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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31) 한국이 보는 자유시 참변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0.28|조회수130 목록 댓글 2

한국이 보는 자유시 참변

출처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 독립군전투사(상)』, 1973
국사편찬위원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3권 제4편 2장 4절 참조.
『독립신문』 1922년 5월 6일자, 채세윤(蔡世允 당 18세) 당시 니항군(尼港軍) 소대장 기술 참고.
『독립신문』 1922년 6월 3일자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부 엮은 『조선민족운동연감』 1921년 9월조 참조.

(...... 중략......)

이 무렵 자유시 일대에 모인 독립군들의 지도권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다툼으로 자주 변경되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흑룡주 제야강변 마자나바(마사노프 라고도 한다.)의 상해임시정부•상해파측 군사 위원회에서는 다시 독립군 부대의 통합을 기도하여 15명의 군사 위원을 재선출하고 교섭 대표를 원동공화국 서울 치타에 보내 협상하였지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가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 영내 한국 독립군 부대의 고려혁명 군정의회 이관이 지시된 이후였기 때문에 군권을 둘러싼 다툼은 결국 이르쿠츠크파의 승리가 되었다.

 

그리고 사할린 의용대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만주 방면의 독립군 부대가 군정의회와 러시아군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든가, 아니면 이르쿠츠크파에 편입될 형편이었다.

여기서 여러 무장 단체의 독립군들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 독립군이 생명을 내걸고 싸운 것은 조국독립을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들은 만족치 못한 무장이나마 몸에 지닌 이대로 만주 땅으로 돌아가 독립 전쟁을 전개하자’

고.

오늘날의 자유시

 

1921년 5월 어느날 사할린 의용대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독립군 부대는 주둔지를 떠나 삼림과 강을 통과하여 만주 쪽으로 행군을 시작하였다.

중국령 애혼 지방 혹은 북만주까지는 대략 130Km~190Km 정도 거리나 높은 산이 전혀 없는 평원이었다.

1920년 니항에서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추모비. 독립운동가 리흥진, 허재녕 선생 등이 여기 잠들어 있다.

오늘날 러시아 아무르강 하류 니항에 세워진 니항사건 추모비.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부대 본부 건물터에 세워져 있다.

일제 시베리아 및 만주 침략군에 의해 억압 당하던 니항의 2,000여명 화교를 구원하는 데 앞장선 중화민국 군함 이수(利綏), “江亨”,“利川” 등

 

강형(江亨) 함

1920년 니항사건 당시 중화민국의 유명 반일열사이며 지나사변의 용장이었던 진세영(陳世栄, 陳季良) 장군

문호훈장 등을 받은 중국의 대표적인 반일지사이다.

https://baike.baidu.com/item/%E9%99%88%E5%AD%A3%E8%89%AF

https://www.krzzjn.com/show-1003-75707.html

 

그러나 험로를 강행군하는 중 기아와 곤고가 뒤따랐고 대대장 중의 한명인 허근(許根, 이명 : 허영장, 허재욱) 등의 왕복 주선으로 지휘관들의 생명 안전을 보장하고 요구를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무장 부대는 다시 회군하여 자유시에서 5리 아래에 있는 한국인이 많이 살았던 수라제프카 촌에 주둔하고 전체 독립군의 통일 방안을 토의하게 되었다.

 

이때 수라제프카촌에 주둔한 군대는 1천 5백여명 ~ 2천여명 정도이고 안무(安武)·홍범도(洪範圖)·허근 등의 휘하 군인 약 5백여명은 자유시 내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양측 대표들의 회의는 여러 차례 계속되었으며 중간에는 이동휘•홍범도•문창범•라핀•안무 등 노령 방면 유명 인물들의 조정도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부대에서는 군정의회측의 주동 인물인 최고려•김하석•오하묵의 제외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군정의회측에서는 사할린 의용대의 무조건 복종을 종용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회담은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러시아 내전 무렵 1920년대 장갑차

러시아 내전기 장갑열차

러시아 내전기 장갑열차

1920년대쯤의 아무르강 경비함

까란다리시비리와 기병 부대

일제 침략군의 장갑열차

오늘날 하바로프스크의 러시아 아무르강 경비함

오늘날의 러시아 아무르강 경비함

 

고려 군정의회측은 처음부터 사할린 의용대에 대한 강제적인 무장해제를 시도하였고, 군사력의 우위를 확보후, 6월 27일의 회담이 결렬됨과 함께

6월 28일 아침 동트기 전부터 자유시 수비대 및 적군(赤軍) 제29연대, 장갑차 2대, 장갑열차 2대, 장갑함, 기병대 등을 동원하여 제야강변 수라제프카 촌 주택가 및 공장지대의 사할린 의용대 주둔지를 총공격했다.

