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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29)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 2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26|조회수86 목록 댓글 2

홍범도•안무•허영장 등의 연설

6월 24일경

홍범도 등이 연설한 『의병 전쟁에서 변변한 말 한마디 못남기고 죽어간 독립군들 이야기와 일신의 안녕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라』는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린 게 바로 어제 오늘의 일이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의 자유시 일대 지도.  오늘날과 제야강 주변 지형이 다르다.

 

1895년 을미년 단발령 때부터 시작된 25년 정도의 의병전쟁 기간중 부모를 왜적에게 잃고, 친일파와 일제의 포위망를 탈출해 부대 지휘권과 보급•분배를 놓고 그동안 얼마나 다툼이 많았던가?

바로 옆 고을(郡)로만 이동해도 그 지역 의병과 반드시 합의를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었던가.

수천여명 독립군이 모인 이상 분란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계속 타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본이 아니었던가.

 

최고려•김하석•오하묵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갑자기 고려혁명을 인도하는 진짜 공산 혁명가가 되었다고 치고,

홍범도•안무•허영장 등은 이러한 경험이 많았는데 왜 적극 저지하지 못했는가?

일제의 밀정이야 즉결로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만, 독립군이 독립군을 쏴본 경험이 있었는가?

 

여기서 홍범도•안무•허영장은 설마 동양비서부나 자유대대가 사할린 부대 등을 강제 무장해제 시킬 때 조준 사격을 하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설혹 독립군 부대 위에 있던 러시아 볼셰비키 일부로부터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도

 

당연히 조준 사격이 아닌 하늘로 쏘거나 빗겨 쏴서 탈출하게 할 것이라고 자신들의 경험으로 미리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자유시 (스바보드니시) 시내 사진. 출처 : 스바보드니 시청 사진자료

 

문제는 이르쿠츠크파라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는 주로 ‘얼마우재’라고 불리던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대부분 어려서 사리분별이 힘들고 수개월 이상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볼셰비키 혁명가』라는 최고려•김하석•오하묵 등으로부터 사상 교육까지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 진정한 볼셰비키 혁명가가 되기 불과 몇 년전까지는 예수교 전도사 활동, 차르군대 참가, 차르 및 백파 정부 등에 협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 웃지 못할 사실은 고려혁명의 인도자라는 최고려•오하묵•김하석 중 볼셰비키 혁명 이전에는 자본가와 제국주의를 배척한다는 레닌주의를 동조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어제의 회의를 계속하여 군대편제에 관한 의견을 각기 진술하며 토론중인데 사할린 군대 군인의 주장은 일개 중대를 150명으로 편제함이 옳다고 하고

 

자유 시내 주둔 군인(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 합동민족연대, 간도 각 군대)의 주장은 일개 중대를 100명으로 편성하자는 각자의 주장이 불일함으로 인하여 설왕설래 분분하다가 결국은 서로간 충돌이 발생하여 회의 자리에 살풍경이 기하니

 

오홀라는 군인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군대편제에 대하여는 이미 군정의회에서 결정한 바 있으니 금번 대표회에 다만 의사의 여하를 참고할 것 뿐임으로 역시 가부에 대한 다소를 표시에 불과하니 각자의 의견을 고집함도 실행상에 무용으로 귀할 수가 없지 못하리니.

부당한 충돌과 공연한 시간을 허비할 것 없이 가부에 대하여 각각 거수할 것 뿐이라”

 

하여 급기 거수한 결과에 일중대를 100명으로 편성하자는 의견에 가결되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할린 군대 대표들은 분만히 생각하여 패담(悖談)을 제창하되

“압제이니 야심이니 또는 10인에 1인식 대표를 선발한다면서 자유시 군인에게는 예외 증선(增選)하여 표결권의 다수를 점하였다”

 

하는 여차 불평설로 기탄없이 시비를 야기하며 각자 멋대로 퇴석한다.

