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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41)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양보, 고려군정의회 폐기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1.16|조회수106 목록 댓글 3

러시아와 일본간의 대련회담

브루조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였던 극동공화국 정부는 1921년 8월 26일경에도 일본 정부와 교섭에 들어갔다.

몇 년 동안 지속되었던 대련회담(大連會談)이라는 것이다.

이 무렵 일제를 제외한 다른 시베리아 간섭국들은 1920년경 이미 모두 철군하였고, 중화민국에서는 1919년 5•4운동 등으로 일제의 만주침략 정책 등에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여 만주일대의 악명 높은 친일군벌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고 있었다.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이라고 떠들어 대던,

1920년 10월경의 훈춘사건(琿春事件,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도 일제의 거듭되는 조선•중국•러시아 민간인 대규모 학살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하였다.

1920년 8월경부터는 미국 등이 일제의 사할린섬 북부 점령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 주내에 일본인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등 압력을 가하자

일본 역시 니항사건 배상문제•시베리아 철군•만주 동청철도•사할린섬 북부와 쿠릴열도•오호츠크해 일대 어업권•러시아 영내의 한국독립군 문제 등을 놓고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경에는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연해주의 러시아계 친일파들로 구성된 백파 괴뢰정부는 일제의 앞잡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일본정부는 극동공화국•모스크바 정부와 교전과 휴전, 교섭 등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철군 조건 등을 협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원하던 사할린섬 북부 할양, 동청철도 양도, 니항사건 배상, 한국독립군 해산 등은 ‘세계 무산 혁명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표방하며 설립된 레닌 정부가 쉽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스크바 정부 역시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을 연해주나 한국 국경으로 진출시킬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 정부의 일제에 대한 양보

볼셰비키 러시아와 일본간 국교 정상화 교섭은 192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본은 결국 니항사건의 배상금과 동시베리아 철군의 조건 때문인지 1922년 수립된 소련(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으로부터 양보를 받아

1925년경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탄광•삼림•쿠릴열도•어업권 등은 획득하였다.

 

이것은 소련이 부정하였으나 사실이다.

 

그러나 만주 동청철도에서는 중국•일본•러시아간의 분쟁이 있어 1929년경에도 동청철도 중동로 사건(中東路事件)이 터지기도 한다.

 

중동로 사건에도 소련군에는 소수의 여러 민족 군인이 있었으며, 중국 군벌군에는 북만주의 특성상 반일성격이 강하던 장병 등이 동원되어 또 한번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부근의 국경선 분쟁은 알바진 요새 전투 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간도•녹둔도 문제 등등 다툼이 있다.

 

 

 

(이르쿠츠크파의 자회자찬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따르면)

 

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지

1921년 8월 말경 자유시에 남아 있던 일부 독립군들이 철도로 이르쿠츠크에 도착 완료하였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독립군의 총수가 대략 1,745명이었다.

(※카프카스 기병(혹은 카자키 기병)과 중국계 군인을 제외한 수)

 

그리고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취소되고 러시아 볼셰비키 제 5군단의 지도를 받는 동시에 일반 교육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인들로 1개 여단을 편성한다.

여단장에 까란다리시비리(전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군정위원장에 박승만이 선임되었다.

 

※필자의 의견 :

이르쿠츠크파 몇 명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러시아•만주•중국 일대의 한국인들에 대한 정부 기능과 한국 독립군 최고 지휘권을 가진다고 설립했던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자유시에 모였던 독립군, 아무르 일대의 고려인, 상해파, 만주•간도 일대 독립운동 단체, 상해임시정부 등이 거세게 반발하자 바로 폐지된 것이 아니었고

 

아마 상해파와 관계가 있었던 극동공화국 인물들과 아무르주 현지 러시아계 공산당원의 반발도 대단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이르쿠츠크파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일방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려혁명군정의회』가 간단히 폐지된 것은

대포까지 쏴대며 그 학살극을 벌렸는데 모스크바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체카와 달뷰라 등도 이르쿠츠크파가 계속해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반혁명, 일제 간첩, 강도, 강간범”의 누명까지 씌웠는데 진행 과정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맨좌측 김규면 선생

김승학

 

레닌과 촬영한 볼셰비키들. 크라스나쇼코프도 있다.

극동공화국 간부. 니키파라프

Первый Премьер ДВР П.М.Никифоров

극동공화국 수상. 크라스나쇼코프

 

고려혁명군정의회 폐지와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퇴진은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레닌과 모스크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최고 독립운동지도 기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일제와 친일 밀정들의 주장만을 골라 모아 독립군들과 조선놈들이 “무정부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하고, 강도질, 강간, 약탈, 살인 등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 이라는 사람도 있고 일부 반공학자의 사기만을 인정해 “러시아 볼셰비키가 공산 혁명 성공을 위해 일본과 공모해 학살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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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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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16 1922년 수립된 소련으로 부터 양보를 받아 1925년경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탄광.삼림.쿠릴열도.어업권 등을 획득하였군요 일본으로서는 실리를 챙겼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17 일본은 시베리아, 사할린섬, 만주,동청철도..를 집어 삼키려고 시베리아를 침략하였으나
    아예 소득없이 물러난 것은 아니며...

    사할린 섬 북부의 유전에서만 200만톤 이상의 석유를 비롯한 각종 자원을 1944년까지 획득하는 등 상당한
    이권을 확보한 것이 명백합니다.

    소련 시대 에는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오늘날 러시아도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 의견이 많지만..
    분명 이권을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병의 조건으로

    일본에게 준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17 신룡기2 ㅇㅇ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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