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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28)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 1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24|조회수165 목록 댓글 2

최고려,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의 연설

이로부터는 최고려가 “독립군 손에 죽는 것은 한이 없는 것”이라고 군중 앞에 나가서 자기로 자기를 사형에 선고하고 생명상 최후시간을 대하였다.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오늘날의 자유시 시내.  출처 : 유튜브

 

이에서 일반 군인들은 일동 침묵 중에 있을 뿐으로 시간은 십분간 이상을 경과하되 하등의 변동이 없음으로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는 다시 모든 군인을 향하여

 

“여러 동무들이여

고려혁명 군대들이여

중대한 혁명을 담부한 그대들이 이와 같이 유치한 언론으로 대사에 지장을 야기함을 볼 때에 한심 가통함을 금치 못하겠노라. ”

 

“저간 장황한 시일에 제군의 행동은 아녀자의 비웃는 바를 감위하여 기탄 없음에 이르니 나의 능력으로는 그대들과 더불어 같이 혁명을 도모할 수 없고 그대들을 인도할 수 없으니 이 시간으로부터 나도 책임을 벗고 그대들과 이별을 고하노라”

 

하며 우수절진(憂愁絶盡)한 언색으로 정신을 수습지 못하고 있는 중에

사할린 군대에서 장교 몇명이 나서서 자기들 군대를 향하여 우리의 금일 것 소위가 이유 없는 반대로 정신없는 행동이며 또는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까지 최후의 선언으로 강개불승(慷慨不勝)하니 각성한 금일로부터 일치단결하여야 된다는 것으로 군인에게 권유하여 비로서 군인 전부가 반응이 되는 동시에 어떤 군인이 나서며 하는 말이

 

“최고려가 중대한 죄가 있는 줄로 인정하였던 바 금일에야 우리가 토죄한 결과에 하등의 토죄할 죄목도 없거니와 또는 무죄한 자기로서 자기를 사형에 선고하고 그 자리에서 사형을 기대하니

우리가 첫째 그 사형 선고한 것을 벗기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최고려가 자기로서 자기를 사형에 선고한 것일지라도 취소되기를 바라는 자는 박장하라”

1918년에서 ~ 1920년경 자유시의 시베리아 민족계 항일 파르티잔

 

하니 만장 갈채성이 진동하고 또는 일치단결하자는 문제로 가결되여 만세를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흔동(掀動)하니 까란다리시비리는 이 형편을 보고 다시 돌아서 군인에게 대하여 책임을 벗는다는 말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군인들은 환희불승하여 까란다리시비리를 위하여 만세를 호(呼)하고 억 기차 자유대대와 사할린 군대간에 서로 악수례를 행하여서 과거의 감정은 불문에 붙인다는 뜻을 표시한 후 낡이 밝을 무렵(黎明)에 각각 산회하였다고 주장한다.

(※ 최고려 및 까란다리시비리의 연설 내용은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5~66쪽에서 인용함)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의 수

오늘날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1921년경 자유시 일대에 모인 독립군의 수는 6천여명 이상이다.

러시아의 파르슨, 파포프, B.D.박 등은 인구자료와 재판기록 등을 참고하여 작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신뢰성이 높다.

여러 자료들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1921년 6월경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수는 대략 3천여명에서 ~ 8천여명까지 추정할 수 있다.

가장 적게 잡는 자료가 이르쿠츠파와 극동공화국 군대 쪽의 주장인 3천에서 ~ 4천여명이다.

 

홍범도

젊은 시절의 안무 장군

1920. 4. 1. 일경 리흥진 선생의 장례식날  사할린 의용대원들 중 일부

 

의병전쟁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 독립군 100여명이면, 일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1,000여명으로 주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실제 1,000여명이 있어야 제대로 무장된 독립군 100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도 러시아측 자료와 러시아 정부 문서를 확인하기 전에는 독립군 수가 그렇게까지 많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19년 3•1운동이후 무장 독립투쟁에 나선 독립군들이 간도•만주•연해주•아무르주(흑룡주) 일대 항일 유격대, 사할린주•니항 해방,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을 하다가 볼셰비키와 상해임시정부 등의 교섭으로 1921년경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에 모여들어

국제군 혹은 몇 개 독립군 사단을 편성해 한국 국경으로 진출한다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다수의 독립군들이 그러한 목적으로 자유시에 모였다.

 

최고려가 종파를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용어라는 『이르쿠츠크파』 휘하의 자유대대, 그리고 중립을 지켰던 다수의 독립군들, 박일리야와 상해파 대부분이 1921년 6월 22일경 (혹은 6월 20일경)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서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것에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최고려의 “분란을 일으킨 자신을 총살시켜 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람은 이르쿠츠크파 문건외에는 오늘날 발견되지 않는다.

최고려, 까란다리시비 등이 혼자 하늘을 보고 떠들었는지, 잠꼬대를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미 그러한 말을 해서 쉽게 화해가 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독립군들은 까란다리시비리, 최고려가 누구인지 몰랐다.

박일리야와 같은 경우에는 그 유명한 ‘니항사건’에서 일제 침략군을 전멸시킨 효웅중 한명으로 독립운동의 목표를 가졌던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운동장에 모인 수천여명의 독립군의 대부분은 최고려, 까란다리시비리, 오홀라가 누군지도 잘 모를뿐더러 무슨 일을 과거했는지는 더욱 몰랐다.

