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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항사건의 전주곡' 시베리아 민간인 학살사 (2) 마자나바 학살 Мазановское восстание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10|조회수217 목록 댓글 5

'니항사건(러시아어: Николаевский инцидент, 일본어: 尼港事件)의 전주곡' 일제 침략군의 시베리아 민간인 학살사 제2탄 마자나바 학살.

(혹은 마자나바 봉기 Мазановское восстание)

 

앞선글 : https://cafe.daum.net/shogun/2DR/4795

 

오늘날의 러시아 시베리아 아무르주에서 발생한 1919년 마자나바 학살은 러시아의 각종 백과사전, 위키백과, 일본의 시베리아 출정사, 미국의 시베리아 간섭사에 반드시 등장하는 세계사적 사건이다.

일본•미국의 역사학계도 니항사건, 이바나프카 학살, 4월 참변, 자유시 학살사건 등과 더불어 대부분 인정하는 사건이다.

최근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한국에서도 ‘마자노보 학살’, ‘마사노프 학살’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으며

제야강 일대는 발해시대와 조선시대 흑수강 중류의 알바진 요새 전투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1921년경 조선인 박일리야, 안무, 홍범도, 허영장 장군 등이 주둔한 적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알려진 마을이었다.

대략 일제시대 흑수강 애혼(오늘날의 중국 흑룡강성 ‘흑하시’의 과거 명칭, 독립군 중에는 ‘아이훈’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 다양한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몽고 흑수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지방의 북쪽 200 ~ 300Km정도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이다.

전형적인 시베리아의 농촌 마자나바 군

1889년에서 1893년경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을 중심으로 제야강 일대에서 마자나바 군이 만들어진다.

고려인도 아무르주 자유시, 마자나바, 블라가베셴스크 인근에 수천여명이 거주하였다.

차르 러시아는 볼셰비키들을 유럽에서 시베리아 지역으로 귀양을 자주 보냈고, 1910년대에도 아무르주에 볼셰비키 지하 조직이 있었으나 1917년 2월 혁명까지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볼셰비키들의 득세

1917년 12월 이후부터 마자나바 일대는 볼셰비키들이 장악하기 시작한다. 백파들의 반란은 곧 진압된다.

일본군의 마자나바 점령

1918년 9월경 마자나바 상류의 제야시와 하류 자유시 및 블라가베셴스크까지 일본군이 점령한다.

 

오늘날 러시아에는 인구는 1만여명이라고 할지라도 면적은 남한 면적만한 군단위 행정구역도 있다.

 

오늘날 러시아 방송을 보면 1919년 마자나바 민간인 학살을 니항사건의 한 원인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 방송내용중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이 니항에서 일본인의 잔인성에 대해 보복할 것을 명령했다’는 부분이 나온다.)

 

https://youtu.be/P-vqLjZNZns

 

1921년 마자나바, 자유시 일대에서 벌어진 자유시 참변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역사와도 관계가 깊은 1919년 마자나바 학살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918년 9월경부터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아무르주 일대를 점령하자 이 부근에서도 내전이 발생한다.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등의 24개 마을의 친 볼셰비키 대표들은 백파와 일제 시베리아 간섭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봉기를 조직하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농촌인 마자나바 인근 제야강 건너 사하지나 마을에서 60명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무장 파르티잔 부대가 조직되었다.

침략자에 대한 마자나바 봉기가 준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르 지역의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봉기는 우연히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마자나바 봉기

1919년 1월 7일 정교회 크리스마스날 마자나바 마을에서 일본 점령군과 주민이 사소한 시비 끝에 충돌이 발생하여, 일본군과 백파는 마을 지도자들과 파르티잔 혐의자를 색출해 체포한다. (체포된 사람들 상당수가 사망한다.)

겨울날 술취한 주민과 일본군과의 다툼 때문에 발생했다는 소리도 있다.

 

1919년 1월 7일 또는 8일경에 마자나바 마을의 농민들은 현지 일본 점령군의 폭력에 참을 수 없어 대표단을 제야강 건너 사하지나 마을 볼셰비키 본부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파르티잔 사령부는 가장 가까운 마을 농민 약 1,000여명~ 2,000여명 정도를 동원했으며 1919년 1월 10일경 마자나바에 도착한 파르티잔들이 일본군을 공격한다.

(※ 이 무렵 마자나바가 150호로 구성된 독립군이 머무를 수 없는 촌락이라는 한국계 독립운동단체 00000파의 주장은 그냥 헛소리로 생각하면 된다.)

