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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25) 다반 부대, 이만 부대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20|조회수190 목록 댓글 2

(※ 본 자료는 검증되지 않은 자료입니다.

1950년대 이후 과거를 회상한 회고록들은 러시아 정부 문서, 일본인들의 기록, 중국인들의 기록, 북한의 주장 등과 비교하면 과장되거나, 심지어 조작된 부분도 있으며, 축소된 부분도 있습니다. 1921년 자유시 사건과 관련하여 참고용으로 올립니다.)

아무르 지역 소련 정치 테러의 피해자

https://bessmertnybarak.ru/books/Kniga_pamyati_Amur_obl_7/page-3/

다반 군대

출처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1』

다반 빨치산대. 30/I 1958년 박춘봉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회상담.

나는 1895年生 원동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근방 다반촌(지금 Хабаровская область, Лазовский район, Р.Н.А село Александро-Михайловка, 하바로프스크 주, 라좁스키 구역, 알렉산드로-미하일로프카 농촌)에서 살았다.

(위의 러시아 행정구역은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1919년 말이였다. 내가 살던 다반촌과 안반촌(Кутузовск, 쿠투좁스크) 어간에는 러시아 사람들로 조직된 일본 기타 외국 무력 간첩자들과 백위파를 반대하여 일어난 붉은 빨치산대가 있었는데 그 군대를 Соков(소코프)와 Ткачов(트카초프) 두 동지가 지도하였다. 우리 다반 주민들은 그들한테 무기와 식료를 비밀이 가져다가 도와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동정하였다.

 

그 후 일본 군대는 우리 다반 조선촌을 점령하고 빨치산과 연락한다고 집을 수색하고 무죄한 주민들을 구타하고 검거하면서 우리가 조선 사람이니 독립운동을 한다고 볼셰비키와 관계있다고 별별 쟁탈을 하였다.

우리 촌 중 조선 주민들은 모두 일본 놈들을 미워하였고, 놈들의 만행에 격분하였다.​

하바로프스크 일대 일본군의 만행

그리고 조선서 일어난 3.1운동은 우리를 더욱 흥분하게 하였다.

우리 농촌에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온 최니꼴라이고(쟁바우)•김옥활 기타 이전 군인들이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우리 다반촌 조선학교를 점령하고 한 달 남짓 유하다가 학교 집에 불을 달아 놓고서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로 향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대는 돌아가던 중도에서 러시아 빨치산대 한테 조우전을 당하여서 전부대가 몰살하고 한 놈도 살지 못하였다.

그 후에 일본 군대는 또한 우리 농촌을 침입한다는 소식이 자자하였다.

 

당시 비밀리에 동작하며 러시아 빨치산을 후원하던 조선 청년들은 내놓고서 무장을 하고서 5~6십 명이 러시아 빨치산에 참가하였다.

 

그래서 조선 사람 중대가 편성되였는데 중대장은 최니꼴라이였다.

우리 군대는 러시아 사람들까지 천여명이 되었다.

우리는 각 러시아 농촌에 잠입한 흰파(백위파)들을 청산하면서 자주 극렬한 전투를 하면서 우수리 철도선 청룡정거장에 나왔다. (ст. Верная, 베르나야 역)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와 Неверская(네베르스카야) 어간에 있는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므코프)파를 반항하는 싸움에서 우리 조선 중대는 악전고투하여서 여러 날을 걸쳐 싸웠다.

최후에 전투는 극렬하여서 우리가 승리하였다.

 

당시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미코프) 무리들은 달아나다가 우리의 추격이 너무 심하니 가지고 가던 무기를 모두 우수리 강 얼음을 깨놓고서 얼음 중에다가 처넣고서 달아났다.

당시 그 전투에서 흰파(백위파)대장 Калмыков(칼미코프)란 놈이 직접 참가 지도하여서 나중에는 하도 시급하게 우리가 포위하고 습격하니 자기 처가 되는 여자를 우수리강 얼음궁에다 처 넣고서 저만 살겠다고 중령(중국령)으로 달아났다

 

. Калмыков(칼미코프)란 놈이 금방 중국 료하 지대 국경선에 당도하니 미리부터 그곳에서 흰파(백위파) Калмыков(칼미코프)를 지키고 있던 中국 조선 혼성 빨치산 부대는 그놈을 사로잡아서 그 자리에서 우리 지도자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КИМ.А.П.Станкевич) 원수를 갚았다고 선언하고 처단하였다.

 

※-내의 참고 주해 이인섭이 씀)] 이 전투에서 우리 동지 고순덕 • 김 Алексей(알렉세이) • 리세르게이 동지들이 전사하였다.

 

그 해 봄에 우리 다반 조선 중대는 300여명이였다.

우리 중대는 러시아 빨치산대와 동행하여서 그들 지휘 밑에서 우수리강 청룡정거장에 고 • 김 • 이 시체를 안장하였다.

 

우수리 강을 건너서 Амур(아무르)주로 향하였다.

인 역(Ст.Ин)에 당도하였다가 Орликовка(오를리콥카)로 옮겨가서 우리 조선 중대는 7~8월경에 H.P.인민혁명군 제8연대내 조선부대로 편성되였다.