 

다만 이르쿠츠크파 역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개월 동안 진행된 양파의 분란이 어서 끝나고 볼셰비키 측의 무기 압수·지급, 식량 배급, 피복 지급, 한국 국경으로 이동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하였으나, 그것은 러시아 대기근과 볼셰비키와 일제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쉽게 해결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3,000만여명의 기아민이 러시아에 있었으며 수백만여명이 굶어죽었다는 소리가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도 수백만명에서 ~ 수천만명이 죽었다는 자료가 있다.

 

그래서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당일에도 “우리끼리 무슨 전쟁이 나느냐?” 고 말하고 낚시•사냥•식량조달에 나갔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자유시에 모인 간도 독립군 부대원 중에는 조준 사격이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아침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다수였던 것이다.

 

최고려 등이 지휘권 투쟁에만 열심이었고, 사할린 의용대를 모략만 하다가, 감동적인 연설을 한번 해서 설득을 해보겠다니 야유도 쏟아졌던 모양이다.

이날 최고려가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나 오홀라의 통역사였으니 많은 말을 한 것은 사실이다.

 

홍범도 혹은 안무의 연설

홍범도가 레닌에게서 직접 받아 남한에서 논란이 된 권총집.   출처 : 홍범도의 동거인 이인복 여사의 후손 제공

 

연설을 한 것은 홍범도 등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믿을 수는 없으나, 홍범도 혹은 안무 등 지휘관들이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는 사람은 분명 있다.

아마 간도 독립군 부대원중 누군가도 여러 가지 제안과 연설을 하였을 것이다.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

이 연설이 어디서 나왔는 지 알고보니, 한국의 유명한 역사책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것이었다.

 

홍범도, 안무 등은 자유시 시내에서 걸어서 약 1시간 거리인 수라제프카에 주둔했던 사할린부대 등을 자유시 시내의 군관학교로 활용되던 운동장에 모아 토론 겸 화해를 시도하였다.

 

홍범도, 안무는 그 때도 이미 모든 독립군이 이름과 활동을 알고 있었던 유명한 독립군이었다.

홍범도가 의병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

무릇 장수란 것은 나라의 믿음직한 성곽이요 임금을 보위하는 손발이다.

전쟁 마당에서 승패를 좌우하려면 반드시 우으로 하늘을 이치를 알며 아래로 지리에 정통하며 중간으로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여야 하는 바 그렇게 한 뒤에야 성공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성과 신의로써 부지하고 있으나, 백제는 오만한 버릇으로 하여 멸망되었고, 고구려는 자고자대하여 위태롭게 되었으니, 이번에 우리의 올바른 정의로써 옳지 못한 적을 친다고 하면 뜻대로 될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전 하 편중에서. “必上得天道, 下得地理, 中得人心, 然後可得成功. 今我國以忠信而存, 百濟以慠慢而亡, 高句麗以驕滿而殆, 今若以我之直, 擊彼之曲, 可以得志.”)

고 연설하였다.

홍범도나 안무가 무슨 말을 했던지 큰 상관은 없었다.

독립군들은 “의병전쟁에 나가 왜적을 때려죽여 자기들에게 한없이 우러러 존경 받던 홍범도에게 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홍범도는 나중에도 최고려에게 여러 차례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 홍범도는 가족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홍범도의 묘는 2021년 8월경 알려진 것만 4차례의 이장을 거쳐 남한의 대전시로 이장되었다. 이정도면 유족을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DNA 유전자까지 훼손되었을 수 있다. 아 정말 슬픈 일이다. 북한 공산당은 최후까지 북한에 후손이 있다고 우겼다고 한다.)

 

특히 최고려는 “상해파 측의 러시아 자금 횡령 문제”를 빠트리지 않았을 것이며, 홍범도가 대범하게 러시아 독립운동 지원금 분배에 대한 문제를 모르는 척 넘어갔을 리가 없다.

 

( ※ 여기서 오늘날 남한의 사회주의운동에 관한 역사책을 쓴 사람이 레닌자금의 사용처가 밝혀졌다고 쓰면서, 일부 친일파와 000에게 넘어간 부분을 누락했다는 소리가 있다. 레닌자금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노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일 정도로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문제였다.

몇몇은 그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 돈을 사욕에 쓰고도 끝까지 헛소리를 하고 간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독립군은 지난날의 대립을 버리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모든 병사들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인용)

지금까지 고심 노력하던 군대 통일 문제가 대개 이상의 사실과 같이 십분 원만이 해결된 것을 만행으로 인하고 금후 긴급문제는 군대 편제와 공급 기타 정치상 여러 문제들에 관하여는

군정의회에서 (일방적으로) 연구 토론한 결과 군대 편제는 의병식에 편의한 점을 주로 중요함으로 인원수는

1중대를 장교 및 하사 병(幷)하여 백명으로,

1대대를 3중대로,

1연대를 3대대로 편성하기로 결정한 후 역시 일반 군인의 의사여하를 참고로 요구하려 하였다.

 

1921년 6월 23일경

오후 6시에 군인대표(10인에 1명씩)회를 열어 군대편제, 공급 기타 정치상 문제에 관하여 토의하다가 시간의 부족으로 문제에 대한 결정이 없이 산회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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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24 홍범도 연설에 삼국사기 내용을 인용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5 예. 김유신 장군 삼국 통일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설화와 삼국사기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독립군들도 인용을 한 모양인데.... 왜 삼국사기를 인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왜적? 일본과 싸운 이순신, 이억기, 권율,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곽재우, 김시민, 정문부 등도 대표적인 장군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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