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근대사/현대사

자유시 참변 100주년 (44) 우수문 노동수용소 석방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1.21|조회수90 목록 댓글 2

한인의용군사회(韓人義勇軍事會) 등 조직

1921년 7월경부터

자유시 참변의 참화를 피해 탈출한 이용, 김규면 등이 연해주로 돌아와서 ‘한인의용군사회’를 조직한다. 혹은 ‘제3차 군정위원회’, ‘군정의회’ 라고도 한다.

자유시 참변 무렵 지도

김홍일, 김규면 등의 주장에 따르면,

연해주 있던 독립군외에도 자유시 참변에서 탈출해온 독립군들이 증가하여 위원장에 김규면, 사령관에 이용, 1중대장에 임표, 2중대장에 김홍일, 3중대장이 한운용 등이었고 총 병력은 300여명에서 ~ 1,500여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자유시에서 살아서온 박일리야 등도 가담한다. 과거 자유시에 있던 사할린의용대중 니항부대는 100여명 미만이 연해주 독립군에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광복군 출신의 진술에 따르면 이 무렵 김홍일의 활동은 대단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러시아에서 세거한 김규면, 리인섭, 최계립, 김승빈 등은 김홍일이 독립군에 가담하였음을 확인하였다.

 

1921년 겨울에는 상해파 측에서 이르쿠츠크파에 보복한다는 소문이 나돌며, 중국에서 이르쿠츠크파 이성(李聖, Ли Сенг)이 상해파의 총에 맞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1921년 10월말경 극동공화국•일본간 대련회의 결렬과 일제의 발악

일본과 극동공화국간의 대련회의가 결렬되어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백파와 볼셰비키 간의 전투가 다시 벌어진다.

(1925년 1월 20일경 북경에서 소련•일본 간의 조약이 체결 될 때까지 수십차례 이상이 교섭이 더 있게 된다.)

 

1921년 11월 14일에서 ~ 18일경 연해주 올가(Ольга)에서 전투가 발생하여 독립군 신용걸 등이 전사한다.

올가전투 추모비.   신용걸 선생 등 전사

 

1921년 12월 4일경 이만 전투에서 한운용 등 수십여명의 독립군이 전사한다.

이만과 인 전투에서 전사한 의용군수는 대략 78명 정도라고 한다.

이만전투 추모비..   한운용 선생 등 전사

인 지역의 초가집

 

홍범도 등의 독립군 재판 참여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붉은군사』 제2호, 1921. 12. 24자 《중대사건 판결》), (국사편찬위원회 國史館論叢 第75輯/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군사활동(임경석 저)/Ⅱ. ‘자유시사변’ 이후 고려혁명군의 재편성/3. 자유시사변 피고인 재판) 등에 따르면

 

‘1921년 11월 27일로 ~ 30일까지 4일 동안에 고려혁명군법원은 재판위원장 채동순, 위원 홍범도, 박승만 제동무가 출석하여 금년 6월 28일 자유시 병변에 범죄자 50명을 판결하였는데 세 사람은 2개년, 다섯 사람은 1개년 징역에 처하고, 24인은 일개년 집행유예에 처하고 17인은 방면하야 군대에 보내여 종사케 함.’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이라 일방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다.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재판에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최근 나타났다.

 

 

동시베리아 내전의 볼라차예프스키 전투(Волочаевский бой)

1921년 12월 23일경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 시를 백파군대가 다시 점령한다.

 

1922년 2월 5일경에서 ~ 14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 볼라차예프스카야(Волочаевская) 전투(Волочаевский бой)에서 독립군 수십여명이 전사한다.

동시베리아 내전의 볼라차예프스키 전투 추모식

 

1922년 2월 14일경 하바로프스크는 결국 볼셰비키가 탈환한다.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쯤 자유시 참변이후 만주•간도로 귀환한 독립군

중국계 반일 열사들. 동림각 장군

대안란 장군. 펄S 벅의 소설 "약속"의 모델이라는 소리가 있다.

마점산 장군

곽송령 선생

주경란 선생

 

러시아령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다만 러시아 영내 진입시 볼셰비키가 요구한 무장해제 등에 응할 수 없어 아무르주(흑룡주) 자유시로 가지 못했던 독립군들도 이 무렵 연해주에 상당수 있었던 모양이다.

 

홍범도 장군 부대 등은 1921년 1월에서 ~ 2월경 연해주 이만일대에서 무장해제후 기차 등을 이용하여 자유시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러시아 영내 진입시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 요구는 독립군들이 쉽게 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1922년경 러시아 지원 자금 문제

러시아가 지원한 금화 40만 루블이 레닌이 약속한 금화 200만 루블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나머지 약 1백 40만 ~ 1백 60만 루블을 받기 위해, 김규식(金奎植) 등이 직접 레닌 정부와 교섭하기도 했으나 실패한다.

