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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현대사

지나사변의 용장 진계량 (2) 니항 (니콜라예프스크) 도착

작성자신룡기2|작성시간21.12.08|조회수137 목록 댓글 2

중화민국 북상함대 5척의 니항 도착

이때 "정안"함은 예인 작업을 완료하고 남쪽 상해로 돌아갔고, 강방 함대의 지휘권은 진계량에게 이양되었다.

(※러시아 측 자료에는 수송선 정안함도 1920년 초까지 있었다는 소리가 있다. 오호츠크해는 바다로 아무르강보다 먼저 얼음이 녹는다.)

대략 중국해군의 수는 군함 4척에서 ~ 5척이고 병력은 234명 정도였다고 한다.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은 아무르강 하류 바다의 입구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흑룡강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당시 니항에는 2,000여명이 넘는 중국인들과 중국영사관, 화교상공회의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은 구축함 4척과 순양함 1척 등의 무력으로 불법 점령하고, 니항에 한 때 1,000여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제의 니항과 아무르강 하류 일대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에 대한 멸시와 압제는 조선인들에 대한 것과 유사하였다.

일찍이 아무르강 하류에서 어업•상업•운송 등에 종사하던 중국계는 일제와 그들의 앞잡이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항 일본인회 회장 시마다.

화폐까지 발행했으나, 니항사건으로 전재산을 잃었다.

 

또 일본군이 니항을 점령하자,

사실상 당시 행정구역상 사할린주의 주도(州都)였던 니항 일대는 일본인 세상이 되었다.

 

(※물론 일본인들의 시베리아 점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한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동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수천여명 이상이 친일단체를 조직해 활동하였으나,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군시 재산 등을 모두 잃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니항에서 경제권을 일시적으로 완전 장악한 일제에 협조하는 자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끝까지 충성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악질 친일파》라고 한다.)

 

그러나 1920년 2월 29일경 트리피츤이 니항을 해방시키자 유격대에 가담한 조선인 부대장 박일리야는 일단 조국 독립에 염원을 보이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사할린 섬이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도 있으나,

중국측 역사 자료에 따르면 사할린섬은 일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중국의 고대시대부터 영토였다고 한다.

 

일본군 외에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백파 군대도 니항에 주둔하고 있어 현지 상황이 매우 복잡하였다.

 

중국인들의 중국함대 환영

진계량의 함대는 니항에 도착한 후 현지 중국인들과 화교상공회의소 등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진세영에게 흑룡강(아무르강)이 앞으로 10일안에 얼어붙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르빈에 가려면 가능한 한 빨리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음에 갇힐 것입니다.”

 

 

일본의 방해와 강방함대의 아무르강 북상 실패

진세영은 중국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같은 날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닻을 올렸다.

 

그러나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대는 일본 포병에 의해 저지되었고, 4척의 군함은 니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곧 아무르강은 얼어붙었고 진세영은 배를 이끌고 니항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1919년 10월 말경부터, 볼셰비키 정부가 이끄는 파르티잔들은 연해주, 사할린주 일대에서 제국주의 간섭군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이 니항 일대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백파 군대를 공격하자 대부분의 백파군들은 트리피츤이 지휘하는 파르티잔들에게 투항하였다.

니항 주변이 모두 트리피츤에게 가담하자, 니항의 백파 장교와 일본 천황에게 니항을 공격해 달라고 청원서를 보냈던 지도층, 일본군 등의 상황은 갑자기 급박해졌다.

 

시베리아의 겨울철, 니항은 썰매길로 이동하거나 바다에 인접시켜 썰매로 활용하여야 하지만, 당시의 상황상 일본군 대병력과 군함을 동원하기는 힘들었다.

 

 

백파 군대의 지원요청 거부

어느 날, 백파 러시아 장교가 급히 진세영의 거처에 와서는 문에 들어서자 마자 말했다.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진세영은 마음속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사나운 백파 군대 지도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세영은 “강방함대는 수병들이 있기는 있으나 모두 육전을 잘 모르는 뱃사람들이다”고 한 마디로 상대방의 지원요청을 거부하였다.

백파 군대 장교는 화를 내며 떠났다.

파르티잔의 니항 해방

1920년 2월 29일경.

얼마후 볼셰비키의 공세를 견디기 어려웠던 일부 백파 군대는 썰매 등으로 동쪽으로 도주하였다.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은 주민들을 열렬한 환영 속에 니항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다.

일본은 트리피츤 부대와 중립을 지키기로 조약(약속)을 맺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 계획

입으로만 니항의 러시아인끼리의 내전에 중립을 지키겠다는 일본군은 파르티잔 지휘관들을 몰살하려던 기습공격이 실패하면

아무르강 쪽의 일본 영사관, 일본군 병영을 지키며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유지할 계획이었다.

니항의 일본군 성매매 업소는 사진이 없어서 다른 것으로 대체

니항사건 당시 일본군 수비대장

트리피츤 부대의 군기 엄격과 니항의 질서 유지

트리피츤이 이끄는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은 군기가 엄격하고, 식량 분배 등의 규율 때문에 도시의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였다.

 

이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중 한명과 부사령관이 중국 함대가 니항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방문했다.

