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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정의회' 의 선포문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18|조회수131 목록 댓글 2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기억들... 동료를 죽일 때 근거라고 제시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선포문(전문)

​                                    군정의회 선포문

자유시 군변에 대하여

지난 6월 28일날(스무여드랫날)에 자유시에서 군대소동이 있었다함은 신문에 보도와 인편의 전함으로써 누구나 다 들은 소식일지로다.
한데 말이란 전하면 느는 것이오. 실정을 목도한 사람이 아니면 분명히 알 수 없는 바임으로 몇 달 되지 않는 동안에 사실밖에 여러 가지 기괴한 소문이 많이 전하였고 딸아 엇지된 심인지 몰르고 이리저리 당치아닌 추측이 성히 생기게 되었도다.
이 비록 지나간 일이오. 우리 피차의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일반의 오해를 풀고 거짓말의 뿌리를 없이하기 위하여 본 군정의회는 이제 그 군변 나든 전후형편과 진압한 경과를 소상히 적어 무릇 독립혁명운동의 단체나 개인에게 향하야 널리 그 진상의 엇더하엿슴을 알니노라.


자유시와 그 근처에 있든 근대졍형
자유시와 그 부군에는 전년부터 우리의 군대가 있었는 바 그 군대들의 이름과 사람수와 대장은 대개 아래와 같었고
ㄱ. 자유대 000명 오하묵
ㄴ. 사할린대 000명 박일랴(박일니야)
ㄷ. 다반 이만대 000명 박그레고리
ㄹ. 간도대 0000명 최진동, 홍범도, 허근, 리청천, 안무
ㅁ. 학생대 00명 채영

(자유대는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조직된 것이오, 사할린대는 니꼴라옙스크로서 올라온 것이오. 다반이만대는 다반이만지방에서, 간도대는 간도로서, 들어간 것이오. 학생대는 군관학생으로 된 것)

각 대 사이에 평일에 연락된 관계로 말하면 다반이만대의 일부가 사할린대와 좀 접근하고 그밧게 각 군대는 대게 사할린대와 서의한즁에 특히 자유대와 사할린대의 감정은 좋지 못하였나니, 처음에 대한국민의회가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부근에서 의용병을 모집하여, 자유대를 편성하고 명의상에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19련대 부속하였으나, 실제 관할을 하여 오든 바,

뒤에 사할린대가 니꼴라옙스크로서 올너오매, 역시 자유대의 일례로 국민의회가 관할하는지라. 사할린대의 대장 대장 박일랴는 이에 불평을 가지고 치타(치따) 한인부(치타 한인부는 박애, 김진, 장도정, 계봉우, 박이완 등이 주의 선전한다고 로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총국안에 부처 설한 기관)와 샹해 차함사령 리용(이용) 등과 련락하여, 원동공화국에 청원하여, 각 군대를 제2군단에 부속하되 관할은 한인부가 하기로 하고 박일랴는 군정위원장 김이노껜지는 사령관이 되어왔스나, 자유대는 그 관하를 받지 아님으로 한인부는 다시 원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에이헤)에게 교섭하야, 한인의병대를 모두,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서 직속케하고, 박이완을 사령관으로 로국인 그리골예프로 참모장을 정하고,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오하묵을 치따로 불러간 뒤에 사할린대를 크라스노야로에 옴기고, 자유대에 항하여 복종치 아니면 무장을 해제하겠다 함으로 자유대는 복종한다 선언하였고, 간도대는 대국이 귀졍되기 전에는 중립하겠노라하였스나, 저들은 간도대의 량도를 사흘이나 끊으므로 하는 수 없이 복종하기로 하고, 사할린대 있는 곳으로 간 사실 등이 그 원인이러라.


군정의회 조직과 권한
군정의회는 금년 5월 이르쿠츠크에 모인 고려 공산당 창집대회에서 자래, 각 방면의 공연한 규각과 부질없는 분쟁을 일제 타파하고 투철한 각오 아래에서 통일 또는 적극적으로 우리 혁명운동을 진행하기 위하여 류동열, 최고려, 까란다리시비리, 세 사람으로 위원을 정하여 조직한 바이니,
그 권한은 우리의 군정일체를 총할할 것이오. 딸아 원동공화국에 관할되었던, 한인의병대는 다넘겨 맛게 된 바이다.


