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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38) 간도•만주•연해주 독립군들의 반발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1.12|조회수284 목록 댓글 3

볼셰비키 정부의 신경제 정책 실시

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시작된 러시아 경제의 침체와 대기근으로 볼셰비키 정부는 1921년경부터 1928년 『5개년 계획』 시작 전까지 신경제정책(Нов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политика)을 실시하였다.

 

러시아 내전중 농민들에게 토지의 무상(無償) 분배 등을 내걸고 볼셰비키 공산혁명에 참가시켰다고는 하지만, 징발과 징병, 군대에 숙식제공 등의 과중한 부담은 차르 정권보다 크게 나아진 점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불만이 증가되고 있었다.

 

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의 생산 의욕을 무시하고 평등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소생산자(小生産者)들을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가 필요했고,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볼셰비키 내부에서 여러 논쟁이 있었으나 레닌 등 최고 지도층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과의 무역, 자본도입, 농민의 수확물 자유판매, 공산주의 체제 테두리에서의 소기업 경영, 자유로운 상거래 등 기존의 방법도 그대로 인정했다.

이 때문에 부농(富農) 등이 생기기도 하였다.

상공업 분야에서도 소규모의 사기업을 인정하였다.

1922년경 러시아 대기근

 

간도•만주•연해주 지방 독립군들의 반발

사할린의용대와 대한의용군의 강제 해산

(※ 이르쿠츠크파의 자화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1921년 6월 30일경에 포로한 군인 중 죄의 유무를 조사키 위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에서 임시검사부를 조직하여 검사원 5인으로 하여금 포로한 군인의 죄의 유무와 또는 경중을 일주일간 계속 검사한 결과 총군부 군대는 사할린 군대의 위협에 부득이하게 가담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총군부는 마지못해 사할린의용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밖의 포로 군인중에서도 신임 있는 사람의 보증이 있는 군인은 수용하여 모두 364인은 군정의회군대에 편입하고 나머지 500명은 재차 검사부에 인도하여 다시 취조에 착수하였다.

(※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포로의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사망한 독립군의 수도 자료마다 다르다. 공격군이 일방적인 학살극을 숨기기 위해 피해를 축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비무장 독립군을 독립군으로 보느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대체로 김홍일, 김승빈, 파포프, 파르슨 등은 비무장 독립군을 독립군으로 봤다. 1920년대 일제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영내로 들어오자마자 무장해제된 사람도 있었지만, 김승빈 등의 주장에 따르면 아예 비무장 상태로 독립군에 가담하고자 러시아 영내로 온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승빈은 자신이 자유시 참변에서 사망한 시신을 수습하여 백목으로 덮은 후 관곽 없이 묻었다고 주장하였다. 김승빈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수는 약 5천여명 이상이었고, 수라제프카에 있던 사할린의용대는 약 2천여명 정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 다음날인 1921년 6월 29일경 수라제프카 마을 입구 쪽에서 약 33명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하지만 파르슨, 000 등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자유시에 독립군 부대를 계속 두는 것은 참사를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독립군들의 반발이 심해질 것이 분명하였고

 

상해파측이 블라가베셴스크나 마자나바, 보츠카료프카, 자유시 일대를 왕래하며 독립군들을 연해주 혹은 만주지방으로 이동해 일제와 투쟁하자고 설득할 것이 분명하였기에 자유시에는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스바보드니시의 발전으로 지금은 없어진 타타르스코예 묘지

1989년경 스바보드니의 역사학자 파포프는 수라제프카 구역의 발샤야 거리 북쪽에 있었던 타타르스코예 묘지에 수백여명의 독립군들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발샤야 거리에 있던 고려인 마을 주민과 러시아계 주민, 볼셰비키 군대도 시체를 수습해 여러 곳에 관곽 없이 대충 매장되거나 처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시신들의 매장 방법도 증언마다 다르다.

 

 

제야강을 따라 바르다곤 마을 방향에서 발견되었던 익사자들도 대충 묻어라도 주었으면 다행인 것이다.

 

자유시 참변 현장에서 독립군 시신을 수습해 매장했다고 알려진 사람의 후손이 선조로부터 “전투중에 전사한 시신을 한번도 묻어준 적이 없었고...........”고 자유시 참변과 지나사변에 참가하여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 들은 바 있었고,

 

심지어는

지나사변 등에서는 “수킬로미터 이상 몇시간을 가도 시체가 즐비하였다......” 등의 회고를 남긴 점에 비추어 볼 때도 매장지 선정과 수백구의 시신을 이동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고려인들이나 독립군들이 스바보드니 주민이나 볼셰비키 군대처럼 시신 매장에 참여하기 힘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00000 활용하여 시신의 수를 파악하고 이름을 알아내려고 노력은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

일찍이 들어본 적이나 있었던 일인가 !

