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23) 이르쿠츠크파의 기습 계획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17|조회수57 목록 댓글 2

이르쿠츠크파의 기습 및 강제 무장해제 계획
1921년 6월 10일경에 자유대대측에서 주장하기를 ‘사할린군대에서 이탈하여 자유시로 오는 군인들은 주로 총군부 군인이며 70명 정도가 자유시에 왔다.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사할린 의용대는 금일 미명(未明)으로부터 전부가 출동하여 산중으로 입거하는 형세다.’라고 주장한다.

이 정도 허위기록이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기록을 인용할 가치가 없으나, 이들의 주장이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했던 러시아인 오홀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기록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기에 인용한다.


(※ 수라제프카를 공격한 볼셰비키측의 슈먀츠키, 오홀라, 블류헤르, 셰르쇼프 등의 보고서는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약 100쪽 분량과 맞먹거나 문서량이 더 많지만 내용이 상호 유사하여, 공격자들은 미리 서로 합의후에 공격을 감행한 것이 명백하다. 실제 1921. 6. 27. 한밤중부터 공격을 감행한 직후 극동공화국 산하 군부대와 이르쿠츠크파의 보고서들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김승학 등에 따르면 수라제프카 주둔 독립군들은 “무정부주의 강도”, “악마”, “귀축 비적떼”다)


사할린군대에서 이탈한 군인들의 보고에 따라 고려군정의회에서는 이에 대한 선후책을 세우고 있을 때


허재욱(허영장) 장군의 자유로운 이동
사할린군대 제3대대장 허재욱은 자기 부관을 대동하고 함께 와서 보기하기를 역시 사할린군대가 산중으로 입거한다 하며 그 이유는

(※ 기근에 허덕이던 사할린 의용대가 왕복 600km 이상의 제야시 약탈을 계획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에는 그런 허위 주장은 없다. 또 마자나바와 자유시에는 산으로 부를만한 고지대가 없다. 자유시의 언덕에서도 60Km 떨어진 마자나바의 등불이 보인다. 이동을 차단했다고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한 후 바로 자유롭게 오가고 있음을 자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할린 의용대와 함께한 독립군 대부분이 이르쿠츠크파로 귀순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자유시 참변 직전에도 1,500여명에서 2,000여명 이상이 사할린의용대와 함께 하였다.)

(허재욱의 주장)

첫째로 군정의회에서 그리고리예프와 김민선을 포착하였으니 우리가 자유시로 출거하면 일반장교까지 포착하리란 추상이고

둘째는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가 자유시 사위에 속사포를 둘러놓고 사할린 의용대 출거함을 기대한다는 풍설이 있음으로 군대가 경동이 되였다 함으로

자유시의 고려군정의회에서는 사할린군대의 추상적 오해와 무리한 경동의 의혹을 양해시키기 위하여 일변으로 그리고리예프와 김민선을 방환시키며 일방으로는 허재욱 및 부관 양인(兩人)으로 하여금 고려군정의회의 처사에 대한 소문소견인 사실을 명백히 사할린군대에 알게하여 십분 해혹(解惑)케하라고 명령하였다.


김민선의 보고
6월 12일경에 김민선이 자유시에 와서 고려군정의회에 보고하기를 자기가 군대에 설론한 결과 일반 군인도 장차 자유시로 출래하려는 중에서 자기는 본시 수금으로 방환된 터임으로 시일지체가 있고 보면 고려군정의회에서 자기에 대한 의혹이 있을가하여 우선 급속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마자나바에서 탈래한 군인의 보고에 의하면 사할린 군대는 여전히 점점 원방으로 주거하는 형편이며 억기차 사할린연대에 재하던 하사 양성소 학생 90여명은 채영의 지휘하에서 사할린군대를 배척하고 만반위험을 무릅쓰면서 탈래한 장교 및 해 양성소 군정위원장 보고에도 사할린군대 전부가 점점 원방으로 찬주(竄走)하며 역로(歷路) 각 촌락에서 마차량, 식료 등품을 위력 징발하였으며 또는 해 군대중에서 자유시로 향응꼬저하는 의사가 유한자에게는 극렬한 위협을 가하여 일거수일투족의 자유까지 속박하는 바 즉 박일리야, 전응호(全應虎) 등 기개(基個) 장교가 일부 군인과 부동(符同)하여 여외 군인에게 적극적 강박으로 시령(施令)한다 하였다.



강제 무장해제 계획을 수립
까란다리시비리는 이 보고에 대하여 천만사려를 궁구하다 못하여 최후의 계책으로 사할린군대 무장해제할 문제를 제출하였다.