 

그러나 자유시내에 주둔한 군대 대표 즉 합동민족연대, 간도 각군대, 자유대대 대표들은 사할린 군대 대표의 퇴석을 불구하고 의연히 착석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하고 각각 산회하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부대 개편

6월 25일경

까란다리시비리와, 오홀라 및 류동열은 수라제프카에 가서 사할린 군대 장교를 회집하고

“어제 회석에서 자기 맘대로 퇴석한 대표자들의 불법 행동을 말하고 장교들로 하여금 그런 군인에게 엄칙(嚴勅)하라”

하니 사할린부대 장교들은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대답하되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철저히 군인을 통어(統禦)하기 난함은 현하의 사실이라 한다.

 

그것은 그 장교들의 임시적 핑계에 불과함을 짐작하나 아직 것 군정의회에서는 과거에 논한 계획을 그대로 씀으로, 어제 퇴석한 대표 군인에게 징벌 등 명령은 시행하거나 더함이 없이 하루 후를 계(戒)할 뿐이었고

오후에 자유시에 귀래하여 군정의회에서 이미 결안된 편제를 실행키 위하여

 

일개 중대를 100명으로,

일개 대대를 3중대로,

일개 연대를 3대대로 편성하되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사할린 군대 총계 1008명(다반군, 이만군, 총군부군, 독립단군 합칭)중으로서

 

간도•총군부 군대 400여명은 합동민족연대와 혼성하여 제 1연대로

니항군과 독립단군과 혼성하여 제 2연대로

자유대대와 국민군과 독립군대를 혼성하여 제 3연대로

기타 이만군과 다반군 양군대는 경비대로 편성하란 명령을 내렸다.

 

 

 

아무르주 일대의 중국계 반일 열사들의 활동

1900년도 쯤의 자유시 일대 지도.  자유시가 건설되기 전이다.  수라제프카 마을이 먼저 건설되었다.

 

6월 27일경

이르쿠츠크파의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오전에 사할린 군대 제3대대장 허재욱이 고려군정의회에 와서 말하기를 군대 편제에 관하여 총사령부에서 어제 이미 명령이 내렸다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우리 군대에는 아무 명령도 전달되지 않았다하며 자기는 일선으로 사할린 군대를 떠나 합동민족연대에 편입 되였으면 안심하겠다는 등 담화 중에 박일리야가 사령부에 들어옴을 보고 말하기를 저자들이 내가 이와 같이 보고하는 것을 보면 어떤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면서 황망히 피신하여 곧 귀거하였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의 주장은 자유시 학살 이후 일어난 일을 보면,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말임이 명백하다.

 

허영장(허재욱)은 나중에 동양비서부가 아닌 『러시아 공산당 최고 지도자』에게 자유시 참변의 부당성을 탄원하였다.

 

(※참고자료 : 러시아 정부 문서 전자 도서관. 『1921년 10월 25일자 허재욱, 이병채의 편지』

http://docs.historyrussia.org/ru/nodes/48195#mode/inspect/page/2/zoom/4.

제목 : 『Доклад представителей корейских партизан в Иркутске Хе Дзе Ука и Ли Бен Цхая Исполкому Коминтерна о расправе с корейскими партизанами. 25 октября 1921 г.』)

 

자유시 참변의 참혹함은 허영장 같은 사람도 규탄에 나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현재 남한과 러시아 거주 고려인의 기록 등에서 자유시 참변 전후 중국계 파르티잔과 중국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룬 내용이 없다.

 

6월 27일 한밤중부터 불의의 기습 공격에서 탈출한 박일리야가 자유시에서 블라가베셴스크 방향으로 이동하여 흑룡강을 건너 중국령 흑하시(혹은 애혼) 방향으로 건너간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블라가베셴스크에 있던 러시아 공산당원과 중국계 반일 파르티잔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자유시 참변 이후 사망자 조사에 나섰던 000 등도 이 경로를 활용한 것이다.

간도 지방 국민회 회장 구춘선이 남긴 기록물 등에서 중국계 반일열사 측의 역할도 있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문제는 청나라 시대 알바진 요새 전투 때부터 크게 문제가 되어 애혼 조약(오늘날의 자유시에서 직선거리 140Km 정도 떨어진 흑하시 일대에서 맺은 조약)이 자유시 부근에서 체결되었고,

1921년 당시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에는 아마 고려인 수와 비슷한 수 이상의 중국인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이 무렵 중국계 반일열사들의 활동은 '신불해'님의 자료가 잘 설명하고 있다.

https://cafe.daum.net/shogun/MqaT/72

러시아령 아무르주 거주 중국인들이 볼셰비키 혁명에 동조하고 시베리아의 일제 침략자와 싸운 것은 사실이다.

