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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27) 화해 2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23|조회수140 목록 댓글 3

오늘날 러시아 역사가들의 이르쿠츠파로 구성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한 의견

오늘날 자유시 참변을 기술한 러시아의 파르슨(Паршин, Евген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파포프(Попов,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박바리스(Пак,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혹은 B.D.박), 스말야크(Смоляк,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김타치야나(Ким Татьяна) 등 역사가들에 따르면, 1921년 5월경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를 러시아 영내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정부 혹은 국가의 역할까지 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바리스.    혹은 B.D.박

박바리스 : 고려인 역사학자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Пак, 1931년 1월 4일 소련 블라디보스토크 출생. 2010년 12월 24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작고)

파포프
파르슨

상해임시정부와 만주•연해주•중국 영내 독립운동 단체들의 반발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이르쿠츠크의 볼셰비키 군대 제5군단 등지에서 ‘무정부주의 반란군, 귀축 비적’ 등으로 재판받았던 수백여명 이상의 기록 등이 차차 공개되면, 왜 살인멸구(殺人滅口)를 당했는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상해파와, 만주•만주•중국•일본•미국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통합된 임시정부와 독립군 지도 기관을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1945년까지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공산당•중국공산당•의열단•조선의용군•동북항일군•소련파•광복군•국민당군•상해임시정부•이승만 등의 여러 단체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한 남한의 평가

그리고 100년 세월이 흐른 후 오늘날 남한에서 1921년 자유시 참변 전후의 이르쿠츠파나 상해파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많지만,

1921년경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연해주•중국 영내 독립운동 단체들을 지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독립운동 통합 단체가 맞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 그러나 니항사건은 독립군이 저지른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인데 그동안 지식인들이 숨겨왔고 자유시 참변은 만주, 러시아, 국내,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이 약탈, 강도, 강간을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람들은 다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은 당시 한국 민중의 독립운동 열망에 편승하여 러시아 영내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동양비서부와 결합해 만주•연해주•중국영내 독립운동 단체들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종파 위주로 조직되었고,

 

(※1921년 자유시 참변 직후 수년간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등 이르쿠츠크파의 몇명이 러시아에서 한국계를 대상으로 지도권을 행사하였으나,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결국에는 자유시참변과 직접 관련된 최고려•김하석•최호림은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사실상 제외된다.)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로부터 인정 받지 않고,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동양비서부의 간판에 가까운 그루지아인 까란다리시비리를 총사령관으로 내세우고, 최고려•류동열을 의원에 임명한 후, 군부•특립부•법원•문명부 등을 조직하여 1921년 5월 18일경에는 상해파의 일부(박애 징역 8년. 김진•장도정•계봉우 등은 징역 5년 등)를 제거하려 하였고,

 

특히 사할린 부대장 박일리야를 비롯한 상대방을 살해하기 위해 동양비서부의 몇 명과 결탁하여, 주로 『무정부주의 강도, 악마, 귀축 비적』 등등의 온갖 죄목을 뒤집어 씌워 자유시 참변을 일으켰다고 보기도 한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추후 행적

『고려혁명군정의회』가 특립부, 문명부 등을 조직하여 한 행적을 살펴봤을 때, 만주와 조선내에 병력을 보내 밀정을 처치하거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는 증거가 자유시 참변 전과 후 모두 발견되지 않으나, 남한의 일부 반공인사가 주장하듯이 공산혁명을 선전한 것은 맞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당시 최우선 목표는 고려 혁명계에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부 인물중 한 때 이르쿠츠크파 계열에 있다가 화요파로 넘어온 사람, 다시 남로당 등지로 왔다가,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한민국의 지도부에 기댄 사람들의 진술을

‘일제 강점기 교도소에서 몇 년간 복역을 했으니 의심할 필요가 없는 독립운동가의 진실된 진술’로만 바라 볼 것이 아니고 신중하게 해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무렵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산하에 조직한 『특립부』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악명 높은 정치 경찰이었던 『체카(Всероссийская чрезвычайная комиссия по борьбе с контрреволюцией и саботажем при СНК РСФСР)』를 모델로 한 것으로, 일제 및 밀정들과 싸운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나, 정치적 반대 세력을 감시하고 제거하는 데 활용되었다.

 

심지어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자유시 참변을 회피하기 위해 허위 주장을 섞어 작성한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도 일제가 독립군 내에 숨어있던 밀정으로부터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6월 22일경(혹은 6월 20일경) 까란다리시비리와 이르쿠츠크파의 설득 시도

1919년경 일본군 약 3,000여명이 자유시를 점령하였으며, 1921년경 독립군은 약 5천명에서 ~ 8천여명정도가 자유시 일대에 모여 있었다.
오늘날의 자유시 기차역
오늘날의 자유시 건물
자유시 북쪽에 건설중인 대규모 천연가스 수출기지
자유시 북쪽의 바스토치니 인공위성 발사장, 한국 위성도 가끔 여기서 발사된다.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는 각 군대 전부에 대하여 즉 군대에 대한 무근의 설이 횡행하는 것과 또는 혈서 등 불의한 점을 대충 넘어갈 수 없음으로 다시 일반 군대의 심리와 행동을 심사할 겸 효론키 위하여 각 군대 전부를 같은 장소에 회집하고 필두에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우리 의병대가 연해주 이만 등지에서 일본군대와 창귀(倀鬼) 고산파(靠山派) 마적과 충돌이 되여 일본군 130여명을 몰살하였으며 또는 마적도 다수의 사생이 있는 동시에 기관포 1문과 4,5백 자루의 소총을 득하였다는 소식을 연해주 특파원의 보고로서 전접(轉接)하였노라”

하여 위선 군심을 흥분케하고 분발한 언론을 다시 계속하되 우리 군대도 속히 중국영내로 전진하여 일군과 더불러 전쟁을 시작하여야 될 터이라.