그 후 우리는 흑룡주 보치갈(오늘날의 벨라고르스크 추정)에다 근처에 옮겨가서 니콜라옙스크(니깔랍쓰크)로 올라온 사할린 군대와 합하였다가

국민전쟁 시기에 한 번도 싸우지 아니하고 자유시에 있던 자유시 군대한테 창피한 자유시 사변을 당하고 해산 되였다.

우리 중대장 최니콜라이는 자유시에서 체포되여서 Иркутск(이르쿠츠크)로 들어가다가 감옥된 차량 장판을 궁글들고 도망하다가 두 다리가 끊어졌다.

그때 같이 도망하던 동지들은 최니콜라이 • 박그레고리 • 김이노겐지 • 박니콜라이 • 함빠싸 • 한권길 • 박춘봉이였다. 당시 한권길이는 부상된 다리를 앓다가 침대에다가 머리를 쪼아 자살하고 박그레고리•김이노겐지는 다시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들어가고 박춘봉 • 박니꼴나이 • 함빠싸 세 동무는 당시 Чита(치타) 조선민회장 태(太)용서가 가만히 중명을 하여주고, 금전을 주워서 달아나다가 중노에서 김하경 동지를 만나서 흑룡주로 왔다가 박춘봉은 집으로 돌아갔다.

[김하경은 지금 Андижан(안디잔)에 있으며, 당시 상해서 왔던 사람이 전교사]

1959년 전원 13/i59 조선 노동당역사 연구소로 보냈음.

 

이만 군대

출처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회상기(아령과 중령에서 진행되던 조선민족해방운동) 1, 김표돌(※김표돌의 이름을 쓰는 동명이인이 여러명 있다)』

이만 빨치산대 1918년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지도와 당시 원동인민위원 소비에트 외교 인민위원장이고, 하바로프스크 러시아 볼셰비키당 책임 비서이던 김알렉산드라 메들옴문니[Станкебиц(스탄케비치)] 지도하에서 조선인들 적위군(赤衛軍)이 러시아 적위군들과 같이 이만 시에서 시작하여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는 들어오는 기간에 싸우다가 다수가 전사하고 원동전폭이 흰파(백위파) 주중에 잠시 점령 되었을 때에 그 전쟁에 참여하였던 적위군 또는 사회당원들은 각처 조선 농촌에 잠재하여 있었다.

레□□□□하면 다반에는 류떼빤, 이만에 윤해 기타이다. 1919년에 3.1운동이 조선서 폭발되어서 연해주 조선인 가운데도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청, 소황령(소왕령) 신길동 등지에서 조선 빨치산들이 일어났다. 일본 놈들은 각처 조선 농촌을 강점하고 혁명자를 감금, 학살 하였고 각처에서는 러시아 빨치산 군대가 대대적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말 1920년 초이였다. 이만 근방에서 동작하는 러시아 빨치산대에는 조선 사람으로 조직된 한 중대가 있었다.

그 중대장은 김표도르 동지였고, 그 간부 위원들은 박공서•김덕보 이였다. 당시 그 군대 인원수는 백여 명이였는데 Калмыков(칼미코프) 흰파(백위파)는 반항하는 전투에서 ст. Вяземск(뱌젬스크 역), Верная(베르나야) 및 Красная Речка(크라스나야 레치카)에서 싸워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다반 빨치산대와 같이 동행하여서 흑룡강을 건너갔다.

1920년 여름에 이만 빨치산 조선 중대는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함께 치타 방면 후바이칼 등지로 이전되어서 흰파(백위파) Семёнов(세묘노프) 잔당을 섬멸하는 전투에 참여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이만 부대도 1920~1921년경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 현장 인근 지도

스바보드니 반일 파르티잔 부대

(오하묵, 김하석, 최고려 등이 오기 전에 아무르주 거주중 자유시에서 반일 파르티잔에 가담한 고려인들)

1921년 사망한 대한 독립군이 지금은 없어진 타타르스코예 묘지 인근에 묻혀 있다고 주장한 파포프.

자유시의 반일열사 리포 (혹은 이포)선생.   м.и. ли-по участник граждансой войны

1918 ~ 1920년경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조직되기 전 활동한 스바보드니시의 항일 유격대와 시베리아 민족계인 반일 파르티잔

반일열사 장상두 선생, 1918년경 자유시(스바보드니), 오하묵 등이 한인 보병 자유대대를 조직하기 전이다. я .и. жан-сан-дю яшка

1918년부터 시작된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 백파와의 스바보드니 일대 파르티잔 활동

 

자유시 참변과 관련하여 ​한국 인터넷에는 수백여권 이상의 시베리아 항일 활동에 관한 책을 제외하고, 구트만 같은 친일파의 책 1권만을 진리라고 올리는 자료도 있으나,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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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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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20 구트만 같은 친일파의 책 1권만을 진리라고 올리는 자료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태도로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1 과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특정 자료나 허위 자료만을 진실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다만 자유시 참변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친일파 까지 좋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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