중국계 파르티잔의 역할은 자유시 참변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아 추가적인 자료 확인이 필요하다.

 

이동휘와 상해파의 독립군 부대 국내 진군 계획

박일리야와 이용 등의 탈출경로와 중국계 항일 파르티잔의 역할 등에 비추어 볼 때, 이동휘와 상해파 측의 자유시 집결 독립군 부대에 대한 계획도 상당하였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몇 명을 고려 혁명계에서 제외시키고 러시아 볼셰비키•만주 친일 군벌•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의 손바닥을 벗어나

독립군 부대를 연해주의 러시아내전의 중간지대나 한만 국경지역으로 이동시켜 유격전이나 국내 진군을 계획한 것이다.

이동휘는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는 데 가장 기여한 인물이 맞다. (또 하나의 인물은 아마 이 무렵 활발한 활동을 한 이르쿠츠크파의 최고려다.)

상해파의 대표적인 독립군 부대장이 이용과 박일리야다.

이르쿠츠크파의 기습 공격은 "강제 무장해제"를 내걸고 현장에 있던 박일리야를 살해하기 위한 공격으로 보여진다.

 

흑하(애혼) 지방 일대에도 당시 만주의 악명 높은 친일 군벌인 장작림 일파와 러시아 백파, 일본군의 동청 철도 점령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상당하였고, 만주에도 손문 일파를 추종하는 세력과 다양한 반일 열사들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 내용은 추후 글로써 남기고자 한다.)

 

 

6월 27일경

그리고리예프와 박일리야는 군인 수십명을 이끌고 와서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에게 말하기를

“이 군인들은 간도 군인 전부의 대표로서 여기 온 이유는 간도 군대에서는 니항 군인들과 결단코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이 있음으로 이전과 같이 사할린 군대에 편입시켜달라”

하였다.

 

까란다리시비리는 답하기를

“이미 명령을 발표한 바 있으니 명령대로 실행할 것 뿐”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위 허재욱의 의문 및 요구하는 의사에 의할지라도 어제의 군대 편제에 대한 명령은 일반 군인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 즉 간도 군대 대표 위조 청원은 박일리야의 수단임이 확실 명백하다고 이르쿠츠크파는 주장한다.

관련 인물들

김동한(Ким Дон Хан) : 일제 밀정으로 변절

김민선(金敏善, Ким Мнишен)

김승빈(金承彬, Ким Сын Бин)

계봉우(Ге Пон У)

그리고리예프(Григорьев)

박병길(朴秉吉, 朴炳吉, 박바실리, 박와실리, Пак Василий, ワシリー朴. 1898년경 출생 추정 ~ 1921. 1. 28. 혹은 2월경 사망) 1917년쯤부터 니항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1918년경 일본의 시베리아 침략기 일본군이 점령했던 니항의 조선인회 서기였다.

이지택, 김낙현, 최호림, 김창순, 박민영, 반병률, 윤상원 등의 대략적인 주장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이전에 니항의 일본인들이 알 수 없었던 비밀독립운동을 단체를 조직하였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인 니항부대 380여명을 조직한 사람으로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는데 가담하였으며, 성품이 원만하고 살인과 약탈을 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측 기록과 박병길의 동료였던 이지택•김낙현•최호림의 진술을 대조해 보면 『트리피츤』 등을 『무정부주의 강도』로 몰아 살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니항사건과 자유시 참변 당시 자신들의 행적을 허위 진술한 부분이 상당하다. 박병길의 행적도 이르쿠츠크파의 일부가 상당 부분 거짓말한 것으로 보여진다.