 

마자나바 마을을 방어한 일본군은 약 100여명, 백파군대는 약 150명이었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
만주 봉천을 통해, 애혼(흑하시) 등을 거쳐 아무르주로 진출한 일본군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을 다룬 책자

2,000여명이라고 주장하는 파르티잔 가담자 중 절반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실제 공격이 하루종일 감행되었음에도 마자나바를 해방시키지 못한다.

 

저녁이 될 무렵 파르티잔은 자유시 방향인 후방 크라스나야라바 마을에 일본군 증원군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리자 파르티잔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파르티잔 부대가 사하지나 방향에서 제야강을 건너 마자나바를 공격한다.

볼셰비키가 주장하기를 일본군과 백파는 약 25명에서 ~ 50명의 전사자를 내고 도주한다.

 

전투는 결국 파르티잔의 승리로 끝났다.

그들은 마자나바의 공공 건물에 붉은 깃발을 걸고 볼셰비키의 권력 회복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백파 군대가 파르티잔을 다시 공격하기 위해 접근한다. 매우 추운 날씨였다. 파르티잔들은 주변의 광산 노동자들과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무렵 일본군에 체포되었던 사람들은 손과 발이 얼어붙어 있었다.

파르티잔들은 마자나바 인근 마을까지 해방시키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했다.

 

일본군의 재공격

1월 10일경 일본군 마에다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 공격 부대가 스바보드니(자유시)에서 제야강 상류인 마자나바 쪽으로 이동한다.

일본군 지나가는 마을들을 불태우고 비무장 농민들을 살해했다.

1월 11일 정오 무렵 일본군은 파르티잔과의 전투 없이 마자나바를 다시 무혈 점령한다.

 

1월 13일 밤, 중대급으로 추정되는 마에다 부대의 일부가 마자나바 인근 사하지나 마을을 공격했지만 파르티잔들은 이미 떠난 뒤였고 주민들은 평화 협상을 위한 대표단을 보냈다.

 

(※ 일본군이 주장하기를 일본군은 사하지나 전투에서 약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으며, 6명이 동상을 입었다고 한다.

1월 평균기온 영하 20~30도 이하인 마자나바 일대에서 야외 활동중 동상에 걸리면 죽기 쉽다. 백파 포로들중 일부도 파르티잔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백파 군대중 주민에 의해 화형에 처해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일부 여성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숨을 시간이 없었던 마을 협상 대표단과 주민들을 모두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대략 15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1월 14일경 마자나바, 사하지나 일대에서 25채 ~ 42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마자나바 마을 인근에서만 내전과 큰 관계가 없던 대략 100명 이상 ~ 300여명 이상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 300여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은 볼셰비키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는 소리도 있다.)

 

일본군은 마자나바 상류의 푸짜치나 등지의 마을까지 불태워 이 부근에서만 결국 수백채 이상의 주택을 방화하였다.

주민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 더 외딴 마을과 타이가 숲으로 대피해야 했다.

겨울철 숲에서 동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일본군은 마자나바 외의 지역에서도 남녀, 어린이 및 노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마자나바 민간인 학살 추모비중 하나
마자나바 학살 추모비중 하나
마자나바, 자유시 일대의 항일 유격대
마자나바 주민
제야강의 마자나바 항구. 오늘날에는 도로 교통의 발전으로 항구 역할이 거의 상실되었다.

그 외에도 과거 봉기에 참가하였던 쿨레니치, 노비코프 등 파르티잔 20여명이 마자나바, 벨라야라바, 사하지나(Сохатино) 일대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총살되었다.

수백여명의 파르티잔들은 숲으로 피난하였다.

 

마자나바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본군의 잔혹함은 추가적인 파르티잔 봉기들을 막지 못했으며, 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들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켜, 반대로 아무르 지역 전체에 분노의 물결을 일으키고 거대한 파르티잔 봉기를 가속화했다.

 

지역 공산당 역사에서 마자나바 봉기는 일제 침략자에게 대항한 아무르주 최초의 대규모 농민 봉기라고 선전되었다.

그러나 2021년 오늘날 시베리아 농촌지역인 마자나바의 인구 감소는 뚜렷하였으나,

최근 국제 천연가스 가격 폭등 등으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가스를 수출하는 엄청난 규모의 플랜트 시설과 보스토치니 인공위성 발사장이 인근에 설치되어 급격한 도로포장과 기반시설이 확충되기 시작하였다.

