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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한국인의 시베리아 이주사 (2) 러시아 내전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1.25|조회수353 목록 댓글 6

1918년 볼셰비키의 곤란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직후에도 식량 문제인 ‘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계속되었고, 볼셰비키 정부도 자본가•귀족 계급의 대토지와 재산을 무상몰수, 균등분배, 무상분배, 평등한 생존권, 공정한 기회 보장과 같은 공산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개혁을 이룩하지 못하자 반볼셰비키 진영은 레닌정부의 약점을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1918년 1월 12일 일본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였다.

 

볼셰비키와 독일의 타협,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철수

1918년 3월 3일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는 전쟁중이었던 독일과 휴전 및 영토일부 할양을 포함하는 브레스트 조약을 맺었고 3월 15일 조약이 비준되자,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철수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독일과의 사실상 평화조약을 맺고, 독일 등에게 영토할양과 이익을 보장하자,

러시아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영토상실과 배상금 등으로 러시아의 권리가 침해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1918년 반볼셰비키 운동과 러시아 내전 발발

이들은 외국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지원을 받아 반볼셰비키 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유증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작지는 급감하였다.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여름부터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일부 토지의 재분배와 식량 조달계획을 시행하자 러시아 전역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화되었다.

콜차크

셰묘노프

김인수

 

연합군들의 러시아 간섭 전쟁

연합국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사할린주•흑해 등의 유전•광산•산림•공장•농장 등의 국유화, 러시아내 외국인 재산 국유화, 차르 정부의 외국 채무 승계 거부 등으로 경제적 손해까지 발생하자,

볼셰비키의 이러한 행동을 세계 공산화 방지 등을 위해서 러시아 내전에 간섭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연합국들의 무르만스크 점령

1918년 3월 6일 영국군, 프랑스군이 러시아 서부지역의 중요 항구인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고 미국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도울 수 있다고 발표하자 러시아는 식량과 무기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합국은 곧 무르만스크를 점령하였다.

 

러시아 내부의 볼셰비키 적대 세력(백파)과 연합군에 의해 러시아 내전 간섭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는 당장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역의 서부전선에 배치된 군대를 러시아 백파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니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캄챠카, 이만,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만주 하르빈, 동청철도 등의 동시베리아 지역에 동원할 수는 없었다.

연합국들의 일본 참전 요청

그들은 1918년 3월 15일경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동지였던 일본, 중국 등에 러시아 간섭 전쟁 참전을 요청하였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개시

1918년 4월 5일 일제(日帝) 시베리아 침략군(일본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정군’)의 시베리아 파견 선발대 1백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1918년 5월경 일본 군함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정박하여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니항(尼港, Николаевск, 니콜라예프스크)을 위협하였다.

(※니항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르쿠츠크파 김낙현이 쓴 《빨치산의 수기》에 나오는 내용이며 수기는 1967년경 쓰여져 니항 사건의 순서가 틀리는 부분이 있다. 김낙현은 니항사건의 ‘안드레예브’를 진실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묘사하고, 이지택, 박병길은 영웅으로 묘사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과 대조하면 대부분 허위다.)

 

 

중화민국과 일본의 연합

1918년 5월 16일경에서 ~ 5월 19일 사이 중화민국 정부와 일본간에 독일•오스트리아 등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 군사협정이 체결된다.

 

 

체코 군단의 반볼셰비키 반란

1918년 5월 26일경 볼셰비키가 무장해제 시킨후 대륙횡단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을 통해 프랑스로 귀국시키려고 시도하였던 체코군이 반란을 일으켜 첼랴빈스크를 점령하였다.

체코군의 반란은 시베리아 지역과 볼가강 지역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인 약칭 ‘백군(백파)’의 통합에 기여하였다.

 

한국 독립운동과도 연관된 체코군단의 반란과 귀국

 

1918년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들이 체코군과 백파의 공격으로 전복되었다.

 

 

연합군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점령

1918년 8월경에는 일본군(시베리아에 많을 때는 약 7만 3천여명)과, 미국군 약 5천명, 영국군 8백여명, 이탈리아군 1천4백여명, 1백여명의 프랑스군 등의 연합군이 대륙횡단철도로 귀국하려는 체코군단을 구원하고 러시아내전에 간섭하기 위해 두만강 너머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항(해삼항) 점령하였다.

중화민국 북경정부 소속 군대도 러시아 내전 간섭에 참가하였다.

(※러시아내 거주 다수의 중국인들은 볼셰비키 측에도 가담하였다.)

