한 사회주의계열은 북한에서도 탄압받았던 ‘남로당’이라는 것인데, 관련 유명 인사로는 ‘000, 000, 000, 000, 박갑동, 박상희 등등’ 이다.

남로당은 과거 일제시대 ‘화요파’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화요파는 상해파, 조선의용군, 동북항일군, 중국 국민당, 미국 등보다는 이르쿠츠크파와 가까운 조직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남한에서는 남한의 사회주의 계열의 주류가 비교적 많이 들어본 남로당, 화요파, 이르쿠츠파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은 남로당, 화요파, 이르쿠츠크파가 생기기 전이거나 그들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고 일어난 사건이므로 훗날의 남한 사회주의 조직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그 때 당시의 독립군의 눈으로 자유시 사건의 진행을 한번쯤 살펴봐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주장들 외에도 자유시 사건을 목격한 한 사람의 진술이라도 더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다양한 정보와 기록을 공유하는 바람직한 글쓰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서는 ‘주류 역사학자 공식도서를 인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의견은 학자의 자세라기보다는 ‘남의 책과 기록에 00000 넣어 출판하고 0000를 받고 짜깁기하는 행위’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이며 비극을 다룸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로 인정되어서는 안된다.

 

이르쿠츠파의 설득 시도

1921년 5월 6일경에 고려군정의회에서 고려의병대를 운전할 문제로 토의하기 위하여 홍범도, 최진동 등으로부터 협의회를 개최하고 토론한 결과 아래와 같이 결의하였다고 한다.

1920년대 안무장군이 주둔했던 마자나바 항구
러시아 내전기 아무르주 자유시를 점령하고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한 일본군과 백파, 앞잡이
1920년대 자유시에서 운행중인 기차

 

1920년대 자유시 항구 인근 제야강 여객선, 오늘날 수상교통은 거의 없어졌다.

 

고려군정의회에서 군법상으로 말하자면 즉시 사할린의용대에 명령하여 본 군정의회에 복종하라 하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 의병대들은 아직 군율이 무엇인 것을 잘 이해치 못하며 그동한 허다 풍파가 있었으니 군율대로 명령함보다 위원을 파송하여 고려군정의회의 조직된 내력과 장래 진행책을 먼저 설론하며 겸하여 포론문(佈論文)으로써 일반군인에게 각오를 주는 것이 방침상 일책이라고 결안하고 설론위원으로 김광, 이훈, 송세주, 최흔, 려인빈 5인을 선정하였다.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제가 1923년경 알 수 없는 경로로 획득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이청천, 홍범도, 최진동 3인은 박일리야 일파와 의견이 맞지 않아 자기들의 영솔하였던 군대는 사할린군대의 협박에 임시로 인도하고 이청천은 간도로 향하는 차 블라가베셴스크에 체재하고 홍범도, 최진동은 자유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홍범도 등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르쿠츠크파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홍범도 등은 대체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여진다.)

 

5월 7일경에 5인 설유위원이 포유문(布諭文)을 갖고서 사할린 의용대로 파견되었다.

박일리야는 이들을 이르쿠츠크파라고 무조건 적대시하면서 전원을 수감해 버렸다고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한다.

이때부터 자유시 북동쪽에 위치한 마자나바 동구는 봉쇄되고, 각 군대 사이의 왕래는 차단되었다고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나 오늘날 러시아측 기록 어디에도 마자나바와 자유시, 블라가베셴스크 등지로의 자유로운 이동이 차단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https://youtu.be/P-vqLjZNZns

(1919년 일제의 마자나바 학살을 고발하는 희생자의 후손들과 오늘날의 마자나바 군)

당시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의 고려인들만 최소 수천명이었고, 자유시 최대 번화가인 발샤야 거리(혹은 볼쇼이 거리라고도 한다)에 있는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와 수라제프카 구역 서쪽에 있는 카레이스키 파셜록 등 고려인 마을만 최소 2개소 이상이었다.

5월 9일경에 제2군단장으로부터 전 한인부대에 명령을 내렸다는 통보가 임시 고려군정의회에 도착하였다.

이틀 뒤인 11일에 홍범도와 최진동은 그들의 부대를 찾아갔는데, 박일리야는 ‘오하묵에게 매수된 자’라고 하면서 최진동을 수감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최진동의 부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난동을 일으키자 사할린부대는 최진동을 석방하였다.

