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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한국인의 시베리아 이주사 (3) 이동휘 선생과 독립군 이동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1.29|조회수176 목록 댓글 2

이동휘 선생의 연해주•만주•간도에서의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은 볼셰비키와 손을 잡고 1918년 초 노령에서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였으며, 그 때부터 레닌과 관계가 있었다.

이동휘 선생

리인섭 선생

광복군 출신 오광선 장군

계봉우 선생

 

이동휘는 1995년 한국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때에도 논란이 많았으나, 독립운동사에서는 상해임시정부, 연해주, 만주, 간도, 러시아 본토, 국내 등지에서 이동휘의 독립투쟁만큼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동휘는 구한국의 무관 출신으로 일찍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다가, 1906년 군대를 사직하고 교육과 대한자강회 등의 활동에 힘썼다.

일제가 침략하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가 1912년경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1913년경에는 로령 연해주로 이주하여 군사학교를 설립을 추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간도 왕청현 나자구 일대로 이동하여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 때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구춘선, 김규면, 이용, 계봉우, 임병극, 홍범도, 이범윤, 장재관, 신채호, 한형권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6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리저리 피난하였다.

 

1917년 10월초 러시아 무산혁명 발생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1918년 4월경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김규면, 김립, 류동열, 리인섭 등과 한인사회당이란 정당을 만들어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독립전쟁에 나섰다.

 

같은 해 크라스나쇼코프 등과 한국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일제•백파와의 전쟁에 가담하였다.

극동공화국 수상 크라스나쇼코프

1918. 9월경 일본군이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를 점령하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피난을 떠나거나 숨어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동휘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 3•1운동이 발생하자, 연해주•만주•간도 일대에도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1919년 8월 이동휘 선생은 김립과 같이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다.

 

1920년 모스크바에 열렸던 제2차 제3국제 공산당 회의에 한인사회당이 참석하여 승인되었다.

이 무렵 이동휘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좌익•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이르쿠츠크파, 일부 민족주의자 등과 대립하여 다툼이 있었고, 1921년 6월 독립운동사의 비극이었던 자유시 참변으로 지원하던 사할린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도 연해주•만주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출처 : 이영일저,  『이동휘 선생』(1981.8.1))

 

1936년경 조국독립인지, 무산혁명인지를 부탁하고 연해주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1995년 남한에서 논란 끝에 해외에서 작고한 사회주의자 계열로는 거의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약사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약사
•1917년~1918년 초경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조직 (연해주)
•1918. 4월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 선발대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1918. 4월~5월경 하바로프스크 일대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1919. 4월경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1919. 4월경 상해임시정부 조직
1920. 8월경 제3국제공산당 2차대회 참가하며 ‘고려공산당’이라는 명칭 사용
•1920년 12월 21일경 치타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소속 한인부(상해파)는 통합 독립군 단체 조직을 결정
•1918. 1월경 김철훈, 오하묵 등 몇 명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볼셰비키내 한인지부 조직
•1919년 초 일부 인사들이 ‘대한국민의회’ 조직
•1919. 9월경 김철훈, 오하묵 등이 전로한인공산당 조직
•1920. 1월경 이르쿠츠크 공산당내 고려부 조직
•1919. 8월경 ~ 9월경 한인사회당 박진순 등이 모스크바에서 금전지원을 약속 받고 전로한인공산당(나중의 이르쿠츠크파)과 금전관련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오늘날까지도 확인하기 힘든 소액으로 추정됨)
1920. 3월경 이르쿠츠크에서도 합동민족군대 조직 (고려인 포함 11개 민족)
•1920. 3. 1. 일경 일본군이 물러난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서 최고려 등이 피난온 고려인들과 자유시 고려인들을 모아 『흑룡주 고려주민대회』 소집 제의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러시아측 기록에는 최고려가 주도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고, 자유시 일대로 피난 온 한인들로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된 것은 사실임
•1921. 3월경 마자나바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극동공화국 등의 지원을 받아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
•1921. 5월경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1921. 5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으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정부성격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
1921. 6. 28. 자유시 참변 발생. 상해파 등이 자유시에서 연해주 등지로 탈출
•1922년 말경 코민테른이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해체
•1922. 12. 30일 한국에서 『소련』이라고 불렀던 국가 수립
•1922년 말경에 볼셰비키에 의해 연해주의 독립군 부대 해산됨
•1923. 2월경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국(꼬르뷰로) 활동 개시

