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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42)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퇴진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1.16|조회수87 목록 댓글 2

볼셰비키의 영웅 까란다리시비리의 사임

1922년경 이쿠치야에서 공산주의에 반발하는 반란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까란다리시비리의 장례식

한국독립군 부대를 조직해 일본과 싸우고자 했던 그루지아인 까란다리시비리.

(1922년 3월 6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까란다리시비리. 까란다리시비리(혹은 ‘칼란다리쉬비리’ 등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루지아인으로 여러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 3. 6일경 사망) :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자유시 참변 무렵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1922년 3월 6일경 이쿠치야(Якутия)에서 반란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1921년 10월 3일경

 

여단장 까란다리시비리는 본직을 사면(까란다리시비리가 한국어를 전혀 못함으로 군대 교육에 불편하다는 이유)하고 오하묵을 여단장을 선임하고 동시에 정치부를 설치하고 정치부장에 채동순을 선임한다.

까란다리시비리는 1921년 10월경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적기훈장을 받는다.

그는 1922년 이쿠치야(Якутия)에서 반란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여단편성

1. 여단 관리부 (참모부, 공급부, 위생부, 정치부)

2. 제 1연대

3. 제 3연대

4. 특립대대(사관학교)

5. 여단 특립연락중대

6. 특립포병소대

7. 제 2연대는 편성중에 있음

 

이상으로 여단을 편성하니 여단의 인원 및 무기, 마차 수량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1. 20개 중대 및 여단 관리사무원 총수가 2천 1백여명

(※카프카스(혹은 카자키)기마병은 본 군대를 떠나 5군단 직할로 감)

2. 대기관포 36문, 소기관포 6문, 대포 3문, 5연발 소총 2,800자루(각 자루마다에 탄환150발), 폭발탄 1,500개

3. 말150필

 

교육

사관학교 설립

 

1921년 10월 16일경

이르쿠츠크파 등이 계속해 문제를 삼았던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자금 문제에 대하여 상해파 측이 자금의 사용처 등을 러시아측에 보고한다.

 

이후 미지급되었던 자금은 러시아측에서 상해파로만 전달하지 않았다.

오늘날 공개된 독립운동 자료와 일제의 기록, 러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부터 이르쿠츠크파•화요파계 등의 일부에도 지원이 된 것으로 나온다.

 

 

1921년 10월 28일경

한국인 독립군 여단 내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수업 기한은 6개월로 정하여 200명 학생을 양성하니 임시교장에 류동열, 교관에 이청천, 채영, 김승빈으로

군정위원장 선우정으로 선임되였다가 1921년 10월말에서~ 11월경 임시교장 류동열은 사면하고 동 교관 이청천이 교장을 겸임하였다.

 

포병과 설치(1921년 11월 6일경)

연락과 설치(1921년 11월 9일경)

 

각 기술과 설치 및 양성

1. 기병 교관대 34명

2. 보병척후대 45명

3. 의생 및 간호대 36명

4. 연락대 115명 (내부에 전신•전화 학생 40명)

5. 무기제조 견습생 17명

6. 음악대 28명

 

위의 기술과에 대하여는 제 5군단내 러시아인 교관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1921년 11월 28일경 이동휘 선생의 레닌 접견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한다.

※ 과거 한국에서는 이동휘 선생의 레닌 접견, 슈먀츠키의 국제 공산당 동양비서부장 퇴진, 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기, 상해파•이르쿠츠크파의 해체 등에 대해서 날짜와 이유 등이 잘못 알려진 점이 많았으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을 확인한 바 러시아 공산당 중앙과 최고 지도자의 지시도 있었다.

김규면 선생(혹은 김백추)

이동휘 선생

계봉우 선생

 

1921. 11. 월경부터 독립운동 단체가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한다.

 

 

1921년 12월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결정

코민테른이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상급기관으로 간주되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한다.

 

한국 파르티잔 처형 사건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중략......

소위, 아무르 사건은 한국 파르티잔들의 기억에 매우 불쾌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아무르 사건은 여전히 두 파 사이의 말다툼을 가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2개의 한국 공산주의 단체간 다툼에 있어서

한국 파르티잔 문제들은 더 재치 있게 해결했어야 했습니다.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위된 파르티잔에 대한 포격, 불신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직접적인 범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유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게 되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러시아령으로 이동해온 유명한 한국 군인들, 불행히도 동양비서부의 슈먀츠키 동지가 대표하는 코민테른의 역할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성이 필요했으나, 기본적인 분파적 다툼을 해결하는 것조차 실패했습니다.

아무르 사건은 파르티잔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보복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료에 국한되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지시한다.

......중략.......

 

Из протокола № 111 заседания Оргбюро ЦК РКП(б)

 

 

1921년 12월 18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형식적인 퇴진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가 한국 독립운동 분야에서 형식적인 퇴진을 발표한다.

 

바이친스키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된 분야에서 이 때 당시에는 물러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슈먀츠키는 1922년 1월경부터 1925년 1월경까지 페르시아(이란) 주재 전권대사 및 무역대표를 하다가, 1926년 말부터 2년가량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을 지냈다.

그 이후에는 한국 독립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슈먀츠키가 수장이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역시 다른 부서로 대체되며 사라진다.

슈먀츠키와 스탈린 등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참고인물
슈먀츠키(Шумяцкий Борис Захарович, 1886년경 출생 ~ 1938년경 사망) : 오늘날의 동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경부터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21년경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장을 지낼 당시, 한국계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을 편들어 자유시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의 반발로 동양비서부장에서는 해임되었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 제외되었다.

부인은 릴랴 이사예브나(Лия Исаевна)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늘날 슈먀츠키의 후손들은 자주 인터뷰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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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16 한국독립군 부대를 조직해 일본과 싸우고자 했던 까란다리시비리였으나 공산군의 공격으로 사망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17 예. 까란다리시비리는 1922년 이쿠치야... 한국에서는 '야쿠치야'라고 많이 부르는 자유시 북동쪽의 추운 지역에서. 공산 혁명에 반대하던 반란군 잔당에 의해 죽었습니다.
    죽은 지점에 비석도 세워져 있고

    묘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루지아 공화국.. 오늘날 조지아 공화국에서는 알아 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스탈린?????도.. 조지아에서는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지역보다는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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