불과 몇 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천지개벽할 변화라고 말하는 주민도 있다. 인구 증가도 예상된다.

 

2020년경 아무르 지역 TV방송 등은 1920년 아무르강 하류의 니항사건은 마자나바 학살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1919. 10. 3.일경 (10월 5일경이라는 소리도 있다. 비석에 적힌 날짜는 10월 3일이다.) 마자나바에서 일본군 대대병력과 파르티잔 간에 탈환전투가 또 발생하여 최소 33여명 이상의 파르티잔들이 사망했다.

추모 기념비에 적힌 파르티잔 명단이 그 정도 되며,

1919. 10. 3. 진행된 일제 침략자와의  마자나바 전투 추모비

내전 기간중 강에 버려지거나 태워지거나 매장된 시체가 도대체 얼마인지 정확하지 않다.

 

1920. 2. 7. 일경 아무르주 자유시, 마자나바에서 일본군이 철수 시작하고, 볼셰비키 군대에 의해 해방된다. 일본군은 3월 3일경 전원 철수하였다고 한다. (날짜는 자료마다 약간씩 다르다)

마자나바 학살 약 1년후

1921년경 안무, 허영장, 박일리야, 이용, 박애, 김규민 등 한국계 독립군 약 1,000명에서 5,000여명이 마자나바 군에 집결하여 사할린특립 의용대를 조직한다.

 

당시 행정구역상 아무르주 9개군 중 하나였던 마자나바 군의 도회를 포함한 총인구는 1만여명 이상이었으며, 주택수는 2천여채 정도로 추정된다.

(※ 박병길이 니항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했던 모 독립운동 단체가 주장한 마자나바 주택 수 150호의 10배 이상 규모였다.)

 

1928년 아무르강 대홍수로 마자나바 마을의 행정관청과 주택들은 제야강 상류쪽 8Km 떨어진 언덕으로 옮겨진다.

 

출처

https://proza.ru/2015/11/23/612

https://www.amur.info/news/2019/01/08/148297

https://elibrary.com.ua/m/articles/view/%D0%98%D1%81%D1%82%D0%BE%D1%80%D0%B8%D1%8F-%D0%B3%D1%80%D0%B0%D0%B6%D0%B4%D0%B0%D0%BD%D1%81%D0%BA%D0%BE%D0%B9-%D0%B2%D0%BE%D0%B9%D0%BD%D1%8B-%D0%9C%D0%A3%D0%A5%D0%98%D0%9D%D0%A1%D0%9A%D0%9E%D0%95-%D0%92%D0%9E%D0%A1%D0%A1%D0%A2%D0%90%D0%9D%D0%98%D0%95-%D0%9D%D0%90-%D0%90%D0%9C%D0%A3%D0%A0%D0%95-%D0%B8%D0%B7-%D0%B8%D1%81%D1%82%D0%BE%D1%80%D0%B8%D0%B8-%D1%8F%D0%BF%D0%BE%D0%BD%D1%81%D0%BA%D0%BE%D0%B9-%D0%B8%D0%BD%D1%82%D0%B5%D1%80%D0%B2%D0%B5%D0%BD%D1%86%D0%B8%D0%B8-%D0%BD%D0%B0-%D0%94%D0%B0%D0%BB%D1%8C%D0%BD%D0%B5%D0%BC-%D0%92%D0%BE%D1%81%D1%82%D0%BE%D0%BA%D0%B5-%D0%B2-1918-1919-%D0%B3%D0%B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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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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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10 일본군은 재공격으로 파르티잔과의 전투없이 마자나바를 무혈 점령했고 주민들은 평화협상을 위한 대표단을 보냈지만 대표단과 주민들을 모두 총살했군요 하지만 마자나바에서의 일본군의 잔혹함은 추가적인 파르티잔 봉기를 막지 못했고 반감을 증폭시켜 파르티잔 봉기를 가속화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10 예. 마자나바 학살에서. 대략적인 민간인 사망자는 수백명이고,

    러시아 내전기에는 수백만명이 러시아 전역에서 기아나 전쟁으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1차 세계대전으로도 많이 죽고요... 비극의 시대였지요

    일본군의 시베리아 간섭을 주민학살전쟁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도 간혹 있다고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11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1.10.11 잘 읽었습니다.
    쓰기 어려운 장중한 역사글을 올리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에 계급하나를 승작하여 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11 ...(족보에도 오를) 높은 관작을 하사하여 주셔서 **이 망극하옵니다. ㅎㅎ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휴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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