 

일본군을 환영하는 친일파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처형

1918년 7월 16일에서 ~ 7월 17일경 볼셰비키 지지자에 의해 예까쩨린부르크에서 러시아 전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적군과 백군 모두 피에 대한 보복을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볼셰비키도 대대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일본군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 점령

일본군은 1918년 8월 2일경 연합군의 시베리아 출병 목적과는 별 관련이 없는 교통•어업•광업의 중심지였던 아무르강(흑룡강) 하류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오늘날 러시아에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독립운동가 리흥진 선생이 여기 잠들어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니항 인근 '치니르라흐 요새' 잔해

빨치산 대장 트리피츤의 본부 건물터에 설치되어 있는 '니항사건 추모비'

1918년 9월 5일경 러시아 동시베리아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도 일본군이 점령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9년)이 일본, 미국, 영국 등 연합군의 승리로 1918년 11월 11일경 종료되었다.

 

 

일본군의 연해주•아무르주 침략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로, 아무르강, 만주와 하르빈을 등을 경유하여 시베리아 침략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아무르주도 공격을 받는다.

 

1919년 1월 11일경 일본군이 아무르주 마자나바(※독립운동관련 자료에는 마사노프, 마자노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러시아어의 발음법칙 때문이다.) 일대에서 어린이, 여자, 농민 등 포함한 대피하지 못한 사람 300여명 이상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마자나바 마을은 중심지가 불타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으로 대피해야 했으며,

일본군 철수후에도 파괴된 마을이 복구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마자나바 학살 현장은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적한 농촌이다.

 

우수리스크 추모비

자유시 민간인 학살 추모비

 

러시아 간섭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대기근 발생

1919년 1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러시아 전역에서 농민들의 남은 식량을 고정가격으로 압수하는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하이퍼 인플레이션 시대에 이것은 몰수를 의미하였다.

초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급감한다.

 

볼셰비키에 의한 강제적인 식량 분배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부지역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까지 발생하였고, 내전으로 인한 경작지 감소로 농민들도 식량이 몰수되면 굶주리고 파멸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군의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이바나프카 일대 민간인 학살

일본군은 동시베리아 지역 대륙횡단 철도, 만주 동청철도, 아무르강 등을 따라 교통 요충지들과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간도 토벌 때부터 이어지는 일본군의 주요 목표는 시베리아의 영구 점령과 특히 한국계 항일 세력의 몰살이었다.

 

1919년 3월까지 일본군은 아무르주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 이바나프카에서는 수차례 학살을 감행), 마자나바 일대에서만 공산주의 동조하는 마을을 파괴하라는 지시에 따라 900명 이상을 학살하고, 30여명을 산채로 불태웠다.

 

그러나 아무르강 하류의 니항의 일본군은 1920년 초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했다가 반격을 받고 전멸하였다. (니항사건)

일본은 니항의 일본 수비대가 전멸한 후 1920년 4월경부터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을 자행하고 1920년 4월 22일경 사할린섬 북부와 유전 등을 추가 점령을 하였다.

 

(※1922년 10월 25일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1924년부터 사할린섬 북부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어 1925년 소련•일본간 국교 수립시 사할린섬 북부를 반환하였고,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사할린 섬 남부와 주변 섬들도 소련에 양도하였다.)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의 내전

러시아령에서 1921. 6. 28. 자유시 사건 직전 독립 운동가들의 분열 원인중 하나는

내전•대기근•외세침략이 겹쳐진 볼셰비키의 한국계에 대한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 때문이다.

 

아무르주 일대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년 1월부터 볼셰비키가 득세하였으나, 1918년 9월경 일제와 백파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도 1918년 8월경 백파가 점령하였다.

1920년 초반까지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는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친일 백파 괴뢰정부의 손바닥에 있었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차르 러시아 장교였던 오하묵이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전설적인 활약을 하였다고 하는데 (......중략......)

오하묵

 

파르티잔 부대들은 항일 전투를 통해 1920년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일대를 탈환한다.

이후 극동공화국이 수립되자 극동공화국의 영역이 되었다.

아무르주의 주도 블라가베셴스크

 

한국계 독립운동 부대들과 피난민들이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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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5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돋네칙인 | 작성시간 21.11.25 이쪽 정세는 혼란 그 자체였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5 한국으로 따지면 6.25사변 무렵쯤이 되겠습니다.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25 러시아가 상당히 혼란한 시기를 겪었군요 그 와중에 외세의 침략이 있었고 그 중 일본군이 대규모 민간인 학살도 있었군요 내전.대기근.외세침략이 겹쳐진 볼셰비키의 한국계에 대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인해 자유시 사건 직전 독립운동가들이 분열했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5 러시아 측의 잘못도 큽니다.
    고려인 강제 이주도.... 잘못된 일이었고, 니콜라이 2세의 딸과 아들까지 모조리.. 처형한 것은 너무 심한 것이었지요...

    물론.. 저쪽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불행한 시대이었죠.. 야만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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