 

 

1922년 4월 22일경 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의 상해파 복권 결정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지도하에 이르쿠츠크파가 1921년 5월 4일경부터 ~ 5월 17일경 폐회할 때까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까란다리시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을 임명 할 때)

제명된 (주로 상해파의) 모든 당원을 복권하고,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이 퇴진하며, 두 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실천기간을 가지기로 결정한다.

(출처 : Док. № 85 Постановление Комиссии Президиума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им делам г. Москва 22 апреля 1922 г.)

 

 

상해에서의 여운형 등의 활동

1922년 5월 10일경 여운형 등은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준비위원회의 활동을 부활시킨다.

상해 임시정부의 내분사태를 개탄하는 모든 인사이 공감하였다.

그리고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자금을 가지고 오자 국민대표대회는 열릴 수 있었다.

 

1922년 5월 중순부터 수개월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구성된 임시 연합 간부회의가 시작된다.

결국 겉으로는 파쟁을 중단하고 통일된 공산당 조직에 합의를 한다. 그러나 양파에서는 서로 자기파의 세력 확장에 노력하고 있었다.

8월경에는 연해주 송전관(松田關, 솔밭관) 등지에서도 문창범, 이중집, 오주혁, 이범윤, 이표(李杓), 윤기영, 김승덕, 김석훈, 홍범도, 백림, 김좌진, 이용, 김승덕, 김하석, 이동휘 등의 회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아일보 1922. 9. 19자 3면 보도)

 

 

1922년 8월경 우수문 노역장에서의 석방

 

※상해 독립신문 1922년 8월 1일자 제2면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블라가베셴스크로부터 철도선로로 서북방향으로 사백여리를 떨어진 우수문 산속에서 벌목정정의 노역하는 2,000여명의 독립군은 무삼 죄역(罪役)인지 아모도 알지 못하는 바이나 작년 흑하 참변시에 독립군 이백여명을 포로로 하야 벌목 징역을 식한 바 이것은 이미 해방하기로 작정(酌定)되엿으나 아라사(러시아) 당국은 이르쿠츠크파(伊市派)의 무함(誣陷)과 또난 군용차(軍用車)의 화목을 빙자(憑藉)하고 1년간이나 무임(無賃)의 노역(勞役)을 식켓더라

 

더욱이 원통한 것은 앞에 작성한 노동대(勞働隊) 가운데서 도망하야 중국령지방(中領地方)을 러시아지방(俄領地方)인 줄 알고 잘못 도달한 즉 중국 육군은 이를 궁당(躬黨, 볼셰비키 군대 赤軍)이라 하고 20여명을 총살하고 겨우 5명은 러시아촌에 와서 야간에 떡을 걸식(乞食)하려 하다가 절도(竊盜)의 혐의로 촌민의 포격(包擊)을 당하야 피살된 일이라더라

 

(소왕영 통신원경)

(※일부 표기를 요즘의 표기로 수정하였습니다.)

 

아무르 주 우슈문 군

대류횡단 철도와 시베리아 개간에 강제 노동에 동원된 사람이 수십만명에서 수백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10년대 대륙횡단 철도가 건설될 무렵의 우수문 혹은 우슈문 지역

 

1922년 7월경에는 연해주의 이용, 김규면, 박일리야 등이 지도하던 독립군 부대에 이르쿠츠크파인 박창인, 김춘선, 심상구, 최미하일 등이 가담하자 또 양파의 분란이 발생한다.

 

이 때의 분란으로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일부 독립군들이 우수문 노동병으로 수감된다.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부의 지시로 1922년 8월 9일경 석방되었다.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8쪽 등)

 

결국 1922년 8월경에 이르러서야 우수문 노역장에 수용되었던 자유시참변 포로 및 연해주 독립군 수백여명에서 ~ 2,000여명이 석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벌싸움의 무서움은 이것이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석방 지시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비서부, 슈먀츠키, 채동순, 박승만, 오하묵, 최고려 등은 시간을 끌며 석방조차 시켜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르쿠츠크파의 문건을 읽거나 자유시 참변, 니항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철저한 검증과 사실여부 확인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실제 조금만 비교검증하면 허위 주장한 부분이 드러나기도 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21 연해주의 인물들이 지도하던 독립군 부대에 이르쿠츠크파가 가담하자 양파의 분란이 발생했고 이르쿠츠파에 의해 일부 독립군들이 우수문 노동병으로 수감되었군요 결국 1922년 8월경에 이르러서야 우수문 노역장에 수용되었던 자유시참변 포로 및 연해주 독립군이 석방되기시작했지만 러시아 중앙의 석방 지시가 있었음에도 동양비서부외에 몇몇 인물들은 시간을 끌며 석방조차 시켜주지 않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1
    강제노동을 하다가 죽거나 불구가 된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기계가 발전한 지금에도 삼림에서 벌목, 운반, 건축 등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진시황제 때.....만리장성 쌓을 때도 죽는 사람 수두룩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베리아 철도 건설, 삼림 개발, 광산개발에 동원된 사람들 많았고, 인력에 의존하다가 보니 힘든 노동이었고, 병사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