 

니항에 거주했던 니항 일본인회와 박일리야 등의 다수 기록에는 학력•나이•친일파여부 등 과거를 확인하기 힘든 부랑인으로 니항의 일본인 상회에서 일했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일본인 및 친일파들과 결탁하였다가 1920. 2. 29.일경 트리피츤의 니항 해방 이후 파르티잔에 의해 일제에 협력한 죄목으로 처형 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조선인 부대장 박일리야의 비호로 처형을 모면하였다.

박병길은 박일리야의 사촌여동생의 약혼자였다는 소리도 있다.

박병길 등은 니항 해방 이후에서야 조선인 파르티잔 부대에 가담하였다. 이지택의 경우 본인 주장에 따르면 1919년 3•1운동 때는 니항에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1920. 7월경 께르비로 피난하여, 친일파 안드레예브, 김낙현, 이지택 등과 트리피츤 등을 ‘무정부주의 강도떼’로 몰아 일본군의 방조 아래 기습해 결국 살해했다.

독립유공자 김낙현은 동료였던 안드레예브가 진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안드레예브가 일제에 협조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측 역사가들이 사실로 인정한다.

 

박일리야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니항 부대원들의 반발 때문에 아무르주 자유시로 도피하여 이르쿠츠크파인 오하묵, 최호림의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가담하였으나, 여기서도 자유시에 도착한 과거 트리피츤 부대였던 제19연대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하는데 관여하였고 결국 조선인 사할린부대원들에 의해 1921. 1. 28.일경에서~2월쯤에 살해되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 되는 중요 인물이며, 1920년 니항 사건과 1921년 자유시 참변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김홍일, 이범석, 리인섭, 박일리야, 이용, 조선 노동당, 사할린부대원들의 평가와

최호림, 김낙현, 이지택, 김창순, 박경리, 박민영, 반병률, 윤상원 등의 이론이 정반대 의견으로 대립된다.

러시아에서는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이르쿠츠크 볼셰비키 5군단 군사재판소 기록 등이 나중에 공개될 모양이다.

 

박일리야(박윤천, 朴允天, 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 :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사에 등장하는 니항사건 당시 조선인 니항부대를 조직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블류헤르(Блю́хер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1890~1938)

하나테루유키(原暉之, 원휘지) : 일본인으로 『尼港事件 の諸問題』 등을 저술함. 니항사건에 관계된 조선인 박병길과 이지택을 언급하였고 일본에서 니항사건과 관련되어 자주 인용됨

홍도(Хон До)

한명세(Хан Мен Ше)

한운용(韓雲用, 1895~1921)

한형권(Хан Хен Гвон)

홍범도(洪範圖, Хон Бом До, 1868~1943. 이명 김범도, 박범도, 범도) :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제 침략기 앞장서서 의병대를 조직하여 국내에서 여러차례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나는(날아다니는) 홍범도. 범도 나간다’라는 명칭으로 널리 불려졌다고 한다.

안무, 김좌진, 허재욱, 나중소, 이범석 등과 1920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1년경 1,500여명의 휘하 부대중 일부를 거느리고 만주에서 러시아령으로 이동하여 자유시 참변 무렵 아무르주 자유시와 마자나바 일대에서 주둔하였다.

자유시에서 홍범도가 나가 연설을 하면, 독립군들이 한없이 우러러 존경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 까라막치 지역에서 세거하여 3차례 정도 이장되었으나, 다시 2021년 8월경 남한의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허재욱(許在旭, 이명: 허영장(許營將, 許令將), 허근(許謹, 許根), 허영진(許泳振). Хе Дзе Ук), 1866년쯤 출생) : 청산리 전투, 자유시 사건 등 참가

 

까란다리시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년 사망) :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크라스나쇼코프(Краснощёков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1880~1937) : 러시아 내전기 동시베리아에 설립되었던 극동공화국의 수상(최고 지도자)이었다. 상해파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등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극동공화국 간부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가를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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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26 이동휘와 상해파의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군계획이 있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7 예.. 그러한 계획으로 독립군들이 자유시에 집결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러시아 내전 간섭군들이.. 한 때 모스크바까지 위협할 정도였고, 볼셰비키는 여러 지지세력과 군대를 끌어들였습니다.

    이르쿠츠크파도.. 국내 진군을 계획은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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