그동안 사할린군대에 대한 처사가 군율상 과단을 실행치 못함은 단순한 무마책으로 군심만회 하랸 것이 도로혀 피자에게 군율상 부적합한 태도를 시(視)함에서 점점 무시를 조장하였을 뿐아니라 현하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뿐이 아니고 기타 군대들에게도 군율무시를 가능으로 염습되는 폐단 즉 이와 같은 해독이 맹아(萌芽)할 넌지 모를 것이며 전후 보고에 의할지라도 무장을 해제하고 악분자를 제거치 아니하면 안될 것으로써 실행상 계획은 보츠카료프카에 주둔한 기병대로 하여금 사힐린 군대의 도주하는 전로를 차단케하며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와 오홀라는 자유시수비대 제12여단의 수개 중대를 영솔하여 사할린 군대의 후로를 추종하기로 결정하였다.



간도•연해주•이르쿠츠크 합동민족군대 군인들의 공격 반대
간도•연해주•이르쿠츠크 합동민족군대의 군인들은 니항 군인들과 마찰이 전혀 없었고, 니항 부대(사할린 의용대)는 모스크바의 레닌, 상해임시정부와 이동휘의 지지를 받으며 1920년 초 그 유명한 니항사건 당시, 박일리야와 류소심을 중심으로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고 일제침략군을 전멸시킨 독립군이었다.

(※ 2000년대 초반 남한 독립기념관 공식도서와 자칭 주류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니항사건을 일제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으로 주장하기 이전까지는 독립군의 승리가 정설이었고 리인섭, 김홍일, 리범석, 김승학, 강동진, 강준만 등외에도 자유시에 갔다온 대부분의 독립군의 주장도 이와 동일하다. 미국, 러시아에서는 1920년도 당시에도 일본 간섭군이 약속을 어기고 철군을 안해서 많은 문제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일부 파쇼주의 추종자들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는 구트만의 "니항의 파괴" .  강도 트리피츤이 폭력으로 니항에 입성한 후 수천여명을 체포해 수감하였고 500여명을 학살했다. 일본군의 단순 무장해제 시도를 위한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나 조선인회 서기 박병길은 좋은 사람이다. 감옥에 3,000명을 수감해 학살했으며, 최종 1만여명을 학살했다. 백파 장교, 자본가 등 수십여명의 진술도 포함되어 있다. ​                    한국 역사에서는 재등실 일기, 시마다 회고록, 이등방문 문서류 정도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

(※ 1920년 니항의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의 회고록' , 구트만의 '니항의 파괴', 이등박문 문서류, 재등실의 문서류 등의 값어치는 독립유공자 서훈에 활용될 수도 있고 박탈에 활용될 수도 있다. 재등실의 일지에 '조선의 애국지사'로 등장하는 사람이 남한과 북한을 포함하는 한국계 역사학자들에 의해 '매국노'로 인정되어 서훈이 박탈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재등실의 일지류는 자유시 사건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장에서 다룬다.)

남한의 역사학계에서 자주 인용되는 재등실 문서류. 재등실 문서류가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부분은 별도의 장에서 다룬다.
일본의 유명 정치인 '거인 재등실' , 조선의 애국지사라는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강우규와는 1번을 마주친다.
한국에도 남아있는 이등박문 문서류. 이등박문도 안중근과는 1번을 마주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독립군들이 사할린 부대의 무장해제에 반발하자,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와 군정의원 최고려 등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의 동의를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으로부터 받으려 시도한다.

1921년 6월 12일경에 김민선이 자유시에 래하여 군정의회에 보고하기를 자기가 군대에 설론한 결과 일반군인도 장차 자유시로 출래하려는 중에서 자기는 본시 수금으로 방환된터 임으로 시일지체가 있고보면 군정의회에서 자기에 대한 의혹이 있을가하여 우선 급속히 회래하였노라 하였다.

그러나 기(基)후에도 마자나바에서 탈래한 군인의 보고에 의하면 해 군대는 여전히 점점 원방으로 주거하는 형편이며 억기차 사할린연대에 재하던 하사양성소 학생 90여명은 채영의 지휘하에서 사할린 군대를 배척하고 만반위험을 모(冒)하면서 탈래한 장교 및 해 양성소 군정위원장 보고에도 사할린 군대 전부가 점점 원방으로 찬주(竄走)하며 역로(歷路) 각 촌락에서 마차량, 식료 등품을 위력징발하였으며 또는 해 군대중에서 자유시로 향응꼬저하는 의사가 유한자에게는 극렬한 위협을 가하여 일거수일투족의 자유까지 속박하는바

즉 박일리야, 전응호(全應虎) 등 기개(基個) 장교가 일부 군인과 부동(符同)하여 여외 군인에게 적극적 강박으로 시령(施令)한다 하였다.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는 차 보고에 대하여 천만사려를 궁구하다 못하여 최후의 계책으로 사할린 군대 무장해제할 문제를 제출하였다.