군정의회의 로력과 사할린대의 안된 행동
군정의회는 래력과 포부가 그러한 것인즉 무릇 우리 군대에 대하야는 하로밧비 정신을 모으고 힘을 합할 필요가 있음으로, 자유시에 당도한 뒤에 즉시 각 군대를 향하야 군정의회 조직한 리유와 방침을 알리고, 군대를 속히 자유시에 집합하야 대사를 같이 진행하자고 한 바이라.

이를 위하여 장래를 생각하는 이는 대개 뜻이 같음으로 자유대는 물론이오.
홍범도, 리청천, 안무, 최진동, 채영 등 여러 장교는 혹 홋몸으로 혹 부하를 다리고 자유시에 선후도착하였고, 간도대의 임시 대대장 허근 군도 역시 부하 사백여명을 다리고 오려하였더라.

한데, 유독 자래로 말성만키로 소문난 사할린대의 박일랴 등과 전능효 일패는 아무 리유가 없이 군대의 집합을 반대하고, 뿐 아니라 간도대의 자유시로 오렴을 다소의 세력에 의지하야 강제로 금지하는 등 부당한 행동을 계속하더라.
그러나 군정의회는 완화방침을 취하기로 하고 사령관이 사할린대에 가서 설유한 결과로 그 군대를 자유시에서 8리 되는 수라제프카 촌에 이둔식히고, 인차 장교회의를 열어 지나간 죄를 용서하기로 선고한 뒤, 이틀만에 다시 군사회의를 열고, 자유대와 사할린대의 묵은 감정을 서로 낮기로 권하매 두 군대의 군인들은 다-일시에 만세를 불러 화기융융하엿으며, 또 군인대표회의를 사오차 열고, 여러 사람에게 대제 방침을 다 깨닫도록 중복 설명하였으나, 이상한 심리를 가진 박일야 등은 겉으로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론 여전히 반항하여 온갖 당치 아닌 말로 그 부하의 어리석은 군인을 꾀우고 위협하야 아모쪼록 통일을 히살하고 분요를 일으킬 양으로 괴악한 짓을 다하였나니,
그중에는 소위 장교 셋이 단지동맹하야 최고려, 최진동, 안무, 리청천, 김하석, 홍범도, 오하묵 등 일곱 사람을 죽이고야 복종하자는 혈서까지 만든 일이 있었더라.

하지만 군정의회는 6월 수무이렛날에(27일) 다시 제 6차의 군인회의를 열고 그여히 화평한 가운대서 좋이 정돈할까하야, 여러 가지 리유로 개유하고, 또 권고하여 온갖 방법을 다하노라고 무한한 애를 썼으나, 소동내기로 직책을 삼듯하는 피 등은 기탄 없이 우에 말한 일곱 사람을 다 죽여야 하겠노라고 마구 떠듬으로, 사령관은 이에 일곱 사람의 죽일 죄가 없음과 또 그 같은 악한 생각을 고칠 것이라는 등 말을 하매, 피 등은 발을 구르고 소래를 질러 아주 질서를 물란케 할 뿐 아니라, 폭탄을 사령관에게 던진 자까지 잇어 회의는 전혀 여지없이 파열되고 말엇더라.


무장해제와 변란경과
형세가 이미 이에 이르매 피 등에 대한 방법은 오직 무장을 해제할 외에 다른 방침이 없음으로 군정의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심의한 결과 반동하는 부대와 및 그 세력 밑에 있는 군인의 무장을 전부 해제하기로 하고, 부근 로군 수비대에 밀령하갸 6월 스무여드렛날(28일) 새벽 세시에 수라제프카에 가서 피 등의 무장을 해제하기로 한 바 미리부터 소동하기로 준비하고 있든 피 등은 무장해제의 영이 나리매, 듯기는 차치하고 일시에 사격을 시작하여, 완전한 적대행위를 가짐으로, 수비대장은 하는 수 없이 본대로 부득이 하야 퇴군함에 이르럿더라.