 

충신 엄흥도

조선시대 수양 대군이 단종을 죽일 때 엄흥도라는 충신이 있어 죽기를 각오하고 매장을 해주었다고 하는 대

그게 어디 책에서나 나오는 것이지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이 무렵 자유시에 있으면서 공격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오광선은 1945년 해방후 남한으로 와서 1964년 11월 16일경부터 김준엽과 자유시 참변 등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고 한다. 김준엽은 일제 시대 일본군 학도병으로 지나사변에 참가하였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329쪽에 따르면)

자유시 참변에 대하여 증언을 남긴 오광선 장군

광복군 출신 채형세 장군

 

이르쿠츠크파에서 만든 검사부라는 곳에서 취조를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할린 의용대원이거나 니항군대 출신이었다고 한다.

김규면, 리인섭, 김홍일, 오광선, 최진일, 채세윤, 이우석, 김승빈 등의 진술도 이 부분에서는 일치한다.

 

7월 5일경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양비서부의 전보를 수령하니 고려혁명군대를 만주로 출동할 계획을 정지하고 속히 군대를 영솔하고 이르쿠츠크로 입래하라고 지령하였다고 한다.

이 전보를 받은 고려군정의회에서는 임시회의를 개하고 토론이 있었으나 하등의 결정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간도•만주•연해주 독립군들의 반발

(김창순•김준엽 공저, 『한국공산주의 운동사 1권』, 청계연구소, 1986, 330쪽에 따르면)

김홍일이 자유시 참변 이후의 상황을 주변에서 듣기로는 간도 독립군들은 제2의 수라제프카 참변을 피하기 위해 이르쿠츠크행을 단호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풍점해 장군

김홍일 장군

진계량 장군

 

이 것은 000에 비추어 봐도 사실이다.

북로군정서에 있다가 자유시에 오게 되었다는 이우석과 김승빈은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 지휘하에 있던 군인들 중 일부가 수라제프카 구역에 가서 독립군 시신을 수습해 대충 매장했다고 주장하지만

 

현장에 홍범도 부대에 있던 000은 자신들이 시체를 매장했는 지 여부에 대한 진술을 남기지 않았다.

000 등이 수라제프카 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였던지 아니면 단지 사망자 수만을 세었던 간에 간도 독립군들과 안무 장군 휘하 독립군들이 수라제프카의 대참사를 눈으로 본 것이다.

“조준을 정하고 사격하여 생지옥의 참극을 만들었다.”
“사격, 포격, 학살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속됐습니다. 절박한 상황을 보며 많은 파르티잔들이 견디지 못하고 제야강에 뛰어들어 익사했습니다.”

“아침부터 석양까지 포격소리 요란하다.”
“죽은 자의 시체가 거리에 누워 있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주위에 숨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인접한 거리는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참변의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참변의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약한 사람 중에는 자살한 사람까지 있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4년경 만주 지방의 일제 영사관, 일제 경찰, 조선총독부의 기록들에도 000 등이 연해주 혹은 만주•간도 쪽으로 이동한 약 000여명 독립군과 한 때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봐서도, 자유시 참변 이후 000 등은 이르쿠츠크로의 이동을 거부한 것이다.

 

000 등은 이미 만주의 지리에 밝고 0000 연줄이 있었으나, 악명높은 친일파인 0000 일파가 일제와 공모하여 독립군들을 탄압하던 시기인지라, 아무르강을 따라 연해주로 이동하였거나 아니면 철길과 도로, 혹은 삼림지역을 지나서 연해주 혹은 북만주 등을 이동해 다녔던 모양이다.

 

박일리야는 자유시 참변이후 수라제프카에서 탈출하여 주로 걸어서 흑룡강을 건너 중국령 애혼지방으로 탈출하여, 배편 혹은 걸어서 요하현을 거쳐 이만이나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르쿠츠크파의 이르쿠츠크 이동 계획

오광선, 이청천, 김홍일, 김규면, 리인섭, 김승빈, 이우석, 채세윤의 진술 내용을 살펴보면, 자유시 참변이후 이르쿠츠크파는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 부대 전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켜 자신들의 지도 아래 두려고 하였다.

더군다나 자유시는 아무르주의 주도였던 블라가베셴스크와 직선거리로는 130km정도였고, 아무르주의 공산당원이나 현지 행정기관 등은 동양비서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김규면 등에게 우호적인 것이 분명하였다.

김승빈 선생

1921년경 동청철도와 아무르주 일대의 기차역 지도. 당시 중국과의 국경은 오늘날처럼 봉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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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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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12 간도 독립군들은 제2의 수라제프카 참변을 피하기 위해 이르쿠츠행을 단호히 거부하였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12 예.. 참변이후 1922~1923년도쯤에는 양파의 타협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참변직후 이르쿠츠크 행을 거부하고 연해주나 만주 중국령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최소 50%~ 80% 이상의 독립군이 자유시에서 돌아옵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13 신룡기2 추정 수치가 꽤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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