그동안 사할린 군대에 대한 처사가 군율상 과단을 실행치 못함은 단순한 무마책으로 군심만회 하랸 것이 도로혀 피자에게 군율상 부적합한 태도를 시(視)함에서 점점 무시를 조장하였을 뿐아니라 현하 군대가 사할린의용대뿐이 아니고 기타 군대들에게도 군율무시를 가능으로 염습되는 폐단 즉 이와같은 해독이 맹아(萌芽)할 넌지 모를 것이며 전후 보고에 의할지라도 무장을 해제하고 악분자를 제거치 아니하면 안될 것으로써 실행상 계획은 보츠카료프카에 주둔한 마병대로 하여금 사힐린군대의 도주하는 전로를 차단케하며 총사령관과 오홀나는 자유시 수비대 제12여단의 수개 중대를 영솔하여 사할린 군대의 후로를 추종하기로 결정하엿다.


사할린 군대를 무장해제하기로 결정된 것은 사세 부득이에서 최후 행동이나 차(此)로 유(由)하여 자유시 당지에 주둔한 군대 심리에 여하한 영향이 미칠가 또는 유언비어가 극성한 차제에 혹이나 오해를 야기할넌지도 난측임으로 일반 군대를 회집하고 최고려가 집합장에 출현하여 자초 군정의회가 자유시에 도착한 후로 위시하여 금일까지 사할린 군대를 위하여 만반심력을 극진주도함과 사할린 군대의 금일 것 군율을 무시하고 더욱히 난폭한 전후동작을 일일히 설명한 후에 군율상 부득이한 사세인 사할린 군대에 대한 처리방법으로 제반 장교 및 군인의 의사여하를 문한즉



독립군들의 반대
독립군대 중으로서 어떠한 군인이 말하기를 사할린 군대가 자유시로 출래하기를 불긍하고 타처로 피거함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피거하는 군대의 전설을 들은즉 오하묵, 김하석이가 군대당국에 재함을 기오(忌惡)함이고 군정의회를 반대함은 아니라고 함애 돌연 합동민족군대 중으로 일인이 출현하면서 하는 말이


“그러면 오하묵, 김하석을 군대에서 면제할 것이며 또는 오하묵, 김하석이가 과연 직정한 혁명자일 것 같으면 스스로 현장에 자살을 실행함이 적당하다” 하고 이어 무조건으로 대성질호하니 군인 중으로 분요가 일어나는 바 자유대대 군인 중으로 기개(幾個) 군인이 합동민족군인의 무리를 반문하며 심지어 호상 부집까지 있었음으로 자연 회장은 일대 문란을 야기하였다.


기시(基時)에 오홀나가 출석하여 일장의 연설을 시하고 억 기차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는 군인중으로 일인식 출두시켜 명석한 설명과 효론로 조건을 들어 군인의 의사와 혁명의 정신에 참조를 시켜 문답을 시하는 바

“군대의 정신은 하(何)인가? 군대에서 총사령관을 인정하는가 아니하는가? 군인은 명령에 복종함이 가한가 부한가? 명령에 불복종하는 군대는 용서함을 득하는가?” 등의 축조(逐條)에 답변을 요하며 또는 오하묵, 김하석에게 대한 기오와 토죄로 말할지라도 혁명계에 어떠한 죄과가 있으니 용납할 수 없다고 확실한 죄목을 들어 토죄하는 것이 아니라 덮하놓고 무조건 무조리하게 군대에 면제하라나 자살을 실행하라니 하여 문란을 야기함을 볼지라도 오하묵, 김하석에게 상당한 죄목 없는 것이 분명하고 그 반면에 군인은 피동에 불과함이 더욱 분명하며 그뿐 아니라 김하석은 정식군정의회가 래당한 후에는 군대에 대하여 하등의 책임이 없음이니 면제여부가 문제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설사 과거의 과실이 있다 할지라도 개인을 위하는 군대가 아닌 이상에는 상당한 죄목이 있는 개인은 면제처벌은 당연 자재할 것이 아닌가.

연즉 군대가 연합된 후에 2개인이나 또는 하(何) 허인(許人)을 물론하고 상당한 죄목을 들어 제출하면 상당한 처벌이 있을 것이니

아무쪼록 피동적 감정으로 더욱히 무조리의 토죄는 부당하고 군인으로 말하면 단지 무정신 행동이 아닌가 하는 등 조리적으로 일반군인에게 상세히 문답한 결과 군인들은 감정설을 주장할만한 여지도 없거니와 축조(逐條)의 질문에 문란을 야기하던 군인은 어색한 경우에 지(至)하여 사할린 군대의 무장해제도 적법이 아니라 할수 없는 답변으로

마침내 대다수 군인의 거수에 의하여 사할린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가결되다.

 

 

출처 :

코민테른 간부 오홀라의 보고서.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totalCount=1&itemId=kd&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kd_034_062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8%A4%ED%99%80%EB%9D%BC&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http://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haf_082_0560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17 결국에는 대다수 군인의 거수에 의하여 사할린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가결되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17 예... 그렇다고 합니다만.. 과거 남한에서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또 이게 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가려서 들어야 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