 

 

볼셰비키 파르티잔 지휘관의 중국함대 방문

(참모장 나우모프는 니항에서 전사함)

중국 함대를 방문한 파르티잔 대장은 외팔이 남성으로 전투에서 왼쪽 팔을 다쳤고, 부사령관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굳은 의지를 지닌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아마 파르티잔 부대의 간부였던 000과 나우모프를 말하는 것 같다. заместитель 00000 и начштаба Наумов)

 

(※ 당시 니항의 파르티잔 대장은 트리피츤이었으나, 진세영 함장을 면담한 사람은 파르티잔 간부중 한명이었던 것 같다. 아마 트리피츤의 참모장이었던 나우모프도 방문한 듯 하다. 나우모프는 3월 12일 쯤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사망한 100~200여명중 한명이었다. 니항 사건 기간중 상당수의 파르티잔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께르비로 대피한 후 안드레예브의 공격 등으로 살해되었다.

파르티잔 간부중 부진-비치는 생존하여 회고록을 남겼으나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 시기 사형집행되었다.

 

니항에서 전사한 나우모프, 오늘날 니항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20년 7월경 께르비에서 안드레예브와 친일파의 공격으로 살해된 파르티잔 대장 트리피츤과 부인 레비제바

썰매를 탄 트리피츤, 좌측의 흰색 단추옷을 입은 부진-비치 등의 사진 1920. 4. 1. 촬영됨

 

의료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나 1920년 니항사건 기간중 부상당한 사람들 중 팔다리를 절단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리고 니항사건 기간중 당시의 여건상 팔다리 등에 동상에 걸린 경우 사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트리피츤은 일본군의 공격에 니항을 최대한 방어하다가 5월말 6월초 피난을 결정해 부상자의 사망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

 

진세영은 두명의 파르티잔 대장에게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정신을 보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세영은 두 사람은 긴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해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3월 12일경 일본군의 기습공격

눈 깜짝할 사이에 1920년 3월이 되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 날짜는 자료마다 약간 다르다.)

 

(3월 12일경)

어느 날, 영사관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갑자기 볼셰비키 파르티잔 진영을 공격하자 볼셰비키는 이에 반격하여 일본군을 일본 영사관과 일본 병영 쪽으로 후퇴시켰다.

포위된 일본군들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외팔이 지휘관의 전사

이 치열한 전투에서 외팔이 파르티잔 지휘관은 영웅적으로 사망했다.

일본 영사관과 병영의 강력한 방어로 인해 트리피츤 부대는 중화기가 없었고 오랫동안 그들을 공격 할 수 없었다.

이때 파르티잔들은 중국 해군을 생각해냈다.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은 일본군이 점유하고 있는 영사관을 돌파하기 위해 함포 2문을 빌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대표를 진세영(진계량)에게 보냈다.

 

진세영은 즉시 4척의 함장 회의를 소집하여 함포 대여 문제를 논의했다.

 

모든 함장들은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이 니항(니콜라예프스크)에 진입한 이후 엄격한 훈련을 받고 인민을 방해하지 않고 중국 해군과 화목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중국 해군에 대해 일본처럼 오만하거나 불합리하지 않았다.

중국 해군은 일제와 백파의 방해로 아무르강을 거슬러 상류인 서쪽으로 이동할 수 없었고 니항에서 겨울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두가 볼셰비키 파르티잔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기로 동의했다.

 

진세영은 함장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강형(江亨)" 의 함포 1문, "이천(利川)" 의 함포 1문과 21발의 포탄을 파르티잔에게 빌려주었다.

(※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중국군들이 유리한 편을 들었고, 결국에는 일본군에게 함포사격을 하였다고 본다. 중국에서도 이 것을 사실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물론 볼셰비키는 함포 사격후 대략 3일만에 니항의 일본 영사관까지 진군하여 수십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130명 이상의 일본인과 친일파 등을 포로로 잡았다.

트리피츤을 무정부주의 강도로 몰아 살해한 안드레예브, 독립유공자 이지택, 김낙현 등은 안드레예브를 진실된 공산혁명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드레예브는 자유시 참변 당시 자유시 포병부대 지휘관이었으며, 일제 측으로 도주하였다. 그의 자손들은 구트만과는 달리, 니항에서 대피한 민간인은 1만 5천여명으로 러시아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소련 시대 안드레예브의 존재는 철저히 숨겨져 알려지지 않았으며, 상해파 최진일, 채세윤, 한운용, 이용, 김규면, 이인섭, 최계립, 김승빈, 김홍일 의 기록 등에도 일체 알려지지 않았다.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파르티잔들

조선인들로 보이는 파르티잔 간부가 있다

니항의 파르티잔 간부들

파르티잔 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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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1.12.08 볼셰비키 파르티잔이 중국해군으로 부터 함포 2문을 빌린게 묘수네요 함포 사격으로 볼셰비키가 일본 영사관까지 진군하여 일본군을 사살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포로로 잡았군요
  • 답댓글 작성자신룡기2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2.08 예.. 그렇습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대체로 빌려준 것이 아니고, 중국군이 함포사격을 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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