자유시 참변과 관련되었던 1919년에서 ~ 1921년경 만주•간도 일대 독립운동 단체

(※출처 : 1920. 6. 16. 일자 고경(高警) 제16,900호. 《최근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체 무력준비상황(國外情報(間島地方 不逞鮮人團體의 武力 준비상황과 首腦部의 所在地)》 등)

부대명주요 인물활동지역기타
(1) 대한군정서서일, 현천묵, 김성, 김좌진, 나중소
(서로군정서 일부 포함)
주로 왕청현 등 간도소총 1,200자루
(2) 대한독립군홍범도, 박경철연길현 명월구 등소총 200자루
(3) 대한군무독군부최진동, 박영왕청현 등소총 200자루
(4) 대한의군단방위룡(방우룡), 허근, 김종헌, 김연원왕청현 등소총 400자루
(5) 광복단이범윤, 김성윤, 홍두극, 김백우, 김성극, 김성원, 황만실왕청현 등소총 150자루
(6) 신민단김성배, 유봉득, 김준근, 이흥수왕청현 등소총 150자루
(7) 대한 국민회구춘선, 안무, 강구우, 김규찬, 김동합, 한중진, 양도헌, 마룡하, 박혁춘간도, 연길현 등소총 400자루
(8) 대한의사부김리근, 최정국, 박창준왕청현 등소총 160자루
(9) 대한노인단이승교, 정치윤, 김치보연길현, 노령소총 60자루
(10) 공의단엄준, 심룡운만주소총 40자루
(11) 흥업단김창일, 서관일장백현 등소총 50자루
(12) 군비단이희삼, 박동규, 윤덕보장백현수십자루
(13) 태극단임석우, 박대성임강현 등수십자루
(14) 야단오석영, 윤좌형간도

(15) 노농회조응순, 권중선간도,연해주

(16) 농무회김기형, 김직묵간도



대원 최소 3,000여명 이상

소총 3,000자루 이상, 기관총 9정 이상 등

위의 표 외에도 만주•간도•연해주 일대에서 독립투쟁에 나선 사람들은 많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직된 독립군 부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칭과 주둔지를 자주 변경하였다.

 

한국계 피난민의 아무르주 자유시 이동과 자유시 한인 보병자유대대 조직

러시아 내전을 피해 블라가베셴스크, 연해주, 사할린주 일대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자유시 일대로 이동해 오자, 피난민 중에서 다수의 젊은 청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독립군에 가담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들중 상당수가 제대로 된 무기를 지급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시의 독립운동가 리포 선생

자유시의 독립운동가 장상주 선생

 

 