(※오늘날에도 당시 000에 관한 논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놀랍게도 사실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5월 12일에 종전의 한인보병 자유대대는 크라스나야라바(Красноярово)부터 원주둔지인 자유시(Свободный)로 이동하였고, 같은 날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서는 “연대장 그레고리예프 및 군정위원장 박일리야가 군정의회에 출두하여 군사보고를 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할린 의용대에게 고려군정의회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1921년 5월 13일 오전 11시경 사할린 의용대에서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전보가 왔다고 한다.

내용은 오하묵이 직접 마자나바에 와서 군대를 인수하기 전에는 어떤 명령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기를) 같은날 오후 3시경에 박일리야로부터 다시금 오하묵 앞으로 전보가 왔는데, 사할린 의용대 본부까지 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오하묵은 군대 인계인수는 군법대로 하는 것이므로 군정의회의 명령으로 파견하고 군대를 인계할 뿐이고 오하묵을 마자나바로 오라는 것은 안된다며 거절하였다.

같은 날 이청천이 블라가베셴스크(Благовещенск)로부터 자유시에 당도하였다.

러시아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 중국령 흑하시와 마주보고 있다. 흑하시는 예전에 한국에서는 애혼 혹은 아이훈으로 불려졌다.

고려군정의회 쪽에서는 이청천을 고려 각 의병대 교관으로 선임하였다.

이청천은 1921년 5월경에야 교관으로 선임된 것이다.

 

5월 14일경에 임시 고려군정의회에서는 사할린 의용대를 인수하려고, 김표돌, 최진동, 구춘선, 임호(사할린부대 장교)와 극동공화국 제12여단(참모부장 및 군정위원장) 및 지방수비대 장교 2명을 합한 8인 검사원으로 선정하여 보내는 동시에 사할린의용대를 이 검사원 8인에게 인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허위주장

이용 (이준 열사의 아들이다. 월북)

(※ 간도국민회 회장 구춘선은 실제 자유시에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22년 8월경에 작성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은 1923년 7월경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관에서 알 수 없는 경로로 획득한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데(친일파가 일제에게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르쿠츠크파를 자화자찬 하는 것 외에도 상대방을 악의적으로 매도하였다. 남한의 유명한 반공학자였던 김창순은 너무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을 사실로 인용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잘못된 자료가 계속해 떠돌기도 한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1921년 5월경의 대략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이르쿠츠크파는 최선을 다해 통합을 하고 아무르주 주민들과 독립군부대의 불편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사할린의용대는 처음부터 불응하였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자유시의 독립군부대를 기습하려던 소수의 사할린부대가 희생되게 된 것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이 문건은 자유시 참변을 주도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오홀라, 슈먀츠키의 자료나 당시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제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는지, 자유시에 가지 않았던 김좌진, 서일, 구춘선 등이 자유시에 도착한 것으로 허위 작성하였고, 각종 오류가 많다.)

 

최계립 사진 등
김승빈

같은 날 이르쿠츠크에서 합동민족군대 중 선발대 120명이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5월 15일경에 자유시 지방수비대 및 지방 공산당기관에서 임시 고려군정의회에 교섭이 있었는데, 이르쿠츠크파가 사할린부대 등을 “강도, 아편중독자, 무정부주의자, 강간범, 금광 노동자 집단” 등으로 몰아세우기 위해서, 마자나바 일대에 주둔한 사할린군대가 민간에 약탈을 하여 주민이 안심하지 못하고, 제야강(Река Зея)으로 왕래하는 상선을 억류하고 상인들의 금전을 탈취하니 이러한 군대는 하루바삐 무장을 해제하고 처벌치 아니하면 안될 것으로 두세차례 요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타도 목표였던 사할린 의용대를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서 사살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공개되는 극동공화국 제2군단, 오홀라•슈먀츠키 등의 기록과 일치된다.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1922년 8월경 작성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요 공격 목표는 ‘일제 침략자나 시베리아의 친일 조선인단체’가 아니고 ‘사할린의용대와 상해파’였음을 수십 쪽에 걸쳐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임시 고려군정의회에서는 대답하기를 사할린군대가 그와 같이 불법 행동함은 군대 자체의 과실도 있고 극동정부 군부에서 한인부의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며, 지금부터 고려군정의회에서 그 군대를 관리할 것이므로 만일 이후에도 그러한 폐단이 있으면 고려군정의회에서 책임을 부담하겠노라고 답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무장해제시키라는 요구를 방지하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이미 없어진 달뷰라 산하 한인부에 소속되었던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고 마치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와의 타협을 모색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허위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무렵 시베리아의 상해파 간부 몇 명은 투옥된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이용 등을 강도떼라고 주장하는 문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용 등은 북한, 중국의 자료를 보지 않는 한 언급하기 힘든 사람이다)