 

“우리가 단취(團聚)한 본의가 무엇인가?

군대 통일을 위하여 의외의 다수한 시일을 허비하여 우리 혁명 사업에 무한한 마장(魔障)을 끼쳤으며 더욱이 공연한 풍파를 연출하니 혁명자의 단결이 이와 같이 무정신할 수 있으랴. 사업을 주중(主重)히 생각하고 목적한 바를 고려하여 혁명정신을 수습하는 동시에 일치 단결하여 우리의 자체를 공고케 할 것이 긴급한 문제이니 만일 우리가 종래 삼분오열하여 우리로서 분쟁을 일사(日事)하는 것을 일본인이 알고보면 박장대열(拍掌大悅)할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분개한 언론이 있은 후 최고려로 하여금 통역하라하여 최고려가 등단하니 사할린 군대 군인 몇십명이 좌우로 대성질호하되

“최고려의 언론은 원치 아니하노라”

하니

고려혁명군정의회 군정위원 겸 통역사 최고려

 

최고려는 우선 말하기를

그대들이 나의 언론을 불청한다면 나도 역시 그대들에게 말하고저 아니하노라.

그러나 즉금에 말꼬저하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의 말을 번역하는 것이니 그리 알고 들으라하고 이어 연설을 통역한 후 까란다리시비리는 전반 군인에게 대하여 다시 말하기를

 

“최고려가 지금 현장에 있으니 군인중으로 아무개든지 최고려에게 대한 죄목을 현명하게 말하라.”

 

과연 최고려가 유죄하면 그대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최고려와 같이 혁명대업을 도모할 수 없다하니 사할린 군대중 다반 군인 한명이 출두하여 말하되

“최고려는 대한국민의회에서 법부대신을 지냈으니 우리의 동지가 아니라”하며

 

또 어떤 군인은 말하되

“최고려는 작년에 자유대대 군정위원장으로 재하였을 때에 니항에서 래한 우리군대를 박멸하기 위하여 10월 22일 밤에 러시아군대 철갑차를 청구하여 우리 군대를 위협한 사(事)가 유하니 여차한 인으로 더부러 혁명사업을 도모할 수 없다”하니

 

까란다리시비리는 최고려로 하여금 변명하라 함애 최고려는 군인에게 대하여 이외 다른 죄목은 없음을 물은 후에 일일히 설명하되

 

“몇명의 군인의 무리한 토죄에 변명할 여지도 없으나 그대들이 금일 것 그것으로서 중대한 죄목이라하여 나로 하여금 혁명계에 용납지 못하게하여 가살(可殺)자로 지목하는 바이니 이에 대하여는 변명이 아니라 내가 그대들의 창칼에 피살을 당하기 전에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노라.

 

국민의회 법부대신이란 것은 구구히 변명꼬저 아니하노라.

그러나 과거에 의원으로 있었을 뿐이였고 작년 10월 22일 밤에 철갑차로 니항군대를 위협하였다 하는 것은 그 역시 무리한 토죄가 아닌가.

그때로 말하면 제군도 아는 바와 같이 제2군단 19연대의 폭동에 대한 무장해제가 자유대대 군정위원장 최고려의 능력이 미칠 수 있겠는가?

그 19연대로 말하면 당당한 책임자가 있는 터에 또는 로시아 군대가 아닌가. 그러면 중대한 무장해제를 자유대대에서 하등 간섭여부 없을 것은 군계에 종사한 제군이 물론 잘 이해할 것은 나의 구구한 변명을 기대할 여지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것으로서 대죄를 지목하여 최고려로 하여금 우리 혁명계에 수용치 아니하고 가살자로 인할 때에는 제군도 피선동에 불과한 것이라.

그러나 최고려가 죄가 유무간에 금일 통일문제에 최고려 등 몇명이 군대 당국에 있기 까닭에 통일이 못된다 하면 현장에서 나를 포살할 것이다.

내가 비스마르크나 나폴레옹이나 그와 같은 영웅도 아니다.

나 하나 없을지라도 우리 혁명계에 적은 영향이 없을 것이니 제군은 주저할 것 없이 현장에서 나를 포살하되 3천명 제군이 각기 일탄식을 발하여 나의 신체에 3천 탄혈을 주어 최고려의 사체로 하여금 고려혁명 제단에 제물로 당함을 원하노라.

 

그러나 제군에게 일언의 부탁이 있으니 발탄을 당분간 정지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최고려를 포살한 후에도 우리 혁명계에 해독을 주는 자가 있으면 내게 대한 과단의 처치를 필행하되 최고려의 죽음으로써 혁명계 불행의 악분자를 징계하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제군은 혁명 군대의 정신이 없는 것이다.

연즉 진정한 혁명의 정신이 있거든 현장에서 3천발 탄환으로 나를 포살하라!”

 

(최고려가 전 독립군을 모아 놓고 이렇게 연설을 하였다고 이르쿠츠크파의 몇명이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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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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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23 현장에서 3천발 탄환으로 포살하라는 발언이 호기롭네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4 최고려는 예수교 전도사까지 하였고... 말을 잘합니다.
    이동휘 선생이 레닌 자금을 잘못 집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도 너무 많이 탄압한 것입니다.

    독립운동은... 임진 왜란 같으면... 전투에 나가 앞장서서.. 왜군 수급을 가져오면 과거의 허물도 면천되고 하던 시대였습니다.
    최고려는 앞에서는 통합이요. 혁명이요. 독립운동이요 했습니다만.....

    뒤에서는 살인멸구? 에 가담했을 수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24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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