전사한 독립군 Корейский партизан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

1918 ~ 1921년경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러시아령의 독립군 단체들

독립군 부대명주요 인물활동지역기타
(1) 혈성단채영, 김청남, 강국모, 한희진, 허용하 등니콜리쓰크-우수리쓰크 수이푼쓰크1920년경 ~ 1921년경 활동
(2) 다반군대최니콜라이, 김억활, 이두일(리둥일), 이와실리, 백수동(박수동), 김안드레이, 박춘봉 등다반 일대1918년경부터 “한인사회당” 창립시기에 조직. (상해파계)
(3) 의군부허영장(허근), 김종헌, 김재규, 김학, 강응렬, 김석종, 이춘섭, 남해룡, 안알렉산드라 등만주, 노령1919년경부터 만주와 노령
(4) 철혈광복단최계립, 임국정, 한상호 등간도, 노령(다수 사형 집행)
(5) 독립단조맹선, 박그레고리, 최파사, 전응호 등중국, 노령백두산 일대, 연해주 고로치크꼬프
(6) 제1이만 군대김덕보, 박공세, 김표돌, 황하일 등이만 일대1920년 초부터
(7) 제2이만 군대윤덕보, 김덕은, 김찬, 임표, 이용, 한운용(한운룡), 김일수 등이만 일대1920년 여름경부터 1921년 여름까지 백두산 장백현에서 《군비단》군대가 수십 차례 남만주, 북만주를 거쳐 수천 리를 걸어서 이동해 온 군대
(8) 안수청 군대신용걸, 한창걸, 강백우, 이승조, 박경철, 고상준, 박영, 임한준, 김식(김신) 등수청 일대수주허, 홍더허, 올긴스크 지방으로 이동하여 온 《신민단》군대가 그 지방인 부대들과 합동하여 “한인사회당” 《안수청 군대》라고도 활동
(9) 솔밭관 군대유진규(이해산,류진규), 김달하, 신우여, 최찬식, 허승환, 이범진(이해룡), 유학관 등추풍 솔밭관 일대1921년부터 훈춘지방에서 이동하여 온 《신민단》군대 일부도 합세
(10) 창해청년단김규면, 정재관, 김경천, 정순철 등소성 일대1921년경 우수리스크 지방
(11) 니항부대박일리야, 채세윤, 최진일, 고명수, 임호, 김완욱, 송병렬(손병렬), 김학, 김제문, 채국성, 이다물, 이와실리, 고창률, 리흥진 등아무르강 하류 니항(니콜라예프스크)1919~1921년경 활동.
부대장 사소프는 트리피츤과 함께 사형됨. 일본인과 일한 적 있는 박병길을 1921년 초 처형함
(12) 외수청 군대김정하, 김려하, 김병하 등수청 일대

(13) 자유대대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전희세, 유익정 등자유시 일대1920년 초 자유시 일대로 피난온 고려인 등을 중심으로 조직
(14) 합동민족연대내 고려특립부대최길래이, 박알렉세이, 안경억, 신춘식 등이르쿠츠크, 옴스크1919년 11월경부터 이르쿠츠크, 옴스크, 크라스나얄쓰크, 베르흐네우진스크(울란우데), 오호츠크 일대 고려인으로 조직

 

러시아 내전의 무기 부족과 볼셰비키 군대의 일방적인 주장

러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 전선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지급할 소총도 부족하여 개탄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러시아 내전 무렵 러시아령에 입국하는 독립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유시에서 신형 소총 등을 지급했다는 볼셰비키 군대의 일방적인 기록은 함부로 믿을 수는 없다.

 

자유시 일대의 한국계 독립군들은 소총, 총알, 무기, 식량, 보급품 지급대상에서 나중 순위였으며, 다수의 독립군들은 비무장 상태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유시에 모인 사할린의용대 등 독립군들에게 1921년 자유시 참변 이전 수개월 동안 식량지원이 없었다.

 

 

독립군 부대의 대응책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간도,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들은 최소 수천여명 이상 ~ 수만여명이었음에 틀림없다.

만주나 한국에서 넘어온 독립군 부대는 대체로 자신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무장 투쟁을 지원해줄 수 있는 쪽의 지도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 러시아 볼셰비키 중앙 정부 (혹은 이들의 지도를 받는 극동공화국)

(2) 이동휘 계 (상해파, 상해임시정부)

(3) 이르쿠츠크 파 (대한국민의회, 고려혁명군정의회)

순의 지시에 따르려고 하였으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다툼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독립군 활동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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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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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1.29 이동휘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을 잘 봤습니다 자유시 일대의 한국계 독립군들은 군수물자와 식량의 지급대상에서 나중 순위고 다수의 독립군들은 비무장 상태였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30 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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