이때를 당하야 피 등은 더욱이 기세가 살아, 어찌할 도리가 없음으로 군정의회는 긴급결의로 사령관에게 명하야 군대 전부를 충동케하야, 그 부근을 에위싸고 일변으로 속새포, 장갑포차를 가저다가 놋코, 다시 무장해제를 명하였으나, 피 등은 또 여전히 일제 사격을 시작하야, 도저히 순편히 조쳐할 방책이 없음으로, 오후 두시부터 세길 우를 견우고, 맹열한 시위공격을 더하게 되매, 그제야 변군의 괴수 박일야 등은 형세의 불리함을 알고, 먼저 도망하였고, 석양에 이르러 변란은 전혀 진정되었는데,

이일에 당장에 죽은 자 37명이오.
중상하여 병원에 가서 죽은 자 4명이며,
도망한 자 50명이오.
항복하고 잡힌 자 900여명이며,

또 리용 등이 사할린대에 대하여, 어대까지든지 군정회의를 반항하여 충동을 일으키라한 비밀문자가 들어 낫더라.


변군의 처치
잡힌 변군, 900여명은 전부 검심한 결과
공모주동한 자, 75명이요.
축임받아 협동한 자 450명이며,
그 나머지는 강제에 못이기어 일시 섞이엇든 자로 대부분이 간도대의 군인인 바,
그 공동한 진술에 의지하건대

간도군인은 처음일이 날 적부터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극력 반대하였으나, 위험한 강박에 엇지할 수 없어, 앞서게 된 것이오.
동무중에는 싸우지 아니랴하야, 총을 걱구로 쥐고 혹 내바리고 군정의회 군대로 넘어오다가 사할린대의 손에 잘못 죽은 사람이 여럿이오. 대대장 허근씨는 저 사위 안하고 방안에서 나오지 아녔나니, 우리는 실상 아무 죄가 없노라』

함으로 본 군정의회는 주모자 75명만 군사재판에 붙이기로 이르쿠츠크에 실어 보내고, 협동한 자 4백 5십명은 자동이 아니고 남에게 속음임으로, 무장해제한 대로 로동군을 만들고, 그 외는 전부 혁명군에 편입하얐노라.
이리하야 이른바 자유시 군대 소동은 아주 결말된 것이라.

누구든지 우에 쓰인 글을 보면, 진정한 사실을 요연하게 아실줄 믿거니와 이를 공포함에 당하야 본 군정의회는 우리의 장래, 특히 일반의 리해와 각오를 구하고 겸하여 우리의 품은 바 주의와 방침을 아울러 선포하노라.
세상에서 흔이 적화니 무엇이니 하야 평론이 있고,
또 공산당과 관련이 있다하매 염려 많은 이는 아마 모두가 세계적으로 화하야 고국의 독립에 등한치 아닐까? 혹 로시아의 정쟁에 리용되지나 아닐까? 하리다.

그러나 그는 다 아니할 걱정이니, 첫째 독립과 세계화는 반대되는 것이 아니오.
도리여 일치한 것으로 세계화를 하려면 먼저 독립부터 하여 놓아야 될 까닭이며,
둘째 로시아는 맘말고 우리 힘이 자라기만 할진 대 온세계의 불평과 억울을 바로 잡기 위하야 싸울지니, 엇지 남의 리용하기를 기다리리요마는,

실상 말이지, 현재 우리의 힘이 우리의 혁명 사업을 진행하기에도 쟝-부족한 것이었거니, 어느 겨를에 다른 일에 힘을 들이며, 다른데 힘을 논으리요. 이는 우리뿐의 생각이 아니라, 실정을 아는 우리의 좋은 이웃도, 충분히 량해하는 것이니라.

군정의회는 유일한 목적이 우리나라의 혁명에 있으므로 무릇 일본의, 자본주의, 군국주의의, 강도세력을 우리의 땅에서 전혀 모라내함이 품은 바 주의요.
이 주의를 관철하기에 순전히 무력에 의지하렴이 우리의 방침일뿐이로라.


1921년 9월 30일

고려혁명군졍의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3, 不逞鮮人團의 알력』, 朝鮮民族運動年鑑 朝鮮獨立運動 第2卷 民族主義運動篇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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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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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18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18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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