 

(※ 사망자 조사에 참여하였던 대한혁명군측 성토문에서는 공격군이 대략 1만여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비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하였고 니항해방•봉오동•청산리 등지에서 용맹을 떨친 사할린 의용대 측이었지만 2대의 장갑차, 30여 문의 기관총, 군함 함포사격, 장갑열차 포격, 6백여명~9백여명의 기병대를 앞세운 러시아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 등 대병력의 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공격 개시 약 1시간도 되지 않아 사할린군은 싸울 의사를 보이지 않았으나, 공격군의 가가호호 색출하고 제야강 섬과 묘지 인근, 바르다곤 방향까지 추적하는 방식의 공격이 아침 6시경부터 한밤중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사할린 의용대측의 전사 2백여명, 수십여명의 익사, 다수의 중상자, 행방 불명 2백 50여 명, 포로 9백여 명을 냈다. (※대략적인 사망자는 4백여명에서 7백여명으로 추정된다.)

1921년경의 자유시 지도

 

오늘날 수라제프카 구역 셰르셰바 거리 일대의 주택가에는 시체가 즐비하였다고 한다.

2군단장 셰르셰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오늘날 자유시에 있다.

수라제프카와 만주와는 최단거리로 약 90Km정도였다.

그래서 박일리야를 비롯한 다수의 수라제프카 주둔 독립군들이 만주, 연해주 등지로 탈출할 수 있었다.

 

1923년경 독립군

1920년대 한국 독립군

 

이 참변을 당한 독립군 부대에 노령 방면에서 구성되었던 니항군(尼港軍)을 중심으로 다수의 만주 방면 독립군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악전 고투를 거듭하여온 수많은 애국 투사가 일부 군 지도자들의 군권 쟁탈싸움으로 하여 희생되었던 제야강변에서의 대참사는 독립운동사의 오점이다.

 

이르쿠츠크파에 한 때 가담하였던 독립군 중 류동열, 이청천, 오광선 등 일부 장교는 임시정부 및 각 애국 단체의 외교적 활동으로 이르쿠츠크파를 벗어나 석방되었지만, 3백 60여 명은 소위 심사 과정을 거쳐 군정 의회군에 편입되고 4백여 명은 무정부주의 반란군•반혁명주의자로 취급되어 억류, 악형·노역·기아의 온갖 고초를 겪다가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그리고 뒤이어 국제 공산당에서는 원동 정부와 일본간의 국제적 문제로 인하여 한국 독립군의 만주 출동 계획을 부득이 중지한다고 하면서 당초 독립군과의 협정 혹은 약속을 파기하고 한국인 부대의 이르쿠츠크 이주를 명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후 볼셰비키 군대 제 5군단 관할의 1개 여단으로 개편하고, 이르쿠크파 측의 고려혁명 군정의회도 해산하니 1920년에서 1921년 사이 자유시에 모였던 독립군의 국내 진군 계획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채세윤 선생

 

(※ 그러나 오늘 한국의 일부 주류 학자 중에는 니항사건은 일본에서 저술활동을 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존J 스테판』의 이론대로 민간인 4천여명 학살이 본질이며, 니항 주민 1만 5천여명중 2천여명만 남고 학살당했는데 이것은 박일리야 등의 소행이다. 그리고 자유시참변은 사할린 부대와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들이 살인•약탈•강간을 했기 때문이라고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도 있다.

 

 

관련인물

진세영(陳世栄, 陳季良, 1883 ~1945) : 복건성 푸저우 출생, 강남수사학당 필업, 1920년 아무르강 하류 니항사건 기간중 배수량 550톤 정도의 군함 강형(江亨)의 함장 겸 강방함대 분함대 영대장이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 당시 파르티잔에 협조하여 함포를 파르티잔들에게 대여하였다고 한다.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 등은 처형되었으나 진세영은 일본군의 재공격에 니항에서 억압당하던 화교 2,000여명과 중국 영사를 탈출시키고, 4척의 함대를 아무르강 상류인 하르빈으로 무사히 이동한다. 1924년경 장령으로 승진한다. 1932년 해군 1함대 사령, 1937년 8월 12일경 양자강 강음해전(江阴海战)에 출전하였다.

 

 

오자수정

압치니코프 에서 -> '압친니코프' (일본으로 도주한 니항사건의 일제밀정)

셰르쇼프 에서 -> '셰르셰프' (자유시 참변 당시 볼셰비키 군대 2군단장)

로 변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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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0.28 니항 사건에 대해 존 J 스테판의 잘못된 이론을 인터넷에 올리는 한국 주류 학자가 일부 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9 예. 맞습니다. 일제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일본, 한국, 미국,러시아, 중국, 북한의 자료를 교차 검토하여야 하는데.. 상호 의견이 대립되는 게 엄청납니다.

    러시아, 중국, 북한의 자료를 제외하고
    거기다가..
    한국의 자료도 이지택,최호림,김낙현, 등의 주장만 인정했고요.... 이사람들은 교차비교만 해봐도 횡설수설했고요..

    미국의 반볼셰비키 A.Y.구트만, 존J스테판 등이 냉전시대에...대충 짜깁기에 허위 주장해 놓은 것까지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바람직한 남한 학자의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의 러시아와 중국 북한과 원수지간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 저술을 보면. 일본에 유리하게 장난쳐 놓은 게 많죠..

    그리고. 요즘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원수를 갚으리..." 하는 시기도 아닙니다.

    어디 되지도 않는 반공 학자의 개소리를 인정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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