 

자유시 참변에 직접 관련된 이르쿠츠크파의 일부는 1921년 자유시 사건 이후 한 때 득세하여 고려군대 군권을 장악하였으나, 1929년경 이후부터 “종파를 조성하여 무고를 일삼았다”는 혐의 등으로 수년에서 수십년간 투옥되었다,

그들은 이미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 이전부터 과거의 행적 때문에 소련에서도 처벌되었던 것이다.

 

상해파 이용 편지의 압수

5월 18일에 상해파의 동림이란 자가 치타로부터 이용의 서신을 가지고 사할린군대로 가는 중도에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특립부원에게 포착되여 서신이 발각된 바 그 서신은 아래와 같았다고 주장한다.

자룡(한운룡), 극평(채영) 동무는 보시오.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였소.
나는 잘 지내오. 저비(혹은 제비, 납작코인 김하석)일파가 내려갔으니 아마 우쭐거리지오.

모쪼록 군대에 일반 군인으로 하여금 전부나 혹 3분의 2 이상을 고려군정의회에 불복시키시오.

그리하면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를 박멸하겠소.

제반 세세한 사정은 차거(此去) 동림 동무에게서 상탐하시고 실행하시오.

5월 4일 추산(이용)


(※일부 표현을 오늘날의 용어로 변경하였습니다. 이용의 편지는 타협적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서신을 압수한 즉시에 군정의회에서는 동림(董林)을 수금하고 이 사실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전보로 보고하였다.

 

5월 19일 오전8시 경에 검사원 김표돌의 전보에 군대를 인수하였으니 이로부터는 군대를 다소 정리하고 속히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김표돌이라는 동명이인이 이 무렵 여러명 등장한다. 당시 “표돌”, “표트르” 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5월 19일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일행은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하여 4일후에 치타에 도착하여 자유시 임시고려군정의회에 전보로 통지하고 극동공화국정부(원동정부) 총사령관 라핀(Лапин Альберт Янович, 1899~1937)을 면회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장차 행사할 것을 진술하자 라핀은 무한한 동정을 표하며 원동지대에서 있는 동안 활동상 편의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후원하겠다고 하고 다만 물질상 공급은 본 원동정부(극동공화국정부)에 의뢰 없음을 원한다.

이에 대하여는 고려군정의회가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인도하에 있음으로 원동정부(극동공화국정부)에 물질상 공급까지의 의뢰가 없음을 대답하였다.

라핀(Лапин Альберт Янович, 1899~1937)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 군사령관 재직 : 1921. 5. 4. 일경부터 1921. 6. 25. 일경까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46쪽에 따르면)

5월 21일에 김표돌은 김광 등 5인(설론위원으로 출장하였다가 즉시 수금되었던 바 군대를 인계한다는 동시에 방면)을 대동하고 환래하여 보고하기를 군대를 인계한다는 것은 형식상 처단(處斷)뿐이고 내용으로는 박일리야가 자기의 신복(信服)군인 몇십명을 선동하여 고려군정의회에 불복케 함으로 어찌할 수 없기에 명의상으로만 인수하였고, 군대에 대해서는 어떤 명령 전달도 없이 환래하였다고 한다.

고려군정의회 측에서는 이 사실을 동양비서부에 보고하였다.

사할린군대의 사정이 그와 같이 문란함에 의하여 부득불 정식군정의회가 래당하기만 행대(行待)할 밖에 다른 방침이 없었고 이로부터는 하등의 명령도 발함이 없고 사할린군대에 대하여 다만 식료일체를 여전 공급하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 그러나 이 무렵 사할린의용대가 러시아의 당국으로부터 충분한 식량을 공급 받았다는 증거는 오늘날까지 없다.)

1920년대 러시아 혼란기에 발행된 10만루블 지폐, 인플레이션으로 5루블 금화보다도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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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08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묘지에 묻히기까지 3차례 이장을 거쳤고 1645년 이후 크즐오르다 묘지에 이장될 때 북한에서도 관을 가지고 왔군요 2021년경 남한으로 오기까지 정치에 이용되기도 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08 3차례 정도 이미..이장했으면 유골이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큰 데, 졸속으로 이장을 또 하니 안타까운 점이 많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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